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작성한 도시의 역사 연재 중, 중세 도시에 대한 포스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중세의 성곽 등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유인 즉슨, 사람들의 인식에 잡혀 있는 유럽성들이란 노이슈반슈타인 성처럼 방어적인 목적보다는 예술적 가치의 성을 보편적인 유럽 성의 특징으로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노이슈반슈타인 성도 어느정도 유럽성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목적은 방어, 행정의 목적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위해 지어진 성이었다. 일종의 진시황의 아방궁이나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위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나 아래의 베르사이유 궁전 모두 똑같은 용도일 뿐, 별 차이는 없다. 그리고 공성전에서 거의 방어능력이 없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아예 이번에는 중세 시대의 성들에 대한 특징을 싸그리 끄집어 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른바 중세_특집_성쌓기.txt
-중세 성의 목적-
성을 쌓는 이유는 행정적인 기능에서 영주나 성주들이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쓰이기도 한다. 단순히 생각해 보자면 성을 쌓기 위해선 엄청난 돈과 인력, 자재가 필요하다. 만약 어떤 지역에 사람들이 많고 자원이 풍부하며, 먹고살기에 좋은 땅이고, 거기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장악하고 있다면, 그 권력자는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곳에 성을 쌓을 때 좀 더 크고 멋있게 지으려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성은 단순히 왕이나 성주가 전쟁이나 하려고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인 것이다.
물론 적의 침입을 막는다는데 있어 성의 필요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행정의 중심지라면 당연히 침입하는 쪽 입장에서는 이런 저런 마을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시간보내는 것보다 그 지역을 통치하는 성 하나를 차지함으로써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이 더 이득일테니 말이다. 따라서 침입자들은 항상 권력자가 있는 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권력자들은 언제 있을 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튼튼하게 쌓으려 했다.
윈저성의 사진. 흔히 알다 시피 윈저성은 영국 왕실의 거주용으로 쓰이며 각종 행사나 연례 등에도 사용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입지의 조건-
성을 방어하는 방어자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곳에 위치하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따라서 방어자의 성은 항상 그 지역에서 가장 방어의 효율성을 따져 가장 유리한 곳에 위치하곤 했다. 그렇다면 방어자에게 있어 가장 유리한 입지는 어디인 것일까?
방어자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는 경계가 유리하며, 적을 관측하기 유리한 곳일 수록 좋다. 그러기에 적당한 곳은 역시 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이야 말로 적을 경계하기 유리하며, 무엇보다도 공성전 때 적의 접근이 상당히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성을 지키는 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최첨단 로보트 군단이 아니다. 사람이 지키는 곳이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다. 그러자면 제 1순위로 필요한 것이 무기보다도 먹을 것인데 먹을 것은 창고에 저장할 수 있지만, 물은 그렇지가 못하며 무엇보다도 수요량이 엄청나서 식량처럼 아껴서 먹는 것도 어렵다. 바위 한 가운데서 물이 쏟아지는 기적이 없는 한 공성을 위해 높은 산 위에 성을 쌓는 영주들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높은 곳에 있는 이득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주들은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낮은 구릉지나 언덕 등에 성을 쌓아서 공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사전에도 motte-and-bailey는 '작은 언덕 위에 성벽을 두르고 지은 성'이라고 나와 있다.(물론 11세기에 대부분의 motte들은 인공적으로 깍아지듯이 만들었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충분한 식수를 얻기는 어려웠으므로 수비군과 중요인물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거주민들은 모두 성밖의 교외에서 생활했었다. 그만큼 방어의 이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식수의 문제는 중요했다. 한면이라도 활로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면이 포위된 상황이라면 그만큼 성에서는 자급자족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식량창고는 이를 위해서 반드시 있었지만, 물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실제로 삼국지의 마속은 가정 전투에서 왕평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지에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짧은 생각으로 인해 장합에게 포위되어 식수가 고갈되자 촉군은 손쉽게 궤멸당했다.
요크성 motte의 단면도. 상당히 우물을 깊게 파서 식수를 공급 받았으니 더 이상 올라갈 생각은 못 했었을 것이다.
