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엔 늘
그리움의 정물화가
소나무의 옹이로 박혀 있다
고창의 큰딸,
철 없는 스물의 나이에 남자를 따라가
스물일곱에 애가 셋이고......
그리고, 순창 요양병원의 장모는
안타까움의 정처없는 수정체다
추석지나고 찾아 뵌다는 기약이
억새 피는 가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군산 지나 김제평야쯤의 서해고속도로]
아내가 손가락으로 오른쪽 둔덕의 갈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껀 '갈대'야.
그리고 왼쪽을 가리키며 또 말한다.
"이쪽 껀 '올대'고.
재밌어서 낄낄 웃었다.
[법성포 야경]
구시포에는 카페가 없다 하여
언젠가 왔었던 법성포로 아이들과 갔다
안사돈도 같이 갔으면 좋으련만
근자 유감의 관계인지라ㅜ.ㅜ
[밤의 법성포구]
낯의 얼굴은 본 적이 없어
법성포구는 쌩뚱맞은 외부인
동서남북, 들고 남을 모르는
좌표없는 이국의 항구
머언 어느 항구의 사연이
이토록 애잔하게 출렁이느뇨
해 저물어 어둑신한 포구에서
점적하는 눈물
딸네의 관계망 속에서 생몰하는 법성포구
[사위와 딸]
사위는 큰딸의 이 포즈를 어이없어 하고
나는 큰딸의 모습이 살아있는 듯해 귀엽다
"뭐가 흉이라도 돼?!"
딸은 트라우마까지도 벗어던진 듯 탈속함까지 보여줬다
대견하고 놀라웠다.
[재철이와 서정이]
재철이는 공익요원이다
둘은 순수하게 사귀고 있다
결혼은 서정이의 결정에 달린 듯
나는 예의 바르고, 균형감각 좋고
공잘차는 재철이가 좋다.
[내딸]
눈의 쌍커풀을 밀어 소성시켜
사진을 찍게 만들던 딸
"행여, 얼굴에 칼 대지 말아라.
네 코는 정말 훌륭한 코니라."
나의 부탁의 말이다
딸이 무심히 던진 말 중에
"복코" 운운하면서 복코를 부정적인 의미로 말을 하는데
내 딸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단연코 코다.
[부녀들]
[사위와 함께]
다정하게 찍으라고 요구하여
작위적으로 취했던 포즈
내 장인과의 시절을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지요만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오
"사위야, 그때 험악한 말을 내가 했지?! 미안하다."
"니들이 오손도손 살아주니 내 참 고맙구나."
내 말에 사위가 겸양의 모습을 보여줘서 기쁘다.
[카페 내 컴퓨터 앞에서 연우와 함께]
[귀로의 농로에서]
"우렁이로 농사지은 거예요."
사위가 자신의 논두렁에 차를 세우고 하는 말
"물속에 자라나고 있는 풀을 우렁이가 먹어 치워요."
벼는 이미 물 밖으로 나와 있으므로ㅎ
도정한 쌀 한가마니 차에 실었다.
[다음날 아침 뒷산을 홀로 오르다]
[올려다 본 하늘의 문양]
[올라갈 방향의 능선]
[진행해온 길을 돌아보다]
[등산로 능선 좌측조망]
[구름위로 선운산 쪽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정상부에서 만난 태양]
태양은 큼지막한 얼굴로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 가깝다
이 순간 문득 이곳 산하를 주름잡은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증산교의 강일순
원불교 창시자
왜 이곳에 신흥종교가 죽순처럼 신생했을까?!
넓은 농토와
사나운 기개
한양에서 멀다... 는 이유?!
장사산의 높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올라가면서 본 하늘과 태양을 보면서 어떤 전율을 느꼈다.
[정상부의 삼각점]
[산불이 2년전쯤 났고,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남도의 풀, 아마도 봄에 일찍피는 꽃일 터이다]
[하산길의 산국]
[장사산 해발 260m]
[인가 끝지점에서 본 갈대속의 코스모스]
[둘째 손주 똥구멍을 씻어주는 서정이ㅋㅋ]
[하장리 출발 전, 마당의 손녀]
[밝고 예쁘고 현명하게 자라다오!]
[둘째 도윤이는 어데갔지?!]
[사위네 가족]
뒤에 보이는 건물은 마을회관
[순창 옥천요양원 뜰의 꽃사과]
[파초]
장모님 침대에서 바라다보이는 파초
"저 파초에 비가 내리면 '파초우'란다"
내 말에 장모께서 한말씀 하신다
"저것이 토란처럼 알뿌리도 있어..."
그 말씀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다
처음듣는 소리
"엄마, 이사람 누군지 알아요?"
영례가 장모의 기억력을 긴가민가해 나를 가리키며 물었고
세상에나 장모의 다음 말씀이라니,
"글쎄, 저이가 누구래?"
