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McGeary의 Farinelli in Madrid: Opera, Politics, and the War of Jenkins' Ear ,위키페디아 영문판의 관련부분을 번역하고,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음악의 유산>2권,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 중 헨델 부분(집필자:Anthony Ford)을 박영철 목사께서 정리하신 자료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넬리 유해에 대해서는 텔레그라프지 기사와 한 병리학자의 블로그와 한 인류학자의 블로그의 내용을 번역했습니다. 파리넬리 1730년
파리넬리 1750년
파리넬리 1755년
18세기 영국에서 어떤 오페라 가수도 카스트라토 가수인 카를로 브로스키, 파리넬리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없다.
공중은 그의 노래에 환희에 찬 환호를 보냈으니, 파리넬리는 전설적인 급여를 받았으며, 그의 팬들은 휘황찬란한 선물을 바쳤으니, 이는 그의 명성의 징표이며, 이는 Owen Swiney가 그를"blazing star."로 묘사한 것이 정당한 평임을 증명한다.
그가 영국에 오자마자 쏟아진 그를 기리는 시와 찬사, 희곡, 노래, 책자들은 그가 온 영국에서 각계각층에서 명성을 어느 정도 누렸는지 보여준다.
파리넬리는 첫 오페라계 슈퍼스타라고 칭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단지 3 시즌 만에, 1737년 가을에 런던의 휘황한 사회는 파리넬리가 영국을 떠나 마드리드로 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 (중략)
파리넬리는 1734년 10월에 런던에 도착했으며, "고귀한 사람들의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 ”을 위해 일하러 왔다. 이는 헨델의 오페라단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왕세자 전하, 프레데릭 웨일즈 태공이 Opera of the Nobility를 세우신 것은 부왕 조지2세 전하와 극도로 사이가 나빴던 세자가 부왕이 총애하는 헨델을 타도하려 하시는 뜻이 있었다. 후에 세자는 부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서, 세손이 위를 이으니, 그가 조지 3세 전하이시다.) 영국에서의 파리넬리의 위상은 한 여성 팬이 - 레이디 Rich가 한 말이라고도 한다- 한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알 수 있으니, "One God! One Farinelli."
이 발언은 1735년 3월14일자 Prompter신문에 처음 보도된 이래,파리넬리의 여성 팬들의 숭앙을 묘사한 시들과 풍자시들에서 즐겨 인용되니, 주로 이 여성들을 꾸짖는 의도로 쓰였다고 할 것이다.
그럼 돈 얘기가 나오므로 당시 영국의 화폐가치에 대해 살피면,
* 12 페니= 1 실링 * 20 실링 = 1 파운드 * 21 실링 = 1 기니 * 5 실링 = 1 크라운
18세기 대부분의 기간에 1실링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었다.
비숙련 노동자는 1주에 15실링을 벌었다.
시골에서 농업노동자는 더 적은 소득을 얻었으니, 농촌 노동자는 하루에 1실링을 벌면 스스로 감동했다.
그러니 서민이 1년에 버는 돈은 1년에 200파운드를 크게 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The Value of Currency in Eighteenth Century England." 123HelpMe.com. 21 Feb 2013
파리넬리의 경력의 절정기는 그의 첫 개인수익콘서트( benefit concert란 오페라 극장이나 연주단체와 미리 약정된 임금만 받는 음악가들이 그 임금 외에 순전히 자신의 몫을 챙길 기회를 주기 위해 허용되는 것이다.)였다. 이는 1735년 3월 15일 이었으며, (하세의 ) Artaxerxes공연이었다. 이는 1734-1735년 시즌의 마지막 공연이기도 했다.이 공연이 있기 전에도 그가 후원자들에게서 받은 엄청난 선물들에 대한 보고가 있다.
1735년 3월 13일자 Daily Advertiser 신문에서는 왕세자 전하의 선물 200기니, 레이디 Rich의 20기니 등을 열거하며, 그 선물들의 가치는 2000파운드에 달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1735년 3월 14일자 Prompter 신문은 파리넬리가 받은 선물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이를 휘황찬란함의 절정으로 묘사하며, 30기니 가치가 있는 금제 코담배갑에 든 50파운드 수표가 들어간 것(즉 1680실링이 되니, 농촌 노동자의 1680일치 임금이 되겠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제 핀셋, 한 장에 5기니(105실링이니 농촌노동자의 105일치 임금에 상응하는 액수) 하는 입장권 등을 열거하며, 그 시즌에 파리넬리가 얻은 수익은 4000파운드 ( 80,000 실링으로 농촌 노동자의 8만일 치 임금에 상응한다.)에 이를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웨일즈 대공, 왕세자 프레데릭 전하가 첼로를 연주하시는 모습
1713년 대영제국
1746년 대영제국
1763년 대영제국 1815년 대영제국
1735년 The Political State of Great Britain 4월호는 이 선물 목록들을 다시 정리하고 그 시즌에 파리넬리는 최소 4000파운드에서 5000파운드를 벌었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그 공연 후에 왕세자 전하가 다시 파리넬리에게 다이아몬드와 루비들이 박혀 있는 금제 코담배갑, 다이아몬드로 된 두쌍의 무릅띠 버클, 100기니가 든 지갑을 수여하셨다는 신문기사가 있다.
