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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스크랩 다시 읽는 역사, 호외(號外) - 중앙정보부(KCIA) 부장들 2부
먹기위해 추천 0 조회 39 12.04.15 16: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립묘지에 안장된 박정희의 묘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박정희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사람,

그 사람은 경기도의 이름없는 묘지에 묻혀 있다.

 

김재규. 그의 최후 역시 비참했다.

그의 묘비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묘비조차도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김재규.

의사다 아니다 말들이 많지만

 

궁정동에서 벌여진 암투는

치열한 권력 싸움의 결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왜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는가?

 

역사는 여전히 그 답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공개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다만 한 사람은 국립묘지 현충원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없는 묘지에 묻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 이 사람 중앙정보부 4대 부장 김형욱은 그 말로조차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죽었을 것이고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역사는 당분간 그것도 정답을 공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두 번째 이야기는 김형욱, 바로 이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김형욱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서울 가정법원에 있다.

 

 

김형욱은 실종된 지 꼭 12년만인 92년.

그의 아내의 신고에 의해 실종 선고를 받았다.

 

김형욱.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어쩌든 이와 함께 사망자로 간주되었다. 

 

 

김형욱이 실종된 이유가 이 세 권의 회고록 때문이라는 걸 부정하는 이는 없다.

김형욱은 이 회고록을 통해 박정희에게 철저히 보복했다.

 

 

 

그는 미국의 청문회에서도 박정희의 정치 자금까지 거론하며 박정희를 물어뜯었다. 

이는 박정희를 불편하게 했고 이후 김형욱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실종시부터 그의 죽음은 당연시 되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느냐가 관심사였을 뿐 그가 살아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사망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차지철씨가 그것을 지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차지철씨가 지도하는 소위 비밀공작대 사람들이 따라가서 김형욱을 잡아간 거죠.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만

김형욱씨가 파리의 드골 공항으로 날라갔을 때

그 비행기에 당시 KCIA 미국 워싱톤 주재 모 공사가 같이 동승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참, 역사의 무서운 교훈이라고 할까!  

 

김형욱씨가 동백림 사건으로

서독에 있는 우리 교포 수십 명 끌어오지 않았습니까?

 

논리가 어떠하든 간에 김형욱도 비슷한 방법으로 고국으로 끌려왔어요.

역사는 무섭게 반복됩니다."

                                                                             - 김경재, <김형욱 회고록> 저자

 

그렇게 한 정치 군인의 최후는 비참하게 마감됐다.

 

처음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에 앉을 때만 해도

그에게 그처럼 비참한 말로가 오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김형욱은 김종필을 중심으로 8기생들의 강력한 후원 아래

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 오른다.

 

김형욱 앞에 가장 먼저 떨어진 지상 과제는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기간은 단 2개월.

그는 중앙정보부 조직을 총동원하여 금권, 관권 선거를 주도해 나간다.

 

마침내 63년 10월, 박정희는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혁명만 하고 군대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은 영원히 사라졌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여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마침내 김형욱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그에게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이 주어졌다.

 

 

지독한 반공주의자였던 김형욱은

하루가 멀다하고 공안 사건들을 터트렸다.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빨갱이로 몰리기 일쑤였고

세상은 중앙정보부가 휘두르는 칼날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그럴수록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저항은 거세어져 갔다.

 

마침내 64년 6월 3일 첫 비상계엄령이 발표되었는데

당시 학생들의 시위를 보고 김형욱이 했다는 말은 김형욱의 사고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해 말 외교 길에 올랐던 김종필이 귀국한다.

 

1964년 12월 31일. 김종필 귀국.

환영은 대단했다.

 

"청년 기수 김종필 장군 만세!"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를 이어갈 제2인자로 인식되었다.

 

"그때는 누구나가 5.16혁명 나고

박정희 대통령 다음으로 김종필을 생각했지요.

 

자타가 그렇게 생각을 했다구요.

다만 군의 선배들이 시기질투하고 견제하려고 좀 했지요."

                                                                  - 이만섭, 전 공화당 의원

 

김종필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다.

 

박정희가 그렇게 오래 장기집권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점점 김종필 곁으로 몰려 들었다.

 

김형욱이 폭발한다.

