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신농님께|고구려 토론방
신농님은 바라보는 객체가 달라질 때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리하십니까?
고구려사를 볼때는 혈통이나 관념을 중시하고 고려,조선을 볼때만 지역을 중시한다는 뜻입니까?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아서 문제라면 조목조목 꼬투리 잡듯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평산박씨의 시조 박직윤이 대모달을 자칭했다고 고구려사람이 됩니까?
그럼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부터 대대로 몽고사람이 되어 몽고벼슬하며 살았는데 이사람들은 몽고인으로 봐야 합니까?
제말씀은 목조가 몽고땅에 살던 몽고벼슬을 하든 목조자신이 고려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으면 고려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평산유씨,평산박씨,황주황보씨등은 고구려계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고구려가 망한 다음에도 고구려의후손이 아니면서 옛날 고구려지역에 살면 모조리 고구려계가 됩니까?
그리고, 견훤이 경상도 출생이지만 백제를 재건했기 때문에 백제유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더해서 여기서는 혈통적 중요성이 있습니까?
무엇을 근거로 견훤이 백제유민입니까? 견훤이 본래 이씨인데 고려이전시대에 백제에도 이씨가 있었습니까?
물론 광주의 지렁이설화가 있습니다. 광주지렁이설화가 있으면 광주사람이 됩니까? 삼국유사에는 후백제 견훤조에 고대 기록인 이비가기(李碑家記)를 인용해 아자개를 진흥왕의 혈통이라면서 그 혈통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볼때는 두가지 모두 견훤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지배층계열에게는 족보를 조작해서 정통성을 강조하고, 민중들에게는 설화를 창작해서 퍼트림으로써 지역적 기반을 얻고자 조작한 것으로밖에 안보입니다.
우리역사를 이해하는데 지역적 정서를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 안되는 것이 그리 많다니 그럼 중요한 세가지만 들어주십시요.
백제적인 기질을 강조하시는데, 더해서 전주 이씨가 백제 정서를 지녔던 가문이라는데, 전주이씨는 시조 이한(李翰)부터 대대로 신라벼슬하다가 15세손에 이르러야 고려조에서 고려벼슬하는데 어떤면에서 백제정서를 가졌는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Re:Re: 고려사에 대해| 고구려 토론방
그리고 고구려사를 볼때는 혈통을 중시하고 고려.조선을 볼때는 지역만 중시한다라..아예 남을 몰아붙이는데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혈통도 중요하지만, 지역적 정서가 그에 앞서 더더욱 중요하다고. 언제 혈통을 무시하고, 지역적 정서만 강조하덥니까? 그리고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지만 님은 후삼국시대 개막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것 같습니다. 후삼국이 어떻게 열렸는지요? 한마디로 고구려, 백제의 부흥이자 부활입니다. 이 시대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박직윤입니다. 박직윤이 스스로 대모달을 칭했고, 대모달이 고구려장군호를 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역사학자는 없습니다. 이도학교수님도 인정하시고, 왠만한 분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는 박직윤이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임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박직윤은 뒤에 궁예에게 귀부합니다. 궁예 또한 고려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박직윤과 궁예는 이미 고려(고구려)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님이 말씀하시길 -그럼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부터 대대로 몽고사람이 되어 몽고벼슬하며 살았는데 이사람들은 몽고인으로 봐야 합니까?- 라고 하셨는데, 이성계의 조상이 비록 원나라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몽골사람임을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조금만 역사를 들여다봐도 알수 있지만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몽골에 간 것은 쫓겨간 것입니다. 발해 문왕도 스스로 고려(고구려)의 왕이라 칭했는데, 그러면 문왕을 고구려의 후예라 볼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님이 말씀하시길-제말씀은 목조가 몽고땅에 살던 몽고벼슬을 하든 목조자신이 고려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으면 고려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자. 님께서 드디어 의식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원하던 답변이지요. 정서와 의식은 그 뜻이 비슷한 말이라는 사실 정도는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자기가 몽골사람임을 자처하지 않은 이상은 어디까지나 고려인의 후예입니다. 그게 뭐가 이상하지요? 저는 틀린말 한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왕건이 고려를 어떻게 건국하였는지 조차 망각하고 계십니다. 왕건이 단순히 국호를 고려라 하였겠습니까? 그가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그래서 패서계 호족들이 그를 따라준 것입니다. 고구려는 비록 6세기 경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지만, 고구려 부흥전쟁만도 아주 오래 일어났다는 사실과 신라의 영토 안에서도 고구려적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 궁예를 따라 나중에 고려를 세운 사실을 잊으셨는지요? 