# 77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하도 답답해서
옥상에 올라와 혼자 하늘을 보고 있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완전히 혼자가 됐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전엔 비연이가 있어 외롭지 않았는데… 외로워.
"……."
유천이가 망가뜨린 내 핸드폰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핸드폰은 유천이가
새로 사준 핸드폰이었다.
그것도 유천이랑 같은 핸드폰…
때마침 유천이에게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았다.
"끝나고 병원 같이 가자."
"병원? 응. 알았어."
웬일로 먼저 다 병원에 가겠다고 이러는거지?
맨날 병원 가기 싫어서 억지로 달래서 병원에 끌고 갔었는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응? 응. 졸다가 받은거라서 목소리가 이렇네?"
순간 긴장이 풀렸던 몸에 긴장이 확 됐다.
내 목소리가 듣기에 이상했나 보다.
"조례 시간에 졸았냐?"
"응."
아무런 감정도 투입하지 않고 그냥 '응'이라 말하고.
"수업 시작하겠다! 끊을게. 좀 있다 봐."
수업은 무슨… 그냥 빨리 끊고 싶었다.
"여기가 교실이야?"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니 비연이가 서있었다.
싸늘한 모습의 비연이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못 올 곳 왔니?"
내 옆에 앉으며 말하는 비연이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예전에 우리 같아.
"왜 이렇게 됐니."
"…."
"왜 이렇게 틀어졌어. 너 행복하다고 했잖아.
얼마전까지만해도 행복하다고 그랬잖아.
근데 지금은 왜 이런 모습인데?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건데?
정말 애들 말대로… 너 찬희… 갖…고 논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
이 말… 어떻게 주워담으려고 그래. 차효주.
차효주… 정신차려.
"응, 나 너 믿을게. 나 너 믿을래.
너 그런애 아니잖아."
그런애.
찬희 갖고 놀다 버린애.
"…저번에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힘이 들었어. 헤어진다는 게 아팠어.
내가 찬 건데… 내가… 내가 찬 건데…
왜 내가 이렇게 아프니? 나 왜 아픈 거야?"
우는 나를 안아 주는 비연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바보야!"
"응… 나 정말 바보 같지… 흐흑흡…."
"응. 넌 욕먹어도 싸.
모두 다 너 욕하고 있어.
나쁘데, 나쁜년이래. 너."
"…그 중에서 네가 나 외면할 때가 가장 아팠어, 나, 으허헝!"
그렇게 비연이에 품에 안겨서 크게 울어 버렸다.
"나도 너 미워, 너 진짜 밉다. 진하까지 힘들게 하면서
그 사랑한 건데 왜 까진 건지…
네들 왜 깨진 건지 나 이해 안가.
너 미워. 찬희 찬… 너 밉다구."
나도 내가 미워. 찬희…랑 헤어진… 헤어져 버린 내가 밉다구.
근데 어떻게… 현실이 이렇게 되어 버린걸.
"왜 찬희한테 헤어지자고 한 건데, 응?"
비연이 품에서 빠져 나와 눈물을 닦으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만 알아. 그거….
그리고 종이 쳤다. 수업을 알리는 종.
"비연아. 수업 시작하겠다. 수업 들어가자."
염치도 없게… 불쑥 내민 내 손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연이.
내 소중한 친구. 이 세상에 이런 친구는 둘도 없을… 내 친구.
비연이. 구비연….
너한테까지 모든 걸 다 털어 내지 못하는 날 이해해줄래?
이런 날… 너는 이해해줘. 너만은 이해해줘. 그래줘 비연아.
"왜 헤어진거냐니까?
하지만 비연이 마저도 날 이해하기엔… 너무 벅찬가보다.
"나한테도 말 못하는거야?"
"…미안해. 비연아."
"너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비연아, 비연아!"
그 말을 내게 하고 옥상을 뛰어 내려가는 비연이었다.
그 후 수업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청소시간에도…
우리 사이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
교문 앞에 서있는 유천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난 조금은 오버스러운 표정과 행동을 취해가며
유천이에게 달려갔다.
그러면 유천이는 제일 먼저 내 손을 잡는다.
"병원 갔다 가 어디 갈까?
오늘따라 설레이는 말투,
설레이는 행동을 내게 보이는 유천이다.
"네가 가고 싶은곳."
유천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음- 밥 먹을까?"
"응."
"뭐 먹을래?"
"아무 거나."
유천이에겐 미안하지만…
이젠… 하루하루가 지루하다.
예전에 같은 활력은 없다.
