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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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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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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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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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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신라 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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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84-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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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는 『신승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월출산에 있는데 일찍이 도선에 머물렀다」고 하였으나확실한 근거를 잡을 수가 없다. 또 『도갑사사적』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기록되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나 창건 내력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만일 도선(827~898)의 생존 연대에 도갑사가 창건되었다면 이 연대에 버금가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통일신라말 9세기 경까지 상한하는 예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조성연대가 확인된 유적으로는 도갑사 입구에 있는 국장생의 고려 선종 7년(1090)의 명문이다. 아마도 도갑사는 이 연대 이전인 어느 때에 창건된 후에 11세기 후반이 되면서 대대적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도갑사의 중창 내용은 조선 초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즉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가 1457~1464년간(세종 3~10년)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또 『도감사사적』을 보면 명종 10년(1555) 서남해안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도갑사에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불이 꺼져 화재를 면하였고 역시 정유재란 때도 왜적들의 전과를 면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 광해군(1608~1623)때 낡고 허물어진 건물을 새롭게 고쳤다는 흔적이 엿보인다. 수미왕사가 도갑사를 중창했을 때의 시세를 보면 건물규모가 966칸에 달했으며 여기 소속임자가 12임자였다고 한다. 특히 이때 도갑사에 재적한 승려수는 730명에 이르렀으며 대선암에서 공부하는 숫자만도 50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만 번영은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예로서 숙종 8년(1682)에 만드러진 대형석조 (길이 4.7m)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도갑사는 1977년 화재를 만나 소실된 대웅전을 3년여에 걸쳐 복원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미륵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그외 도갑사해탈문(국보 제50호), 도갑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도갑사소조동자상(보물 제1134호), 도선수미비, 오층석탑, 수미왕사비, 5층석탑, 미륵전 내의 석조여래좌상, 도선과 묘각화상비, 해탈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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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박사 유적(王仁博士遺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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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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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기념물 제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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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185만 2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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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백제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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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76-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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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 유적은 구림 삼거리에서 월출한 주지봉을 향해 올라가면 해발 350m되는 곳에 왕인이 출생했다는 성기골과 그가 수학했다는 문산제가 있다. 왕인은 성기동에서 태어나 이곳 주지봉의 정기를 받아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유가의 성현이 되었다. 또 이 계곡 흐르는 물은 성천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바위에 '성천'이라 각해진 글씨가 있다. 그가 일본에 건너갔다는 상대포는 당시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왕인이 공부했다는 책굴과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뒤 후대인들이 그를 기려 상대포를 향해 새겼다는 석인상이 있다. 1975년 왕인박사유적현차창회 에서는 이 유적지에 유허비를 건립하여 이곳이 왕인박사 탄생지임을 후대에 남겼다. 또 월출산 중턱에는 박사가 공부를 했다고 전해 오는 책굴( 冊窟 )과 문산재( 文山齋 ), 양사재( 養士齋 )가 있다.
