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김종건옮김, 범우사, 1998년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아일랜드), 의식의 흐름 등의 문체적 변이, 모더니즘 그리고 <율리시즈>로 각인만 된 작가다. 다시 <더블린 사람들>부터 제임스 조이스 다시 읽기를 하려고 한다. <단편집>을 읽고서 덧붙여 생각되는 것은 '마비'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종교적 영향력 하에 놓였던 그의 조국 아일랜드(더블린), 의식의 흐름, 에피파니, 신화와 언어등의 개념이다. <율리시즈>를 다시 읽으면 또 뭐가 추가될까? 고백하자면, 예전 읽었을때 제임스 조이스와 교감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역시, 제임스 조이스가 숨겨놓은 보였다 사라졌다하는 수수께끼를 발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복잡한가를 한번 물어보면, 단순한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로 생각하기까지 발전했다. 문체적 시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결국에는 어머니가 요구하시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신이 될 수도 있는 예술을 선택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하지 않은가. 결국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디덜러스의 어린 날 혹은 젊은 날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그 옛날 옛적 정말로 살기 좋은 시절이었지 그때 음매소 한 마리가 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어 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던 이 음매소는 터쿠 아기라는 이름을 지닌 예쁜 꼬마 소년을 만났지.....
아버지는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외알 안경을 통해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털이 더부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기 터쿠였어. 음매소는 베티 번이 살던 길을 따라 내려왔지: 그녀는 레몬 향기를 캔디를 팔았어.(21쪽)'
이렇게 시작하는 작품이다. 다시 보기를 하고서야, 이제서야 제임스 조이스의 장점인 의식과 오감이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보는 듯한, 보이는 한 사람의 외양만이 아닌 그 사람의 내면과 의식체계까지 따라가진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감각하는 코로 냄새 맡는듯한 느낌의 작품이다. 예전 공감이 어려웠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놀라울 뿐이다. 장점은 언젠가는 단점으로도, 단점은 또한 어느 순간 장점으로 전환되기도 하다는 것을 제임스 조이스 작품을 읽어가며 새롭게 인식한다. 어느 때의 곤란이 즐거움으로도 작용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감각할(될) 수 있는 표현, 신의 이미지로 비쳐지는 햇빛 등이 마치 진정 생명체로 느껴진다. 물론 나의 감상이 제임스 조이스의 의도나 생각과 제대로 겹쳐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율리시즈>에서 수수께끼를 남겨두어, 그 자신이 불멸한다는 그런 의미적 보물찾기는 아니지만, 뭔가 즐거움이 찾아지는 책읽기다.
스티븐 디덜러스가 처음 예수회 학교인 클론고우즈 우드에서의 자신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스티븐 디덜러스
기초반
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
킬데어주
아일랜드
유럽
세계
우주"(32쪽)
자리잡기를 처음부터 생각했던 그는 결국,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결정하며 태양을 향하는 이카루스가 되는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다. 종교적인 자리, 어머니가 요구하는 자리, 국가 속에 포함된 자리를 그는 예술을 선택하며 떠난다.
어떤 언어로 하느님을 부른다 해도, 하느님은 하느님 일뿐이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부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이 중요한 현실이라는것, 누가 부르냐가 중요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스티븐은 어릴적 종교로 인해 가족의 분열을 체험했던 그 기억으로부터, 권위의 상징인 종교를 체험하고, 차차 수렁에 빠진 자신을 벌하고 구언하는 종교를 체험한다. 그렇지만 그는 갇혀진 안주보다는 비상의 위험을 선택한다. 물론 거기에는 어떻게 이름불러도 존재하는 신에 대한 기도가 믿음의 증거로 자리한다.
'아널 신부가 화를 내는 것은 죄일까 아니면 학생들이 게으름을 피울 때 그들에게 화를 내면 공부를 보다 잘하게 되니까 화를 내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면 그는 화를 내는 척하는 것일까? 신부님은 죄가 무언지를 알기 때문에, 또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화를 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그가 한 번이라도 잘못해서 화를 내면 어떻게 고백할까? 아마 그는 고해를 하러 부교장 선생님에게 가겠지.(75쪽)'
1707년 영국과 스코틀랜드와의 합병에 이어, 1799년 아이랜드 의회를 해산하고 영국의회와 통합하는 것을 아일랜드 주교가 찬성하여,1801년 대영제국이 성립된 역사적 배경이 있다.1801년 성립된 대영제국은 1922년에 남아일랜드는 독립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아있어, 끊임없는 분쟁를 경함과 아일랜드의 역사다. 그 분쟁의 실체인 IRA의 존재가 있다. 지금은 비록 휴전협상 아래 조용한 듯하지만, 언제 어떻게 흘러갈까 궁금해지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다. 제임스 조이스를 통해 다시 분열과 균열과 균형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단편집에서도 살펴보면, 그당시 아일랜드의 마비는 성직자들의 영향이 크다고 제임스 조이스는 비판하는 것이다. 종교로 분열되는 개인과 개인이 있다. 단티와 아버지 디덜러스씨가 파넬의 죽음과 연관하여 싸우는 장면이다. 아버지의 말이다.
