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인 집단과 음악 예술인 >>
조선 후기 음악 사회를 민악화로 통일한 두 개의 산맥은 신청과 예인 집단이었다.
예인 집단은 주로 기층 민중 출신의 예술인 집단을 말한다.
예인 집단이라 함은 노래, 악기, 춤, 인형극, 곡예(줄타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장대타기 등), 재담 등 예술 장르를 통합적으로 다루며 음악의 대중성은 물론 예술성을 집단적으로 창출하였다.
예인 집단에는 생활 근거지로 분류하여 떠돌이 예인 집단과 붙박이 예인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떠돌이 예인 집단은 떠돌이 신세로 공연 수입으로 살아가는 유랑 예인 집단이다. 반면 붙박이 예인 집단은 특정 지역에 농업이나 향리로서 관청에 종사하며 그 지역을 중심으로 연행하는 예인집단이다.
1.떠돌이 예인 집단
예인에 대한 기록은 최치원의 「향약잡영5수」처럼 신라 시대에서부터 볼 수 있지만 위의 표와 같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 예인들의 연행은 더욱 구체화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 전문 예인들이 다양화하거나 집단화한 것을 볼 수 있다.
< 조선 후기의 예인 집단들이 직업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 >
1)조선이 양란을 겪으면서 궁중의 음악인(악공,악생)들이 피납, 사망, 도망하거나
2)18세기 연행기관이었던 산대도감의 폐지에 따라 많은 음ㆍ악 예술인들이 떠돌이 예인들로 발생함.
3)후기의 농촌의 피폐로 이농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자신의 예능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음.즉 두레 풍물 생활을 하던 농민들이 예인 집단에 흡수 되기도함
40최고의 예술 집단인 신청이 그들에게 부과된 무세나 환곡을 갚지 못하고 '굿판'을 떠나면서 떠돌이 예인집단화함.
5)이유로 예인 집단은 사당패나 절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사당패나 남사당패, 그리고 걸립패와 중구미패 등은 절과 관계를 맺고 광대패의 경우는 신청과 관계를 맺음. (* 남사당패의 경우 신청과의 관계도 맺음)
5)마을과 장시, 시전,조창 등 상업 지역을 돌면서 순화 공연을 하면서 살아갔다. 조선 후기 이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19세기에는 독자적인 전문 예인 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지위가 향상되어간다.
***********************사당패*******************************
1)여자로 구성된 연행패로 사당벅구춤이나 산타령같은 민요, 판소리, 때로는 줄타기,재담 등 그 연행 종목을 삼고 있다. 주된 공연 종목은 판염불을 중심으로 춤과 노래였다.
2)전문으로 하였을 때는 '홀미패'라고 불리기도 하고 후에 구성된 남사당패와 구별하기 위하여 '여사당패'로 불리기도 하였다.
3)말은 '거사'라는 용어와 함께 절에서 나왔다. 출가하지 않고 불교에 귀의한 일반 가정의 남자를 '거사''남사당'이라고 하는데 반하여 그 여자를 '사당''여사당'이라고 불렀다.)
4)여자들로 조직되었다고 하여 반드시 여자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에겐 짝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거사'다 그리고 사당패를 대표하여 거사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사람을'모갑'이라고 불렀다. 모갑과 거사들이 주로 걸립패의 화주 출신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사당패와 걸립패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조직이 처음에는 거사들이 직접 연행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니 거사들이 대부분 노래, 풍물, 버나(접시 돌리기), 얼른(요술) 등의 예능을 가진 걸립패 출신이라는 점에서 점차 직접 연행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18세기 중반 금과 비파가 빠진 삼현육각으로 연주를 하였다. 사당패의 삼현육가 반주에 사당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장구춤과 그 지역의 민요나 단가 등이었지만 주요곡은 <산타령>이었다.
6)사당을 업고 다니거나 사당패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사당의 허우채(解衣債 : 몸값)를 관리하였다.
7)절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입원으로 삼아 그 수입의 일부를 절에다 내고 연행판의 수입과 허우채 그리고 부적 판매와 양식 구걸로 유랑을 하면서 살았다.
8)청룡사 뒤편에 살았던 바우덕이라는 여사당의 경우 1864년 경복궁 중건 사업에 초청 연행자로 불림을 받아 노래와 소고춤으로 당대를 홀릴 정도였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걸립패와 남사당패가 합류함에 따라 사당패가 없어지고 이들의 연행 종목이 남사당패에 흡수되기도 하였다.