이들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한 것은 임시방편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후삼국시대는, 삼국시대의 재현인 셈입니다. 그리고 견훤을 백제유민이라 하였는데, 그것도 다 까닭이 있어서 그리 말한 것입니다. 견훤이 태어난 상주 가은현에는 백제인이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한 완산견씨세보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부여융의 직개8대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완산견씨세보야 족보이므로 믿을수 없다고 하지만, 견훤이 단순히 신라 사람이라면 뭐하러 백제를 재건하였을까요? 궁예야 신라 왕족출신으로 정권 다툼에서 밀려난 것이고 자신의 아버지인 경문왕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견훤은 별로 신라사회를 배타하거나 그럴만한 배경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세웁니다. -우리역사를 이해하는데 지역적 정서를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 안되는 것이 그리 많다니 그럼 중요한 세가지만 들어주십시요. - 라 하셨으니 세가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고려시대에 일어난 무신정변입니다. 무신정변의 주역은 이제까지 정중부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 주역은 정중부가 아니라 이의방, 이고입니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 세사람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원인은 모두 제각각 다릅니다. 이중 이고는 단순히 천대받는 무신사회 때문에 무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정중부와 이의방은 다릅니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곧 패서계 사람입니다. (패서계는 서경<평양>과 황해도를 포함한 지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서경에서는 묘청의 난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김부식입니다. 이 사건으로 김부식은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바로 그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중부는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묘청과 같은 패서계 출신입니다. 즉 묘청의 몰락으로 인해 패서계 또한 같은 비극을 걷게 된 것입니다. (당시 황해도 지역과 평양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은 생활권이 비슷한 지역이었습니다) 이의방의 경우, 그 출신지 전주는 누구나 다 알듯이 후백제의 수도입니다. 고려왕조가 제일 차별하던 지역은 백제입니다. 그중에서도 전주가 제일 차별받았는데, 현종 시대에 거란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현종이 전주로 가려 하자 신하가 나서서 말하기를 "전주는 옛 백제로서 성조(聖祖)께서도 미워하셨으니 가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여 현종은 전주로 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성조란 왕건을 뜻합니다. 이 신하의 말은 훈요십조와도 부합되는 말입니다. 그만큼 전주는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의방은 최근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지만 전주 호족 출신입니다. 즉 이의방의 세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의방은 당시 견룡행수로 있었는데, 견룡행수는 군부의 요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관직입니다. 즉 이의방의 경우 무신정변을 굳이 일으키지 않아도 군부의 요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방은 무신정변을 주도합니다. 이는 이의방이 전주를 차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려에 경고를 한 셈입니다. 그만큼 무신정변에 있어서도 지역적 정서가 중요합니다. 학자들은 이 무신정변이 단순히 차별받는 무신들이 일으킨 단순우발적인 것으로 평가하지만, 무신정변의 뒤에는 지역적 차별에 대한 반감이 녹아들어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고려시대에 일어난 삼국부흥전쟁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김사미, 효심이 신라부흥전쟁을 일으키자 당시 집권자인 이의민이 몰래 이들과 타협한 사실까지 있으며, 전라도 원율, 담양 지방에서는 이연년이 백제부흥전쟁을 일으켰고, 서경(평양)에서는 최광수가 스스로 고구려부흥병마사라 자칭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고려시대에도 삼국계통이 융합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입니다. 세번째, 조선시대에 황해도 지역이 반골 지역이라 하여 천대한 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의방은 전주이씨로서 그 동생 이린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6대조입니다. 이 이의방은 바로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피살당했고, 전주이씨도 이때 가문의 최고 위기에 다다릅니다. 정중부가 속한 황해도 지역에 대한 전주이씨의 반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황해도 지역을 차별했습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전주이씨 족보만을 말씀하셨을 뿐, 그 가문의 특성을 모르십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전주 지역은 고려에서 최고로 차별하던 지역이었고, 이의방의 출신은 전주 호족입니다. 