하세Hasse의 오페라: [아르타크세르세스 Artaxerxes] 중 Pallido Il Sole
한편 파리넬리가 영국에 올 당시에는 헨델이 영국에 이미 뿌리를 내린 뒤였다.
영국 국왕 조지 1세가 서거하기 전 마지막으로 처리한 국사 중 하나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에게 영국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에게 아들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도록 위촉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국왕이 특정 외국인 개개인 별로 영국인으로 귀화시킨다는 어의를 표하면, 국회는 그 특정 외국인에게 영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켜야 외국인이 영국인이 될 수 있었다. 조지1세가 서둘러 헨델에게 영국 국적을 부여한 것은 외국인이 영국국왕의 대관식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의회 법률인덱스에서 "조지 프레데릭 헨델 시민권 부여 법안"
25세 시절의 헨델
1720년경 30대의 헨델
42세의 헨델
68세의 헨델
1727년에 헨델은 조지 2세의 대관식에 사용될 4곡의 앤덤 ( 영어 가사로 된 영국 국교회 종교 음악)을 작곡하니, 그 중의 하나는 Zadok the Priest이며,이 곡은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의 모든 중요행사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 기념제에서 Zadok the Priest
1728년에 John Gay의 [거지 오페라]가 Lincoln's Inn Fields Theatre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고, 62회 연속공연이라는 당시까지의 최장 흥행기록을 세운다.
[거지 오페라]의 포스터
Queen's Theatre 또는 King's theater at the Haymarket (현재의 Her Majesty's Theatre)는 1705년에 건축가이자 희곡작가인 John Vanbrugh의 설계로 1705년에 건설된 극장으로 곧 오페라 극장으로 개조되었고, 헨델은 1711년에서 1739년 사이에 25편 이상의 그의 오페라를 여기서 초연한다. 1729년에는 헨델은 John James Heidegger와 극장의 공동 경영자가 된다.
헨델의 아성
1709년경 리허설 장면
1724년 Queen's Theatre 또는 King's theater at the Haymarket에서의 무도회
극장 내부
1782년 개조공사를 위해 만들어진 도면
1792년에 재건축된
헨델은 이탈리아로 가서 7명의 새 가수들을 영입해 오고, 그는 7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한다. 그러나 공중은 음악을 들으러 온다기 보다는 스타 가수의 공연을 보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헨델은 이 시기에 [에스터]와 [데보라] 두 편의 영어 오라토리오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그 돈으로 남해 회사에 투자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남해의 거품’이라고 불려지는 영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금융 스캔들로 온 나라를 진동시킨 이 회사의 붕괴로 …. ) 헨델은 이 무렵 [아시스와 갈라테아]를 개작하였고, 이는 남해회사의 타격에서 그가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에스터] 중 '주여 우리 적들을 다 베었나이다.The Lord our enemy has slain'
[아시스와 갈라테아] 중 '행복한 우리 happy we'
1733년 1월부터 롤리와 세네시노가 이끌던 헨델의 적대자들은 세자 전하,즉 웨일즈 대공 프레데릭을 필두로 하는 귀족들과 모임을 가졌다. “고귀한 분들의 오페라단”은 세네시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가수들을 끌어들여 헨델 밑에는 단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그리고 니콜라 포르포라가 새 가극단의 음악감독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헨델은 “고귀한 사람들의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가 영입한 요한 아돌프 하세, 니콜라 포르포라와의 경쟁에서 패하고 만다. 그들은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를 영입한 것이다. (파리 넬리의 사부는 포르포라였기에 파리넬리는 사문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하세
포르포라
“고귀한 사람들의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은 왕세자 프레데릭 웨일즈 대공이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부왕 조지 2세는 헨델을 응원하고 있었으니…..
헨델은 급히 가수를 모아 1736년 1월에 《크레타의 아리아드네》의 공연을 기획했다.
포르포라는 헨델의 뒷통수를 쳐서 그보다 한발 앞서 자작의 《낫소의 아리아드네》를 링컨즈- 인-필즈 극장의 무대에 올렸다.
또한 1733년의 《그리젤다》 재공연에 맞서고귀한 분들의 오페라단”은 헨델의 “Royal Academy of Music” 시절의 동료로 한 때 헨델보다 더 인기가 높았던, 보논치니의 성공작 《아스타르토》로 대항했다.
헨델에 대항하는“고귀한 분들의 오페라단”은 급속히 지반을 굳혀 헨델의 킹즈 극장 임대기간이 끝나는 1734년에 그곳으로 옮아갔고, 국가의 오페라 지원을 받게 되었다.
