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작품은 1974년 소위 '인혁당사건'을 소재로 한 것으로, 인혁당사건을 유신이라는 집단적 정신이상의 폭력시대를 만들어낸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지하의 옥중수기 '고행 1974년'의 한 대목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끝까지 당시 인혁당사건 관련 정부발표, 희생자 가족과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록, 일부 공개된 공판기록, 당시의 신문기사, 그리고 당시의 정부간행 홍보물 등을 바탕으로 문장의 특별한 가감 없이 구성하여, 사실 자체의 기록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공연은 시종 차가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며 배우들의 의상이나 무대의 색채도 흑백의 무채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극단 '연우무대'에서 제작되어 1988년 12월 1일부터 1989년 2월 26일까지 석 달간 서울 혜화동 연우소극장에서 공연되었고 3회의 대학초청공연을 가졌으며, 제2회 민족극 한마당 참가작으로 1989년 4월 8일과 인혁당 희생자들의 14주기일인 4월 9일에 연우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 대본은 1989년 4월의 공연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나오는 사람들
- 8명의 배우가 이 연극의 모든 역할을 분담한다
1-해설자, 시인, 희생자, 귀빈, 수사관,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성명서 낭독자, 신부, 코러스
2-희생자의 목소리, 해설자, 장관, 판사, 수사관, 언론, 코러스
3-희생자의 목소리, 장준하 선생의 목소리, 희생자, 농민, 해설자, 코러스
4-희생자의 목소리, 해설자, 각하, 수사관
5-희생자의 목소리, 부장, 수사관, 검찰관, 코러스
6-희생자의 목소리, 농민의 부인, 희생자의 부인, 코러스
7-희생자의 목소리, 희생자 부인의 목소리, 희생자의 부인, 아이, 코러스
8-희생자의 그림자, 대학생, 희생자의 아들, 아이, 희생자 가족의 목소리, 코러스
(무대는 간소하다. 덧마루를 사용하여 높이를 주고 뒤에는 창살을 만든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덧마루 위, 바닥, 덧마루와 바닥을 잇는 계단. 덧마루 가운데 벽에 각하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제1막-1972년 가을부터 1974년 봄까지
(무대 한쪽에 부분조명 떨어지면 조명 속에 첫 번째 해설자가 들어선다)
[해설자]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그들은 그것을 시월유신이라고 부르고 각하의 용단을 찬양하고 각하에게 예배했습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생들과 민주세력의 저항도 각하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1974년 새벽 벽두, 각하는 드디어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칼을 빼어 쳐들었습니다. 각하의 집권 18년 동안 가장 살벌했던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각하는 한번 치켜든 칼을 그대로 거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 해 4월 3일 밤, 각하는 긴급조치 4호와 함께, 대한민국 사상 최대의 정치사건이자 희대의 조작 사건으로 기록된 민청학련사건을 터뜨렸습니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소위 인혁당, 정확히 말해서 인민혁명당재건 단체는 민청학련의 배후조종단체로 국가전복을 기도한 공산계 비밀지하조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비상군법회의는 형식뿐인 재판 절차를 거쳐 김지하 시인을 비롯한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계자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자마자 1975년 2월 26일자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苦行) 1974'를 발표하여 인혁당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세상에 폭로하고 보름
후 재구속되었습니다.
(조명 바뀌면, 실루엣으로 철창 사이사이에 희생자들의 그림자가 보인다. 해설자는 마침 출소하려는
시인으로 역을 바꾼다. 때는 1975년 1월쯤)
[소리1] 여보세요!
[소리2] 여보세요!
[소리3] 여보세요!
[소리4] 들립니까?
[소리1] 제 말이 들립니까?
[소리2] 여보세요!
[소리3] 여보세요!
[시인] 거기 누구요?
[소리1] 하재완입니더!
[소리2] 이수병입니다!
[소리3] 우홍선입니다!
[소리4] 송상진입니더!
[소리1] 김용원입니다!
[소리2] 서도원입니다!
[소리3] 여정남입니더!
[소리4] 도예종입니더!
[시인] 당신들 누구요?
[소리1] 인.혁.당입니다.
[시인] 아하, 그래요? 인혁당 그거 진짭니까?
[소리2] 물론 가짭니다.
[시인]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소리3] 고문 때문이지요.
[시인] (사이) 고문을 --- 많이 당했습니까?
[소리4] 말도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뼈가 부서지고 엉망입니더.
[시인] 저런 --- 쯧쯧쯧 ---
[소리1] 자기들도 정치 문제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합니다.
[시인] 아하, 그래요.
[소리2] 처음에 중앙정보부에서 뭐나 있나 하고 고문할 때는 그래도 참을 만 했습니다. 그런데 각본에 맞춰서 간첩으로 몰려고 고문할 때는 삼층에서 떨어져 죽고만 싶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두어 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날 고문하던 수사관은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시인] 아하, 그래요.
[소리3] 정말 부끄럽습니다. 이거 나라 위해서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이리 끌려들어와서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으니 ---
[시인] 아하, 그래요.
(무대 전체가 어두워지면서 '대통령 찬가'. 각하 얼굴에 부분조명 떨어지고 여배우 하나에게 부분조명 떨어진다)
[여자] (이북식 발성법으로 각하의 수식어를 낭독한다) 무질서와 비능률, 분열과 파장, 타락과 나태 속에서 조국을 건져내시었으며, 반만년 가난 속에서 민족을 구제해내시었으며,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백척간두에 선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결단과 예지로 구해내시었으며, 조국과 민족의 앞날에 화합과 번영과 통일의 미래를 약속해주시며, 용맹스런 우리 60만 국군의 통수권자이시며, 예비역 육군대장이시며, 한국적 민주주의와 수호자이시며,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박.정.희.대.통.령 각하께 대하여 경례!
('대통령 찬가' 끝나면 조명 바뀌면서 배우들 바닥에 내려놓았던 각하의 대형 사진들을 들고 메트로놈의 박자에 맞춰 행진하기 시작한다)
[남자] 11.7 선언에 대한 우리 만화인의 결의!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단에 의한 11.7 특별선언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우리 만화 동인은 다음과 같은 결의와 신념을 이에 천명하는 바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우리 만화 동인은 11.7 선언에 힘입어 만화 예술의 중흥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한국 아동 만화가 협회!
(다함께 메트로놈의 4분의 4박자에 맞춰 구령하듯 외친다)
[일동] 재건 국민 운동 중앙회! 전국 주부 교실 운동회! 축산 기업 조합 중앙회! 단군 숭녕회 중앙 본부! 대한월남 귀순 동지회! 대한 관광 협회 중앙회! 한국 완구 수출 진흥회! 한국 우유 협동 조합! 한국 제지 공업 연합회! 한국 불교 태고종 총무원! 한국 과학 기술 진흥 재단! 한국 기계 공업 진흥회! 유신 유신! 시월 유신!
(대열에서 하나가 튀어나오며 성명서 낭독을 시작하면 조명 바뀌고, 모두들 각하의 대형 사진을 내던져 독재타도 시위대로 변한다)
[대학생] 학우여!