물은 공성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꼭 생존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물이 풍부하다면 해자를 파는데도 이용할 수 있고, 끓는 물을 만들어 적에게 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의 규모가 거주 용도로서 확장될 무렵에는 성들이 구릉에서 내려오는 대신 용수가 풍부한 곳에 정착해 주변으로 해자를 만들어 방어하기도 했다. 심지어 현대에 관광지로서 운영되는 고성들의 우물은 항상 주목을 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성의 입지에 중요한 것은 교통이었다. 보통 상상하기로 성은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어서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통로 근처에는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은 어디까지나 요새로서 만든게 아니라 행정적인 역할 때문에 만든다. 따라서 접근하기에 불리한 지형은 오히려 나가기도 어렵다는 뜻이 된다. 성이 고립되어 버리면 외부의 영지와 연락이 곤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기 어려워 진다. 그것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뜻이나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기 어렵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고, 따라서 평시에 행정적인 기능을 위해서라도 교통이 좋은 곳은 방어적 기능이 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교통이 좋은 곳의 이점은 적의 공격에 대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다가 지원군 역시 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기 쉽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결코 불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방어의 수단-
공성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는 성벽이다. 성벽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작되었느냐에 따라서 방어가 성공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성벽이 높을수록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냥 높다고 정말 유리할까? 높으면 높을수록 적에 대한 감시 효과는 분명 효과적일 정도로 좋아진다. 적이 접근할 때 화살을 쏘는데 아군의 궁수들에 비해 적들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화살을 쏘아도 성벽 위의 적들이 정확히 맞았는지 알수도 없거니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고 해도 상당히 힘들다. 그렇지만 성벽도 결국에는 성을 이루는 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상당히 높게 쌓는 것도 힘들다.
왜냐하면, 성벽을 짓는 데 드는 돈은 영주, 결국은 농민의 부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정을 전부 성벽에 투자할 수도 없고, 기타 재정 부담이나 민생에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성벽에 무리하게 투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백제의 개루왕이 도림의 꾀에 빠져 무리한 공사를 하여 민생이 엉망이 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다. 더군다나 중세에 성벽 축조 기술이 정교해봐야 얼마나 정교할 수 있었겠는가? 계속 정비 보수를 해서 유지해야 하는데 그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만약의 사태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것이 평시라고 해도 상당한 비용과 기간이 들 것이고, 만약 최악의 경우 공성전 중이었다면 적의 공격이 집중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온갖 잡동사니를 쌓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크락데슈발리에.
포체스터성의 성벽.
뭔가 위험한 그림이 지나갔지만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런 성벽의 단순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과 다양한 구조물들도 이런 성벽만의 약점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흔히 동사로서의 keep은 '유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명사로 쓰일 때는 '아성'이라는 의미에서 조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주로 높은 탑으로 인해 '천수각'이라고도 번역되는 keep(이하 '아성'이라고 표기)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탑이 가장 주목 받는 대상이다. 이 아성은 사실상 성의 마지막 피난처로 인식되는 곳으로 성의 대부분이 점령되었을 시 마지막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로서 쓰이는 곳이다.
1370년대 축조된 왁워크성의 아성.
반지의 제왕 헬름 협곡 전투 최후에 혼버그 요새에서 세오덴 왕이 자신의 기사들과 말을 타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장면과 탑 꼭대기에 헬름 해머핸드 나팔이 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아성은 성이 대부분 함락당한 상태에서 지켜지게되는 최후의 요새였다. 물론 방어 자체에 도움이 되는 시설은 아니나 마지막 희망이 성을 구원하려고 오는 구원군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안에라도 틀어박혀 있는다면 성을 구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보디암성의 murder-hole
카르카손성에 있는 격자살 성문(fortcullis) 개요도. 무게추를 달아서 성문을 여닫는 것이 가능했는데 주 재료는 나무에 쇠를 둘러서 만들었다. 전체를 쇠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너무 무거워서 문을 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성을 방어하는 용도로서 성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성문의 기능이야 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도 있지만 평시에는 출입하는 상인들의 통행세를 받는 역할도 했었다. 물론 공성전에서는 그런건 상관할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성의 전체적인 부분을 놓고 봤을 때 성문은 성에서 방어가 가장 약한 곳이라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방어자는 항상 수성에서 성문 위에 병력을 상당히 집중시켜 놓는다. 설령 공격자가 성벽을 함락했다고 해도 여전히 성문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중갑으로 무장한 보병의 경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긴 힘든데다가 설령 보병만 올라간다고 해도 이후 필요한 보급품이나 수레, 기병 등을 사다리나 공성탑 등으로 성벽 위로 올려보내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컸다. 따라서 공격자의 최우선 목표는 성문과 성벽을 장악하는 문제였다.