박정희 신봉자였던 그는 김종필이 커 나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풀어

김종필을 미행하고 도청하며 김종필 제거 작전에 들어간다.

 

김종필의 후원으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올랐지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자면 김종필을 쳐내어야 했다.

 

"김종필이 총리 때, 김형욱 정보부장 할 때인데,

한 번은 나하고 단둘이 만났는데

나보고 "김종필 총리가 저거 완전히 래프터다" 해서 내가 그래서 깜짝 놀랬다고.

 

자기가 지금 2년째 중앙정보부에서 김종필 총리에 대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그 당시 언론사에 있던 성 모라는 사장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하고 JP하고 둘이 만나면 덮칠려고 하고 있다고 말이야..."

                                                                                     - 김상현, 전 신민당 의원

 

"JP가 굉장히 기분이 나쁜 거야.

형욱이가 이럴 수가 있냐 말이야, 난 형욱이 말을 믿었는데 말이야. 

 

몇일후 JP가 대통령에게 가서

정보부장이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다니는데 잘라버리십시요 했다고.

 

그랬더니 대통령이 "아, 그래. 고려해보지." 해놓고는

밤에 김형욱을 불렀어요.

 

그리고는 "야, 김종필이가 너 목 자르라고 그러더라, JP하고 좀 사이좋게 지내지,

서로 으르렁거리고 그러니까 JP가 너 목 자르라고 그러지, 앞으로 싸우지마!" 하고 내보냈다고.

 

그러니까 김형욱이가 나오면서 자기 보좌관 보고

"내가 김종필이 때려 잡지 못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이러구 나왔다는 거야.

 

그러니까 박대통령은 그걸 계획적으로 한 겁니다."

                                                                                   - 강성원, 초대 중앙정보부 조직 담당

 

박정희는 분명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있었다.

2인자로 떠오른 김종필을 서서히 쳐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장기집권의 꿈이 익어가는 가운데

박정희의 용인술이 본격적으로모습을 드러낸다.

 

"여기 저울이 하나 있습니다.

권력을 다는 권력의 저울이라 그러지요.

 

최고 권력자가 추 하나를 집어서 어느 한쪽에 올리면 권력은 그쪽으로 기웁니다.

그러면 반대편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 하나를 써서 그 권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권력 행사의 생리는 이렇게 계속 되는 시소 게임 비슷합니다.

박정희 용인술이 바로 이랬습니다.

 

한쪽을 적당히 키우다가 너무 커지면 상대편에 추 하나를 올립니다.

그러고는 저희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권력의 시소 게임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분할 통치하며 양쪽을 대결하게 하는 것.

박정희의 그러한 용인술은 이미 처음부터 드러났다.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대립했던 8기와 5기의 싸움도   

결국은 박정희 분할 통치의 결과였으며

 

8기가 급부상하자,

8기의 견제 세력으로 11기를 밑에서부터 키운 것도 그 통치술의 하나였다. 

 

동시에 박정희는 군인 전체 세력을 견제할 세력으로

공화당 4인 체제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4인 체제를 견제

김형욱과 이후락을 연합케 한다.

 

끊임없이 중간 보스를 키우고

그 중간 보스간에 파워 게임을 유발하지만

그 중간 보스가 너무 컸다 싶으면 과감히 잘라내는 것도 그의 용인술이었다.

 

"권위주의적인 통치술이죠.

박정희씨는 디바이드 룰(Divide and Rule)을 아주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패턴은 다르지만 DJ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싶을 보면 중간 보스가 전혀 없습니다.

 

박정희 스타일은 중간 보스를 심고, 딱딱 끊어서 하나씩 처리하고,

DJ는 중간 보스가 없습니다, 중간 보스를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잘라냅니다."

                                                                        - 김경재, 김형욱 회고록 저자

 

박정희의 통치 패턴이 계속 되는 한 결국 김형욱도 언젠가는 잘리게 되어있는 인물이었다.

장기집권의 시나리오는 착착 발표되었다.

 

3선 개헌, 야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는 이미 그때부터 물러난 뒤의 보복을 두려워 했다.