[일동] (스크럼을 짜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대학생] 자유, 정의, 진리는 대학의 생명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도 비통하고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사회에 만연된 무기력과 좌절감, 불의와 권력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모든 패배주의, 투항주의, 무사안일주의와 모든 굴종의 자기기만을 단호하게 걷어치우고 의연하게 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이 땅에 정의, 자유, 그리고 진리를 기어이 실현하려는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인다! 우리의 외침을 억누르는 자 그 누구냐! 정부는 파쇼통치를 즉각 중지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자유 민주체제를 확립하라! 대일 예속화를 즉각 중지하고 민족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하여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중앙정보부를 즉각 해체하고 만인 공노할 김대중 사건의 진상을 즉각 밝혀라! 기성 정치인은 각성하라!
[일동] 유신철폐! 독재타도!
(조명 바뀌어 덧마루 위에 부분조명 떨어지면 1973년 12월 24일. 배우 중 하나가 뛰어오른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본부)
[남자] 민주주의 회복, 현행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전개하면서 ---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명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다시 무대 다른 쪽에 부분조명 떨어지면, 다른 배우 하나가 뛰어오른다)
[장준하] 박정희라는 사람은 일제 때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제 만주군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다! 박정희씨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 대통령을 시켜서는 안될 사람이다!
(다시, 덧마루 중앙의 단 위에 부분조명 떨어지면 각하의 모습. 검은 검도복을 입고 목검을 들었다)
[각하] 작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이른바 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민혁명의 수행을 기도하였습니다. 따라서 나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이 같은 불순활동의 비록 초기단계에 있다 하더라도 이를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오늘 헌법 제 53조에 의하여 대통령에게 부여되고 있는 긴급조치권을 불가피하게 발동하게 된 것입니다.
(배우들, 각하를 향해 예배드리면서 유신 찬송가를 합창한다. 유신 찬송가는 마치 미사곡처럼 웅장하고 성스럽고 경건하게 부른다)
[일동] 유신 유신 시월 유신.
(모두 각하를 향해 움직여 각하의 앞 계단에서 합창단이 된다. 찬송가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 중 하나가 부장이 되어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마치 기도 하듯 장중하고 경건하고 엄숙하게 낭독한다)
[찬송가] 대한 상공 회의소
대한 교육 연합
대한 반공 청년회
대한 불교 불입종
대한 불교 조계종
대한 종교 협의회
대한 한의사 협회
대한 방직 협회
대한 제당 협회
대한 증권 협회
대한 건설 협회
대한 간호 협회
대한 보관 협회
대한 의학 협회
대한 탄광 협회
대한 곡물 협회
[일동] 대한 주정 협회
한국 잡지 협회
한국 사진 협회
한국 국악 협회
한국 영화인 협회
한국 화섬 협회
한국 관세 협회
한국 소모방 협회
한국 석유 협회
한국 무용 협회
한국 선주 협회
한국 선급 협회
한국 박람회 협회
전국 극장 협회
생명 보험 협회
국제 기능 올림픽
대회 한국위원회
[부장] 첫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물건, 금품, 기타의 편리를 제공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제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7항에 의한 문교부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유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부과 할 수 있다. 제1항 내지 제3항, 제5항, 제6항 위반의 경우에는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음모한 자도 처벌한다. 열 번째, 열 한 번째, 열 두 번째, 이 조치는 1974년 4월 3일 22시부터 시행한다.
[일동] 유.신.유.신.시.유.신.
(찬송가 합창이 끝나면 스피커를 통해 일본군의 군인칙유(軍人勅諭)가 일본어로 터져 나온다. 배우들 대형사진을 들고 퇴장하면 무대에는 각하만 남는다. 군인칙유 낭독이 끝나면 각하 목검을 치켜들고 무대 앞으로 공격자세로 달려나와 멈춘다)
[각하] 빨갱이 새끼들 다 잡아넣어!
(조명 사라졌다가, '새마을 노래' 웅장하게 터져나오면 다시 밝아진다. 조명 환하게 밝아지면 새마을운동 찬양대회장. '새마을 미래'라는 홍보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무대 뒤쪽에 귀빈들이 자리하고 앉아 계속감탄과 박수와 찬사를 보내고 있음을 동작으로만 보여준다. 무대 한쪽에는 두 명의 아나운서가 등장하여 영화를 해설한다. 무대 가운데는 미래의 영화 속에서 연기한다)
[아나운서1] 시월 유신! 이제 우리는 어려운 시련을 극복하고 화합과 번영의 미래를 넘겨다보게 되었습니다. 분단과 전쟁이 굶주림의 비극은 이제 끝났습니다. 5.16을 계기로 전진이 시작된 조국 근대화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하에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시월 유신으로 번영하는 조국의 미래! 오늘 미리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나운서2] 어.느.중.농.가.의.미.래.도!
농가 소득 8백만 원과 농촌에 이룩될 문화생활 환경을 바탕으로 해서 90년대의 우리나라 농촌의 미래를 그려보자! 때는 1991년 10월의 어느 토요일, 곳은 경상북도 상주군 어느 농촌 마을. 그곳을 전라북도 부안이라 해도 무방하고, 강원도의 어디라 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나운서1] 농촌 김동철씨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이때 무대 한쪽에 마네킹처럼 서 있던 남녀가 연기를 시작한다) 대전 근교 전문연구자가 감기가 들어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까 어머니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아나운서2] 오늘은 연휴의 첫날. 김동철씨는 우유축사를 잠시 돌아보고 온수 꼭지에서 알맞게 더운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 식탁에는 쌀밥 한 공기와 생선구이, 그리고 야채 샐러드가 놓였다. 김동철씨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고 아내는 우유를 들었다.
[아나운서1] 지난봄에 농업고등학교를 마친 아들의 방문을 두드리며 면소재지의 미곡 집하장에다 추수한 벼 30가마를 입고시켜야 할 그 날의 일거리를 부탁한 다음, 김동철씨는 차고로 갔다. 4기통승용차, 아내가 진작 운전기술을 배워두었더라면 혼자 대전에 다녀올 수 있었을 텐데 --- 하면서도 부부 동반으로 드라이브를 겸하여 딸을 찾아가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구릉 위 주택지에서 큰길로 나가는 15도 경사를 그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아나운서2] 고속도로까지는 15분 가량 걸렸다. 차선 증축공사가 한창인 하이웨이는 주말을 즐기려는 행락차량으로 줄을 이었다. 아내가 카 텔레비전의 채널을 고른다. 마침 월드컵 축구 극동지역 예선전이 이날 하오 두시부터 인천 론 그라운드에서 열리는데 그 예상을 왕년의 스타 차범근이 나와서 해설하고 있다.
[아나운서1] 그들은 한시간 정도로 대전에 닿았다. 주말이 아니었다면 10분 정도 단축되는 구간, 딸이 묵고 있는 아파트 숙소는 5층 건물, 정원 잔디밭 한가운데 샐비어가 불타듯 피어 있다.
[아나운서2] 이하 생략!
[아나운서1] 이것이 1991년의 우리나라 어느 중농 가정의 어느 날 소묘이다.
('새마을 노래'그친다)
[아나운서2] 내일의 한국, 부제 대망의 80년대. 1977년 12월 15일 초판 발행, 1978년 1월 25일 4판 발행. 백두진, 편집인 윤주영, 발행처 유신정우회. 164쪽부터 167쪽까지 인용.
