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 나의 추억 나의 노래
2006년 7월 3일 (월)
도시의 창문도 모두 잠든 어둠이 짙게 내린 밤, 마음도 울적하여 옛 노래와 함께 기억 속으로 지난날 나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항상 반복되는 일상의 넋두리 속에서 음악마저 없다면 정서적으로 얼마나 삭막할까?
음악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 속에는 사랑과 시가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으며 아름다움과 정겨움이 담겨져 노래와 함께 울고 웃었던 지난 세월들이 차곡차곡 쌓여 살아 숨 쉰다.
나는 매주 월요일 밤 열시에 어김없이 KBS 텔레비전 가요무대를 즐겨 찾는다. 그 시절 그 노래가 내 인생의 어느 시점 이었던가를 뒤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값진 시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유행가를 알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게다. 당시 시골에는 전기도 없었고 문화시설이란 상상도 못하던 때에 우리 옆집 석주네 외삼촌이 노래가 나오는 축음기를 사와 동네가 온통 떠들썩했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 희한하기도 했으며 도깨비 요술 단지마냥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둥근판 위에 바늘이 긋고 지나가면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할머니는 저 조그만 네모상자 안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해서 한동안 방안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저녁이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사람이 모두모여 방안이 꽉 차고 마루까지 발 들여놓을 틈도 없다. 노랫소리가 축 쳐질 때면 무엇을 빙빙 돌리면
희한하게 노래가 금방 되살아 나오기도 한다.
그 때 내가 처음 들어본 노래가 전선야곡, 귀국선, 목포의 눈물, 울고 넘는 박달재, 황성옛터, 애수의 소야곡 등 인것 같다. 며칠을 개근하였더니 내가 금방 따라 부를 정도였으니 어릴 적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노래가 중,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는 제쳐두고 노래가 그렇게 좋았다. 틈만 생기면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뒷동산에 올라 발성연습부터 시작하여 어디서 알았는지 가장 나쁜 컨디션 상태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소금물로 목젖을 적셔가며 연습을 했는데 언제나 변함없이 연습용 노래는 Danny boy 아, 목동아 이다. 고음처리 부분이 많아 그 노래를 불러보면 그날의 노래 컨디션을 가눔 할 수 있었다.
팝송으로는 폴앙카가 부른 Diana, 톰죤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 후랭크시나트라의 My way 정도는 어렵지 않게 소화해 내었다. 노래책도 있지만 악보를 전해주는 학교 밴드부에 있는 친구의 역할도 컸다. 당시 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노래는 한상일 노래는 웨딩드레스를 포함하여 모두 좋아했고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정원의 무작정 걷고 싶어 등이다.
만 21세 되던 해 군대 영장을 받고 일 년은 농사일을 도왔는데 말만 농사일이지 농촌 청년 계몽단체인 4H (Head, Heart, Hands, Health) 클럽에 참여하였지만 그저 놀기에 바빴고 충주시와 중원군 여름철 하기 수련회 노래자랑에서 최희준의 엄처시하로 1등을 차지해 동량면 대미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대원과 인근주민들의 환호성을 받기도 했다. 이어서 이류면 대소원에서 충북 일보사 주최 군민위안 노래잔치에서 남상규의 '추풍령'을 멋지게 불러 당시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6척 장신의 이름난 주먹 박ㅇㅇ에 이어 2등을 차지한 적이 있다. 심사석에도 주먹의 우상이 끼어 있었고 그들이 사전에 나에게 기권을 강요하던 터라 2등도 다행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늘씬한 키에 인물도 미남(?) 인데다 쥐어짜듯 부르는 나의 노래는 처녀들의 가슴을 풀었다 조였다 정말 대단한 인기였다. 라디오에서 신곡이 흘러나오면 한두 번만 들어봐도 소화할 수 있는 실력이기도 했다. 언젠가 충주극장에 쇼 단이 왔을 때 '마포종점', '쌍고동 우는항구'를 작곡한 쇼 단장인 송운선 작곡가를 그가 묵고 있는 충주여관으로 직접 찾아가 떼를 써서 노래 테스트를 받고 "자네, 노래실력이 대단하네! 희망이 있으니 하숙비를 장만하여 서울로 나를 찾아오게!" 하는 언질도 받았지만 봄철을 맞은 시골 보릿고개에 어떻게 돈을 준비하겠는가? 결국은 서울 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7년 구정을 사흘 앞둔 2월 6일 군대 가기 전날 동리에서 막걸리 파티로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군대 갈 때에는 동리에서 의례적으로 송별회를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육이오 전쟁 때부터 군대에 가면 살아오기 힘들기 때문 동리 기금으로 송별회를 해주었는데 내가 군대 갈 때 까지도 그 관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도 동량면 ㅇㅇ리에 살던 지금은 충주호 수몰지구가 되었지만 나를 그토록 좋아했던 ㅇㅇㅇ 아가씨도 친구 몇 명을 데리고 그 먼 길을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는지 달려 왔으며 다른 곳의 남자 친구들도 여러 명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한동네 어릴 적 소꿉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타 지역에서 온 친구들과는 간단하게 한잔한 후 아쉽지만 돌려보내고 동네 소꿉친구들과 밤새도록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노래하며 즐겼다. 문화가 없던 시절이었던 만큼 구경거리만 생기면 동네 아줌마들도 극성스러울 정도로 모여드는 시절이기도 했다.