*************************초라니패*******************************
1)원래'초란이'란 말로서 요사스런 탈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면극인 탈놀이를 주된 공연 종목으로 삼았지만 이외에도 매구밟기, 얼른(요술), 죽방울 받기 등도 함께 하였다.
2)주로 관에 매인 노비나 군인 출신들이 주로 하였다.
3)세 번째 박 타는 대목에서 나오는 초라니패는 사당과 거사로 조직되어 있다. 소고와 장구를 맨 사당들은 구음 장단을 기본으로 공연하고 있고 반주는 남사당(거사)들이 삼현육각 편성으로 반주를 하고 있다.
**********************솟대쟁이패***********************************
1)입구에 세워 놓은 솟대처럼 굵고 긴 장대를 세우고 쌍줄을 양쪽에 매달아 연행하는 떠돌이 예인 집단을 솟대쟁이패라고 부른다. 장대의 길이는 보통 10여 길이었다. 주 종목은 솟대놀이와 죽방울 놀이였다.
2)정부의 나례도감을 통하여 외국 사신 맞이 환영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위에서 장대를 중심으로 매단 줄 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놀았던 솟대놀이가 쌍줄을 장대에 매단 놀이로 변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조선 후기 장대에 쌍줄을 매단 솟대놀이패가 일반화되었다.
4)솟대타기, 새미놀이(어름-줄타기), 살판(땅재주), 풍물이 전문이었고 이 외에도 버나, 병신굿(지주와 머슴이 엮어가는 2인 탈놀음),얼른(요술) 등이 공연되었다.즉 조선 서커스의 원류라 할 수 있다.
5)두 손을 짚고 한 번씩 공중돌기를 하는 기술로 그 종류가 대략 12가지 기본 살판에다 변형 형태가 있었으며 그 최종 단계는 솟대타기에 있었다.
6)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놀이가 모두 재담과 노래와 기악 반주로 진행되었다.
7)표는 일종의 종합 음악극이다.
8)솟대쟁이패의 주종목이 남사당패의 공연 종목과 겹치고 있으며 실제로 뛰어난 솟대쟁이패의 살판쇠는 남사당패로 스카우트될 정도로 교류가 있다. 이 둘이 서로 다른 점은 솟대쟁이패는 낮에 공연하는데 비하여 남사당패는 주로 밤에 공연한다는 점이 다르다.
9)솟대쟁이패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도 부른다.
**********************걸립패***************************************
1)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직한 판굿 전문 연행패이다. 걸립자체가 필요한 재원을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때로는 걸궁이라고도 하지만 시설물 건축에 걸립이 목적이 있다 하여 건립(建立)이라고도 하고 풍물 동원과 돈 마련이 결부됨에 따라 금고(주로 전남 지방)라고도 한다. 즉 목적하는 바는 공동체의 대동성에 있다.
2)떠돌이 걸립패는 일반적으로 승려 출신의 비나리가 중심이 되고 일반 예인들이 동참하여 조직한 절걸립패가 대표한다.
3)그러나 중들로만 조직된 걸립패가 있으니 이를 중매구패라고도 부른다.
4)절걸립패 :절에서 떼어 준 일종의 증명서(신표)를 주민들에게 제시하고 풍물 놀이와 춤에 이어 집지킴이(터, 성주, 조왕, 샘)에 대한 굿과 고사 문서인 비나리 축원과 탈놀이를 하면서 곡식과 금품을 걸립한다.
5)걸립패의 우두머리를 화주라고 하는데 그 아래로 고사꾼인 비나리, 비나리와 부부 관계를 맺고 있는 젊은 여인 '보살'의 춤과 노래, 풍물잽이, 접시돌리기 저문가 버나산이, 줄타기 전문가 얼른산이, 그 밖에 곡물을 지니고 다니는 '탁발' 등 15명으로 조직된다.
6)화주들은 사당패를 조직하여 모갑이나 거사로 전환하기도 한다.
*************************중매구패*********************************
1)중매구매는 중들이 주도하는 걸립패로 이들의 중심적인 공연 종목은 '중매구'라는 탈꾼을 고용한데서 비롯되었다.