(조명 바뀌면 귀빈석의 두 남자, 수사관으로 바뀌어 농부 김동철씨를 체포한다. 조명 갑자기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새마을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 웅장하게 터진다)
제2막-1974년 봄
(무대 한쪽에 부분조명 들어오면, 조명 안에서 해설자 등장)
[해설자] 각하의 사고방식은 군인답게 단순했습니다. "꼼짝마라! 움직이면 쏜다!" 그리고 움직이는 사람은 쏘았습니다. 각하는 감히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일부 불순학생들에게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계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1974년 봄, 전국의 몇 대학들은 대규모 유신반대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학생들에게는 조직적인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벼르고 있던 각하는 긴급조치 4호라는 초헌법적인 폭탄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시위에 참가해도 사형, 수업을 거부해도 사형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3월부터 중앙정보부는 한편으로 4월 위기설을 퍼뜨리면서 예비검속을 통해 학생들을 잡아다가 한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해가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일부 유인물에 편의에 따라 붙인, 이름뿐인 민청학련을 유혈 폭력혁명으로 정부전복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시나리오에 따라 그럴듯하게 연기를 시킬 주연급 배우들이 필요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4월말까지 모두 1,024명을 체포, 수사하여 그 중에서 윤보선 전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김지하 시인 등을 공범과 배후조종혐의로 구속하고 배역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청학련의 괴수로 찍은 서울대학생 이철과 서울대학원생 유인태를 현상수배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정보부는 뜻밖의 수확을 올리고 환호했습니다. 이철, 유인태를 자신의 하숙에 숨겨준 졸업생이자 반정부학생운동의 전력이 많은 여정남을 체포하여, 그로부터 과거 혁신계 인사들과 1964년도 소위 '1차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이름을 짜낸 것입니다. 시나리오는 점점 붉은색이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인민혁명당'은 그 해 봄, 이렇게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조명 바뀌면, 무대 한쪽에 취조실. 희생자의 한 사람, 책상 밑에 고문에 지쳐 쪼그린 채 쓰러져 있다. 가끔 공포와 고통으로 몸을 떤다. 해설자, 희생자 방향으로 몸을 돌리면서 수사관이 되어 취조실에 들어선다. 수사관, 손에 증거물인 노트 몇 권과 진술서 뭉치를 들고 있다)
(이하 수사 장면에 등장하는 12명의 남자는 각각 특정한 희생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이 사건으로 희생되고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을 형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극에서는 두 명의 배우가 각각 6명씩 역할을 나누어 양쪽 무대에서 연기하고, 수사관은 3명의 배우가 각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수사관 역할을 분담하여 양쪽무대를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수사관1]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어. 앞으로 대한민국 수사기관을 존경하게 될 거야. 당신, 4.19 직후에 민족자주통일 경북협의회 부위원장을 지냈군 --- 젊었을 때부터 사상이 불온했어. 먼저 말해두는데 여정남이가 벌써 다 자백했어. 도예종이 서도원이 이수병이도 다 불었어. 계속 버텨봐야 당신만 괴로울 뿐이야. 자, 민청학련에 대해 아는 대로 불어.
[남자1]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수사관1] 다시 한번 말하는데, 대한민국 수사기관을 허술하게 보지마! 당신뿐 아니야! 당신 주위가 모두 새빨갛더군 --- 당신 성의를 봐서 살려줄 수도 있고 죽여줄 수도 있어! 자, 민청학련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봐!
[남자1] 정말 나는 민청학련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수사관1] 하재완! 당신 그만큼 당해봤으면 이제 반성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아직, 모자란가?
[남자1] 정말 민청학련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수사관1] 좋아, 민청학련은 전혀 모르신다고? 그럼 이 노트는 뭔지 아나?
[남자1] ---
[수사관1] 설마, 이 노트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남자1] 압니다.
[수사관1] 누가 썼나?
[남자1] 내가 썼습니다.
[수사관1] 무슨 내용이지?
[남자1] ---
[수사관1] 시간 끌지 마! 이게 무슨 노트지?
[남자1] 북한 방송을 받아쓴 노트입니다.
[수사관1] 북괴 방송의 뭘 받아쓴거지?
[남자1] ---
[수사관1] 뭘 받아쓴 거냔 말이야?
[남자1] 조선노동당 5차 전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회 보고서입니다.
[수사관1]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 --- 그게 무슨 보고서지?
[남자1] ---
[수사관1] 김일성이 말씀을 왜 받아썼나?
[남자1] ---
[수사관1] 말해!
[남자1] 알고 싶었습니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사관1] 뭘 알아?
[남자1] 북한의 통일정책을 알고 싶었습니다.
[수사관1] 당신이 그걸 뭐하러 알아? 당신, 공산주의자지?
[남자1] 아닙니다.
[수사관1] 공산주의자도 아닌데 뭐하러 김일성의 말씀을 받아써?
[남자1] 조국통일을 생각하는 것이 공산주의입니까?
[수사관1] 너 간첩이지?
[남자1] 아닙니다.
[수사관1] 이 노트 누가 시켜서 썼나?
[남자1] 내가 혼자서 썼습니다.
[수사관1] 간첩이 아니라면서 꼭 간첩 같은 말만 하고 있어! 누가 시켰어? 그리고 누가 누구한테 보여줬나?
[남자1] 내가 혼자 했습니다.
[수사관1] 거짓말하지 마! 빨갱이 새끼!
[남자1] 난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수사관1] 그럼 뭐야?
[남자1] 난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수사관1] 개소리 하지 마! 빨갱이 새끼야! 너 수령님 뵙고 싶지? 보내줄까? 나한테 협조만 잘해주면 공화국으로 조용히 보내줄 수도 있어. 자 이 노트, 누구 지시로 작성했나? 말해!
[남자1] 지시 받은 적 없습니다.
[수사관1] 아직 몸이 편안하신 모양이야? 너 도예종이, 서도원이 알지?
[남자1] ---
[수사관1] 도예종이는 1964년에 인혁당사건으로 3년 복역했고, 서도원이는 민족민주청년동맹 위원장으로 있다가 5.16때 잡혀서 2년 7개월 간 복역한 사상전과자라는 사실 알고 있었지?
[남자1] ---
[수사관1] 서도원이, 도예종이 자주 만났지?
[남자1] 가끔 만났습니다.
[수사관1] 새빨간 놈들이야 전부 다! 이 친구들이 김일성이 말씀을 노트하라구 시켰지?
[남자1] 그렇지 않습니다.
[수사관1] 여정남이를 집에 숨겨두고 이 노트로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교양 시켰지?
[남자1] 여정남이는 아들놈 가정교사였을 뿐입니다.
[수사관1] 여정남이를 배후 조종하여 서울에 있는 이수병이에게 올려보내 서울의 운동권 학생들과 접선시켜 민청학련을 조직하고 전국적인 학생데모를 유도하여 정부를 전복시킬 모의를 했지? 도예종이, 서도원이, 이수병이, 그리고 또 누구누구야?
[남자1] 그런 일없습니다.
[수사관1] 다른 놈들은 벌써 다 불었어. 너만 버텨봐야 소용없어!
[남자1]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수사관1] (일어서며 밖을 향해 차갑게) 이 새끼 다시 지하실로 데리구 가!
(수사관1 무대 밖으로 퇴장, 각하의 역할을 준비한다. 조명 사라지면서 희생자, 뒤로 물러나며 공포의 신음소리 --- )
(무대 다른 쪽에 조명'탁상등' 떨어지면 다른 취조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가 책상을 가운데 두고 다른 수사관에게 신문을 받고 있다)
[수사관2] 이수병! 너 왜 잡혀 왔는지 알아?
[남자2] (밖으로 향하는 시선에 공포의 빛이 보인다)
[수사관2] 너 4.19 때 경희대 학생위원장이었더군. 그래서 겁없이 날 뛰다가 5.16 때 잡혀 들어가서 7년 살았지?