오후에 충주에서 집결하여 논산 훈련소를 향해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땅거미가 질 무렵, 열차가 우리 동네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어머니가 계신 곳을 향하여 모자를 흔들며 "어머니?" 하며 크게 외쳤다. 어머니도 내 모습을 보았는지 손을 흔드시며 쓰러질 듯 기차 지나는 방향으로 뛰어 오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눈에 선하다.
훈련소 시절부터 나는 오락시간만 되면 싫던 좋던 간에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본이 되어버렸다. 주로 불렀던 노래는 오기택의 등대지기,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 정원의 미워하지 않으리! 등을 번갈아 가며 불렀다. 논산 훈련소에서 6주 훈련을 마치고 대구 동촌에 있는 제2 육군병원 군의 학교에서 위생병(간호병) 교육을 받을 즈음 나의 노래는 그곳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일과 교육을 시작할 때 시간이 조금 남으면 여지없이 나를 불러 노래를 시켰다. 죽도록 하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군에서 어떻게 명령을 어기겠는가?
환자를 다루는 의무 병과라 그런지 시간이 많아 훈련병이지만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어 토요일엔 외출 외박도 가능했고 돈이 많이 들어가긴 해도 군대생활은 할만 했다. 어느 날 중사 계급장을 단 훈련조교가 느닷없이 나를 부른다.
"이상현 이병? 자네 운이 지독히도 없네 그려! 일주일전에 이곳에 왔어도 팔자가 피였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알고 보니 일주일전에 '육군 군예대'에서 노래 잘하는 사병 1명과 사회자 1명을 선발하여 육군 문선대로 데리고 갔다는데 노래 실력이 나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나중 제대 후에 알고 보니, 노래 잘 했던 사람은 몰라도 사회자는 코미디언 배일집 이란 걸 알았다. 그 때 만약 군예대에 내가 차출되었다면 어떻게 내 인생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경험과 경력을 쌓아 또 송운선 작곡가를 찾아갈 것이 뻔했으니까
배일집도 군대에서 기능을 쌓아 코미디언으로 성공한 케이스가 아닌가?
대구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수료하고 전방 후송병원에 배치 받아 위생병으로 근무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갈 무렵 군대 오기 전에 나를 그렇게 좋아 했던 동량면 그 아가씨한테 편지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뜯어보니 놀랍게도 가을에 시집을 간다는 것이다. 이상현이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평생을 같이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님의 반대가 거센데다 노래 잘하는 사람은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해 팔자가 드세고 마누라 고생만 시킨다나?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좋다! 네가 잘되나 내가 잘되나 두고 보자!"
굳게 다짐하고 그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은 아예 접어 버렸다. 답장도 하기가 싫었고 또 하지도 않았다. 그 이후엔 노래도 하기 싫어졌고 삶의 가치관도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공병대에서 벽돌 쌓는 기술을 배우던가 운전병과를 받아 수송부에서 차바퀴 밑에 들어가 기계를 조이는 기술이라도 배우기라도 했으면 제대 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현실에 대한 비관이 싹트기 시작했다. 환자를 접하는 핀세트와 주사기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고생하며 높은 산을 정복하고 정상에 올라가서 느끼는 감회와 고생 없이 야산에 올라 느끼는 감회는 하늘과 땅 차이 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편한 군대생활이 지겹기조차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긍정적인 사고를 갖도록 계기를 만들어준 그 아가씨야말로 나의 앞길을 열어준 구세주인지 모른다. 결혼식에 참석은 못해도 결혼을 축하한다는 편지라도 띄우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결국 편지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가수의 꿈은 접었지만 노래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다. 9월에 두 번째 휴가를 얻어 주덕역에 내려 보니 옛날 학창시절 한동안 기차 통학했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철길 양쪽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학창시절 때와 변함없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네
코스모스 한들한들 ~~~~
김상희의 '코스모스 길' 을 흥얼거려 보기도하고 나훈아의 '고향역' 을
주먹을 마이크라 생각하고 크게 불러도 본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
70년 1월 군에서 제대를 하고나니 오직 취업 한 가지 생각 뿐이다. 청주 외삼촌댁에 틀어박혀 내덕동에 있는 연초제조창에 취업하는 것이 1차 목표였는데 엉뚱하게 서울 영등포에 있는 오비맥주(주)에서 먼저 소식이 왔다. 청주보다도 서울이 오히려 다행스럽긴 했다. 당시 오비의 임금체계가 무척 높아 사윗감을 보지 않아도 오비맥주 굴뚝만 봐도 딸을 준다고 했을 때이다.