1733년에 Royal Academy of Music의 이사장인 에섹스 백작은 ‘헨델은 점점 왕처럼 행동할 정도로 독재적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시는 고통받고 있다’로 시작되는 편지를 받는다. 이사진은 헨델이 계약만료와 함께 은퇴하리라고 기대했으나…….헨델은 곧 세 파트너를 찾는다. Hasse의 [아르타크세르세스 Artaserse] 중 'Per questo dolce amplesso'여기서는 소프라노 여가수가 불렀으나, 이 노래는 원래 카스트라토 가수를 위한 것으로 파리넬리가 이 노래로 런던을 평정한다.
파리넬리의 친형인 리카르도 브로스키의 작품인 Son qual nave 메조 소프라노 Cecilia Bartoli가 부른 버전.
니콜로 포르포라의 제자인 위대한 요제프 하이든은 사부에 대해 "행실은 쓰레기와 같다"고 평했다. (물론 사부에게서 처음 작곡이라는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노라고 사부의 공을 찬양하기는 했다. ) 니콜로 포르포라의 [ Siface] 중 Tu che d'ardir m'accendi -원래는 카스트라토 배역을 위한 곡이다.
역시 니콜로 포르포라의 [Semiramide riconosciuta] 중에서 In braccio a mille furie 역시 카스트라토 배역을 위한 곡이다.
헨델은 John Rich와 의기투합하여 그의 세 번 째 오페라단을 코벤트 가든 극장에 설립한다.
헨델 쪽의 강점으로는 마리 살레가 이끄는 코벤트 가든의 프랑스 발레단이었다. 그는 《충실한 양치기》를 제공하면서 《테르시프코레(무용)》라는, 실로 아귀가 맞는 이름의 프롤로그를 만들었다.
영웅 오페라《아리오단테(Ariodante)》와 마술 오페라 《알치나(Alcina)》의 새로운 작품 2편에도 아주 효과적인 발레를 넣었다. 호가스의그림 왼쪽이 헨델의 오페라 극장, 킹즈 시어터, 오른쪽은 서커스 공연장
코벤트 가든 오페라 극장- 위대한 배우이자 흥행사 존리치가 코벤트가든을 번영시켰다. 그림은 코벤트가든에 줄을 선 관객들
1782 개조공사를 위해 그려진 코벤트가든 극장의 도면
1808년 코벤트가든
헨델의 주 커리어는 오페라 였다. 오랜동안 잊혀져 있다가 다시 조명받는 오페라의 수준은 그와 동시기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다시 받으며 절찬 받고 있다. 헨델의 초기출세적인 [아그리파] 중에서 Se giunge un dispetto: 이 작품으로 독일인인 헨델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숭앙을 받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 자리를 확고히 한다.
헨델이 티무르 제국의 개조 티무르에 대한 이야기에서 소재를 취한 오페라[ 타메를라노] 중 Ciel e terra armi di sdegno
[줄리오 체자레- (율리우스 카이사르)] 중 사랑하는 눈동자여(V'adoro pupille):그런데 바로 아래 Danielle de Niese의 버전은 이미지만 취하시고 그 아래 서덜랜드의 것으로 들으시는 것이 더 .....
서덜랜드가 사후에도 여전히 명성이 높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알치나,Alcina] 중 Tornami a vagheggiar
[아틀란타,Atalanta ] 중 "Care Selve" 아직 젊은 시절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른 버전이다.
[세멜레,Semele] 중 - Where'er You Walk
흔히 헨델의 "라르고"라 알려진 이 곡은 사실 작곡가의 지시어에 의하면 '라르게토'인 부분이다. 사실은 오페라 [크세륵세스, -흔히 세르세' serse] 중의 아리아 Ombra mai fu이다. 노래가 아주 좋은 나머지 가사도 대단한 것이리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가사 내용은 아르사케스 왕조 이란의 샤 한 샤 (왕 중 왕)인 크세르세스 대왕이 궁의 정원을 노니시다가 좋아하는 나무를 발견하고 '내 이래서 이 나무가 좋노라'하시는 내용이라고....... 그런데 세멜레의 "where'er you walk"과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사실 헨델은 서슴없이 자기 작품을 조금씩 변형하여 계속 재활용한 경우가 상당해 자기표절의 대가라고 하는 악평도.............
이 시즌을 맞아 헨델은 런던에서 《아탈리아》를 초연하며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막간의 오르간 협주곡 연주로, 그가 스스로 독주를 담당했다. 그 뒤 오르간 협주곡은 그의 오라트리오 연주의 특색이 되었다.
그 이전에도 벌써 협주곡을 작곡했고, Op3의 목관과 현악기를 위한 콘체르토 그롯소가 있다. 이 뒤에 나온 일련의 오르간 협주곡은 대부분 Op4와 Op7로 출판되었다. 다시 그 뒤를 이어 현악기를 위한 위대한 12곡 그랜드 콘체르토 Op6이 나왔다.