[남자2] ---
[수사관2] 학생 때부터 대단히 극렬분자였군 --- 너 사상이 뭐야? 오른쪽이야? 왼쪽이야?
[남자2] ---
[수사관2] 대답 안해?
[남자2] 사상이 있다면 민주주의잡니다.
[수사관2] 그래 빨갱이 새끼들이 민주주의는 더 찾지. 안 그래? 응? 어쨌든 경험이 많은 친구니까, 긴 말은 하지 않겠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게 너하구 또 누구누구야?
[남자2]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수사관2] 이거봐! 이 선생! 나두 빨리 끝내고 집에 좀 들어가 봅시다. 나 좀 도와주쇼!
[남자2] ---
[수사관2] 하재완이, 여정남이, 이철이, 유인태 잘 아시지?
[남자2]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압니다.
[수사관2] 여전히 뻣뻣하시군 --- 좋아 --- 걔네들이 다 불었어. 그러니까, 서울에서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중심이 바로 이선생이야. 안 그래? 이선생 말고 누구겠어? 다른 놈 있으면 대봐.
[남자2] 나는 민청학련과 관계가 없습니다.
[수사관2] 이 새끼 영 구제불능일세 --- 다른 놈들이 다 자백했다잖아! 민청학련 배후조종자들이 누구누구야?
[남자2] 나는 배후조종한 일이 없습니다.
[수사관2] (잠시 사이) 어이 공과장!
(조명, 사라지면 숨넘어가는 소리 간헐적으로 들린다)
(무대 중앙의 각하의 대형 사진에 조명 들어오면 각하 등장한다. 살벌한 분위기, 각하는 약간 술에 취해 있고 분노해 있다)
[각하] 부장 들어오라고 해!
[부장] (등장하여 각하에게 절하고 부동자세로 선다) 중앙정보부장, 각하의 부르심 받고 왔습니다!
[각하] 어떻게 돼가고 있나?
[부장] 문제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겠습니다. 각하!
[각하]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야. 적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게야.
[부장] 명심하고 있습니다, 각하!
[각하] 분명히 얘기하겠다. 나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부장]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각하]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 경제 건설해야지, 자주국방 해야지, 통일해야지 ---
[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각하!
[각하] 지금은 어느 때보다 국론통일이 필요한 때야! 적을 코앞에 두고도 이 나라 민족은 항상 사분 오열, 파쟁만 일삼아왔잖아! 썩어빠진 새끼들 --- 이런 국가적 중대한 시기에 정부를 반대하는 놈들은 전부 빨갱이하고 똑같은 놈들이야!
[부장] 잘 알겠습니다, 각하!
[각하] 다시는 전염병균 같은 놈둘아 이 사회를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이번에 정부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시해!
[부장] 각하의 뜻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각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마지막 한 놈까지 철저히 색출해서 씨를 말려버리겠습니다, 각하!
[각하] (술과 피로에 지친 목소리) 좋아, 이리 와!
[부장] (각하 앞으로 다가와 등을 돌려대 각하를 업는다)
[각하] (잠시 사이 부장의 등에 기대어 일본말로 중얼거린다)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 "
(조명 사라지면, 무대 한쪽에 조명(탁상 등). 다른 취조실. 수사관 두 명이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신문하고 있다)
[수사관2] 민청학련에 대해 아는 대로 써!
[남자3]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수사관2] 송상진이하구 무슨 관계야?
[남자3] 친굽니다.
[수사관2] 송상진이한테 돈 빌려줬지?
[남자3] 아들 등록금이 급하다고 해서 빌려줬습니다.
[수사관2] 얼마?
[남자3] 5만 원입니다.
[수사관2] 이거봐 송상진이가 다 자백했어.
[남자3] 등록금이 급하다고 해서 빌려줬을 뿐입니다.
[수사관2]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 송상진아가 다 불었다잖아! 임마! 니가 소상진이한테 유신반대 학생데모 자금으로 5만 원을 줬잖아! (탁상등 꺼지면서, 신음 소리. 무대 다른 쪽, 신문 소리와 함께 탁상등 조명. 수사관 한 명이 또 다른 희생자를 신문하고 있다)
[수사관1] 당신, 하재완이 잘 알지?
[남자4] 친구 형님입니다.
[수사관1] 당신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결정됐어. 아무한테나 유신헌법을 비방했다구 진술해. 이웃에 잘 가는 곳이 있나?
[남자4] 없습니다.
[수사관1] 당신은 옆집은 뭐하는 집이야?
[남자4] 복덕방입니다.
[수사관1] 잘 오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야?
[남자4] --- ..
[수사관1] (노려본다)
[남자4] 목재소 하사장 ---
[수사관1] 이름이 뭐야?
[남자4] 하진오씹니다.
[수사관1] 또?
[남자4] 블록 공장 이사장.
[수사관1] 이름?
[남자4] 이종규입니다.
[수사관1] 하나 더!
[남자4] ---
[수사관1] 빨리!
[남자4] 철공소 김종태씨가 자주 옵니다.
[수사관1] 좋아, 이 사람들한테 긴급조치를 비난했다구 씨!
[남자4] ---
[수사관1] 씨!
(탁상등 꺼지면, 신음 소리. 무대 다른 쪽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조명. 수사관 두 명이 또 다른 희생자에게 달려들며 조서를 내던진다)
[수사관3] 이 새끼! 지금까지 자백한 게 전부 거짓말 아냐? 이 새끼가 누굴 허수아비로 아나? 꿇어앉어!
[남자5]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는 묻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선량한 시민을 잡아다가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정말 대한민국이 이래도 되는 나랍니까?
[수사관3] 이 새끼가 완전히 돌았군? 선량한 시민이라고? 야 이 새끼야! 니가 선량한 시민이면 여길 왜 잡혀와?
[남자5] 저두 그걸 알고 싶습니다.
[수사관2] 이 새끼 봐라! 이걸 그냥 거꾸로 매달아놓고 콧구멍에다 고춧가루를 부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버릴까? 너 작년에 서울 법대 최교수가 여기서 자살했다는 얘기 들어봤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보여줄까? 너 똑바로 자백하지 않으면 온전히 살아나가지 못할 줄 알아! 너 이재문이, 나경일이 자주 만나지?
[남자5] ---
[수사관3] 대답 안해?
[남자5] 네 ---
[수사관2] 그 친구들하고 자주 만나서 긴급조치를 비난했지?
[남자5] 그런 일없었습니다.
[수사관2] 그 친구들하고 접촉하면서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
[남자5] 공산주의 서적이라뇨? 지금 누굴 빨갱이로 만드는 겁니까?
[수사관2] 좋아, 그럼 사회주의 서적이라구 해두지.
[남자5] 정말 이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수사관2]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각자동조 세력을 포섭하여 ---
[남자5] 아니, 여보세요!
[수사관3] 여보세요? 이 새 끼가?
[수사관2] 각자 세력을 포섭하여 학생데모에 편승하여 민중봉기를 야기시켜서 국가를 전복할 것을 모의했지?
[수사관3] 북괴의 평화통일 5개 강령을 찬양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고 민청학련과의 직간접 관련 사실을 정보수사기간에 숨김없이 고지하지 않았잖아?
