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관람객들 통곡하게 만든 작품
“주름투성이 얼굴에 어머니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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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전시회 중 화제가 된 전시회가 있다. 지난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박성희 닥종이인형전’이 주인공이다. 이 전시회에서는 이변이 속출했다.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대성통곡을 하는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적인 공연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정적인 전시회를 감상하면서 관람객이 눈물을 흘리는 일은 희귀한 법이다.
토요일이던 지난 5월 23일의 일이다. 작가 박성희씨는 2층 전시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1층에서 황급히 올라갔다. 중년남자가 펑펑 울고 있었다. “제가요 58년 개띤데요 어머니 임종도 못하고 한이 맺혀 있었는데 그만 이 작품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무엇이 50대 초반의 그를 울렸을까? 이 연배면 세파에 찌들려 웬만한 일에는 반응이 심드렁할 법도 하건만.
알고보니 그는 ‘어머니-배꽃당신’이라는 작품을 보고 눈물을 쏟았다. 앞니가 두 개밖에 남지 않은 한 할머니가 컬러풀한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즐거워하는 표정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보고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은 데다 작품 앞에 놓인 “애비야! 이쁘냐?” 하는 설명을 보고 그만 눈물샘을 하염없이 열어놓고 만 것이다.
이 전시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내국인만 감동한 것도 아니다. 지난 5월 25일에는 독일인 부부가 작품을 보고 매료돼 박성희씨에게 “작품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작가를 “마이스터(거장)”라고 극찬했다는 후문이다.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면 이 전시회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물론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공연과 전시는 갈수록 홍수를 이루지만 감동을 받은 사례는 손꼽을 정도로 드물기 때문이다.
소문을 듣고 지난 5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현장을 찾았다. 작가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싶었다. 개량한복을 입은 단아한 차림의 중년여성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기자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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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선물 받은 족두리를 쓰고 기뻐하는 할머니. 2.유일하게 남은 벗인 강아지와 한때를 보내는 할아버지. 3.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할아버지의 표정.
작가 이력? 작품으로 보여주면 되죠!
작가 박성희(朴成喜·46)씨. 중앙무대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한 작가 이력도 안 붙여놨다. 이유를 물어보자 “작가가 작품으로 승부하면 되지 뭐가 필요합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 노인을 대상으로 만든 닥종이인형 24점을 출품했다.
그래도 궁금해할 독자들을 위해 간단한 이력을 소개한다. 박성희씨는 예술 인생을 서예로 시작했다. 1982년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1985년 서예가 소헌 정도준(紹軒 鄭道準) 선생의 개인전을 보고 정 선생을 찾아가 서예를 가르쳐달라고 청한 뒤 문하생이 됐다. 소질이 있었는지 1986년에는 문교부장관상도 받았다.
박성희씨는 1987년부터 15년간 서예학원을 운영했다. 서울 방이동에서는 서예만 가르쳤고 경기도 하남시에서는 보습학원을 겸했다. 다행히 학원은 잘됐다고 한다. 닥종이인형작가로의 변신은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 2003년의 일이다. 그는 서예학원을 접고 그해 경기도 양평 용문사 입구에 ‘곤드레마당’이라는 한식집을 연다. 식당을 빨리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던 어느 날 붓글씨 쓰다 남은 종이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종이를 물에 넣고 끓여 종이죽을 만들어 그걸로 종이소쿠리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서예를 하면서 한지를 만졌기 때문에 한지와 친숙했어요.”
종이로 사람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당시 친분이 있던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 이장 김형옥씨를 모델로 닥종이인형을 만들었다. 김 이장이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닥종이인형작가로의 첫걸음을 이렇게 내디뎠다.
솜씨 뛰어난 재야 예술가 집안
그는 서예와는 달리 닥종이인형은 스승 없이 독학으로 만드는 법을 터득해갔다. 별로 어려운 점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닥종이인형 만드는 법은 인터넷에도 나와 있다”며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요리가 좋은 예다.
레시피(조리법)가 인터넷에 공개돼 있지만 훌륭한 요리사는 매우 드물다. 훌륭한 요리사가 되려면 부단한 노력과 더불어 천부적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닥종이인형 제작도 마찬가지다. 서예 입문 4년 만에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예술적 자질이 뛰어나다.
