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7 부활절 두 번째 주일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1027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204 권시혁
예배로 부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8:17-19)
예배 기원
영원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실 주님! 부활의 감격 속에서 지난 한 주간을 보내게 하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에 다시 한 번 저희들을 성전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이곳에 오셔서 저희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아 주옵소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의심하는 도마에게도 보이셨듯이 오늘 이곳에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귀한 모습을 보여주옵소서. 예배하는 이 시간 부활의 주님을 뵈올 때에 우리 안에 걱정과 근심과 의심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기뻐 찬송하세(159장)/ 구원 받은 천국의 성도들(244장)/주의 곁에 있을 때(401장) /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405장)/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456장) /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484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536장) / 그 큰일을 행하신(615장)
고백의 기도
긍휼이 많으시며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저희들은 주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어긋나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한 것과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하셨지만 저희들은 죄악 가운데 거하며 속되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건만 저희들은 멸망으로 이어진 넓은 문을 좋아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포기한 채 먹고 마시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주님, 가슴을 두드리며 이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0407 예배를 맛본 신앙은 다릅니다. 요4:19-24.
☞ 마음 문을 열고
한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도 찾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왔습니다. 그녀에게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이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남성 편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남성 지배 사회에서 배척과 냉대를 받아 상처 입은 영혼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물을 길으러 왔지만 영혼의 목마름이 더 깊었습니다.
이 영혼의 목마름은 현대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오늘날 놀이기구와 게임 산업,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은 스포츠 스타들은 인간의 목마름을 잘 대변해 줍니다. 현대인들은 남편 다섯을 바꾸듯이 다양한 것을 바꿉니다. 직장을 바꾸기도 하고,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를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직장도, 남편도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고립돼 있습니다. 주님은 그녀와 대화하다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정직하게 반응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인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주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났지만,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그녀는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점점 빛안으로 들어오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조금씩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19절). 영적인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화하는 가운데 앞에 있는 이 남성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존재인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서 여인은 어떤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며 예배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20절). 왜 갑자기 예배 문제를 꺼냈을까요? 어떻게 보면 상황에 안 맞는 질문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이 첫 번째 꺼낸 주제는 예배였습니다. 여인의 갈증은 남자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큰 목마름의 원인은 예배였습니다.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주옥같은 예배론을 펼치십니다. 마치 ‘삶의 핵심은 예배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주님은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십니다. 여인의 관심은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예배의 장소, 이것은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 사람들 모두에게 최고의 이슈였습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정통성이 있는 예배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꼭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배의 정통성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통은 사람이 만든 것일 때가 많습니다. 전통은 진리가 아니기에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전통을 진리화하거나 정형화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고수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 새로운 도시로 교회를 옮기려고 하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시간, 그 장소, 그 지역에서 예배하는 것이 전통이 되고 진리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초점은 사마리아 여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1. 예배는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의 변화로 ‘영과 진리의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이 예배는 첫째,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장소나 어떤 조건, 형식, 방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서 교회에도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예배’라는 용어가 탄생했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방법론에 관한 것으로, 본질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예배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장로교 예배, 침례교 예배, 순복음교회 예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예배, 노년층의 예배가 있고, 전통적인 예배, 현대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람이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 예배를 선호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다양한 예배는 주로 사람들이 만든 문화적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핵심이 어떤 방법이나 조건, 상태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정해진 공간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헌금 드리는 요식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닙니다. 영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왔지만,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영은 어떤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로 영의 교통이 끊겨버렸습니다. 영적 기능이 상실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에서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영의 상태입니다. 영의 기능이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영은 예배 안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장소나 찬양단의 악기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모였느냐도 핵심이 아닙니다. 예배에도 문화적인 기능은 있지만, 문화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예배 경험입니다. 예배도 하나의 의식이기에 형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틀 안에 갇혀서 그 의식이 우상이 된다면 형식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영상 예배에 익숙해진 분들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이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어디에 있든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인지 물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영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공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편의주의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우리에게는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 초점을 맞추면 자연스럽게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참된 예배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영과 진리의 예배는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예배는 신자에게 생명과도 같습니다. 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아무리 드려도 허전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이 참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렸음에도 허전하고 짜증나고 신경질이 난다면, 그 공허함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또 다른 남편을 찾습니다. 이런 기계적인 예배는 경계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드리든 타성에 젖은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타락은 예배에서 옵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이 있어야 예배의 문이 열립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영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영이 죽어 있으면 예배의 참관자는 될 수 있지만 예배자는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철저히 영의 일입니다. 영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단순히 자신의 감정에 겨워 부르는 게 아닙니다. 입술로 부르는 것과 영으로 부르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다릅니다.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말씀에 영으로 반응합니다.
