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늪 La Cienaga (2001) : 그 집에 가고싶지 않다.
허우적거린다. 지푸라기를 잡고싶지만, 그 곳에 그처럼 거룩한 찌꺼기는 남아있지 않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장편 데뷔작은 집 이야기이다.
고전 할리우드 공포물 중 로버트 와이즈의 "더 헌팅 The Haunting(1963)"을 비롯한 일련의 귀신들린 집 장르는
더 이상 중산층의 가정이 안전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공포의 묘지로 전환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거기에는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핵 공포와 전후 자본주의 호황의 밑바닥 근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감독은 아르헨티나의 두 가정 - 혹은 한 가정이라고도 무방할 - 을 추락하기 직전의 흔들거림으로 온통 무장한
침울한 집이라는 오래된 불안 요소로 들추어내 21세기의 첫 한 해를 지나가는 시대의 초상을 그린다.
만일, 본편을 작가주의적 경향으로 바로 무리하게나마 포함시킬 수 있다면
영화 내의 거의 모든 대사들의 무의미로서의 무의미, 즉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통속적인 언어들과
리듬감이 전혀 없음에도 각 단락들이 제각각 썩어가는 시신의 팔다리처럼 검은 호흡을 내뱉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본편은 오직 영화적 공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른 요소들을 무시해버려도 좋다는 입장이다.
대사든 연기든 사건이든 캐릭터든 구성이든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영화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아르헨티나의 가정 안에서 흔히 집약할 수 있듯이 인종 차별과 중산층의 부패를 길어올린다.
하지만, 이같은 표면적인 주제는 그 자체로 그다지 영화의 무게로 자리잡을 이유가 없거니와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목적은 그것들이 얼마나 영화 내외적으로 피흘리도록 방치되어도 좋은 가를 인증받는 데 있다.
서로 거의 구별할 필요가 없는 두 가정이 산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집 안에 놓여있다.
굳이 오염된 채 방치된 집 마당의 수영장을 기호화할 필요도 없이
영화의 첫 오프닝 숏 만으로도 감독의 데뷔작으로서의 야심은 능히 눈치챌 수 있다.
소개되어질 이유가 없는 무존재적인 중년 남녀들이 일광욕이라도 할듯한 기세로 수영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 주변 곳곳의 의자에 드러누워있다가 자신들의 의자를 끌고 움직이는 숏 안에서
의지가 끌리는 파열음과 절단된 신체들만으로도 영화는 자신이 이후 어떤 것을 전할 것인지 집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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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장면에서 아이들은 총을 들고 늪 속에 빠진 소를 보고 있는데,
영화는 같은 장소와 인물들의 행동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매초 간격의 카메라 방향의 이동과 편집을 구사하여
그들의 수영복 착용 상태가 마치 내면적으로 헐벗은 상태임을 은유하는 것처럼
프레임 속 인물들이 모두 집 내부의 틀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탁본을 뜨듯 효과적으로 전한다.
이같은 시선 안에서 영화는 추락 직전의 중산층 내부 풍경의 위태로움과
무너질 듯한 상황에서도 인디오라 칭하며 인종 차별을 일삼는 중년 여성의 망령을 조명하는 외장이 지나가면
영화는 뜬금없이 성모 마리아의 환영 기적을 중계방송하는 TV 장면과
다소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청년의 벗은 몸을 보는 소녀들과 근친상간을 연상케하는 접촉을 겹치면서
이들의 性과 외부의 聖이 모두 비상구 없는 늪지대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동이자 환상임을 고백한다.
본편에서 가부장으로 행세해야할 중년 남성들은 무능력하거나 의미가 전혀 부여되지 않는다면
젊은 남성들은 늙은 여성의 정부이거나 상처를 입고 자신의 신체를 불필요하게 과시한다.
집안의 좌장 격인 중년 여성은 오프닝에서 술잔을 깨고 제대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채로
극 내내 지독한 인종차별의 보유자로서 가슴골 위 쪽으로 가로선 상처를 입고서 거의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본편의 전반적인 구조는 에릭 로메르의 작가적 관습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양덕창이나 후샤오시엔 류의 아시아 작가주의 영화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가족 내부 풍경주의를 관통한다.
메타 영화적인 입장에서라면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데뷔작은 그다지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아르헨티나의 어느 가정을 비추는 냉정하고 건조한 방식 자체는 이미 작가적 입장에 서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데뷔작인 본편에 비하자면, 후작인 위 <얼굴 없는 여자>는 상당히 스릴러 장르적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으며
두 편 안에서 여성 감독으로서 남성의 자리는 거의 배제하고 여성의 시선으로 낡은 집과 윤리를 관조하는 뼈대가 노출된다.
영화에서 두 중년 여성은 결국 외부로의 여행을 가지 못하는데, 그것이 그녀들의 거의 유일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감독은 그녀들에게는 어떤 출구도 없음을 뚜렷하게 흘리고 있다.
발버둥치다 늪 속에서 죽어버린 소의 외양 앞에 복선처럼 소년을 배치하지 않았더라도
자동차 안에서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 소년들을 편집으로 갇혀있게 하는 숏이나
갑작스런 소음 이후 불켜진 실내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중년 여성의 태도에서도
영화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두 가정의 허우적거림을 관찰하는 것에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갑작스런 사건 하나를 남겨두어야겠다는 어색한 작가적인 철지난 고집을 남겨두는데,
사다리라는 건너감의 표지가 불가능한 기표임을 소년의 추락을 통해 증명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것이 10대 원주민 하녀가 집을 떠난 이후에 도착했다는 점을 가만한다면 다소 무분별한 복수로 옮겨질 수도 있다.