왕인 박사는 백제가 낳은 대학자로 지덕을 겸비하였고 일본 응신천황의 초빙을 받아 구수왕의 문화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그들 왕실의 사부가 되었음을 물론 문학과 윤리도덕을 널리 가르쳐 일본 문화사에 신기원을 세웠다. 이런 점에서 왕인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많이 알려진 백제인으로 『일본고사기』,『일본서기』,『속일력기』등에 왕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응신 16년조」에 『16년춘이월 왕인래지 태자사지 습제전적어왕인막불통달...시년백제아화왕...』이라 기록되어 왕인이 백제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왕인박사가 영암 구림에서 출생했다는 내용은 1939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영암성기동조」에「백제고이왕시 박사왕인생어차」란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비록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왕인의 출생지가 영암 구림인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있다. 한편 일본에 건너간 연대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백제 고이왕 52년(285)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의 왕명 등으로 보아 백제 아신왕 14년(405)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적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사당을 비롯한 유적정화사업( 遺蹟淨化事業 )을 하였다. 왕인묘(사당) ·내삼문(內三門) ·외삼문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 ·전시관 ·왕인상 ·책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왕인묘(약 82.5㎡)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곳으로, 월출산(月出山) 서쪽 산 중턱에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책굴은 왕인이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이다. 전시관에는 탄생도 ·수학도(修學圖) ·도일도(渡日圖) ·학문전수도 등이 걸려 있다. 이 밖에 일찍이 외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전수하는 대외무역항구로서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발달되고,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도 복원되었다. 또, 왕인이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도 남아 있는데, 이곳은 백제 때의 토기제조촌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지방에서 벌어지는 산유놀이 때, 왕인이 마셨다는 성천(聖泉)의 물을 마시면 왕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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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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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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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국보 제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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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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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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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62-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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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는 월출산국립공원의 남쪽, 강진 땅에 자리한 선비풍의 신라 고찰로서 단아한 맞배지붕의 극락보전과 불가사이한 벽화로 유명하다.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은 조선 초기 대표적 목조건축의 하나로서 주심포식 맞배집인데 1430년에 건립되었으며, 1476년에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 극락전 목서명>에 새겨져 있다. 이 절의 불상 뒤 탱화로 그려진 ‘수월관음도’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당나라의 오도자가 그렸다고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고 무위사 수학여행 때 들었던 전설 만 남아 있다. 법당이 완공되어 스님들이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루한 차림의 노승이 찾아와 법당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차림보다 기품이 있어 보였던 노승은 주지에게 49일 동안 법당 안으로 사람을 들여 보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이후 49일이 다 되어도 인기척조차 없어 주지가 창구멍을 뚫고 법당을 들여다 보았더니, 노승은 보이지 않고 파랑새가 붓을 물고 관음보살의 눈을 그리려는 순간 인기척에 놀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전설이다. <신동국 여지승람>에 의하면 무위사가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돼,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면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신앙배경이, 극락전 건립과 아미타 삼존도와 아미타 여래도 벽화가조성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위사사적>을 보면 절은 삼국 통일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9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여지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 통폐합의 2차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가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9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 당간지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전이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1991년에 산신각을 짓고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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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이용 호남고속도로 광산I.C → 13번 국도 → (53km) → 송정.나주 거쳐 영암라이온스탑 앞삼거리 → 왼쪽 13번 국도 → (1km) → 오리정 오거리 →불티재 → 강진, 해남 가는 방면 → 백운교 지나 오른쪽으로 무위사 진입로 → (3.3km) → 무위사
대중교통 · 광주 종합 버스터미널에서 강진행(20분 간격)이나 해남행(20분 간격) 직행버스 이용, 성전면에서 하차/ 1시간 20분 정도 소요. · 성전에서 무위사까지 군내버스(하루 4회)나 택시 이용/ 15분 소요. · 강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위사행 군내버스 이용/ 하루 4회/ 25분 소요. · 강진-무위사행 군내버스 이용/ 4회운행/ 25분 소요 (첫차 06:40 막차 17: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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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고려청자 도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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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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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사적 제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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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183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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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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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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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고려청자 요지는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에 산재해 있다. 1914년 이곳 고려자기 요지가 널리 알려진 이래 세계에서 도자기에 관심있는 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진 청자 요지의 핵심은 대구면이다. 대구면 중에서도 용문천인데 상류는 용운리로, 동북쪽 산골짜기에 정수사가 있으며, 요지는 정수사 밑 운곡마을로부터 용문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해변에 까지 산재해 있다. 용운리 가마는 몇 개소를 제외하고는 10세기 후반경으로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사이의 초기 요지로 중국의 월주요, 여요와의 관계를 살필수 있는 파편들이 각 요지에서 산견된다.