2)중매구란 경남 남해군 화방사 소속의 걸립패 성원 중 탈놀이를 가리키다가 이후 이들을 고용하여 나가면서 걸립패라는 이름과는 달리 '중매구패'라고 불렀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공연 내용은 탈뿐만이 아니라 천수경 등의 불경 노래와 풍물이다.
********************************광대패****************************
1) 신청 출신의 무부들이 떠돌이로 전환한 패이다. 자연히 무부가 중심이 되어 여자들까지 조직하였지만 신청이 굿판을 떠나지 않은 점과는 달리 광대패는 굿판을 떠난 신청 출신 패이다.
2)광대라는 용어는 18세기 이후만 하더라도 광대나 화랑, 또는 무부로 섞어 불렀다, 신청에서 무부는 무당의 남편을 가리킨다.
3)광대패가 신청 출신이라는 점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종목도 다양하여 다른 예인 집단의 공급원이기도 하였다.
4)공연은 삼현육각을 중심으로 판소리와 지역에 따라 발전한 민요(12잡가나 산타령, 서도소리), 춤, 일종의 음악극으로 엮어지는 줄타기와 땅재주 등을 종합적으로 펼쳤다.
5)이들은 신청에서 나왔기 때문에 '뜬 광대'라고도 부르며 굿판을 떠나지 않은 신청 출신의 음악패를 '대령광대'라고 부른다.
6)대령광대는 궁중과 지방 관청 그리고 왕권을 수행하는 모든 계층에 이르기까지 일정 지역에 있으면서 활동 영역을 삼는 것에 비하여 뜬 광대는 전국의 마을과 경제 활동이 집중된 지역을 떠돌면서 민중들을 중심으로 영역을 삼았다.
7)뜬 광대패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굿판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인 요소에 기인한다.
*************************대광대패**********************************
1)대광대패는 장대 타기와 탈놀음을 주 종목으로 삼았다.
2)대광대라는 말은 긴 대나무 장대(십자형의 네 길 정도의 대나무)와 서낭당 각시 인형을 가지고 다니면서 스스로 "대광대 들어 왔소."라고 자처한데서 비롯된다.
3)솟대쟁이가 쌍 줄 위에서 노는 것과는 달리 이들은 대나무 끝 십자형에서 노는 것이 다르다.
4)이들은 장대 타기를 약 20여분 한 후 탈을 쓴 5방 신장의 춤과 중, 양반, 말뚝이과장과 영노, 할미,영감 과장을 끝으로 사자춤 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심이었다.
5)이들은 최치원의 『향약잡영5수』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다.
이들은 경상도 여러 지역에 오늘과 같은 5광대와 야유(들놀음)을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6)이들 중 경상도 초계군 밤마리(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 일전 기간 정착한 것이 붙박이 예인 집단을 형성케 하는 동기가 되었다.
8)오늘날과 같은 유형으로 붙박힌 5광대 지역으로는 산청, 김해, 마사, 진동, 고성, 통영, 거제 지역 등이 있고 들놀음 분포 지역으로는 동래, 수영, 부산진 지역이다.
9)떠돌이 대광대패는 기층 민중 출신이지만 붙박이 5광대나 들놀음에는 중인 출신들이 주도하였다.
****************************무동패*********************************
1)두 어깨 위에 무동을 세우고 춤과 재주를 넘는 것으로 '무동'의 다른 말은 '동니''동구리'라 불렀다.
2)무동 한 사람을 어깨 위에 세웠을 때는 2층거리라고 하고 무동패는 2층거리부터 5층거리까지 있었다.
****************************얘기장사*******************************
1)얘기장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 구연자와 2-3인의 악기잽이로 편성하였다.
2)이들은 일정한 장소를 선택하여 옮겨 다니거나 집집마다 방문하여 구송하였다. 이들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대동한 잽이의 음악에 따라 더 극적일 수 있다.
3)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의 글로 보이는 조수삼의 『추재집』에 의하면 이 기간 전문적인 이야기꾼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전기수같은 사람이 그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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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각쟁이패*****************************
1)지체부자유자들이 해금이나 퉁소 등을 가지고 남의 집 안 마당에서 판 놀음을 하는 예인 집단
2)풍각의 '풍'은 풍류나 풍악을 말하며 '각'은 삼현육각 같은 악기 편성 혹은 총각이나 다각(절에서 차 일을 맡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풍각은 악사들이나 그 음악을 말한다.