그래서 나 충격을 흡수했다
원래 잊고 싶은 사람은 마음에서 몰아낸다는
의학적 용어가 생각났기 때문
잠시 후 영례가 딸을 가리키며 "얘는 엄마." 하니
"서정이잖아" 하며 빙그레 웃는다
이때 나는 장모께서 장난치시는 것을 캐치했따ㅋㅋ
[태인 가는 길의 옥정호 댐 위에서]
장모께선 자주 들리지 않는 사위가 섭섭하셨나 보다
큰 처남을 시장에서 만나 처남댁이 임파선으로 서울병원에 다닌다는 예기와
요양원 비용이 많이 들어 옮길 예정이라는 예길 듣다.
[막걸리 주조 장인 인증마크]
구절재에서 감을 따고ㅎ
길가의 반야생 감들
태인의 이곳을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고
오늘 금산사 가는 길에 반드시 들르리라 하였었다
막걸리 주조의 쓰리 탑
산성막걸리
송명섭 막걸리
대전의 모 막걸리
입맛을 다시며 이곳까지 왔건만,
[주조장 전면에서]
라디오 음악소리만 텅 빈 가을하늘로 퍼지고 주인은 없었다
주변에 원불교 교당이 있다.
[누룩]
주위를 들러보며 누군가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정원의 가을꽃만 정갈하게 핀 송명섭 주조장
정식이름은 '태인합동주조장'
[파노라마]
왼쪽부터 오른쪽 끝의 기와집까지가 주조장이다
허망한 마음을 접고 골목길을 나오면서
지나는 동네 노친께 물었다
원불교 교당 근처라 지나는 행인들까지 웬지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겼다
"송명섭 막걸리를 근처 가겟집에서 살 수 있나요?"
"아니요, 그렇켄 팔지 않아요."
뭐 이런 황당부르스도 다 있을까 싶다
명장 칭호를 받으면서
주위 이웃들은 맛보지도 못하게 한다??
원거리의 주문만 받아 만는다?? 허참
[금산사 가는 길]
멀리 공제선에 걸린 산맥이 모악산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에게 유폐되어 시름에 젖던 금산사
증산교주가 득도하기 전 금산사에서 도를 닦았고
입적할 때 금산사 돌부처가 되어 있겠다는 말을 남겼다...는 금산사
찾아가는 길은 비산비야같아서 마침 길가에서 익어가는 쑤시감이
낮은키에 많이 매어달려 풍요롭기 그지 없었다
견훤이 머물렀던 곳이니 풍부한 물산이 있는 곳일 터,
[거의 금산사에 가까이 왔다]
앞 우측의 건물은 금산사와 무관하다
왼쪽으로 하강하는 산자락 뒷편이 금산사다.
[입구 표지석]
모악성지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인데 그 성스러움은 무얼까?
이곳에 도착했을 때 14:00쯤 되었다.
[다리 건너 매표소]
[입장료 어른 3,000원]
[매표소 지나 개울 왼편으로 인공폭포가 조성되어 있고]
[올라가면서는 이 글자를 해독하지 못했다]
'미륵성지'라는 것을 기념품 판매대에서 물어 알았다.
[은행잎이 곱게 물든 진입로]
은행나무 환영하는 꽃인사 터트리고
수백년 모악정기 서늘한 기운
어느 고승이 대오大悟의 환희로 이 길을 올랐을까
어느 법사가 미력을 슬퍼 해 이 길을 내려갔을까
천년 고목은 말없이 다만 꽃웃음 짓고 있다
[군밤을 사 까먹으며]
앞에 보이는 건물이 일주문.
[일주문에서]
금산사를 구경하고 밥을 먹자!
오면서 백설기두 먹었구
군밤도 그렇게 해서 샀고ㅋ
가족과 여행을 한다는 여유를 가지고
서두르지 말고, 저녁늦게 고속도로를 타도 좋타는 생각으로
가을빛 찬연한
금산사 경내에의 궁금증을 한아름 안고
[일주문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기둥]
대단한 굵기의 나무더라
국내에서 생산됐을까 싶은
이러한 굵기쯤에 이르면
나무로서도 도 튼기라
도 튼 사람앞에 예의를 갖추듯
나무기둥 앞에서 감탄을 퉁긴다.
[일주문을 뒤로 하고]
[안내문]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중창,
법상종을 열어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하여 유폐되었었다고 전해온다.
임진왜란 당시 처영뇌묵 대사 등 일천여 승병 훈련장이 되기도 했다.
한국불교의 정화와 중흥을 위해 전력하던 월주화상이
1961년 주지로 부임한 후 도영.도법등 도제들과 사부대중의 원력을 모아
대적광전, 미륵전, 대장전, 하서전, 방등계단, 삼성각, 적멸보궁 등을 중건 중수하고
보제루, 일주문, 상서전, 서래선원, 범종각, 종무소, 향적당, 보현당,
설법전, 만월당, 성보박물관, 적묵당, 나한전, 조사전 등을 새로 건립하여
대사구를 완전복원하고 확장하였다.