그런데 이 전주에는 200년전 견훤이란 인물이 후백제를 건국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도 나오듯이 견훤의 본래 성씨는 이씨입니다. 이의방의 가문이 후백제 견훤에 맞닿아 있을 가능성은 이미 몇몇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바가 있습니다. 이의방의 조상이자 전주이씨 시조라는 이한..그가 어떤 역사서에 나오던가요? 족보에 나온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족보에 따르면 이한은 중국인이니 전주이씨는 중국인의 후손일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자꾸 이상한 쪽으로 딴지를 걸지 마십시오. 괜히 중국동북공정 이야기를 꺼내었다가 불리하니까 이젠 딴데로 딴지를 거시는데, 그 딴지 거시는 태도가 보기 안좋습니다. 최소한 반박글에 예의가 있어야 하는데, 님 글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분명 저는 동북공정 얘기를 왜 꺼내셨는지 물었습니다. 자꾸 회피하신다면 전 님을 무시하겠습니다. 아울러 제 답변을 이상하게 반박하셔도 말입니다. |
[중/근세사] 들어가는 말 - 한국의 「삼국 시대」인 후삼국 시대| 인용글 등재 게시판
※들어가는 말 - 한국의 「삼국 시대」인 후삼국 시대 먼저 글 이름에 대한 해명부터 해야겠다. 위에서 말한 “「삼국 시대」”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가 아니다. 굳이 말하라면 위·촉·오 나라가 갈라져서 싸운 시대인 중국의 삼국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말해서 후삼국 시대 - 남북국 시대 끝무렵 - 는 위, 촉, 오가 갈라져서 싸웠듯이 한 나라인 후기신라에서 기훤, 박직윤(KBS의 사극인 『왕건』에서는 박지윤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박‘직’윤이다), 양길, 견훤, 궁예, 그 밖의 다른 호족이나 도적 출신의 세력들이 저마다 ‘장군’을 칭하며 신라 왕실에 반기를 들고 홀로 선 때이기 때문에 이 상황이 후한에서 조조, 원소, 원술, 손권, 유장, 유표, 유비, 장로와 같은 지방 세력들이 갈라져 나와 나라를 세우고 서로 싸운 일과 비슷해서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라면 위 이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삼국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지만 한편 으로는 그 이전 시기인 진 ·한 교체기와도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진(秦) 나라가 원래 같은 제후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인 6국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했듯이 신라도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인 남부여(: 백제)와 고려( :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일단 삼한(三韓 : 삼국)을 「통합」했다. 또 진시황 영정( : 영정이 이름이다)이 망한 6국의 백성들을 억누르고 잔인한 형벌로 죽였듯이 신라도 남부여와 고려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특히 남부여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많은 남부여인을 죽였고 남부여를 「식민지」로 다루었다.( :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백제가 악랄한 나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진시황 영정이 죽고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정무는 ??혀 놓고 사치와 쾌락에 빠져서 놀기만 했으며 2세 황제 호해(: 2세 황제의 이름은 호해이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기 형제들을 숙청한 사실, 또 진나라 법으로 6 국의 백성들을 처벌하면서 사소한 일까지 잔인한 형벌과 법으로 처리하고 가벼운 범죄까지도 사형에 처한 사실, 또 지나친 세금과 요역으로 백성의 피땀을 빨아 먹은 일은 후기신라가 하대(下代)인 9세기에 내려와서 왕족과 귀족이 사치에 빠지고 가혹한 세금과 요역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 억누르고 쇄국정책을 쓰면서 무역을 막으면서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결국 나라의 살림을 거덜나게 한 일과 아주 비슷하다. 건강하고 씩씩한 지배층이었던 화랑도 그때에는 이미 썩어빠진 무리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들도 왕실과 귀족을 위해 봉사할 줄만 알았지 백성을 위해 ‘자비와 중생구제’에 나선 경우는 별로 없었다.(원효대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랬다) 음란한 놀이에만 몰두하고 왕관에만 탐을 낸 왕족들이 걸핏하면 칼을 뽑아들고 정권다툼을 벌여 옥좌는 자주 주인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지배층의 권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2세 황제 때에 평민이었던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난 일과, 신라 하대 말기에 와서 여러 곳에서 도적들이 들고 일어난 일도 비슷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때가 되면 그 이전에는 「감히」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반 농민들의 반란까지 일어나게 된다.(물론 세금과 강제요역, 그리고 배고픔과 왕족, 귀족, 호족들의 착취를 견디지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점에서도 두 시대는 비슷하다. 