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 우리 영혼에 회복과 평안이 일어나고 영혼에 묶여 있는 것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예배의 결과입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깊이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2.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우리의 입맛과 기호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나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기 쉽습니다. 가끔 “예배 참 좋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좋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 답이 자기 기분과 연결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기호, 분위기가 예배의 초점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몰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 몰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면 그분에 대한 예우, 그분에게 합당한 최상의 것을 올려드리고 싶어집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예배입니다.
본문 22절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은 산 아래서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우상은 무지함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핵심은 우상 숭배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칼뱅은 “인간은 우상 제조기다”라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우상마저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금송아지 우상이 들어있습니다. 우상은 일종의 ‘욕망의 투사’입니다. 자기 욕망이 우상에게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신을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저절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수준에 걸맞은 대우를 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목말라야 합니다.
요즘 시대를 ‘지식이 풍요한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어려워졌습니다. 목회도 힘들어졌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평신도들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의사들도 지금은 환자들이 연구하고서 병원에 온다고 말합니다. 정보와 지식이 흘러넘칩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내가 원하는 지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작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지식에 대해서는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알아야 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어지간한 기독교인보다 잘 압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에 관해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무신론자들도 무조건 안 믿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무신론을 신앙화하기 위해 학문적 체계를 가지고 안 믿습니다. 우리는 믿는 것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믿어야 합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에 대해서만은 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식 중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다른 것을 아무리 알아도 무식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인간이 왜 교만해집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예배가 무너졌고, 우상 숭배가 만연해졌습니다. 평생의 삶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행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것보다 더 나은 지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수준에 따라 예배도 달라집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와는 정반대인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행위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게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해드리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를 따르는 일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일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자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의 예배로 하나님께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일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상이 부실하다면 예배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된 예배는 삶을 바꾸어 놓고도 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3절).
여기에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는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은 당시에 진정한 예배자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예배는 사백 년간의 영적 암흑기를 통과하면서 죽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예배가 일어났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이면 예배로 나아옵니다. 하지만 모두가 참된 예배자들일까요? 하나님은 예배 의식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받으십니다. 그래서 예배 순서가 아니라 예배자의 태도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은 예배드릴 마땅한 공간이 없다고 투정하지 않으십니다. 예배를 위한 쾌적한 공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예배자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영광과 접촉하는 일입니다. 신앙이란 예배에 대한 눈뜸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체험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물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목마르지 않은 물을 원했습니다. 세상에 목마르지 않은 물은 없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갈증은 주님을 만나고 사라졌습니다. 예배가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녀는 예배를 드리긴 했지만,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 영혼을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허전함, 외로움을 잠재울 수 있는 분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 타락이 찾아옵니다.
태양이 중심을 잃으면 세상에 대혼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예배 자리의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은 ‘나’입니다.
그런데 목마른 내가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 비로소 자기 숭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는 우상이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참된 예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에 머무십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며, 얼마나 답답할 때가 많습니까? 오직 예배로 승부를 거시길 바랍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를 찾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큰 소리로 “네가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의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로 인해 신자는 신자가 되고 교회는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참된 예배로 초대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녹여내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