[금산사 평면도]
광대한 도량이다.
특히 미륵전이 일품이었다.
[금산사 경내로 진입하는 다리 위]
[금강문을 지난다]
[나한전]
기괴하고 장대한 '역사'들이 도열한 곳을
두 군데 지난다
역사의 손에 잡힌 용은 도마뱀 같다ㅋ
세속에서 묻혀 오는 사악한 기운이
이 문을 통과할 때 죽는다.
[나한전을 나서서 정면방향]
저 건물 뒤가 금산사 경내이다.
[진표율사 일대기]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미륵신앙 대가람으로 중창한 祖師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완산주(전주)에서 부 정진나마와 모 길보랑에게서 태어났다.
12세에 아버지 사냥을 따라갔다가 개구리를 잡아 화살촉에 꿰어두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듬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전 해에 잡아둔 개구리들이 가엾게 울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지난날의 행동을 마음 속 깊이 뉘우쳤다.
이에 출가하여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사미를 받았다.
율사의 나이 23세에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망신참법으로 수행하였으나 정각을 이루지 못하자,
내생을 기약하며 바위에 투신하였더니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나타나 율사를 구하였다.
그 후 다시 7일간 용맹정진하여 지장보살의 현전수기로 계율을 받았으나
율사는 미륵보살에 뜻이 있었으므로 변산 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한 끝에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 두 권과 증과의 괘쪽을 받았다.
이후 율사는 금산사로 자리를 옮겨 금당(미륵전)을 짓고
그 안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하는 등 금산사를 미륵도량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현세에 용화세계를 건설하고자 전생에 지은 악업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열가지 선업을 닦도록 한 것이나, 미륵으로부터 전해 받은 점찰경을 바탕으로
점찰법회를 봉행한 것 등은 모두 율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불법의 교화가 삼한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금산사를 중창한 후, 율사는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등으로 자리를 옮겨
미륵신앙의 대중화에 노력하였으며 삼국통일 이후 이반된 민심을 위로하는 일에도 크게 애쓰셨다.
이에 경덕왕은 진표율사를 경주에 초청하여 보살계 계단을 열게 하고,
율사의 미륵신앙 대중화 운동을 크게 지원하였다.
-이렇게 큰 인물이었다면 진표율사의 선시仙詩도 있을 법하다-
[선제루]
아내가 김제에 산다는 고향친구와 통화하고 있다.
맛집을 물어본다고ㅎ
선제루 밑을 통과하면,
[드뎌~~ 금산사 경내 파노라마]
이렇게 드넓은 경내가 펼쳐진다 와아~~~
우측에 멋드러진 건물은 티비드라마에서 보았던 미륵전이다.
[작은 감나무에 매달린 노란 감]
[바짝 다가가 산사나무가 화면에 나오게ㅎ]
[기념촬영]
타이머 셀카치곤 잘 나왔네요.
[미륵전 뒤의 모습]
아마도 자연 통풍구로 보인다.
[한마디로 미륵전이 압권이었다]
[오층석탑과 부도탑]
나는 아무리봐도 6층탑인데...ㅜㅜ
[오층석탑에서 선제루 방향조망]
[미륵전을 배경으로]
이 두 청춘이
먼 훗날 금산사추억을 어캐 나눌런지
한지붕에서 추억할까
멀리 떨어져 아득하게 안개꽃으로 끄집어 낼까
나로선 알수 없는 일이지만
미륵전의 불상은 알고 있겠지
[연출]
"재철아, 저기 좀 바라봐 바바."ㅋㅋ
고목 품안에 갓자라난 애송이가 겁없게도
증조할벨 뚫고 하늘로 솟았네
증조할벤 암 말 없고
애송이는 하이얀 피부의 팔을 벌려
꿈에 부푼다
이 자연을 바라보는 쉰 넷의 사내도
말없이 작은딸을 바라다 본다
[대적광전 창살문양]
[금산사 추녀의 현란함]
[천년고찰의 고즈녁함을 만끽하며]
탑과 미륵전 사이로
김제.전주의 진산 모악산이 보인다.
[기다림]
사진사로 보이는 이가
앵글을 거치해 놓고
작품을 기다린다.
이제 금산사 경내를 벗어나 매표소쪽으로 내려간다.
[금산사 쪽의 석양]
[한일회관]
아내의 김제 친구는 맛집이 김제로 와야 있다고 했고
우리는 배고파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푸짐하고 전부 맛있다.
특히 막걸리는 단물흐르는 홍시처럼
[주차장에서 바라본 금산사 입구의 먹자골목]
[김제 시내를 벗어나는 참 노을 지다]
귀로의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재철이에게 맡겼다
깨어보니 모르는 곳(공주-당진사이)에 들어서 있었고ㅎ
하지만 피로는 싹 가셔 있었다
운전대를 교체하고 새로난 길로, 평택-시흥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무탈하게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