한 번 진나라에게 무너졌던 6국이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나 진나라의 지배가 흔들린 뒤 다시 옛 자리에 옛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힘을 합쳐 진나라를 타도하려 했듯이, 견훤은 옛 백제 땅에 다시 백제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신라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했으며 궁예 또한 옛 고구려 땅에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외쳤다. 즉 진나라가 6국을 아우르지 못했듯이, 신라도 결국 고구려와 백제를 아우르는 데에는 실패했다. 유방이 처음에는 진(秦)을 타도하려고 군사를 일으켰고 결국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말로는 진나라의 「포악함」을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나라의 제도나 법률, 통치 방식을 이어받아 나머지 6국을 다시 무너뜨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항우 세력을 무찔렀듯이 왕건도 말로는 고려를 잇는다면서 실제로는 신라의 제도를 이어받고 신라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 그들을 고려 편으로 만들고 나중에는 옛 백제 세력을 무너뜨리고 항복을 받아 낸다.( : 비록 정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왕건이 과연 실제로 신라에 우호적이었나는 의심스럽다. 신라도 그렇게 순순히 항복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고운 최치원을 비롯해서 실제로 끝까지 신라에 충성한 관료나 귀족, 왕족들도 많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북쪽으로 달아나서 여진족과 함께 살았고 나중에 금나라를 세우게 된다) 비유하자면, 궁예나 견훤은 항우와 같은 ‘포악하고 잔인한 악역’을 맡았고, 왕건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덕이 많은 사람’이 되어 유방처럼 ‘마땅히 제왕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 나오게 되었다. 궁예나 견훤은 항우처럼 ‘억울한 사람’이 되었다고나 할까? 항우가 진나라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굴고 진시황 영정의 무덤을 파헤치고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자영( : 자영이 3세 황제의 이름이다)을 잡아 죽인 일은, 궁예가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내려쳐 잘라 버린 일이나 견훤이 서라벌의 왕궁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왕궁과 도성을 약탈하며 허수아비 경순왕을 세운 일과 비슷하다. 위에서 보았듯이 후삼국 시대는 진·한 교체기와 아주 비슷하며 비교해서 읽어보면 더욱 재미있는 시대이 다. 그럼 글 이름을 『한국의 「진·한 교체기」 후삼국 시대』라고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후삼국 시대는 진, 한 교체기뿐 아니라 중국의 삼국 시대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왕실이 썩고 지배층이 문란하며 중앙정부의 명령이 지방에까지 다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황건적이 일어나기 직전의 후한은 조정이 문란하고 썩어빠져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권한은 십상시라는 환관들이 쥐고 있었고 황제는 허수아비였으며 뇌물과 연줄로 인사가 결정되었다. 왕실이나 귀족, 호족들은 백성들을 외면한 채 사치와 향락에 빠져 놀기만 했고 백성들은 물난리, 가뭄, 메뚜기떼에 시달리며 힘겹게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나마 겨우 거둬들인 농작물은 중앙정부의 관리나 지방 귀족들의 관리가 무자비하게 뜯어갔다. 중앙정부와 귀족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걸인이 되어서 사방으로 떠돌아 다녔다. 행정질서는 엉망이 되었고 중앙정부의 명령은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말았다. 실권을 쥔 자들은 각 지방의 유력자 집안이었고 이들은 사실상 군벌 두목이 되어서 자기 땅 안에서는 왕으로 행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지배층은 사태를 너무 안일하게 여겼다. 십상시는 황제에게 “천하는 태평하옵고 도적이 없으며 모두가 폐하를 칭송하옵고 신하들은 충성하며 만사가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사옵니다.”라고 간했으며 나약하고 멍청한 황제는 이 말을 사실대로 믿었다. 설령 황제가 현실을 제대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실권이 없어진 황실이 무너진 후한을 어쩔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현실이 쌓이고 쌓여서 장각이 태평도(道)를 창시하고 무리를 모아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무력함이 드러났고 이후 지방세력들은 사실상 군벌이 되어 스스로의 세력을 키우고 각자 왕이나 황제를 일컫게 된다. 마찬가지로 후기신라도 군현제 질서가 와해되고 지배층이 썩을 때까지 썩어 있었다. 지방 호족들은 각자 자기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사병私兵을 두고 자기 성城 안에서는 성주나 장군이라고 일컫는 독립 군벌이었다) 심지어는 도적들까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카스트로나 호치민처럼) 산채를 성처럼 꾸미고 독립 군벌로 자라나고 있었다. 치안은 호족들의 성 주변이나 금성( : 왕성)인 서라벌 주변에만 겨우 유지되고 있었고 중앙정부의 명령은 호족들이 다스리는 땅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호족과 도적과 중앙정부, 그리고 그 무렵에는 타락해 버린 불교세력 - 왕실과 귀족을 비호하는 - 에게 이중 삼중으로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무거운 세금과 요역을 피해서 달아나 도적이 되거나 걸인이 되기 일쑤였다. 