72년 11월 25일 같은 직장에 다니던 지금의 아내와 열애 끝에 사내결혼을 했다. 영등포 경원 예식장에서 주례는 박한상 국회의원이었고 결혼 행진곡은 피아노를 대신하여 당시 인기절정이었던 경희대학교 음악부에 재학 중인 '김훈과 트리퍼스' 멤버가 맡았다. 나를 두고 아리랑, 모래성, 정주고 내가 우네! 를 부른 클럽이라면 알만할게다. 같은 멤버인 트럼본 주자가 처남이었기에 때문이다.
나의 노래솜씨는 변함없이 여전했다. 고음과 저음 처리가 능숙했고 감정도 풍부하고 목소리도 맑고 깨끗해서 송창식의 고래사냥, 나훈아의 고향역, 이장희의 그 건너, 이종용의 너,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 등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80년대 중반 광주에 오비맥주 제3공장이 들어설 즈음 나는 광주공장으로 전보발령이 났다. 가족이 함께 이주는 못했기에 혼자서 운암동 주공2단지 사택에 여장을 풀고 외로움을 달래려 부담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직장이 술 공장이고 또 공장이 건설 중에 있어 술자리 기회가 무척 많아 하루도 뜸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스탠드바가 왜 그리 많았는지 전자 오르간이 주종을 이뤄 나에겐 물고기가 제물을 만난거와 마찬가지다. 충장로의 '루불 스탠드바' 는 내 집 드나들 듯 했고 그때 많이 불렀던 노래가 일편단심 민들레야, 옥경이,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 최성수의 기쁜 우리사랑은, 해후 등이다.
9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음주문화가 점점 퇴색되면서 스탠드바가 사라지고
노래방 문화가 들어 닥쳐 여기저기 노래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지금에 이르렀지만 노래는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흐르는 세월 어찌 막으랴! 이제 30여 년간 정들었던 회사도 정년퇴직 했고 기계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스는 법, 나의 노래도 이제 세월 따라 녹이 잔뜩 슬어 볼품이 없다. 고음도 갈라지며 깨지고, 음정이 맞지 않아 후렛이 생겨 저음도 약해지고 목에서의 바이브레이션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기계가 너무 노후 되면 재생도 불가능 하다.
그러나 지금도 노래가 너무도 좋다. 광주 문예회관에서 가수의 단독 콘서트가 있을 경우 모두 가보려 노력한다. 특히 인순이나 장난감 병정을 부른 박강성 이라면 주저 없이 가본다. 그들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언제나 변함없이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좋은 것처럼,
얼마 전에 고향 친구들로부터 나에게 가수의 꿈을 접게 한, 동량면 ㅇㅇ리에 살았던 옛 여인의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에 남편을 잃었고 지금은 충주 대수정 다리 부근에서 국밥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이제 나와 같이 많이 늙었을 게다. 언제 꼭 한번 찾아 만나 보리라! 같은 실버 세대로서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시장 국밥 아줌마의 아름다운 만남이 무엇이 장애가 되겠는가? 노래 가사처럼 주안상 하나놓고 내 설움 나의 노래를 함께 불러 보리라! 그가 나를 외면할 지라도,
충청도 아줌마
노래 : 오기택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에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 서
내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 보잘 것 없는 글, 끝까지 읽어 보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 나의 일기장에서 이상현
첫댓글 형님,기회가 주어진다면 잘 부르시던 흘러간 팝송 한 곡 부탁드리겠습니다...형님의 지금까지 걸어오신 발자취 감동깊게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노래에 대한 일부분의 삶만 그려보려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안 된것 같아 아쉬움이... 동생 좋게 보아줘서 고마워!
오라버니~~^^긴삶에 대한 애정어린 장편 이네요.여태 살아 오신 발자취 너무도 감동스럽게 잘 보았습니다.열심히 살아 가면서 오빠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감사 합니다.
후회없는 삶 같아? 아니야! 나의 삶 후회하는 것이 더 많아. 수호 동생, 좋게 보아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