 

""남북 통일을 내다보고 가는데, 보좌관들 그런 결의가 없으면 사표내고 그만 두시오!" 라든지,

그러면서 "보복한다는데 정권을 내놔?" 이러면서 취중 농담처럼 말하는 걸 내 들은 적 있어."

                                                                                           - 임방현, 당시 청와대 사회 담당 특보

 

박정희는 김형욱 앞에서도 그런 심중을 드러냈다.

 

 

 

이제 김형욱이 할 일은 정해져 있다.

 

3선 개헌만 통과시킨다면 

장기집권의 기반은 마련되고

그와 함께 영원히 자신의 권력도 계속 될 줄 알았다.

그는 온갖 야당 공작을 불사하며 모든 것을 바친다.

 

 

마침내 3선 개헌을 발표한 지 5개월만에 공화당

국회 제3별관에서 3선 개헌안과 국민투표 법안을 변칙으로 통과시킨다.

 

이제 반발을 잠재울 희생양을 내세울 차례다.

69년 10월 김형욱은 정국 수습용 탄알받이가 되어 단호하게 잘려 나간다.

 

 

 

"자기 신세 타령으로 그러더라고.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천사로 만들기 위해 악마 역할을 한 사람이란 말이야.

 

대통령이 차 한 잔을 내놓고 하는 말이

"김부장, 지금 정보부장을 몇 년째 하고 있는가?" 하길래

 

"제가 지금 6년 8개월째 됩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그동안 수고했지. 자네 그만 두게. 좀 쉬게. 오늘부터 그만 두게."

 

김형욱 정보부장이 청와대를 나오면서도

이게 꿈인가 해서 얼마나 자기 허벅지를 쥐어 뜯었대요 아주 새파랗게.

이게 꿈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있냐 말이야..."

                                                                                          - 김상현, 전 신민당 의원

 

"김형욱이 부장 때 하도 악랄하게 해서 

주위에서 접근하는 걸 다 싫어했어.

 

국회의원들이 여야 같이 차도 한 잔씩 하고 밥도 같이 먹으러 가고 그러는데

이 사람은 여야 모두 아무도 접근을 안했으니까 굉장히 고독감을 느꼈을 거예요.

 

지나치게 고독감을 느끼다 보니까 불안해진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홍콩을 통해서 미국으로 도망을 갔지요."

                                                                              - 이만섭, 전 공화당 의원

 

미국으로 건너간 얼마후부터 김형욱은

박정희에 대한 배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정희 용인술에 비극적 말로를 드러내는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박정희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한 그의 회고록은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하는 마지막 선택이 되었다.

 

"김형욱 부장은 그 시대 반공 이슈가 창궐하던 시절,

전형적인 메이 인 코리아 작품이죠." 

                                                                             - 김경재, 김형욱 회고록 저자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라고 하는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입니다.

 

음악의 평론가들은 흔히 성악의 역사를 칼라스 이전과 칼라스 이후로 나눕니다.

그것은 그녀의 창법이 그만큼 뛰어나고 독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칼라스의 노래를 중앙정보부에 비유하는 것은 참 얼토당토 안 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6대 부장 이후락이 들어서면서 중앙정보부는 면모를 일신합니다.

 

그는 주먹 대신 정보에 의지했고,

완력 대신 공작을 활용합니다.

 

이후락 앞에 김계원이 1년 남짓 맡았습니다만

샌님 풍모의 그에게 권력 투쟁의 화신과 같았던 중앙정보부의 업무는 그야말로 맞지 않았습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에서 이후락의 중앙정보부,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이후락은 부패의 대명사지요.

누가 뭐래도 60년대, 70년대 이후락의 부패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죠.

하지만 좀 덜 무식하게 했죠.

김형욱 부장때는 말 그대로 무식하게 공작 정치를 하는 걸 봤는데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그 밖에는 차이를 알 수가 없죠."

                                                                                          -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YS 초산테러하고 그게 미친거지.

김형욱 같은 무지막지한 놈이니까 그게 가능해.

이후락씨는 안돼, 안해."

                                                     - 전 중정고위간부(63~74)

 

과연 어느 쪽이 이후락의 참모습일까?

 

중앙정보부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와 그 반대의 평가.

분명한 건 그가 무려 세 개의 정권을 넘나들며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정치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5.16이 일어나던 아침.