"파스타 먹을까. 파스타 어때?"
"응. 좋아."
"그럼, 오늘 저녁은 파스타다!"
"응."
빵이 있다. 한쪽은 행복함이란 잼이 잔뜩 묻어 있다,
한쪽은 무료함이란 잼이 잔뜩 묻어 있다.
그 중… 난 무료함이란 잼이 잔뜩 묻어 있는 빵이겠지.
텁텁한 빵….
★
식사를 하기 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일어섰다.
"어디가?"
"응.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디 간다고?"
"화. 장. 실. 좀. 갔. 다. 올. 게."
"어?"
"……."
잘 알아듣지 못하는 유천에게 핸드폰 문자로 내가 한말을 적었다.
그리고 보여 주었다.
이 문자를 본 유천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갔다 와."
"응. 먼저 먹고 있어."
"어?"
"……."
평소에는 괜찮다가 가끔 이렇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나,
시끄러운 곳에 가면 서로 대화를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럴 때… 유천이가 못 알아들을 때… 가슴이 아프다.
먼저 먹고 있으라고 문자에 적어 보여 주었다.
"아, 응."
"응."
"올 때까지 기다릴게. 같이 먹자."
유천이에 그 말에…
순간 울컥해서 빨리 화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화장실 빈칸에 들어가 운다.
이제는 음에 높낮이가 굉장히 차이가 나고,
가까이에서 얘기할땐 아무 문제 없이 잘 알아듣다가,
멀리서 말하면 못 알아듣고…
그런 유천이에 모습이 안타깝고 슬프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동정이란걸… 나는 알아 버렸다. 나는… 느껴 버렸다.
★
저녁을 먹고 유천이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에 들어와서 씻으려고 하는데 집으로 전화가 왔다. 비연이었다.
"전화 했는데 계속 안 받더라…
나 지금 너네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인데 잠깐 나와라.
대화 좀 하자."
"너 통금시간…."
아슬아슬 하잖아.
"오늘은 미리 엄마한테 말씀 드렸어.
늦을지도 모르겠다구. 빨리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응."
전화를 끊고 바로 놀이터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네에 앉아 그네를 타고 있는
비연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비연아."
비연이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전까지만해도 축 쳐져 있던 내 기분이 좋아졌다.
"왔어? 앉아."
"응."
그네에 앉은 후에… 한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난 흙장난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 흙장난 진짜 재밌었는데.
"있지."
"저기."
둘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조용해서. 잠이 쏟아질 것 같아서….
"네가 먼저 말해."
"응? 응."
내가 먼저 말을 하게 되었다.
"찬희… 요즘 어떻게 지내? 밥 잘 챙겨 먹지?
학교도 잘 다니지? 애들이랑도 잘 놀고 하지?
찬희… 잘 지내지?"
몇 일을… 몇 번이고… 물어 보고 싶었던… 그 물음들…
비연이에게… 물었다.
비연이라면 할 수 있었다.
비연이에겐… 물어 볼 수 있었다.
비연이 너는… 찬희랑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잖아.
그게 1분이라도…
근데 난 그게 허락이 안돼.
내겐… 허락 될 수 없는 일이야.
요즘… 찬희…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잘 웃고, 잘 있지?
나처럼… 아파하진 않지?
혹시 다른 여자애가 추근덕 거리지는 않나?
그럼… 싫은데.
찬희한테 다른 여자친구가 생기는 거 나 싫은데…
하… 나 참 이기적이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런 바램을 품는지…
내가 찬희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찬희한테 어떻게 했는데…
찬희… 많이 아프게 했는데…
이럼 안되는건데… 찬희… 보고 싶어…
찬희 보고 싶어 죽겠어. 비연아….
# 78
"아니. 별로. 저번에 진하 만날 때 봤었는데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어.
요즘 술도 많이 먹고 다니고,
싸움도 하고 다니고… 애가 망가졌더라."
애써 침착하려 애쓰지만 손이 덜덜 떨린다.
"나 되게 못됐다. 그지?"
또 다시 시작된 새빨간 거짓말….
"나는 막 밥도 잘 먹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밤에 잘도 잘자. 나는… 평소랑 같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나 되게 못됐다."
찬희는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어.
"거짓말 하지마. 효주야.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러지마.
너랑 나 그런 사이 아니잖아."
비연이에 그 말에 미끄럼틀에 시선을 두었다.
괜히 눈물이 날것 같아서…
그래서 애꿏은 미끄럼틀만 계속 보고 있다.
"울어 그냥. 괜히 딴데 보고 있지 말구."