성벽 위쪽에 이처럼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만한 공간을 만들고 접근하는 적에게 활이나 쇠뇌를 쏠 수 있게 십자형으로 좁은 틈을 만들었다. 사진은 코셋 지방의 코르페 성에 있는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수비측도 이에 대한 대비는 어느정도 갖추고 있기 마련이었다.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은 두 가지가 있다. 흔히 공성전에서 볼 수 있는 성문의 경우 나무로된 성문과 쇠창살문(엄연히 말해 나무 격자살에 쇠를 두른 것이다)을 볼 수 있다. 쇠창살문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유럽성의 공성전 모습에 대한 환상을 크게 깨트려 놓는 것일 수 있다. 흔하디 흔한 대문을 공성차가 두들기는 모습을 많이 봐 왔는데 실제로는 이 포트컬리스가 더 주역인 것이다. 하지만 수비측 입장에서는 이 포트컬리스가 도개교만큼이나 유익했다. 포트컬리스의 역할은 적의 보병을 섬멸하는데 있었다. 중세 시대의 성문방어는 생각보다 교활할 정도였는데 포트컬리스를 두개로 나누어 안쪽은 닫아놓고 바깥쪽은 열어놓고 있다가 적이 들어오면 바깥쪽도 닫아버리고 구멍을 낸 천장(murder-hole)에서 돌과 끓는 기름, 불을 던져서 그 안에 들어온 적들을 처치했다. 물론 공성측에서도 얼마든지 이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끓는 기름과 물(기름은 사실 많이 비싸기 때문에 물이 대부분이었다)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또 한가지는 성문 위에 있는 망루였다. 중세 공성전의 역(적)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디블 토탈워에서 성벽 위에 궁병이 아닌 보병들이 멀뚱멀뚱 서 있으면 타워에서 불화살이 날아가 적들에게 꽂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장면의 묘사는 조금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이 부분에서는 궁병을 위한 엄폐시설이 후에 나타나는 총안구처럼 되어 있는데다가 약간 튀어나오게 제작해서 성벽 바로 밑에 달라 붙어있는 적의 머리 위에서 화살이나 돌을 떨어트릴 수 있게 약간씩 개조했다.
케어필리성의 해자. 서유럽에서 가장 큰 해자로 이름난 성이며, 해자의 크기가 12헥타르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방어에 있어서 해자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골메뉴이다. 일단 그 역할 자체가 공성탑이라든지 기타 공성 장비의 접근을 차단하며, 동시에 성벽 아래로 굴을 파는 것 또한 막아버린다는 극악의 조건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개교까지 만들어서 도개교를 올려버리거나 아니면 너무 길어서 도개교가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에 중간에 아예 다리째 파괴시켜버린다면 공성측에서는 아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성들이 해자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자라는 것이 엄청나게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시설이다 보니 날이 가물거나 겨울에는 쓸 수가 없었고, 클락데슈발리에처럼 사암으로 된 바위산 같은 경우에는 아예 빗물을 받아서 쓰는 곳도 있었다.
현재의 콘스탄티노플 성곽. 해자 안 쪽에서 찍은 사진이라 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것을 39,800원에 갖춘 성이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 혹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가히 중세를 대표하는 난공불락의 성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의 성벽은 해자를 시작으로 해자 바로 뒤의 방책, 그 뒤에는 폭 2M에 높이 5M의 외성벽이, 다시 그 뒤에는 폭 5M에 높이 12M의 내성벽이 설치되었으며 각 성벽마다 96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적의 활동을 견제하고 감시했다. 그리고 그 길이는 6km에 달하는 막강한 방어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는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바다쪽을 공격했고, 결국 성 내부로 들어오는 만의 입구를 철쇄로 막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의 해군이 육로로 배를 옮겨 공격해 옴으로 인해 결국 1000년이 넘는 방어의 신화도 끝이 나고 말았다. 물론 이 당시 비잔틴 제국이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상태라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한 시점에 이미 화약무기는 상당히 보급된 상태였었다.
15세기 중엽에 이미 유럽에 화약 무기는 상당히 보편화되어 가고 있던 무렵이었고, 따라서 공성을 위한 높은 성벽은 더욱 쓸모가 없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좀 더 과학적인 형태의 성형 성벽이 후대에 나타나게 되었다. 아마 성형 성채에 대해 나중에 또 심도 있게 글을 쓸 것 같다. 아마도...
*누가 글이 길다고 해서 짧은 글 요약
1. 성은 원래 행정용, 방어는 겉절이
2. 입지조건은 감시가 편한 높은 데, 그런데 물이 없어서 조금 낮은데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데서는 아예 흙을 쌓아서 성을 축조.
3. 방어시설물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의 적을 사살할 수 있게함. 통로는 좁게 해서 일당백이 가능하고, 계속해서 적이 희생당하도록 머리를 써서 성의 방어 구조물을 효율적으로 제작함.
http://en.wikipedia.org (대부분이 글의 내용을 위키에서 끌고 왔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성에 대해 딱히 관심 같는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관련된 책이 있어도 번역이 엉망이거나 우리 정서에 맞는 각주나 주석이 없어서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http://www.medieval-castle.com/
http://www.medieval-castles.net/castles.htm
http://en.wikipedia.org/wiki/Castle
http://egosphere.egloos.com/297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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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라고 만든거긴 하지만, 사람들이 글의 본문보다 한국형 철제산성에 더 관심을 가질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첫댓글 중세 서유럽의 성(城) 하면 '방어를 위한 요새'라는 생각부터 했던 저에게는 상당히 뜻밖의 내용입니다. 제가 '행정 중심지로서의 성'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여자인 저로서는 어렵게 생각되던 부분인데 쉽고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MB산성 ㅋㅋ 진지하게 읽다가 빵터졌어요 ^^
우와...좋은 정보를 알고 갑니다.....스크랩해 갑니다...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