미국에서도 모르고 있었던 박정희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이도 이후락이었다.

 

 

 

 

 

 

그는 쿠데타가 갈아 엎으려고 하는 장면 정부의 정보실장이면서도

쿠데타 세력의 공보실장을 맡는 신기를 발휘한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고용된다.

 

이후락에게는 아주 든든한 배경이 있었던 것 같다.

 

61년대초 그가 장면에게 발탁되는 과정을 보자.

 

"그 사람은 61년초인가 되었을 거예요.

장면 박사 만났더니 "이후락이란 사람 아냐?"고 그래요.

 

"난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했더니

그때 데실바라는 사람이 미국 CIA 한국 책임자거든요.

 

그이가 몇 번 찾아와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할테니 정보 기관의 모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이제부터 사회가 복잡해지고,

또 북에서 공작이 상당히 복잡해지니까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때 데실바라는 사람이

이후락을 정보부장으로 갖다놔야 한다, 그게 조건이었대요.

이후락을 그 자리에 앉히면 물심양면으로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말이죠." 

                                                                                                  - 선우종원, 장면총리 비서실장

 

이후락이 3선 개헌의 희생양이 되어 비서실장에서 밀려나던 날.

그는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지원과 권력에 대한 철저한 헌신.

그것이 정권을 넘나들며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이후락의 헌신은 대단했다.

 

비서실장에서 주일대사로 간 이후락은

생선 초밥을 냉동 포장해 비행기로 청와대에 보내는 극성을 보인다.

 

그는 정말 박정희교의 신도처럼 행동했다.

그에 대한 댓가도 확실했다.

 

이후락은 일본으로 간 지 1년만에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금의환향 한다.

1970년 12월 21일. 이후락 귀국.

 

돌아오자마자 이후락이 할 일은 박정희의 재집권을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여러분!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김대중씨의 예견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지만, 어떠하든 공세는 막아내야 했다.

이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박정희가 내세운 대안은 뜻밖이었다.

 

"유권자 여러분! 앞으로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나로서는 정부에서 물러나겠다,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이후 박정희는 유신을 통해 직선제를 없애버린다.

71년 선거는 유신으로 가는 마지막 절차였다.

 

당시 공화당이 쓴 대선 자금이 600억!

결국 그는 또 대통령이 된다.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승리였다.

 

""내가 박정희 후보한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 부장한테 졌다!" 했어요.

왜냐하면 중앙정보부가 총동원 되어가지고

예를 들면 개표 관계도 제일 먼저 울산에서 했을 거예요.

그런데 울산 딱 여니까 천 표 대 다섯 표, 이렇게 나오더래요.

그래서 야당 참관인들이 "아이고! 다 끝났다!" 해서 참관도 안하고 다 도망가버렸대요."

                                                                                   - 김상현, 전 신민당 의원

 

"중앙정보부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락 부장은 그것을 나라를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권좌를 위해 썼습니다.


떡을 만지다 보니까 떡고물이 떨어지더라

이런 방자한 언사로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기도 했죠.

 

흔히 그에게 따라다니는 '정보 정치의 귀재'라는 말도

추악한 정치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이런 정도일 것입니다.

 

아무튼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그에게 저울의 추가 너무 기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이후락은 낮은 포복으로 기었어야만 했는데 그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귀재의 추락,

그것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아주 엉뚱하게 일어났습니다."

                                          -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이후락의 추락을 재촉한 인물은 수경사령관 윤필용이었다.

 

72년말, 두 사람은 오진압이라는 요정에 마주앉는다.

양대 권력의 최고 수장끼리 마주 앉아 몇 잔의 술이 오간 후 윤필용이 뜻밖의 말을 한다.

 

 

 

당시로선 쿠데타에 버금가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새어나가고 말았다.

바로 수사가 시작된다.

 

("그때 수사를 받으실 때 순순히 다 시인하시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또 그분이 뭐 시인할 부분이야 간단한 거니까 거짓말을 하거나 감출 사항이 없었습니다.

 

자기는 대통령을 아끼는 의미에서 한 그런 의도가 있었습니다.

근데 그게 좀 더 발전해서 불손하게 들렸죠."