내 마음을, 내 상태를 읽은 비연이는
오늘 옥상에서처럼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그냥 울라구. 괜히 딴짓하지 말고 울라구.
"나… 힘들어."
"알아. 너 힘든 거."
"밥도 억지로 먹고, 학교에서도…
그 수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모르겠고,
밤에 잠도 잘 못자. 찬희가 자꾸 생각나서…
찬희 힘들어하는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찬희가 생각날 때마다 찬희 보고 싶어서
찬희에게로 갈까 봐 나 불안했어.
어쩌면 좋아… 나 이제 어쩌면 좋아."
네 말대로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간단한 거 아니야? 찬희한테로."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그건 안돼. 그럼 안돼."
이젠 안돼. 너무- 늦었어. 늦어 버렸어.
"왜? 찬희가 너 안받아 줄까 봐?
찬희가 이제 너 싫다고 할까 봐?"
"응. 내가 얼마나 모질게 끊었는데.
내가 찬희 얼마나 아프게 했는데."
"괜찮아, 너희 둘… 지금도 서로 좋아하잖아.
지금 조금 떨어져 있어도 서로 좋아하고 있잖아.
다시 돌아가. 찬희한테로."
비연아. 난 안돼. 난… 안돼.
내가 어떤 얼굴로 찬희를 다시 보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찬희를 대하니…
앞으로 나 어떻게 해야 하니.
"너 슬퍼 보여. 불행해 보여.
하나도 안 행복해 보여."
"………."
"가, 찬희한테."
"비연아…."
"왜, 혼자 못 가겠어? 내가 같이 가 줄까?
그래, 내가 같이 가 줄게.
일어나. 일어나, 가자! 찬희한테."
"….아니. 안 갈래."
못 가. 돌아가지 못해.
다시는 찬희 곁으로 돌아가지 못해.
"왜 못 가. 왜 안 된다고 해. 너 정말 이럴 거야?"
비연이는 나를 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왜 못 간다고 하냐고.
왜 안 된다고 하냐고. 너… 정말… 이럴거냐고.
응. 나 안가. 안 갈 거야.
나 계속 이럴 거야. 계속… 유천이 곁에 있어야 해.
"나… 찬희한테 못 가… 나… 못 가. 비연아."
울면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찬희 이름만 입에 담아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으니까.
류찬희란 이름이
어느새 나에게 가장 예민한 이름으로 다가와 있었으니까.
"왜, 왜 못 가겠다는 건데?"
"비연아, 나 먼저 들어갈게. 춥고 많이 늦었어.
감기 걸릴 것 같아. 너도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릴지도 모르잖아."
비연이가 다 알아들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보이자 나를 돌려 세워 놓고
두 눈을 마주하고 보게 하는 비연이다.
그러면 난 다시 미끄럼틀에 시선을 둔다.
"너 똑바로 말해봐. 사실대로 말해봐.
너… 은유천 때문에 그러는 거지?
너 은유천이 너한테 협박한 거지?
그런 거지? 찬희랑 헤어지자고 한 거지? 그런 거지?"
그 말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고개를 아래위로 천천히 흔드니까 눈물이 한꺼번에 툭툭 떨어진다.
응… 유천이 때문에 나 못 가. 유천이 때문에… 나 찬희한테 못 가.
"응… 유천이 때문에 나 못 가. 은유천… 유천이 많이 아파.
그래서 나 못 가. 나 찬희한테 가고 싶은데 못 가…
힘들어, 비연아. 아파, 비연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찬희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주저앉아 버리자 밤 공기로 인해
차가워진 모래가 내 몸에 닿았다.
추웠다. 오늘… 춥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쁜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지금 은유천 어딨어! 은유천 어딨냐구!"
"비연아…."
"근데 은유천이 아프다니? 어디가?
어디가 얼마나 아프기에 네가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는 건데?
그 놈 내일 곧 죽는데? 뭐, 그 정도래? 그 정도로 아픈 거냐구!"
흥분한 비연이는 나를 흔들며 물었다.
그럴 정도로 아픈거냐구. 내일 곧 죽을 정도로 아픈거냐구.
나는 그렇게 묻는 비연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유천이 많이 아파. 지금 많이 아파서… 힘들어 하고 있어.
내겐 티 안내지만 많이 힘들어 하고 있어.
유천이 집에… 쓰레기통에…
유천이가 아끼던 악보집이… 하나 가득 차 있어.
그렇게 유천이는 힘들어 하고 있어.