음악적 특징은 대체적으로 님요 음계 제 2형(미솔라도레)에서 미, 라, 도를 골격으로 삼은 니나니 가락과 봉장취, 시나위 음악이 중심이다
3)시나위나 봉장취 또는 판소리가 신청의 음악이고 보면 풍각쟁이패도 신청에서 떨어져 나온 떠돌이 예인이 대부분이다.
4)15세기 풍각쟁이패는 원래 백정 출신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서 신청 출신으로 대체가 되었다.
5)남사당패 : 광대패와 함께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기도 한 대표적인 예인 집단이다.
6)남사당패는 35-50명의 구성원들이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 놀음) 등 여섯가지 대표적인 놀이를 가지고 각 고장을 떠돌며 연행을 함
7)꼭두쇠 : 남사당패의 우두머리로 패를 대표하며 절대 권력을 가진다
8)곰뱅이쇠 : 꼭두쇠를 보좌하며 다음 가는 실력자로 1∼3명까지 있으며 하나는 마을 유지를 찾아가 연행 판벌림에 대한 허가(곰뱅이)를 맡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먹거리를 해결하는 글곰뱅이 이다
(*글은 남사당패의 은어로 밥을 가리킨다) 또 한 사람은 '모총"으로 금전 출납을 맡는 사람이다.
9)뜬쇠 : 분야별 선임자이며 구 분야의 수석 잽이나 수석 연행자와 겹쳐있기도 하다 예로 꽹가리인 경우 '상공운님 또는 상쇠라고 부르는데 그가 뜬쇠이기도 하다. 뜬쇠는 차기 꼭두쇠 후보자로 보통 14명으로 구성된다. 차기 꼭두쇠는 전체 회의를 통하여 선출된다.
그러나 상쇠와 덜미쇠(꼭두극 주조종자로서 선임자)가 후임으로 추대되기도 한다. 뜬쇠 아래 가열과 삐리를 둔다. 삐리는 남사당패에 처음 들어온 어린 소년을 말한다. 삐리는 남사당패가 1900년대 이전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만의 집단이었기에 여자의 역할까지 하였다.
10)남사당패는 장시나 조창의 경우와 달리 떠돌이 예인 집단이라 하여 함부로 마을을 들어갈 수 없었다. 대체적으로 마을의 두레패와 사전 교감을 이루고 난 뒤 곰뱅이를 텄다.즉 지주와 같은 마을의 최고 권력자에게 곰뱅이(허가)를 받았다. 이 일은 곰뱅이쇠가 맡아서 한다.
11) 곰뱅이를 트는 동안 남사당패는 누런 영기를 앞세우고 마을이 잘 보이는 언덕에서 취군 가락으로 풍물과 재주를 보여준다. 허락이 나면 길군악을 치며 마을에 들어가 마당에 자리를 잡고 공연준비를 하며 한편 마을을 돌며 길놀이를 한다. 남사당이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으레 박탈 공연을 한다.
12)경기도 안성이 각종 예인패가 집중된 지역으로 이것은 안성의 청룡사가 예인 집단을 보호하고 육성하였기 때문이다.
13)전국적으로 40여개의 패들이 있었으나 '신파' 극단과 농악대에 흡수되기도 하고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1930년대에 전승의 맥이 끊어졌다.
14)남사당패 놀이 중 박탈(족탈)은 1900년대 직전에 박춘재에게 독자적으로 이어져 광무대를 중심으로 공연하다가 이동안에게 전수되었다.
15)줄타기 종목은 김관보와 이봉운으로 이어지다가 임상문과 이동안으로 이어져 역시 광무대의 주요 공연 종목이 되기도 함.
*****************************굿중패********************************
중들이 변장하고 법고와 징을 치며 고사를 비는 재이다. 이들은 법고와 범패로 복을 빌어주는 것이 주된 분야이다. 대개 가을걷이가 끝나고 변장한 중들이 긴 장대를 앞세우고 촌마을을 돌며 집 앞에서 굿을 하면 집 주인이 고사 치르는 선반(고사반)을 마루에 내놓고 이어서 상쇠가 고사와 범패로 복을 빌어준다.
불가에 재물을 헌납하려는 사람이 앞다투어 환영한 패이다. 그러나 굿중패가 절과 관련된 기존의 사당패, 걸립패, 중매구패와 교류하면서 공연 종목이 늘다가 남사당패처럼 발전하여 갔다.