헨델의 다음 오페라는 1736년 봄까지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코벤트 가든은 새로운 카스트라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음악 시즌은 이해 2월에 가서, 그것도 오페라도 오라토리오도 아닌 작품으로 막을 올렸다. 존 드라이든의 「성 세칠리아의 날을 위한 송가」에 의한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송가 (Ode)이었는데, 제대로 평가를 받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신작 오페라 《아탈란타(Atalanta)》라는 파스토랄은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애국적 작품이었다.
황태자는 「귀족 오페라」의 후원자여서 「귀족 오페라」쪽에서도 같은 행사를 위한 작품을 공연했다. 하지만 헨델 쪽이 이 합창에다 불꽃놀이까지 곁들여 거창하게 공연하여 그들을 크게 눌렀다.
이러한 장면을 토마스 그레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전으로 올라가는 곳에는 파란 불꽃들이 줄을 지어 빛나고 있었다. 분수 같은 불꽃들이 지면에서 천정까지 뿜어 올라갔고, 그리고 2개의 불꽃들이 무대 양쪽에서 비스듬히 교차하고 있었다. 제일 위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퀴와 같은 불꽃이 있었으며, 금과 은과 파랑의 불꽃 비가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합주 협주곡 6집 중 11번 곡 Concerto Grosso Op. 6. No. 11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도착"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 중 "보라, 저 정복자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두 가극단은 한정된 관중을 사이에 놓고 숙명적인 경쟁을 벌인 결과, 끝내 재정적인 곤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1736~37년 시즌에 헨델은 아주 패기에 찬 프로그램을 짰다. 이를 통하여 작곡가이며 오페라단 흥행주인 헨델의 거의 초인적이라고 할 정력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1736년 8월 14일에서 이듬해 4월 13일 사이에 3편의 새로운 오페라가 작곡되어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지우스티노(Giustin0)》, 《아르미니오(Arminio)》, 그리고 《벨레니체(Belenice)》의 3편이었다.
또한 칸타타 《성 세칠리아여, 눈길을 돌려주오》와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의 개정판을 완성했으며, 이들 모두가 이 시즌 중의 《알치노》《포로》《파르테노페》의 상연, 그리고 《알렉산더의 향연》의 연주와 아울러 공연되었다.
1737년 4월 13일 아침, 과로 끝에 헨델은 뇌졸중에 걸려 쓰려지니, 헨델이 재기할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헨델은 아헨에서 그는 6주 동안 하루에 9시간 씩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필사의 노력을 하여 기적적이라고 할 정도로 회복된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단은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그 사이에 Queen’s Theater의 옛 공동 경영자 하이데거는 조반니 바티스타 페세티가 거느리게 된 새 가극단과 계약했으나, 헨델이 뜻밖에 회복되자 계획을 바꿨다. 헨델은 킹즈 극장으로 돌아가 영어 오페라 《파라몬도(Faramondo)》와 코믹한 《크세륵세스(Xerxes),- 대개 세르세 serse로 칭한다-》등을 선보이며 맹렬한 투쟁을 계속한다.
「귀족 오페라」는 헨델 쪽의 맹공세에 7개의 작품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파리넬리도 사부 포르포라와 함께 떠나 버렸고, 「귀족 오페라」 역시 문을 닫았다.
여장한 파리넬리의 캐리커쳐
파리넬리와 쿠초니:키가 190은 넘은 파리넬리는 당시로서는 매우 장신이다. 나폴레옹이 164의 키로 당시의 평균신장은 되었던 점을 보면 당시 유럽인들도 그렇게 키가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파리넬리와 헨델의 사이는 어떠했는가?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파리넬리는 "별 볼일 없고 피상적인"음악만 만드는 재주밖에 없고, 후세에 남을 불멸의 음악을 내놓을 재주가 없는 형과 사부 포르포라의 음악을 경멸하고, 차원이 다른 훌륭한 음악을 선보이는 헨델을 마음속으로 숭배하며, 헨델의 눈에 들어 헨델의 음악을 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묘사된다.
리날도 서곡 영화 [파리넬리] 에서 헨델이 오르간으로 연주하고 파리넬리는 숨어서 들으며 감동하고 있는 장면 ? 영화에서는 헨델에게 완전히 경도된 것으로 나온다
[리날도]는 1711년 영국에 온 헨델이 영국 시장을 목표로 쓴 작품으로 그가 영국에서 수십년 동안 군림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리날도 서곡 전곡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파리넬리가 여자친구의 도움으로 리날도의 악보를 훔쳐서 "고귀한 사람들의 오페라단"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나온다. 반 헨델파의 소굴인 이 곳에서 야유가 터져나오나 , 주인공 파리넬리가 초절기교로 "사랑하는 아내여 Cara sposa"를 불러서 제압하는 장면이 있다.