(조명 사라지면, 신음 소리. 무대 다른 쪽은 고문실. 손전등 불빛 밑에 고문당하는 또 다른 희생자의 얼굴만 보인다)
[수사관1] 너 퇴근길에 광화문 근처 다방에서 김용원이를 만나 김용원이가 소지하고 있던 민청학련 관계 유인물을 함께 봤지?
[남자6](숨소리만 --- )
[수사관1] 이 새끼 왜 대답이 없어?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야 이 새끼야! 김용원이 하구 그 유인물을 같이 보면서 유신헌법을 비난했잖아!
(손전등 꺼지면, 무대 다른 쪽에서 수사관 하나가 라이터 불을 켜서 남자에게 담배를 건네준다. 라이터 불과 함께 조명 떨어지면, 또 다른 신문실. 수사관 두 명이 남자 하나를 신문하고 있다)
[수사관3] 이수병이, 우홍선, 이성재하구는 어떤 관계야?
[남자7] 오래 전부터 압니다.
[수사관3] 친구야?
[남자7] 그렇습니다.
[수사관3] 친구라면 사상적으로도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이란 말이지?
[남자7] 네?
[수사관3] 좋아, 충무로 지다방에서 세 사람과 몇 차례 모여서 유신헌법을 비방한 사실이 있지?
[남자7] 네? 나는 유신헌법을 지지하지도 않지만 개인적으로 비방하고 다닐 처지도 못됩니다.
[수사관3] 우홍선이하구 이수병이가 벌써 자백했어. 민청학련을 지원하여 이 정부를 전복시킬 것을 모의했다구 자백했어.
[남자7] 그럴 리가 없습니다.
[수사관3] 그럴 리가 없다구? (사이) 담배 꺼!
(조명 사라지면 무대 다른 쪽에 탁상등 켜진다. 또 다른 신문실. 수사관 하나가 남자 하나를 신문하고 있다)
[수사관1] 하재완이 알지?
[남자8] 모릅니다.
[수사관1] 이 노트 본적 있지?
[남자8] 무슨 노트요?
[수사관1] 김일성의 연설을 기록한 노트야! 봤잖아?
[남자8] 누굴 공산당 만들려고 이러십니까?
[수사관1] 하재완이 아들 방에서 여정남이와 함께 바둑을 두면서 노트를 탐독하고 북괴 노선에 동조하여 인혁당에 가입했지?
[남자8] 하재완이구, 노트구, 인혁당이구 난 모릅니다!
[수사관1] 몰라? 그럼 이 노트 외워! (남자의 머리를 노트에 대고 짓누른다) 외워!
(조명 사라지면 신음 소리. 무대 한쪽에 손전등 불빛. 지하실)
[수사관2]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니까 협조를 해! 너는 한 일년만 고생하면 나갈 수 있어.
[남자9] (거친 숨소리)
[수사관2] 인혁당 조직원으로 포섭됐다구 시인해!
[남자9] 못합니다!
[수사관2] 날인해!
[남자9] 못해
(손전등 꺼지면 우당탕 소리와 비명 소리. 무대 다른 쪽에 조명 떨어지면 또 다른 신문실. 수사관 두 명과 남자 하나)
[수사관1] 서도원이, 도예종이 알지?
[남자10] 모릅니다.
[수사관1] 기억나게 해줄까?
[남자10]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해냅니까?
[수사관1] 그럼 이수병이나 우홍선이가 그 사람들이 훌륭한 분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은 있지?
[남자10] 그런 말도 들은 적 없습니다.
[수사관1] 이수병이 진술서에는 당신도 함께 서도원이와 도예종이를 지하당 지도위원으로 추대했다고 했는데.
[남자10] 그렇게 진술했을 리가 없습니다. 자꾸 이러시지 마시고 대질시켜주십시오.
[수사관1] 당신 건강 상태로 봐서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야.
[남자10] ---
[수사관1] 자 받아써! 우리는 인혁당과 유사한 지하당을 조직했다!
[수사관3] 받아써!
(조명 사라지면 무대 다른 쪽에 또 다른 신문. 수사관 하나와 남자 하나가 실루엣으로 보인다)
[수사관2] 서도원이, 도예종이. 송상진이하고 몇 명은 벌써 사형으로 내려왔어. 나머지 몇 명은 무기 야. 자 이제 다 끝났어.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야. 몸이나 편한 게 낫지.
[남자11] (꿈틀거리는 실루엣)
[수사관2] 우홍선, 이수병, 전창일과 함께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수 차례 다방과 술집에서 만나서 과 거의 인혁당과 같은 비밀 지하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모의했다.
[남자11] ---
[수사관2] 어느 날 네 사람이 시내 모다방에서 만나서 정세를 논의하던 중 우홍선이가 평양방송에서 이남 학생들이 유신반대 데모를 했다고 보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11] ---
[수사관2] 이수병, 우홍선, 전창일과 4인 지도부를 결성하고 4인 지도위원의 한 사람인 이수병이가 여정남을 접촉하여 유신반대 데모를 조종하고 그 경과를 4인 지도부에 보고하였다.
[남자11]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내가 공산주의자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조명은 그대로 두고 정지동작. 무대 다른 쪽에 조명 들어오면 남자 하나를 앉혀두고 수사관 두 명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수사관1] 나는 하재완에게 대남 방송을 청취하여 기록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습니다.
[남자12] ---
[수사관1] 나는 경북대 데모를 주동해온 여정남이를 상경시켜 이수병이에게 인계, 유신헌법 반대투쟁 단체인 민청학련을 결성케 한 사실이 있습니다.
[남자12] --- ---
[수사관`] 나는 도예종과 함께 과거의 인혁당과 같은 지하 공산조직의 지도위원으로 추대된 사실이 있습니다.
[남자12] ---
[수사관1] 나는 민중봉기로 현 정부가 전복되면 혁신계와 학생, 지식인. 종교인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점차 통일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을 이수병, 우홍선이와 합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남자12] --- ---
[수사관1] 다 썼으면 지장 찍어!
(수사관 하나가 남자의 손을 들어 지장을 눌러준다. 전체조명, 서서히 사라진다. 암전 되면서 아이들 소리 들린다)
[아이들] 간첩이래요! 간첩이래요! 간첩이래요! 간첩이래요!
[아이1] 야, 니네 아빠 간첩이지?
[아이들] 철이 아빠는 간첩이래요! 철이 아빠는 간첩이래요!
[아이2] 간첩 새끼 잡아라!
[아이] 잡아라! 잡아!
[아이2] 그쪽으로 도망간다! 잡아라!
(암전 속에서 부분조명 들어오면 희생자의 부인,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
[아이1] 알았다 오바!
[아이2] 오른쪽이다! 포위하라!
[아이1] 이쪽으로 오고 있다!
[아이2] 간첩 새끼야!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귀순하라! 귀순하라!
[아이1] 반항하면 가차없이 사살한다!
[아이2] 불안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아이1]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아이2] 꼼작마! 움직이면 쏜다!
(아이 하나가 두려워하며 쫓겨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운다)
[부인] 인혁당은 조작입니다. 인혁당은 고문으로 조작해낸 겁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지금 당장 저를 고발하세요. 믿어주시겠다면 제발 다른 열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그 열 사람이 다른 열 사람에게 전하고, 또 그 열 사람이 다른 열 사람에게 전하면 인혁당이 조작이라는 사실을, 억울한 사람들이 고문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겠죠. 그래서 박정권의 조작음모를 만천하에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면 차마 박정희도 생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겠지요. 내 남편은 1964년도에 6.3데모 배후로 이 정권이 조작해낸 소위 인민혁명당사건에도 관계되어 집행유예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시찰 인물로 10년 동안을 감시 속에 살아왔습니다 10년전 그때도 인혁당은 학생데모의 주동자를 때려잡기 위해 조작했다는 여론이 분분했습니다. 담당 검사들이 기소가치가 없다고 하여 잡아넣으라는 상부의 추상같은 명령에 맞서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습니다.