영화의 엔딩은 다시 수영장이다. 여전히 그 곳은 더러워진 채이지만,
이제 그 곳에서 의지를 끌어서 수미쌍관의 효과음을 내는 이들은 가정 내 10대 여성들이다.
되돌려보면, 영화 내 그녀들의 위치는 다소 애매모호하면서도 결정되어 있기를 거부한 채로 버려지면서도
그들 나이 때가 가질 수 있는 어떤 에너지를 내포하거나 폭발시키지도 않고 주저앉아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 다음이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어머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떠나갈 수 있을 것인가
유독 걸리는 것은 중년 여성이 내내 착용햇던 검은 선글라스가 거기 보이는 것이다.
< 늪 >은 위태로운 중산층과 인종차별의 외피 속에서 수영장 위에 떠있는 부유물처럼 썩어버린 채
어떤 기적도 일으킬 수 없이 희생양만 낙태하는, 결핍된 두 개의 성 性-聖의 추락 가정극이다.
2. 성녀 La Nina Santa (2004) : 性과 聖은 城으로 좁혀진다.
충분히 예상할만큼 찬반 논쟁이 가능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영화는 단절되고 응집력이 없으며 모호하게 중지된다.
데뷔작보다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포장지로는 인종차별과 중산층의 위태로운 내면을 사용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매혹시킨 것은 전혀 다른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않은 우연의 종결이나 과거 속의 대과거 따위의 서사의 매혹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않은 모호한 색감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소진시켰다고 믿는 기적의 초라함에서 존재론을 찾아야할 것이다.
본편의 지지자들의 입장은 감독이 전편보다 한발 더 나서서 性과 聖의 약한 고리의 접점을 발견했고
그것을 낯간지럽게 까발림으로서 의외로 앙상한 두 단어의 의미론을 제기했다는 점을 상찬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반대론자들은 지지자들이 말하는 바로 그 입장에서 영화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스스로 모호해하는 것이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닌 연출의 부재에서 읽혀져야한다고 질의할 것이다.
즉, 요체는 본편의 드라마적 성숙과 미성숙의 경계에 대해서 평자들이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세심하면서도 무질서한 편집에 반대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편에 이어지는 매 모서리 부분을 매만질 필요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전작과의 연장임을 추정케하는 숲 속 장면과 더불어
데뷔작의 엔딩의 두 소녀가 마치 본편의 주인공 두 소녀로 이어진다는 설정 정도는 쉽게 눈치칠 수 있다.
가령, 영화는 전편의 집에서 나와 호텔이라는 임시 거주지를 주 무대로 하고
길거리와 일종의 종교 학습소를 곁들이고 감독의 주제적 인장과도 같은 수영장을 다시 포함시키는데
집 혹은 호텔 어디서든 그들의 주거지는 이미 내면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불안의 근원이나 배경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작품 내에서 수회 이상 반복되는 방향제 혹은 소독제를 뿌리는 호텔 원주민 소녀직원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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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성가를 부르는 여교사를 바라보는 10대 소녀들과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호텔로 들어서는 중년 남성 의사 일행이라는 대비되는 군중씬으로 마감된다.
이들이 서로의 거울로서 동일자이면서 대비자가 될 것임은 영화 문법상 명약관화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길거리로 나온 오프닝의 각 집단 내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우연 안에서 동일한 대비가 삽입된다.
어떠한 악기도 없이 두 손만으로의 음악 연주, 그것을 구경하며 주인공 10대 소녀를 뒤에서 성추행하는 의사의 존재
영화는 전자가 어떻게 과학적으로 성립가능한지 후반부에 해석함으로서 그것의 허실을 고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라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 어떻게 10대 소녀를 성추행하는 도착적인 성심리를 가질 수 있는지를 선회해서 고발하면서
더불어 중년남자의 성추행 자체에 대해서 자신을 스스로 바수밀다화하려는 종교적 노예 지위에 놓인 소녀를 근심한다.
( 김기덕의 <사마리아>와 동년에 발표된 영화라는 점 외에 두 작품 사이에는 어떤 근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해서 다시 찬반의 여지는 갈라질 수 있다.
이같은 내외적인 조롱에 대한 집착이 과연 드라마적인 성공을 이끌어냈는가라는 반복되는 연출법의 스타일에 대한 논쟁
한편으로는 분명히 위선을 지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종결에 대해서 의문스러워하는 감독의 결단에의 진위
즉, 위 장면에서 보이듯 두 주인공 소녀가 수영장에서 둥둥 떠다니는 인간 부표로서 머무르고
소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의 장기가 재작동하듯 외화면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릴 때
두 소녀의 배영하는 몸은 안전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중년의사 남성의 연극은 제대로 공연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
즉 이제까지 흘러내렸던 서사 자체의 영화적 신뢰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엔딩에 이르러 다시금 전편에 동일하게 어떤 사건을 올리고 그것의 처리결과를 애써외면하려는
감독의 작법 인장에 대해서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가 다시금 찬반 논쟁의 지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에서는 구태의 반복이라 지칭할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책임하기보다 개방의 자유를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열려있든 닫혀있든간에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3성 - 性, 聖 城- 은
당대의 아르헨티나를 구성하지만, 그 자체로 결단코 인간을 지탱할 수 없는 허실임은 선명히 드러난다.
거꾸로 말하자면 결국 관객의 개입은 그다지 크게 열려있지는 않는 것과 같다.
<홀리 걸>은 또다른 늪에 빠져 버둥대는 중산층 남녀의 성과 종교적 노예화된 소명의식에 사로잡힌 10대 여성의 성을
격렬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합시키면서 그것들이 도망갈 출구를 막아버리는 머쑥한 블랙 코메디 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