피아노가 잘 안쳐진데.
지금 자기가 뭘 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데.
뭘 연주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데. 답답해 죽겠데.
"유천이 귀가 안 들린데."
"뭐?"
"그래서 유천이 피아노 못 쳐. 잘 못 들어서…
가까이에서 말하면 곧잘 알아듣는데 조금만 멀리서
말하면 잘 못 들어. 유천이 못 들어."
"은유천이 귀에 이상있는거랑 너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
"네가 은유천 귀 망가뜨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응."
내가… 유천이를 그렇게 만들었어.
"뭐?"
"응. 나 때문에 유천이 귀 그렇게 된 거고,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거야. 내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 보이는 비연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다.
처음에 내가 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모두 전해 들었을 때처럼…
그 때에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비연이다.
너도 많이 황당하지? 나도 그 때 많이 황당했어. 믿을 수가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왜 네 잘못이라는 거야? 그게 말이돼?"
"그 때 기억해? 찬희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이사랑이 복도에서 나 곤란하게 했던 날…
은유천한테 나 뺨 맞은 날."
그러고 보니 그 때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일기라도 좀 써둘걸…
물론 그러한 것들을 기록하고 싶진 않지만…
이제는 이러한 고통이 지속되다 보니까
일기까지 써놓자고 농담까지 하는 내 모습을 보니 기가막혔다.
"응. 그 날 기억해."
비연이 너도 기억하는구나.
"그 때 생긴 상처래. 그 상처."
"네가 걔를 때렸어?"
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그런 건 아니지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나만 아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야.
결국은 내 탓인 거야. 모든 게 내 탓…."
"그게 왜 네탓 이라는 거야? 넌 아무런 잘못이 없어."
애써 나를 위로하려는 비연이었다. 내겐 잘못이 없다며…
내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내가 유천이 귀에 상처를 낸 것도 아닌데
왜 유천이 곁에 있는거냐며…
그렇게 애써 나를 위로하는 비연이다.
"비연아, 근데 나 변한 것 같아."
"뭐가?"
"나… 유천이 좋아하지 않아.
유천이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어."
나에 가장 큰 변화… 난 유천이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마음을… 내게서 찾아 볼 수가 없어. 이젠… 이제는…
"그건 당연한거구. 지금 넌 찬희를 좋아하고 있잖아."
맞아. 근데 나 착각하고 있었어.
나… 유천이를 좋아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어.
저번에 찬희한테 했던 말…
조금은 사실이었어.
유천이를 잊으려고 찬희를 만났던 거… 그건 사실이었어.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난… 유천이를 잊으려고
찬희를 만났던 게 아니였어. 찬희 자체를 좋아했던 거였어.
"근데 유천이 보면 가슴이 아프고 유천이 곁을 떠나지 못할 것 같고,
자꾸 신경 쓰이고, 안쓰럽고 그래. 유천이만 보면 가슴이 아파."
"……."
"예전에는 유천이가 내 남자친구란 사실이 멋지고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어.
근데 지금은 그런 감정이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워."
"……."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뭘까 했는데…
그건 바로… 동정이었던 거야. 동정."
동정…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기어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그 아픔을 이해해 주는 것.
지금 내가 유천이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 동정.
"그 애가 불쌍했던 거였어. 예전에 느꼈던 사랑이라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거였어. 비연아, 나 어떻게 해야 해?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 그래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비연아."
"괜찮아… 괜찮아… 효주야…."
# 79
아침에 눈을 뜨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어제 비연이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은 내 기분은… 상쾌 했달까?
무언가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 진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는데,
이제는 그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내 기분은 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에 오늘 하루가 설레였다.
학교에 등교를 하니 비연이가 먼저 와 있었다.
비연이가 학교에 등교한 나를 발견하고 나를 보며 웃었다.
"왔어?"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반갑게 맞이하는 비연이었다.
"응."
"아침 먹었어?"
"아니, 아직. 너는?"
"나도 오늘은 늦잠을 자서… 우리 매점 갈까?"
"그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착각에 휩싸이는 나였다.
"차효주, 잠깐 나 좀 볼래?"
비연이와 매점으로 가려고 하는데
문 앞에 서서 우릴 보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비연아, 조금만 기다려. 빨리 갔다 올게."
"조심해, 효주야. 이사랑이 뭔 짓 하려고
하면 나한테 전화해. 알겠지?"
난 비연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이사랑이에 뒤를 따랐다.
사랑이… 머리 많이 자랐구나.
"너 이래도 되는 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옥상에 도달했을때쯤
사랑이가 내게 말했다.