10년 전 그때도 내 남편은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살점이 튀고, 피를 토하면서 몇 번씩 죽었다 살아나 는 상상할 수 없는 지옥을 겪고 나왔습니다. 지금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은 당시 중앙정보부 담당자였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검찰총장이었습니다. 10년전 고문으로 인혁당을 조작해냈던 바로 그 장본인들이 10년 후 오늘. 또다시 고문으로 인혁당을 조작해내고 있습니다.
(조명 천천히 사라진다)
제3막 --- 1974년 봄부터 다음해 4월 9일까지
(무대 한쪽에 부분조명 떨어지면 해설자가 조명 안에 들어선다)
[해설자] 각하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소위 인혁당 관련자들은 40여 일간의 혹독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19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반공 법위반, 내란 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은 6월 15일부터 시작하여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약 10개월에 걸쳐 완전히 통제된 상태에서 비공개, 분리신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각하는 저항세력에 대한 무아책으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자들과 함께 석방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재판정에서는 강신옥 변호사 재판 자체를 사법살인이라고 선언하여 변론 도중 구속당하는 희귀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인혁당 관련자들의 형량은 3심을 거치는 동안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재판은 그저 완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정찰제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도 각하가 이들을 정말로 죽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해설자의 조명 사라지면서 (나의 조국) 이 우렁차게 울리면 무대 전체에 조명 환하게 들어온다. 무대는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정. 검찰관, 정리, 피고가 덧마루 위에 있고, 가족들이 아래 무대에 앉아 있다. 음악과 함께 재판장(각하)이 등장한다. 정리는 서기, 장관의 역할 겸한다. 재판장, 검찰관, 정리는 방역작업 요원처럼 마스크와 고무장갑을 착용했다)
[정리] 기립!
(재판관이 자리에 앉으면 음악 서서히 사라진다)
[정리] 착석!
[재판장] 비상보통군법회의를 개정한다. 이 재판은 국가안보에 관련된 중대한 재판이므로 국가안보상 의 이유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제한 하에 재판절차를 시행한다.
[정리] 첫째, 반국가사범들이기 때문에 상호 접촉할 경우 위증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재판 과정을 공개하지 아니하며 관련자 전원에 대한 재판은 분리신문으로 진행된다. 둘째, 선량한 증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검찰측 증인에 대한 피고인측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금지한다. 셋째, 법정이 협소한 까닭에 피고인의 가족은 한 사람만 방청을 허용한다. 넷째, 반국가사범 들인 관계로 피고인측의 증인신청은 허용하지 않는다. 다섯째, 외신기자는 법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 용을 잘못 이해하여 전달할 위험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방청을 제한한다. 여섯째, 재판 기록은 국가기 밀에 속하므로 공개하지 않는다.
[검찰관] (일어나 신문을 시작한다) 피고인은 일자 불상, 시간 불상, 옥호 불상의 시내 번화가 다방에서 동인들과 수 차례 회합하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영구집권과 국민탄압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비방한 사실이 있지요?
[피고] 모든 국민이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리] (동시에) 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수 차례에 걸쳐 비난한 사실이 있습니다.
[검찰관] 피고인은 일자 불상, 시간 불상, 옥호 불상의 시내 변화가 술집에서 동인들과 수 차례 회합하고, 정부 전복의 중심체가 될 전국적 조직인 민청학련을 결성하도록 배후조종하고 이를 통해 폭력봉 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킬 것을 합의한 사실이 있지요?
[피고]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정리] (동시에) 네, 그런 내용의 합의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검찰관] 피고인은 일자 불상, 시간 불상, 옥호 불상의 시내 번화가 다방에서 동인들과 수 차례 회합하고 정세를 논의하던 중, 평양방송에서 남조선 학생운동이 애국적 기사라고 보도하는 것을 청취하고 동인들에게 설명하니까 모두 함께 끄덕이며 "옳은 말이야" 하고 긍정한 사실이 있지요?
[피고]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정리] (동시에) 네,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검찰관] 피고인은 일자 불상, 시간 불상, 옥호 불상의 시내 번화가 다방과 술집에서 동인들과 수 차례 화합하고, 시급히 흩어진 혁신계 세력들을 규합하여 과거 인혁당과 같은 비밀조직을 구성하고, 이 조직을 통해 투쟁대열을 정비하여 대정부투쟁을 전개하고자 합의하고 국가건설을 모의한 사실이 있지요?
[피고] 유신치하의 다방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 번화가 다방 안에서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검찰관] (소리를 지른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부인1] (분노하여 주먹을 쥐고 일어서서 관객에게 돌아선다. 호소하듯, 구원을 청하듯 관객을 향한다)
[정리] 네, 그런 내용의 모의를 한 적이 있으나 표현이 약간 다릅니다.
[검찰관] 피고인은 일자 불상, 시간 불상 옥호 불상의 시내 번화가 술집에서 동인들과 수 차례 회합하고, 비밀조직을 재건함에 있어서 혁신계와 인혁당원을 중심으로 조직하고 이상적으로 이념이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포섭한다. 동지들의 조직은 점조직으로 하고, 동조직은 상호연락을 중단한다. 동조직은 4인 지도부에서 조종운영한다, 동조직은 지도위원으로 서도원, 도예종을 추대한다고 결의하고 반국가 단체를 구성하여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사실이 있지요?
[피고]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정리] (동시에) 네, 그런 단체를 구성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인2] (분노하여 떨쳐 일어선다. 소리를 지를 듯, 지를 듯, 관객을 향해 울부짖는 듯 ---
[검찰관] 이 진술서는 피고인이 자필 진술한 것이 맞습니까?
[피고] 나 --- 는 --- 고문을 당했습니다.!
(재판장, 정리 벌떡 일어서고, 가족들 피고를 향해 돌아선다. 피고의 눈이 가족을 향한다)
[피고] 고문에 지쳐 횡설수설하는 상태에서 진술서의 내용도 읽어보지 못하고 강제로 지장을 찍었습니다!
[검찰관] 당신! 정말로 고문을 받았으면 그따위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진짜 고문을 당하지 못해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야!
(가족들 분노하여 검찰관에게 달려들 듯)
[피고] 나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나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과 공포 속에서 사전에 작성된 각본대로 받아쓰게 하고 강제로 날인하게 했습니다!
(조명 사라지면 장관에게 부분조명)
[장관]인혁당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항간의 말이 있어서 조사를 해본 결과, 고문이 행해지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고문은 있어서도 안되며, 결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 본인의 소신입니다. 이번 조사에 의하면 고문이 없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심증이 가며 또 논리적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시 조명 무대 전체에 올라오면,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장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개정한다)
[검찰관]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들 피고인들은 평소 공산주의 사상을 소지한 자들로서 내란모의 직전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며, 행동화하기 직전에 구속되었기 때문에 동조자가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
[부인1] (검찰관의 대사를 자르고 객석에 대고 호소한다) 이번 재판은 사실, 비밀재판하고 똑같습니다. 증거 조사나 증인 채택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족도 한 사람씩밖에 못 들어가는 재판정에서 내 남편이 억울하게 정치적 제물이 되고 있다는 생각만 들뿐입니다. 재판정에서 (나는 무죄다! 검찰에 넘어와서까지 고문을 당했다!) 고 남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증거도 없고 공소사실은 전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는데도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하여 사형, 무기라는 엄청난 형을 받았을 때 아내의 심정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남편들은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첩노릇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꼭 우리 남편을 죽여야만 이 나라가 잘되는 것입니까?