Cara sposa의 전곡을 한글 자막과 함께 볼 수 있는 영상이 있으니,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음악회 영상이다. 이동규씨가 불렀다.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헨델은 사업상의 적인 파리넬리의 노래 실력은 인정하면서도 '네 놈은 노래 부르는 기계이지 영혼은 없는 천한 것이로다' 하시다가 적인 'opera of the nobility'가 작곡가인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맘대로 하는 [리날도] 공연을 보러와서 '나를 울게 하소서' 부분을 듣고는 감동하여 실신하는 장면이 ..........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부르는 버전- 비첸차 올림픽 극장에서 이 극장은 1580년대 그리스 극장을 이상으로 여기던 비첸차의 주인이 만든 극장이다.
헨델과 파리넬리 사이가 어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나, 파리넬리는 절의를 지켜 사부 포르포라와 행동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런던조차 두 개의 오페라단이 스타 가수들에게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며 벌이는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첫 시즌의 반이 지날 무렵에 관찰자들은 이제 관객들이 줄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파리넬리의 성공조차 Opera of the Nobility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Colly Cibber는 수 년 후에 잘난 척하며 회상하길,파리넬리도 5명의 청중과 30파운드의 수익을 위해 노래하는 경우가 있었노라고 하였다. 이는 제한된 관객층을 두고 두 단체가 자멸적인 치열한 경쟁을 벌인 탓이리라.
도미니코 스카를라티와 함께한 파리넬리
일부 동시대인들의 설명은 다른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비록 파리넬리의 음악적인 재능은 큰 열광을 불러 왔으나, 런던의 관객들은 그의 연기력의 부족에 넌더리를 낸 것 같다.
한 오페라 관객이 에섹스 백작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내가 파리넬리에 처음 가졌던 숭앙은 지금 좀 그렇게 되었소. 그는 교황의 예배당에나 어울릴 것 같소. 무대에서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표현력이라는 것은 없고… 많은 내 동지들은 처음에 그를 매우 숭앙했으나, 그의 달콤하기만 한 스타일에 식상하고 있소.’
Roger Pickering은 파리넬리와 세네시오 를 비교하며 묘사하길,
‘이 얼마나 멋진 악기인가!이 얼마나 멋진 목소리의 조화란 말인가! 귀에는 엑스타시가 느껴진다! 그러나 세상에 이 얼마나 서투른가!얼마나 멍청해 보이는가! 이 시각에 대한 공격은 무엇이란 말이뇨!’ 하며 파리넬리가 노래를 할 때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청중 일반의 불평을 들려준다.
헨델 하프 협주곡 Op. 4, No. 6: 영상의 배경은 요크셔의 하워드 성 일대라고 한다.
파리넬리의 유해는 2006년에 발굴되었다!!!
영국 텔레그라프 지의 기사이다.
파리넬리와 친구들 1750-1752년경
Farinelli's body disinterred to find secrets of castrati
2006년 7월 13일자 기사이다.
파리넬리, 전설적인 카스트라토로 그의 목소리가 18세기 온 유럽을 전율하게 한 사람의 유골이 어제 발굴되었다. 이는 과학자들이 그에 대하여, 또 과거 어떤 특질이 카스트라토들이 그렇게 노래를 잘 할 수 있게 했는지 밝혀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다.
요크 대학의 David Howard, 왕립 음악원의 Nicholas Clapton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거세가 해부학적으로 어떻게 오페라 스타가 되기를 추구한 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려 한다.
Clapton 의 발언이다.
“이 유골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카스트라토의 유골이오. 우리는 그들이 당시 만화에 그려진 것처럼 그들이 키가 매우 크고, 멀대 같기만 한 지, 아니면 여성형 유방이 있고 큰 둔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파리넬리의 공식적인 초상화에 나타난 대로의 멋진 신사의 외모를 가졌는지 알고 싶소.”
파리넬리를 그린 판화들과 그의 동료인 세네시오를 그린 것들은 그들이 작은 머리와 그들의 동료 가수들을 굽어 보는 매우 늘어난 키의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파리넬리의 유골
카스트라토들은 바로크시대인 17세기부터 18세기 말 사이에 오페라계를 리드하던 소프라노들이다. 파리넬리는 1705년에 카를로 브로스키라는 이름을 지니고 태어났고,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술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5세를 치료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연구자들은 피렌체 출신의 역사학자 Alberto Bruschi가 이끌고 있는데, 그는 연구의 재정문제도 처리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그 유명한 가수의 생물학적인 프로파일을 재구성하는데 충분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보오.” 그들은 생체분자학적 투영조사방법(bio-molecular screening)으로 정보를 수집할 것이며, 왜 그가 그 당시 기준으로 비정상으로 보이도록 그렇게 키가 컸는지 조사할 것이다.
파리넬리 중앙연구소의 Carlo Vitale가 밝힌 바로는, 유해는 ‘중간 정도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나, 과학자들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연구팀은 파리넬리의 성대구조에서 어떤 것이 카스트라토들에게 그런 넓은 음역을 주었는지 밝히고 싶다고 한다.