'우리는 성직자들에게 시달린 불행한 종족이야 과거에도 늘 그랬고 역사의 최후까지 언제나 그럴 거야(61쪽)'
'아일랜드에는 하느님이 필요 없어!(64쪽)'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지만, 단티가 악마, 모독자라 말한 후, 냅킨꽂이가 바닥에 떨어져 굴려가게 하고서 하는 악마라고 말하고 문을 닫고 떠난다. 이에 케이시씨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흐느꼈다. 그 사태의 제공자인 아버지는 어떤가? 어린 스티븐이 지켜본 모습이다.
'아버지의 두 눈이 눈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보았다.(64쪽)'
아버지의 사업은 어려워지고, 학교를 옮겨야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버지의 눈물과 허풍,술주정은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진 듯 보인다. 아버지의 자리, 신의 자리는 그에게는 사라진 듯 보인다. 그에게 신과 종교를 강요하는 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다. 하지만 그는 수도자의 길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구원을 기도한다. 스티븐 자신이 이름을 그로부터 따왔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의 명장名匠 다이달로스(Daidalos)에 대한 기도, 지중해로 떨어지는 그의 아들 이카로스(Ikaros)의 구언을 암시하는 다음의 기도로 작품을 끝맺어진다.
'늙은신 아버지시여, 늙은신 공장(工匠)이시여,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없이 저를 도와 주옵소서.(336쪽)'
이카루스가 깃털과 밀납으로 새가 되어 탈출했듯이, 비록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날개가 녹아 바다로 추락하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끝까지 기도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 비친다. 참회와 종교 안에서의 행복이다.
'그는 어두운 본당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의 말을 되새기며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그의 기도는 하얀 장미의 화심(花心)에서 떠오르는 내음처럼 그의 정화된 마음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진흙의 거리는 즐거웠다. 눈에 띄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온몸을 파고들며 사지를 가볍게 해줌을 의식하면서, 그는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그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그는 고백을 했고 하느님은 그를 용서하셨다. 그의 영혼은 다시 한 번 아름답고 성스러웠으며, 성스럽고 행복해졌다.
만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죽은 것도 아름다우리라. 다른 사람들과 평화, 덕망, 그리고 인내의 삶을 은총 속에 함께 누리고 사는 것 또한 아름다워라.(195-196쪽)'
그렇다고 종교에 대한 배반은 아니다.
'성체를 믿니?'라고 묻는 크랜리의 질문에 대해 스티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그걸 믿지도 않고, 믿지 않지도 않아(317쪽)'
이 작품을 통해서, 스티븐이 구가하는 삶은 자신이 머무르는 자리인식과 진흑을 거닐었다 할지라도 신께 고해성사하여, 다시 아름다움을 구하는 모습이다. 그는 삶에서 안주가 아닌 예술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여정이 되는 순간에서도, 신께 기도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비판이라기보다는 구원이라 생각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보여지는 단계(전체성)이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다음 다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 있을까? 우주의 다음을 무無로보고 있다. 큰 우주의 전체성 보편성을 모르는 자신의 왜소함을 말하기도 한다. 나의 위치는 어디이고, 나로부터 시작한 우주는 그 다음이 무엇인가?
'우주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無)다.(33쪽)'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찾고자하는 스티븐이다. 스티븐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예술론이다. 미지의 것, 없는데도 있어 보이는 것,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파란 장미로 말해보고 있다.
'들장미 피어 있네 파란 잔디밭에'라는 노래가 기억났다. 그러나 파란 장미는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몰랐다(29쪽)'
스티븐의 예술론을 들어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예술론과 스티븐의 미학과 예술의 세가지 형식에 대한 견해를 통해 초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뿔끄라 순뜨 꾸아에 비사 쁠아첸뜨"- pulcra sunt visa placent(246쪽) '즉 눈에 즐거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는 견해와 함께, 미를 위한 세가지 요소들을 말한다. 전체성(全體性), 조화 및 광휘가 바로 그것이다.
전체성에 대한 설명이다.
'너는 그걸 '하나'의 사물로서 인식한단 말이야. 너는 그걸 하나의 전체로 보지. 그것의 전체성을 너는 인식하는 거야, 그것이 '인떼그리따스'야(280쪽)' 조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이 '하나의' 사물임을 느낀 다음에 너는 이제 그것이 하나의 '사물'임을 느끼게 되지, 사물이 복합적, 다원적, 가분적(可分的), 가할적(可割的)이며,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고, 그 사물의 부분과 그들의 총화의 결과가, 조화적인 것으로서 넌 인식하는 거야, 그것인 '꼰소난띠아'지.(282쪽)'
이제 끌라리따스(claritas:광휘)을 말한다. 아퀴나스마저도 애매하게 말한 부분으로,
'물질은 다만 빛이라는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빛의 실체는 상징에 불과하다(282쪽)'
'미적 이미지의 밝은 광휘가, 미의 전체성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의 조화에 의해 매혹되었던 마음으로 명료하게 인식되는 순간이야말로 미적 쾌락의 밝고도 조용한 정지 상태, 즉 이탈리아의 생리학자 루이지 갈바니가 셸리(사그라져 가는 숯불로 비유)의 말에 거의 못지않은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여 심장의 황홀경이라 불렀던 저 강심(强心)의 상태와 아주 유사한 정신적 상태인 것야.(283쪽)'
예술의 세가지 요소인 전체성, 조화, 광휘에 대해 말하고서, 스티븐은 예술의 점진적인 세가지 형식에 대해 말한다. 서정과 서사, 그리고 극적 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 하나는 서정적 형식으로,'예술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속에 두는 형식이요, 그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과 남에게 간접적으로 연관시키는 서사시적 형식,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남과 직접적인 연관속에 두는 극적 형식(283쪽)'을 말한다.