[검찰관] (약간 높은 톤으로)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들 피고인들은 평소공산주의 사상을 소지한 자들로서 내란모의 직전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며, 행동화하기 직전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동조자가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피고인 각자의 진술을 들어보면 무죄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고를 밟아 올라가면 종점은 하나입니다. 중앙정보부 조서나 경찰조서나 자필 진술서나 증거물로 제시된 서적들조차도 모두 공산주의 서적들뿐이라는 사실을 유의하시고 판결해주시기 바랍니다.
[성직자] (대사를 자르며 관객에게) 인혁당이라는 말은 피고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당국이 발표한 것입니다. 정보부는 각본과 도표를 미리 작성해 놓고 그것에 맞추기 위해 고문을 했고 피고인들은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 내지 허위 진술서를 썼다는 것이 상고이유서와 법정진술에서 밝혀졌습니다. 법정에서도 피고인들은 자유로운 진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인혁당은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의혹은 풀기 위해 공개된 민간법정에서 재판을 다시 해야 합니다!
(이하 부장, 성직자, 부장, 각하 대사까지는 조명 변화로 재판 장면 중에 삽입한다)
[부장] (검찰관이 역할을 바꾼다) 오글 목사!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오!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소! 우리는 공산당을 박멸해야 한단 말이오! 우리가 그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을 거요! 당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성직자] 나는 단지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부장] 잔소리말고 당장 이 나라를 떠나시오!
[각하] (재판장이 역을 바꾼다) 인혁당은 세상이 다 아는 공산주의자들입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일부 인사들이 뻔히 알면서도 날조를 하느니, 올가미를 씌웠느니 하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정부를 뒤집어엎어도 공산당만 아니면 죄가 안 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합법 정부를 뒤집어엎는 것은 어느 나라 법에도 극형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아니어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이 사회가 석방운동을 하고 애국자 대우를 하고 동정을 하고 있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말로 해서 못 알아들으면, 법대로 처벌하겠습니다.
(각하, 자리에 앉으면 자동적으로 재판장으로서 역을 바꾸고 무대는 비상고등법회의 계속)
[검찰관] 피고인은 대한민국 헌법인 유신헌법을 반대하여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하였고, 이 정권이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학생데모를 주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인과 회합하고, (성직자, 검찰관의 대사와 동시진행으로 다음 대사를 시작한다)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여한 행위 사실의 전부를 숨김없이 수사정보기관에 고지하여 아니하여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를 위반하였고, 인민혁명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부인2 역시 동시진행으로 다음 대사를 시작한다) 구성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고, 민청학련을 지원하여 정부를 전복시킬 것을 음모해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고, (부인1 역시 동시진행으로 다음 대사를 시작한다) 인민혁명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여 국가전복을 기도했으므로 내란을 예비 음모하였고, 북괴방송을 듣고 기록하며, 북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여 반공법을 위반했습니다.
[성직자] (동시진행. 관객을 향해) 우리 성직자들은 왜 정부가 인혁당사건의 내용을 국민 앞에 소상히 밝히지 못하는지, 더욱이 왜 공개재판을 회피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계기관과 성직자, 재야인사 공동으로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의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사건의 진상과 고문에 대한 조사를 하게 해야 합니다!
[부인2] (동시진행. 관객을 향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세칭 인혁당재건에 묶여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아내입니다. 저희들은 정부와 국민에게 제발 남편을 이대로 죽이지 말고 공명정대한 재판을 해주실 것을 호소 드립니다! 대법원 법관 여러분께 양심과 법의 정신에 입각해서 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을 호소 드립니다.
[부인1] (동시진행. 관객을 향해) 인혁당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해 민청학련을 배후 조정했다는 것은 공소사실에도 없는 것으로 저희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1964년도의 인혁당사건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반국가단체의 존재를 증명해내지 못한 어설픈 정치적 조작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석방학생들의 주장과 국민의 의혹을 공개재판을 통해 떳떳이 밝혀주십시오!
(동시진행의 대사들 모두 사라지면 마치 비명처럼) 우리 남편들의 생명을 구해주십시오!
(갑자기 정리가 책상 밑에서 핸드마이크를 들어올려 공습경보 사이렌을 울린다. 조명 전체가 깜빡거리며 위협한다)
[민방위] (정리가 역을 바꾼다) 여기는 민방위 본부! 여기는 민방위 본부! 국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국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22시 현재 훈련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22시 현재 훈려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지금 대규모 적기 편대가 서해 상으로부터 서울 상공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등화관제를 실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등화관제를 실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조명 완전히 없어지면 어둠 속에서 민방위 요원들 목소리. 민방위 요원 목소리는 재판장과 정리가 한다)
[소리1] 거기! 불꺼요!
[소리2] 거기! 뒤에 불꺼요!
[소리1] 불끄쇼! 불꺼요! 협조합시다!
[소리2] 거 꼭대기 불 안 꺼?
(무대 한쪽에 조명 들어오면 정보부의 어느 방, 연행되어 온 희생자의 부인이 수사관의 위협과 회유에 시달리고 있다)
[수사관3] 이거 봐요, 당신이 뭘 안다구 조작이니 뭐니 하구 싸돌아다니는 거요? 오늘 내보내 줄 테니까 다시는 그런 소리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여기다 각서 써요.
[부인] 나도 처음엔 내 남편이 나도 모르게 밖에서 무슨 잘못을 했으니까 잡혀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판에 가보니까, 내 남편은 무죄고 인혁당은 조작이라는 걸 분명히 알았어요. 난 그런 각서 못써요!
[수사관3] 당신 무슨 증거로 그런 소리 하는 거요?
[부인1] 10년 전에도 없었던 인혁당을 재건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도대체 우리 부인네들을 이렇게 잡아다가 며칠씩 잠도 안 재우고 이년 저년 욕까지 해가면서 강제로 각서를 쓰라고 하는 것부터가 이상해요!
[수사관3] 누가 욕을 했다고 그래? 하여튼 사건이 사건인 만큼 당신들이 남편 구명한답시고 떠들고 다니면 북괴도 같이 떠들게 뻔한데 그렇게 되면 당신 남편이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부인1] 아무도 우리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데모도 하고 호소문도 낭독했어요. 눈앞에서 내 남편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아내가 구명운동도 못한다는 법이 있습니까?
[수사관3] 하여튼 앞으로는 목요기도회에도 안 나가고 성당에도 안 나간다고 각서 써요. 정 가고 싶으면 동네 교회나 가서 기도나 해요.
[부인1] 못 써요!
[수사관3] 써! 당신 각서 안 쓰면 여기서 못 나가!
[부인1] 내 남편이 간첩이라고 인정하는 각서를 내가 어떻게 써? 난 죽어도 못 써!
[수사관3] 이 여자가 ---
[부인1] 마음대로 해요! 여기서 내 남편이 그 끔찍한 고문을 당했나요? 당신이 했나요? 당신이 내 남편을 죽도록 고문해서 그 무서운 중죄인으로 만들었나요?