Clapton의 가설은 소년들의 고환을 제거한 것은 그들의 성대가 커지지 않고 작게 유지될 수 있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호르몬의 변화는 그들의 몸이 계속 잘 자라게 했을 것이며, 성년기까지 성장이 이어졌으리라고 본다. “그 건 말이지요. 그들에게 큰 폐활량을 주었을 것이고, 반면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하게 했을 것이오.”
역사가들은 여전히 왜 교회가 그런 잔혹한 일을 널리 허용했는지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일부는 주장하기를 교회는 여성의 목소리에 숨겨진 에로티시즘 때문에 여성 가수를 불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일부는 주장하길 이는 성 바울의 명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은 명하기를 “여자들이 침묵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디모데 전서 2:11)” 하였고, 이는 교회에서 여성들을 합창단으로 쓰지 않는 오랜 습속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카스트라토였던 Alessandro Moreschi는 매우 장수하여 1902년과 1904년에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녹음기술이 매우 열악하여 매우 높은 음의 꽥 하는 소리만 분간할 수 있을 뿐이다.
파리넬리는 (나폴리 인근) Puglia 출생으로 ( 아버지도 직업 음악가였다. 거세를 한 것이 형이라고 영화에서는 묘사되나, 가족 누군가에 의해서 거세가 추진된 것은 확실하나, 그가 형인지 아버지 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77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유해는 그의 원래 묘 있던 카푸친 회 수도원의 십자가 교회가 1810년에 파괴되고, 볼로냐 Certosa묘지로 이장되었다. ( 조카딸이 자신의 묘자리에 삼촌의 유해도 같이 매장하도록 하였다.)
Alessandro Moreschi, 마지막 카스트라토가 남긴 녹음 1: 구노의 '아베 마리아' 그는 1858년 생이다. 그가 변성기가 지나기 전인 10살 무렵에 수술이 있었던 것이므로 186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카스트라토 수술이 유럽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된다. 그는 1922년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Alessandro Moreschi가 부르는 Crucifixus (Rossini), 1902 그는 파리넬리 처럼 솔로 가수로 훈련 받은 것이 아니라 성가대의 일원으로, 즉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소속이었다.
http://www.pasthorizonspr.com/index.php/archives/07/2011/famed-farinellis-flawed-frontalis
FAMED FARINELLI’S FLAWED FRONTALIS Article created on Monday, July 25, 2011 Dr. Kristina Killgrove: Assistant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Anthropology at the University of West Florida
2006년에 고고학자들은 18세기의 전설적인 카스트라토 가수 카를로 마리아 브로스키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는 파리 넬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년으로서 파리넬리는 오페라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기에, 그의 부친이 사망했을 때, 큰 형인 리카르도는 파리넬리를 거세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목소리를 보존하기 위한 거세 수술 자체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다른 구실을 들어서- 건강상 이유 등- 이루어 진 카스트라토가 되기 위한 거세수술은 1년에 4,000건 내지 6,000건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파리넬리는 1720년대까지는 큰 명성을 얻었고, 그가 78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거의 매일 노래를 불렀다.
그의 유골에 대한 검사보고서는 Journal of Anatomy 에 Maria Belcastro, Gino Fornaciari, Valentina Mariotti 가 2011년에 발표하였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거세가 호르몬 작용의 변화를 일으켰고, 이는 hyperostosis frontalis interna (HFI), 즉 cranial vault( 머리둥근천장)부위의 앞이마뼈 (frontal bone)가 두터워 진 것이다. 이는 대개 폐경기 이후의 여성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증상이다.
파리넬리의 유해는 결국에 그의 조카 손녀 (great -niece )인 Maria Carlotta Pisani의 묘에 합장되었는데, 파리넬리의 유해는 조카 손녀의 발치에 놓여졌다.
불행히도 뼈가 전부 다 잘 보존된 것은 아니다. Belcastro와 동료 과학자들은 좌골절흔(sciatic notch )이 협소하다는 것과 preauricular sulcus이 없다는 것을 기준으로 유해의 성별을 판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유골 주인의 연령에 대해선, 융합된 두개골 봉합부분 ( fused cranial sutures), 이상면 ( auricular surface 골반 뼈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모양이다)이 다공성인 것, 섬유주대 (trabecular )가 매우 얇아진것, 경추( vertebrae)의 퇴행성 변화, 요추( lumbar vertebrae)에 보이는 압박에 의한 균열 등을 발견했는데, 이 특징들은 모두 나이든 사람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흥미롭게도, 연구진은 불완전한 좌측 견갑골 (left scapula ) 의 내부 가두리( medial border )의 뼈끝선 ( epiphyseal lines) 부위와 좌측 장골능(left iliac crest) 부위가 불완전하게 약화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뼈끝선 ( epiphyseal lines )이 성년기에도 계속 발전하지만, 그 성장도 35세이면 멈추는 것이다. 연구진은 우측 척골 ( right ulna- 즉 팔에 있는 뼈라고 한다)의 길이를 토대로 그의 키를 6피트 3인치 (190.50센치미터)로 추정할 수 있었다. 제대로 검사하는 것이 가능한 치아 14 점을 토대로 하여 연구진은 그가 단 두 개의 충치만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으니, 그의 치아는 매우 상태가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elcastro와 그 연구진은 두개골 궁륭구조가 최대 21밀리 두께로 두터워 진 것을 발견했다.