"무슨 말이야?"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줘.
"내가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는데 이래도 되는거냐구. 차효주."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은유천 건들지 말라고 했지?
근데 왜 자꾸 건들여!
왜 다시 은유천 옆에 네가 있는 거냐구!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 줄… 네가 아냐구!"
나는 사랑이를 향해 한 번 웃어 주었다.
그러면 사랑이는 씩씩 거리다가 머리를 헝큰다.
"그런 얘기라면 더 이상 너랑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아.
내려갈게, 이사랑."
너한테 이런 저런 얘기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너한테 말해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아.
"거기서. 어딜 가겠다는거야?
너랑 나 대화 아직 안 끝났어. 거기서."
"할 말이 더 남았니?"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사랑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랑이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술까지 질끈 물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피가 베어 나올 것 같았다.
"……!"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러니까 네가…."
내게 무릎을 꿇으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나한테… 무릎을 꿇을만큼…
유천이는 사랑이에게 커다란 존재였는가보다.
"일어나.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너의 입에서 유천이를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기 전엔…
안 일어나. 제발… 유천이를 포기해줘. 유천이를 나한테 줘."
사랑이에 이 말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사랑이 마음이 나랑 비슷하겠지?
나도 유천이 앞에 무릎 꿇고 말하고 싶어.
그런 행동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 그러고 싶어.
찬희에게 보내 달라고… 너에 곁에서 풀어 달라고…
그러고 싶어. 근데 내가 그러면…
유천이 죽어 버릴 것 같단 말이야. 유천이… 저렇게 다시 살려고 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데…
나 그럴 수는 없어. 나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아.
"그만해. 이사랑.
유천이랑 나 헤어지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엔 날 붙들고 애원하듯 말하는 이사랑이었다.
너 정말 왜 이래… 이사랑…. 너 정말….
"사랑아, 나는 네가 불쌍해."
"………."
"너는 정말 불쌍한 애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는 거야?
네가 나에 대해 알기나 해?"
"지금은 이래도 너랑 나랑… 우린… 친구였어."
나, 비연이, 너… 우리 이렇게 친구였어. 우린 친구였잖아.
"친구? 웃기지마. 누구랑 누가 친구였단 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그것까진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금 또 씩씩대며 내 앞에 화난 표정으로 선다.
"많이 외로웠구나. 이사랑."
사랑이가 흠칫했다.
"부모님이 모두 바빴고 너는 혼자여서 늘 외로웠을 거야.
관심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넌 그 방법을 몰라서
그래서 남들과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고 부자연스러웠던 거야."
"그만해!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는거야!"
"사랑아. 그건 집착이야. 사랑이 아니야. 사랑아."
"너 혼자만 아는 척 하지마. 그런 네 모습 꼴도 보기 싫단 말이야!"
"사랑아… 미안해."
"너 정말 왜 이래?"
사랑이에 두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사랑아 미안해…
은유천 옆에 있는 게 네가 아니라 나라서…
너 일 수 없는 거…. 유천이 옆에… 있을 수 없는 거… 미안해.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나는 사랑이를 와락 안아 버렸다.
그러면 사랑이는 바둥거리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만다.
내 품에서… 그러기를 10초. 그러다가 팍하고 나를 밀쳐 내고
나를 아까처럼 노려본다. 그리고 말했다.
"너 혼자 착한척 하지마! 너 혼자 착한척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사랑이었다.
그 눈물을 훔치고 옥상을 내려가 버리는 사랑이었다.
나쁜 여자… 악녀… 악녀도 여자였다.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그런 여자. 우는 모습이 아름다운 악녀.
"사랑아… 유천이 사랑해줘서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내 대신…
유천이에게 커다란 사랑 줘서…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
"괜찮아?"
"괜찮냐니."
"이사랑이 무슨 짓 하진 않았어? 괜찮은거야?"
"사랑이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비연아."
"……."
나를 가자미눈으로 쳐다본다.
사랑이한테 맞고 와서는 안 맞은척 하는 거 아니냐는 눈초리다.
"사랑이…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
사랑이가 나쁜 게 아니야.
사랑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던 부모님들… 어른들…
그리고 우리…
우리 모두가 사랑이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거야.
사랑이도 여자였어.
사랑받고 싶었던 여자.
근데 사랑이는 방법을 몰랐던 거야.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사랑이가 나쁜 게 아니야. 사랑이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야. 그래. 그런 것 뿐이야.
첫댓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들 너무 불쌍 한것 같아요~>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