상황이 이랬는데도 왕족과 귀족은 사치스러운 삶을 즐겼고 무리하게 절과 궁궐을 다시 크게 지으며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놀기만 했다. 화랑도 그 때 가서는 이미 썩어버린지 오래였고 불교는 대부분 왕실과 귀족을 위해서만 봉사했지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백성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원효나 도선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 마치 서양의 카톨릭이나 러시아의 동방 정교 성직자들이 썩은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던 일처럼. 이에 참다 못한 농민들은 부역을 피해 마을에서 달아나거나 도적이 되거나 호족의 사병으로 들어가거나 선종 같은 개혁불교 세력의 승려로 들어가 반항적인 재야세력이 되었다. 이 때에 이미 신라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나 신앙심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하대의 농민반란이 좋은 예이다.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일반 농민들까지 신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이미 이때에 천손 사상으로 대표되는 ‘왕실이 신성하다’는 믿음이 사라지고, 대신 왕실에 대한 반감과 증오 - 무거운 세금과 요역, 그리고 가혹한 지배와 가난 때문에 - 가 자리잡았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런데도 귀족들은 서라벌 안에서 왕에게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 지방은 조용하고 평온하며 시가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기가 막혀서 다 읽지 못하겠음)라고 아첨을 떨었다.(이때가 서기 880년의 일로 이 말이 있을 때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호족들은 이미 이탈해 가고 있었음) 이미 당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 온 신라의 지식인 6두품은 숨막히는 신분질서인 골품제도에 자기들의 출세길이 가로막히고, 자기들이 배워 온 학문과 제도가 핏줄 위주인 신라 사회에서 제대로 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하여 왕실에 등을 돌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분은 호족이나 불교의 선종 세력과 손잡고 반(反) 신라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활력은 신라 왕실을 떠나 지방 호족과 선종 세력들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왕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이며 죽고 죽이는 ‘내전’을 멈추지 않았고 옥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주인이 바뀌었으며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실권은 왕과 가까운 왕족이나 귀족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혜공왕 때 왕위를 노려서 일어난 반란은 석 달 동안 계속되다가 진압되었고, 왕족 김헌창은 연호를 쓰고 독립국임을 선언하며 신라 왕실에 맞서다가 진압당했다. 이미 신라 왕실의 권위는 조롱거리로 전락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고 각지에서 도적들이 군벌로 성장했으며 지방 호적들이 스스로 장군을 칭하게 된 것이다. 기훤, 양길, 박직윤, 궁예, 견훤,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과 같은 세력들을 후기 신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키워준 것이다. 또 후한이라는 이미 ‘통합된’나라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군벌들이 갈라져 나와 재통일 전쟁을 벌였듯이 후기신라라는 한 번 통합된 나라에서 호족으로 살다가 갈라져 나온 견훤, 궁예, 왕건은 나중에 세력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통일전쟁을 벌인다. 비유하자면 신라는 촉한(蜀漢 : 한의 세력이 파촉 - 사천성 - 땅으로 줄어들었으니까)이고, 고려는 위나라이며, 백제는 오나라 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가 오나라를 무릎 꿇리듯이, 궁예의 마진을 이은 왕건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백제의 신검 세력을 무릎 꿇린다. 또 위나라와 오나라가 자주 싸웠듯이 고려와 백제도 자주 싸웠다. 위나라를 가신인 사마씨가 빼앗아 진(晉) 나라를 세웠듯이, 왕건은 궁예가 세운 마진을 반란을 일으켜서 빼앗은 뒤 나라 이름을 다시 고려로 고치고 고려를 세웠다. 진(晉) 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듯이 고려도 후삼국과 대진국을 모두 통일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후삼국 시대는 중국의 삼국시대와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단순히 진 ·한 교체기 하고만 비슷하다고 보는 점은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삼국 시대를 이들 두 시대와 견주어서 살펴보되 이들 시대에서 없는 점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냉정하게 뜯어보고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에 썼던 글 이름을 고치자. 『한국의 「군벌시대」인 후삼국 시대』로.(그러면 삼국 시대와 진, 한 교체기를 모두 아우를 수 있을테니 말이다) ======================================================= - 앞으로 계속 이어서 글을 올리겠습니다. 태조 [왕건]의 허와 실을 더욱 자세히 가르쳐 드린다는 점에서. |
댓글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