시상봉합의 열구가 손상되지 않은 것을 근거로 ( sagittal sulcus was unaffected), 연구자들은 그 부위가 두꺼워 진 것은 변형성 골염(變形性骨炎) ( Paget’s disease)라기 보다는 말단비대증 ( acromegaly), 섬유성골이형성(纖維性骨異形成) (fibrous dysplasia) 또는 수막종(髓膜腫 meningioma)의 증상으로 보인다.
HFI(이마 부위 두개골의 두꺼워짐)의 원인은 사실 불명하다. 그러나 이 증상이 폐경기 여성에게서 주로 발견되고, 남성에게서는 호르몬 장애가 있을 경우에만 발견된다는 점은 (예컨대 클라인펠터 증후군 ((남성의 성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선천성 질환의 하나))Klinefelter’s syndrome ) 그 사람의 호르몬 불균형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
Belcastro와 그 연구진은 HFI의 남성에의 발현의 증례( clinical literature)만 가지고서 간단히 결론을 내렸는데, 파리넬리의 HFI은 거세수술과 관련성이 깊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거세수술은 그의 큰 신장의 원인이 된 그의 지연된 골단 융합 (delayed epiphyseal fusion)과 그의 골단이 완전히 융합되지 아니한 것(unfused epiphyses in his skeleton). 을 설명해 준다고 보인다.
Belcastro와 그 연구진은 골학적 측면( osteological )에서만 거세하기와 환관만들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 ---- 박사) 유명한 이탈리아 인의 유해 발굴에 있어 업적이 있음은 분명한데,
그러나 이 사안에 있어서는 Belcastro와 그 연구진은 골학적 측면( osteological )에서만 카스트라토와 환관에 대해 논하고 있으므로, 이 유골이 100퍼센트 파리넬리의 것인지에 대한 고찰은 분명하지 않으니, 이는 유골의 상태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그 유해를 찾아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남은 문제는 HFI 가 파리넬리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의 문제이다. 또는 이 증상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많은 여성들의 인생에 대한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증례는 HFI이 기본적으로 자각증상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이 질병이 매우 진행이 더디기 때문이다. 이 증상은 수십년에 걸쳐 발전하기 때문이다. 가장 심한 경우에는 골단(cranial)이 두꺼워 지는 증상은 그 환자의 뇌가 두개골의 변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기 대문이다. 비록 HFI의 증상에 대해서 그리 알려진 것은 없긴 하지만 말이다.
해부학회지의 기사에서, Raikos와 그 연구진은 2011년에 알 수 없는 HFI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며, 심한 경우에는 환자가 그의 두개골 내부의 재편성 과정을 겪게 된다고 본다. 이는 발작(seizures), 간질 (epilepsy), 치매( dementia), 두통을 수반하게 된다.
파리넬리의 유골은 그렇게 많이 발견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그의 증상과 일반적인 증례를 비교하기 어려운 원인이 된다.
(후략- 이하에서 저자는 로마 시대 유골로 폐경기 여성의 삶을 이해하려는 연구에 돌입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합주협주곡 Concerto Grosso Op. 3, no. 2
http://bonesdontlie.wordpress.com/2011/09/01/eunuchs-changes-in-the-flesh-changes-in-bone/
The Unique Remains of Eunuchs( 환관의 특별한 유골) 이 기사는 병리학 지(Pathology) 2011년 9월 1일호에 실린 것이다.
Carlo Maria Broschi, 무대명 파리넬리는 1705년에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그는 그의 가창능력으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1717년에 그는 그의 가족에 의해서 거세 되었으니, 이는 그의 목소리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스트라토 또는 환관으로서, 그는 목소리를 바꿀 사춘기의 호르몬 변화에 노출되지 아니하였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그의 가창실력에 의해 절찬 되었으며, 공연을 위해 유럽 전역의 왕공귀족의 궁실을 순회했다.
그는 1782년에 사망했으며, 볼로냐의 Santa Croce 수도원 묘역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기에 그의 원래 매장지가 파괴됨으로써 그는 볼로냐의 La Certosa 묘지로 이장되었다.
2006년 7월에 그의 유해는 발굴되었고, 그의 해골이 지하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뼈는 그저 쌓아 올려지기만 했고, 그래서 그렇게 잘 보존되지는 못했다. 이는 뼈의 보존 상태가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뼈들은 일단 보존은 되었다.
뼈는 Belcastro, Fornaciari, Mariotti 에 의해 분석되었고, 그 보고서는 2011년에 발표되었다. 이는 고인의 생활 양식, 습관,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었을 질병과 거세가 가져오는 생리학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이 발견의 결론은 Kristina Killgrove 박사와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해 분석되었다.