그의 집안 내력도 흥미롭다. 그의 양친은 건축업에 종사했다. “지금도 엄마(73·소희영)가 동대문시장 가서 옷감을 떠오고 재단을 하시면 아버지(78·박종태)는 재봉틀로 제 옷을 만들어 주세요.” 모친은 음식솜씨도 뛰어나 젊을 때는 김치를 만들어 일본에 팔기도 했다. 그는 1남2녀 중 막내다. 언니는 청음(聽音)이 뛰어나 다양한 장르의 노래 2만여곡을 외우고 있다고 한다.
대단한 재야 예술가 집안인 셈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닥종이인형작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듬해인 2004년 닥종이인형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인사동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는 두 달 만에 인사동 출입을 중단했다. “닥종이인형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에 제 작품(삽살개)을 들고 가서 봐달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대단하다’ 소리만 하면서 오히려 눈치를 보시는 거예요. 얼핏 봐도 제 작품이 훨씬 낫더라고요.” 그가 더 이상 스승을 찾지 않은 것은 닥종이인형을 만드는 데 틀을 사용하는 것에 실망한 이유도 있다. “틀을 사용하는 것은 제 예술관과는 안 맞았어요.”
똑같은 닥종이인형에 표정을 불어넣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공모전에 도전했다. 2004년 전주미술대전과 원주미술대전에 출품해 입상했고 2006년 제1회 크라운·해태제과 닥종이인형 공모전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단체전도 열었다. 2006년 초 이탈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이 개최한 닥종이공예전에는 닥종이인형작가 3명과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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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온갖 삶의 풍랑을 이겨내고 다정한 노후를 즐기는 부부. 2.거위의 활력과 할머니의 허허로움을 대비시킨 작품. 3.바느질하는 할머니.
이탈리아 전시회는 그의 예술인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예술가로서 새로 태어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작품 만드는 데 몰두하느라 남의 전시회를 별로 안 봤거든요. 닥종이인형은 왜 한결같이 볼이 통통한 아이와 엄마, 아빠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사람은 생김새가 다 다른데 닥종이인형의 얼굴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똑같았거든요.”
이탈리아 전시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닥종이인형에 다양한 입체적 표정을 불어넣는 작업에 몰두한다. 대상도 노인으로 특정했다. “닥종이인형계의 기존 작품을 보니 아이와 엄마 아빠가 대부분이었고 노인은 별로 많지 않았어요. 제 자신이 인생을 뒤돌아볼 나이가 되니 노인에 대한 관심이 늘었어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기본적으로 비슷한데 노인들은 얼핏 보면 주름살은 비슷하지만 주름살 속에 숨은 사연은 제각각이거든요. 그 사연을 끌어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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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40년 후의 작가 모습을 모델로 만든 작품 ‘망각’.
모델은 동네사람과 손님, 종업원 중에서 골랐다. “닥종이인형을 만들면서 항상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영감(靈感)이 떠오르면 바로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미래의 자신을 소재로 만든 작품도 있다. ‘망각’이라는 이름의 작품의 모델인 박봉덕 할머니는 30~40년 후 작가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그는 생애 첫 닥종이개인전인 이번 전시회에서 다양한 파격을 시도해 눈길을 끌었다. 우선 사진촬영을 허용했다. “공개한다고 해서 남이 똑같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들이 기존의 작품과 상이한 제 작품을 사진에 담아가 분석해서 닥종이인형계에 다양한 작풍이 생기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본 동료 닥종이인형작가들은 충격을 금치 못하고 돌아간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디스플레이도 입체적으로 했다. 벽면을 따라 작품을 배치하는 기존 관행과 달리 전시장 중간 중간에 작품을 전시해 전후좌우에서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 주요 작품은 그 작품을 확대한 대형 패널을 뒤 벽면에 붙여놔 관람객이 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박성희 닥종이인형전은 폐막 후에도 화제를 낳고 있다. 뒤늦게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양평 곤드레마당(031-775-0311)으로 가면 된다. 그는 전시회를 마치자마자 즉시 후속 작품 제작에 착수했다.
“아직 표현하지 못한 노인들의 표정이 너무나 많아요. 평생 해도 다 못할 겁니다.” 그는 우선 향후 20년간을 목표로 정했다. “앞으로 20년 동안 200명의 노인을 모델로 제각각 다른 삶의 표정을 담을 겁니다.” 여건이 허락되면 해외 전시도 추진할 생각이다. “고국을 떠나 부모를 그리워하는 재외동포가 많은데 그분들의 애달픈 마음을 달래주고 싶습니다.”
첫댓글 아~~~~~~~`` 정말 멋지네요,특히나 마지막 작품이 압권이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