2.붙박이 예인집단
****************************선소리패******************************
1)서서 부르는 소리로 좌창과는 구별되며 또 민요에서의 베기는 부분과는 구분된다.
2)이들은 장구를 맨 사람이 소리를 메기면 소고를 든 사람(4∼5명)이 제창으로 앞소리를 받는다. 소리를 받는 사람은 일렬 횡대로 서서 춤을 추며 앞뒤로 움직이며 주로 산타령을 부르기 때문에 '산타령패'라고도 한다.
3)이들이 연주하는 곡목은 보념, 화초사거리, 양산도, 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경복궁타령, 개고리타령 등이 있다. 선소리패들은 산타령을 비롯하여 나머지 노래를 내리 부른다.
4)보념과 화초 사거리는 전형적인 중모리 장단에 남도의 소리조여서 이 노래들은 남도 선소리패들의 영향이 컸다.
5)반면 경기와 서도 지역의 선소리패들은 그 중심적인 노래가 산타령이었다. 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 등 4곡이 연가곡식으로 이루어진 노래이다.
6)선소리패가 붙박이 예인 집단으로 형성되는 데에는 사당패와 같은 떠돌이 예인집단의 영향이 컸다. 즉 선소리패들이 부르는 산타령이 사당패의 『흥보가』나 『변강쇠가』중에서 부르는 『염불』과 같기 때문이다
7)19세기에 사당패 떠돌이 집단 중에서 붙박이 선소리패가 도시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다. 경복궁 낙성식 때 대원군은 여러 예인 집단을 불러 민악 큰마당을 펼칠 때에도 유명 선소리패들의 연행이 있었다.
8)선소리패가 사당패에서 붙박이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발달한 한강, 용산, 마포, 지호, 서호 등 5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점차 상설 시장이 있는 서울 내륙지방으로 이동하였다.
9)뚝섬패, 과천패, 호조다리패(진고개 월선이패), 청패, 쇠붕구패, 한강패, 서빙고패, 등이 있었다.
**********************평양의 날탕패*******************************
각종 연행을 하는 패로서 1908년에 서울에 와서 그 이름을 날렸으며 선소리패인 서울의 뚝섬패와 함께 각종 무대 공연을 장식하고 있었다.
***********************서울의 사계축패***************************
1)서울 역 앞에서 만리재→ 청파동에 이르는 지역 즉 사계축을 중심으로 활동한 소리패로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집장가, 형장가, 십장가, 방물가, 등 '잡가'를 불렀으며 <추교신><조기준><박춘경> 등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2)그러나 선소리의 잡가는 20세기 벽두에 들어와 당대의 모든 성악곡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모하였다. 즉 기존의 잡가뿐만이 아니라 가곡, 가사, 시조를 구가, 그리고 신민요와 창가(쇼오카) 등을 신가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고 이를 전부 잡가라는 이름으로 수용하였다.
*****************************탈춤패********************************
1)이 탈춤패는 주로 중이들이 주재하였다. 이 사실은 탈춤패의 연행이 도시보다는 주로 읍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2)봉산탈춤이 주로 18세기 중엽에 성립한데 이어서 19세기 초 양주별산대와 그 직후의 탈춤패들이 세시 풍속과 관련지어 성립 발전하였다. 이 분야의 탈춤패들은 읍을 중심으로 향리 집단들이 읍의 제의(祭儀)와 세시 풍속을 통하여 읍권을 독점하고 이들만으로 읍권을 독점하려고 한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분화되어 가는 향촌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고 있엇다. 그로 인하여 이들은 19세기 각종 농민항쟁에서 농민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3)5광대패, 들놀이패 : 중인 주재하에 농민, 천민 출신들이 연행한 비전문 예인 집단이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이들은 제의나 세시 풍속 등 일전한 날에 연행을 통하여 왕권을 중개하고 읍권을 독점하려는 배경에서 발달할 수 있었다.
4)한편 중인들은 5광대의 성립과 발전뿐만이 아니라 전주 대사습을 통하여 판소리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고 황해도 해주 감영에서 탈춤 경연을 주도한 것처럼 체제 지향적 신분 상승을 꾀하고 민악을 상층 문화 감수성으로 이끈 장본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