한편 계치 골짜기를 지나 용문천 하류의 넓은 들을 지나면 사당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고려청자의 절정기를 맞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양질의 청자를 굽던 유일한 관요지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출토 청자에는 국립 박물관 소장의 청자기와가 있어 명성이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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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이용 강진버스터미널 → 마량 방면 23번 국도 → 미산마을 4거리(좌회전) → 정수사 방면 군도 12번 이용 → 대구면 도요지
대중교통 서울 - 강진 : 1시간 간격 일일 10회 운행(5시간 20분 소요) 부산 - 강진 : 30분 간격 일일 18회 운행(5시간 소요) 광주 - 강진 : 30분 간격 일일 32회 운행(1시간 40분 소요) 목포 - 강진 : 30분 간격 일일 20회 운행(50분 소요)
현지교통 강진읍에서 마량행 군내버스를 이용하여 대구면 사당리 도요지에서 하차. 06:00~20:40 사이에 30분 간격으로 운행. (30분 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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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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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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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7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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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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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84-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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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죽미기』, 『만일암고기』, 『북암기』등이 있으며, 19세기 초에 기록된 『대둔사지』가 있다. 이들 기록중 『만일암고기』에는 백제 구미신왕 7년(426) 백제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그 후 백제 무녕왕 8년(508)에 이름이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고 되어있다. 또 『죽이기』에는 신라 법흥왕 1년(514)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기록할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대둔산조에 대흥사의 내용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이 글에 의하면 이 절의 앞마당 신암, 홀은, 성유 등의 부도가 있으며, 이들 세 스님들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으나 다만 고려의 스님이라는 것만을 알 뿐이라고 말했다. 이들 기록대로라면 대흥사는 4~5세기 경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모두 근거가 희박하며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만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즉 고려조에 해당된 세 스님의 부도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 창건연대는 고려 이전으로 올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흥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서산대사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여러 전투에서 관군이 참패하자 급기야 승병을 모집하여 전쟁에 가담하였던 분이다. 서산대사의 제자 처영은 지리산에서, 사명은 금강산에서, 그리고 자신은 문도 1,500여 명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대사는 입멸전 자신의 유품을 「만년불패지지」로 일컬어지는 대흥사에 보관하도록 유촉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종 10년(1669)에 서산대사, 사명, 처영 3화상의 영정을 모시는 표충사가 건립되었으며 그외 많은 유품과 관련 유물들이 서산대사 유물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흥사는 이같은 서산대사의 선풍을 이어받아 고승 석덕이 조선후기까지 많이 배출되었다. 1998년에 대둔산 대흥사 일원이 국가문화재인 사적 및 명승(제9호)으로 지정된 바 있다. 대흥사는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번지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문화재 자료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흥사는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로 해남·목포·영암·무안·신안·진도·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한다.
백두산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 소백산맥 자락에 지리산을 만들더니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서 융기한 두륜산 중턱에 이 가람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는 대둔사라고도 불리었으나 각종 사료에 근거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4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서산대사 부도(전남유형문화재 제 57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서산대사 유물(전남유형문화재 제 166호),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전남유형문화재 제 167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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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주로 : 매표소-장춘동-능선-고계봉-오소재-능허대-가련봉(정상)- 만일재-두륜봉(구름다리)-도솔봉 -작전도로-혈망봉-오도재- 향로봉-능선-상가촌 (8시간소요)
▷ 1코스 : 매표소-장춘동-대흥사-삼거리-북암-오소재-능허대-가련봉(정상)-천년수(만일암터)-일지암-삼거리-표충사-대흥사
▷ 2코스 : 매표소-장춘동-대흥사-삼거리-북암-천년수(만일암터)-만일재-두륜봉(구름다리)-진불암-물텅거리골-표충사-대흥사(4시간소요)
>>주변관광지 : 고산 윤선도유적지(녹우당), 달마산과 미황사, 두륜산도립공원, 송호해수욕장, 우항리 공룡화석지, 팔영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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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이용 * 광주까지 가서 10~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해남행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96Km, 2시간 소요). * 해남 버스 터미널에서 대흥사 입구행 군내버스가 06:30부터 20:00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12Km, 15분 소요).
>>자가용 이용 해남읍에서 완도 방면 13번 국도를 따라간다. 해남 읍내를 벗어나면 왼쪽으로 대흥사 가는 806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 지방도로로 가다 보면 신기리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806번 지방도로로 계속 가면 대흥사 집단시설지구와 주차장이 있다.