Belcastro, Fornaciari, Mariotti 에 의한 분석은 호르몬 변화가 거세에 의해 초래되었고, 이는 파리넬리의 골격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internal frontal hyperostosis이다.
병리학적인 분석은 그 변화가 폐경기 이후 여성의 변화와 거의 같은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Internal frontal hyperostosis 는 판간층(板間層: 두골(頭骨) 내외벽 사이에 있는 다공질(多孔質) 골조직 diploe)의 확장에 의해서 이마뼈가 두터워 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계속적인 두꺼워짐 증상은 병리학자들이 두개골을 두껍게 만드는 페짓병 acromegaly, ?brous dysplasia, meningiom등 다른 질병과 이 증상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연구진은 심한 internal frontal hyperostosis 는 노년의 여성들에게서 또는 고환의 제거 또는 기능위축에 의해 호르몬 불균형이 있는 남성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변화가 파리넬리의 생활양식에 변동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거세의 수반증상과 테스토르테른의 손실은 그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환관에 대한 다른 연구로는 Eng, Zhang, Zhu 세 중국 학자가 한 연구로 이는 2010년에 발표되었다. 그들은 두 명의 명대 환관의 유해로 연구를 했다.
이 남성들은 그들이 존귀한 여인들을 시중들며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거세되었다. 연구진이 연구한 두 사람은 Beijing의 Wutasi의 묘지에서 발굴되었다.
그들은 한 남성이 매우 비율이 맞지 않는 골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이 흔적은 노년의 골단 폐쇄 (epiphyseal closure)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테스트로토른이 없기에 골단은 상당히 늦게 폐쇄된 것이리라. 또는 전혀 폐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는 파리넬리의 경우에도 드러나는 증상인데, 35세에는 진행이 끝났어야 할 골단의 성장이 더 오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치아의 건강상태는 그 두 환관이 매우 힘겨운 어려운 시절을 보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한 유해는 그 주인이 평생 고통을 당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골다공증(osteoporosis)과 골격의 약화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두개골에, 특히 이마뼈에 변이가 있었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머리뼈 속에 파리넬리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팽창현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두 환관의 두개골 뼈는 손상되어 있었기 대문이다.
청대의 환관 서태후를 호종하고 있는 젊은 환관
서태후를 호종하는 환관들 왼쪽 선두가 최옥귀- 그는 무술에 관심이 많아 퇴직한 뒤에는 무예수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전하는 말로는 서태후가 진비를 우물에 던져 죽일 때 이를 실행한 것이 최옥귀라한다. 오른쪽 선두는 이연영. 서태후가 가장 신임한 환관으로 권세가 대단했으나, 광서제와도 가까워서 서태후의 신임이 흔들려 최옥귀, 소덕장 등에게 후에는 파워게임에서 밀렸다고 한다.
이연영
환관들
환관은 매우 특이한 형의 사람으로, 그들은 남성이면서도 남성호르몬이 없었다. 호르몬이 뼈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기에, 이 세 환관- 파리넬리 포함-의 골격이 그들의 거세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점점 환관에 대해 알아감에 따라, 우리는 종래의 지식에 대한 재검토를 해야 할 지 모른다. 환관의 뼈들은 그들이 실제 나이보다 육체적으로 더 젊었음을 보여주며 그들이 정상적인 남성들보다 가냘펏음을 보여준다. 어떤 젊은 성인여자들이 사실은 거세된 나이든 남성일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헨델 [메시아]중 할렐루야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런던에서의 첫공연 (초연은 아일란드 더블린에서 였다) 당시 국왕 조지 2세 전하가 격동되시어 트럼펫이 나오는 부분에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고 한다.
헨델은 자선사업에도 많은 열정을 바쳐서, 영국 최초로 세워진 사회복지법인 "Foundling Hospital"에 평소에도 거액의 기부를 하였고,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헨델은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의 3분의 1을 이 기관에 추가로 기부했으며, 이 병원에 [ 메시아 ] 독점공연권을 부여했다. 헨델이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한 Foundling Hospital의 당시 모습
Foundling Hospital의 헨델 동상
호가스가 그린 그림에서 헨델이 연주하는 모습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헨델 묘비
헨델 묘 - 웨스터민스터 사원
헨델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음악제는 계속 열려 왔다. 1784년 웨스터민스터 에서의 헨델 기념제- 영국 국왕도 친림하는 자리였다.
1857년 수정궁에서 열린 헨델 기념제
바흐는 “내가 만약 바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바로 헨델이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하이든은 “헨델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었다.”라고 했는데, 그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 “하늘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이 때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 <천지창조>이다.
모차르트는 “헨델이 했다 하면 그는 천둥같이 내리친다.”고 하였다.
베토벤은 “헨델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나는 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배우고 있다.”라고 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는 "그는 언급할 가치가 없는 삼류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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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fcpizzahut 원문보기 글쓴이: maml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