' 극적 형식은 각 개인의 둘레를 흐르며 소용돌이치는 생명력이 각자에게 이와 같은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남녀 개개인이 고유의 그리고 신비의 미적 생활을 영위할 때 달성되어지는 거란다. 예술가의 개성은 애초에는 외침 또는 선율 또는 기분에 불과하지만, 이내 한 가닥 율동적이고 유연하게 흔들리는 서술이 되며, 마침내는 세련되어 그 존재를 감추고, 이른바 그 자체가 비개성화되는 거야. 극적 형식에서 표현되는 미적 이미지는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정화되고 재투사(再投射)되는 거지. 물질적 창조의 신비처럼 미적 신비가 달성되는 거지. 예술가는 창조의 하느님처럼, 그의 작품의 안에 또는 뒤에 또는 그 너머 또는 그 위에 남아, 세련된 나머지 그 존재를 감추고, 태연스레 자신의 손톱을 다듬고 있는 거야.(285쪽),강조는 인용자'
현현과 불꽃, 태양(햇빛), 신, 불의 발화, 빛와 그림자에 관한 제임스 조이스의 예술론이 성장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게 펼쳐졌다. 다만 스티븐의 강점은, 누가 알려주고 누가 안내해주는 것이 아닌, 옛 지식을 경유하여 스스로 자리를 찾아보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벗어나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그런 고로 분석가의 분석이 필요없는 인물로 생각되는 것 같다. 언제나 변화를 갈망하는 그이고, 스스로 반성해보는 그이다. 예술가만이 잠수부가 되어, 바닷 속으로 뛰어들어 탐험하고 다시 표면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견해다. 그럴까?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 대해 의식의 흐름, 신화, 상징으로 역자는 말하고 있다. 그 중 신화에 관한 부분이 작품에 있어, 전체적으로 적용됐다.
크레타 왕국의 예술적 거장 다이달로스는 미노스와의 명을 받아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감금하기 위해 미로를 설계한다. 이 미로는 너무나 정교하여,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했다. 한데 나중 왕의 미움을 사서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미궁에 갇히게 된다. 이 예술적 거장은 탈출이 육지와 바다에 막혔지만, 하늘은 자유롭다며, 깃털과 밀납으로 날개를 만들어 아들과 함께 탈출한다. 아들에게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에 밀납이 녹는다고 경고하지만, 반항아인 이카루스는 비상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충고를 추시하고 너무 높이 올라가 지중해로 떨어져 익사하는 운명에 처한다. 스티븐은 거장 다이달로스와 아키루스를 상징한다.
이 다이달로스 신화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자신의 운명과 상징적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 또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도 있다. 메르세데스는 스티븐에게 생의 보물로 자리하고 있다.
읽다가 남들도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역시 나도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 외알안경과 스티븐의 안경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시력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안경은 이 작품에서 스티븐이 영웅이 되기도, 한편 놀림감이 되기도 하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진흙이 있다. 이는 인류의 기원이 진흑을 통해 빚어진 존재라는 견해와 진흙탕(수렁)에서 빠져나오는 탈출의 의미다. 비상을 상징하는 새가 보여진다. 스티븐은 이카루스처럼 더블린을 떠나, 다른 곳을 향한다. 비록 너무 가까이 다가가, 태양열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추락할지라도, 거장의 기도가 있다는 믿음에서 날기를 계속할 것이다. 예술의 구성요소 광휘는 빛으로 등장한다. 햇빛으로, 불꽃으로, 등불로, 빛과 그림자로 광휘는 예술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듯하다. 더불어, 개화(開花)와 발화(發話)의 개념이 잠시 겹쳐지기도 한다. 내가 가장 즐거웠던 이유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현실이지만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현실로서 느끼고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맡고 맛을 보는 듯한 작품임을 이제서야 체험하며 읽었다. 인간만이 아닌 자연 또한 느낌으로, 생각으로 마음이 지닌 듯 보여지는 것이다. 하나의 표현이다.
'함성은 온화한 회색의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88쪽) '
첫댓글 저는 개인적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아이를 멀리서 보며 다가가다가 꿈처럼 변하고 깨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이스의 소설은 정말로 작가가 손톱만 깍는지, 소설이 끝나고 나서 허전함을 지울수 없더군요. 이런걸 영혼의 유체이탈 이라고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