[수사관3] 이 여자가 제정신이 있나?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부인1] 왜?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수사관3] 간첩이 "난 간첩이요"하고 다니는 거 봤어? 마누라도 모르는 게 간첩이야! 당신 남편은 재판정에서 자기 입으로 공산주의자라고 시인했어.
[부인1] 뭐라구요? 나도 재판에 갔지만 그런 소리를 들은 적 없어요!
[수사관3] 자 --- (서류를 들고 읽는다) 과거 인혁당과 같은 공산비밀지하조직을 구성하여 폭력봉기를 일으켜 정부 전복을 음모한 사실이 있지요? 네,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부인1] 뭐라구요? 아니, 뭐라구요? 시인했다구요? 아니, 그게 뭐예요?
(부인은 공판 기록조차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부인1] 뭐요? 공판 기록이라구요? 어디 봐요!
[수사관3] (당황해하며) 이 여자가 왜 이래?
[부인1]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내 남편은 재판정에서 모든 것을 부인했어! 왜 부인한 것이 시인한 것으로 바뀌어 있지요? 당신들 공판 기록까지 조작하는 거예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하늘이 무섭지 않아요? 정말 이럴 수가 있어요? 안 돼!
[수사관3] 야! 이 여자 끌고 가!
(조명 사라지면, 민방위 요원들 목소리)
[소리1] 불꺼요!
[소리2] 불끄쇼! 불꺼요!
[소리1] 거 정말 드럽게 말 안 듣네! 거기 불 안 꺼?
[소리2] 협조합시다! 불꺼요!
(무대 전체에 조명 들어오면 대법원, 아래 무대의 가족들, 성직자, 모두 퇴장해 있고, 무대 한쪽에 피고, 무대 중앙에 재판장, 무대 다른 쪽에 검찰관과 정리가 앉아 있다)
[재판장]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시작한다. 피고들의 상고는 이를 모두 기각한다. 피고인 서도원, 동 도예종, 동 여정남을 각 사형에, 동 김용원, 동 우흥선, 동 송상진, 동 나경일, 동 강창덕, 동 이태환, 동 유진곤을 각 무기에, 동 김종대, 동 조만호, 동 정만진, 동 이재형을 각 징역 20년 및 가격정지 15년에, 동 전재권, 동 황현승, 동 이창복, 동 임구호를 각 징역 15년 및 가격정지 15년에, 동 장석구를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에 처한다. (망치 소리)
(전체조명, 피고인석만 남기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검찰관과 정리 역의 배우가 형 집행관이 되어 피고인석으로 다가가 피고인 뒤에 선다. 피고인석 조명, 아주 서서히 사라지면서 집행관 하나가 용수를 꺼내 피고의 머리에 씌우고, 용수의 목 부분에 끈을 맨다. 조명 계속 아득하게, 관객이 스스로 죽어 가는 것처럼 느낄 만큼 서서히 사라진다)
(조명이 거의 사라질 때, 철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들 거의 동시에 터진다)
[소리1]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어!
[소리2] 안 돼!
[소리3] 여보! 여보!
[소리1] 이놈들아! 이럴 수가 없어! 여보!
[소리2] 이 천벌을 받을 놈들아!
[소리3] 안 돼! 안 돼! 나를 죽여라! 나를 죽여!
(무대 한쪽에 부분조명 떨어지며)
[부인1] 잡혀가신 날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일년이 넘도록 면회 한번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재판 때 겨우 남편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 있었을 뿐 --- 사형을 잡행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구치소로 달려갔습니다. 일반인은 얼씬도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시신을 성당에 모시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방해해서 저녁 6시쯤에나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시신을 살펴보니 손톱, 발톱 모두가 새카맣게 타고, 발뒤꿈치와 발등에 까맣게 자국이 있었습니다. 정치의 제물이 되어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처참하게 돌아가신 남편과 함께 저도 그때 죽은목숨입니다. 그 날부터 제 눈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밥만 처먹고 꿀꿀거리는 돼지 새끼들로만 보였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억울하게 짓밟혀 죽어 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고만 있었습니다.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다고 그렇게 거리에서 외쳐대고 울부짖어도 그저 못 들은 척,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나 있었습니다.
(부인 조명 사라지면, 무대 위쪽에서 영사막이 내려오고 그 옆 해설자에게 부분조명 떨어진다)
[해설자] 대법원 확정판결은 4월 8일 오후 2시에 있었습니다. 같은 날, 오전 10시쯤 육군대령 하나가 구치소에 나타나 구치소 보안과장에게 사형장 청소를 지시했습니다. 사형장은 처형이 있기 하루 전에 청소를 해두는 관례가 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시작되기도 전에 인혁당 관련자들을 처형시킬 사형장은 준비를 끝내고 있었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린 지 15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다음날, 1975년 4월 9일 새벽 5시부터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처형이 시작되었습니다.
(해설자에게 떨어진 조명 사라지면서, 희생자 및 피해자 24명의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해설자] 서도원, 당시 51세, 4.19직후 민민청위원장, 침술업,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도예종, 당시 50세, 1964년 인혁당으로 3년 복역, 삼화건설 회장,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하재완, 당시 42세, 4.19직후 민자통 경북지부 부위원장, 건축업,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이수병, 당시 36세, 4.19직후 경희대 학생위원장, 학원 운영,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김용원, 당시 39세, 경기여고 교사,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우홍선, 당시 44세, 예비역 육군대위, 골든슬탬프사 상무,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송상진, 당시 46세, 양봉업,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여정남, 당시 29세, 경북대 졸업생, 사형, 1975년 4월 9일 처형.
전창일, 당시 46세, 극동건설 외공부장, 무기.
김한덕, 당시 42세, 블록 제조업, 무기.
나경일, 당시 43세, 염소 사육, 무기.
강창덕, 당시 46세, 전 대국매일 기자, 무기.
이태한, 당시 48세, 측량설계사, 무기.
유진곤, 당시 37세, 대산목재 운영, 무기.
이성재, 당시 50세, 대학강사, 무기.
이상 일곱 분은 1982년 12월 24일 형집행정지로 출소.
김종대, 당시 37세, 학원 운영, 징역 20년.
황현승, 당시 39세, 광신상고 교사, 징역 15년.
이창복, 당시 36세, 대학강사, 징역 15년.
전재권, 당시 46세, 옷감 도매업, 징역 15년.
조만호, 당시 39세, 서점 운영, 징역 20년.
정만진, 당시 34세, 목욕탕 운영, 징역 20년.
이재형, 당시 35세, 전파사 운영.
임구호, 당시 31세, 경북대 졸업생, 징역 15년.
이상 여덟 분은 1982년 3월 3일 형집행정지로 출소.
장석구, 당시 46세, 공예공장 운영, 징역5역,
고문후유증으로 1975년 10년 15일 옥사.
전재권씨와 유진곤씨는 복역중 얻은 질환으로
1986년 7월과 1988년 7월에 작고하셨습니다. (사이)
[해설자] 1989년 12월 24일, 사건 15년 만에 정부는 사실상의 정치거래로 처형당하신 여덟 분과 옥사하신 한 분을 제외한 열다섯 분 모두에게 '잔여형기면제'라는 사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들에 대한 전면적인 복권과, 완전한 인간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우리는 벌써, 그분들의 이야기를 마치 꿈속의 일인 것처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무참한 폭력의 정신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슬라이드 사라지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