* 주차료는 승용차 2000원, 버스 3000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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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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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 [53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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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인들은 영산강을 금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 가을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뜨면 묵객들은 이를 금강추월이라 부르며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를 그치지 않았다 한다.
영산호 건설은 78년에 착공하여 81년 12월 8일에 그 역사적인 준공을 보았다. 이로써 국내기술진의 특수공법으로 시공된 동양최대의 호수가 생성되었으며, 총 1,452억원의 투자비를 들인 이 공사로 인해 목포와 나불도, 영암을 잇는 4,350미터의 방조제가 건립되었다. 이 방조제에는 30톤급의 선박이 영산호를 드나들 수 있도록 우리나라 간척사상 최초의 통선문을 설치하였으며 이 개문으로 인해 주민들은 해마다 고심하던 가뭄과, 강물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
또한 이 방조제는 영암을 비롯한 7개군과 목포간의 해상교통을 육문으로 바꿔 놓았고 광목간 고속화도로와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여 목포를 일일 생활권에 들게 하였다. 영산호의 준공으로 전천후 과학영농이 가능한 새로운 농토가 마련되었으며 이를 위해 16개의 양수장과 164킬로미터의 용수로를 개발하고 나불도 해상공원을 건설하게 되었다.
영산호는 유달산 공원과 더불어 목포를 국제 관광지로 거듭나게 하였고 영산호, 갓바위, 해상공원, 제주도, 홍도를 잇는 해상관광과 유달산, 영암월출산, 해남대흥사를 잇는 육상 관광의 센터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하구둑 주변엔 관광호텔과 낚시터, 방갈로가 세워지고 호수엔 쾌속정과 요트를 띄우게 되어 관광객들은 호반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산호 준공은 우리에게 관광 자원 목포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주변관광지 옥공예전시관, 남농기념관, 영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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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공항 : 공항버스 이용하여 영산강 하구언 하차 ⊙ 목포역 : 시내버스(105,119번) 이용하여 영산강 하구언 하차 ⊙ 시외버스터미널 : 시내버스(105,119번) 이용하여 영산강 하구언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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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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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당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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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목포시 용당동 갓바위는 목포의 산정동 남쪽 바닷가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행정구역상 용당동에 속하지만보통 성자동이라 한다. 이 성자동의 주봉도 이 갓바위의 이름을따서 입암산이라 한다. 이 곳은 목포시 중심부에서 4㎞의 거리다. 이 갓바위에서 바라보면 부흥산과 문도, 나불도, 영암의 두리봉 등이 동남쪽으로 보이고 서쪽으로 목포 시가지와 유달산, 삼학도 등이 보인다. 바닷가에 서있는 이 갓바위는 한 쌍이다. 바다를 향하고 서 있는 이 바위는 큰 것은 8 m가량, 작은 것은 6 m가량이다. 참모습은 바다를 선유해야 볼 수 있지만 조심해서 바위 밑으로 접근해서 볼 수도 있다. 목포팔경의 하나인 갓바위는 두 사람이 나랗니 삿갓을 쓰고 있는 모양의 한쌍의 바위로 경지 높은 도사 스님이 영산강을 가로질러 나불도로 가던길에 잠시 쉬면서 놓은 삿갓과 지팡이 자리에 갓바위가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로는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 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 라 하며 둘다 머리에 삿갓을 쓴형태지만 역시 아들 바위의 삿갓이 보다 근사하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거점으로 개항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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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공항 : - 공항버스 이용 MBC앞 하차후 7번 시내버스 이용 - 택시 이용시 25분 가량 소요 ⊙ 자가 : - 목포역->남해개발산업도로->목포제일중학교 앞->갓바위 문화지구내 - 시외버스터미널->목포과학대학->제일중학교앞->갓바위 문화지구내 ⊙ 시내버스 : - 목포역에서 1번 승차 -> 목포MBC 앞에서 7번으로 갈아탐 -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6번, 14번 승차 -> 용해동 금호아파트 앞에서 7번으로 갈아탐 ⊙ 택시 : -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15분 - 목포역 에서 택시로 15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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