                                                                                    - 백동림, 당시보안사 수사과장, 윤필용 사건

 

윤필용의 제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군부내에서 윤필용의 영향력이 막강해져 간다는 것을 파악한 박정희는

사건이 있기 전부터 이런 말을 흘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이제 자를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까 하나회가 모습을 드러난 것이다.

 

"윤필용씨가 거기에 배후 인물입니다.

그래서 11기생 중에는 윤필용씨를 하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 강성원,초대 중앙정보부 조직 담당, JP계

 

"박정희의 명을 받고,

전두환 이런 사람들이 하나회 같은 사조직을 만들도록,

윤필용이 언질을 준 사람이죠."

                                                                 -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1기생 하나회가 중요한 보직이라든가 또 진급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제일 막강한 윤장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윤장군에게 접근해서 가까이 했고,

 

또 윤장군은 정규 육사 출신들이

앞으로 군의 중요 요직을 담당할 뿐 아니라

군을 이끌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한 애착을 가지고,

 

그런 차원에서 서로 가까이 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백동림, 당시 보안사 수사과장

 

어느새 윤필용의 밑으로까지 진입한 육사11기들.

그들의 하나회 조직은 서서히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윤필용 사건은 이제 하나회 사건으로 바뀌었다.

200여 명의 하나회 회원들이 수사 선상에 오른다.

 

비밀 조직이 드러나면서

군부내 조사관들은 경악했다.

 

"사실 조사하면서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뭐 이런 조직이 있나.

 

정상적인 군생활하고 정상적인 군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조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 들고,

 

이런 것이야말로 군에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우리 수사관들도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오히려 사관학교 나온 사람으로서

밑에 수사관들한테 낮 뜨거운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 백동림, 당시 보안사 수사과장

 

당시 윤필용 사건을 맡았던 보안사 사령관 강창성

하나회 회원 12명을 구속해버린다.

 

그러나 하나회를 키운 건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하나회 수사가 자꾸 확대되자 강창성에게 한마디 한다.

 

 

 

박정희의 목적은 윤필용을 치는 것이었을 뿐

이제 그 목적을 거뒀으니 그쯤에서 멈추라는 뜻이었다.

 

하나회 사건은

결국 7.6 쿠데타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기고 만다.

 

여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이미 그때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중단이라는 것은 아까 말한 하나회 회장으로 있는 전두환 장군이

직접 간접으로 대통령께 얘기를 해 가지고 중단 시킨 거죠, 대통령과 가까이 지냈고.

 

박종규 실장이 가운데 있어 가지고 키워주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파워가 커졌다고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강창성 장군이 보복당해서 좌천됐죠 해임되고."

                                                                           - 백동림, 당시 보안사 수사과장

 

만약 그때 하나회 수사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수사관 백동림은 의미있는 말을 남긴다.

 

"11기 중심의 육사 출신들이 나중에 파워가 상당히 커짐에 따라가지고

수사를 중단시킨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2.12 사건으로 이어진 것이지

그때 중단 안 됐으면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때 만약 하나회 수사를 계속 했다면

12,12 하극상을 비롯한 우리의 현대사가 달리 쓰여졌을까요?

 

글쎄,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하나회 수사를 막을 만큼 전두환의 힘이 이미 커진 상태인데

당시 그것을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세상의 관심은 온통 이후락에게 가 있었다.

 

윤필용 사건으로

이후락의 신임은 땅에 떨어졌고

그는 그것을 만회해야 했다.

 

그때 터진 것이 김대중 납치 사건!

 

혹자는 이것을 박정희의 신임을 얻기 위한 이후락의 무리수였다고 했지만

이후락은 두 가지 상반된 증언을 남긴다.

 

 

 

 

 

 

 

 

걱정말라는 싸인을 보낸 동시에 

언제든지 입을 열 수 있다는 협박.

 

이것이 그의 생존술이었다.

 

지시였건 지시가 아니었건,

어쩌든 이후락은 희생양으로 잘려나간다.

 

그러나 이후락이 누군가!

 

그는 온갖 기밀을 거머쥔 채 출국해버림으로써 청와대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또 다른 김형욱이 탄생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얼마후 이후락은 귀국한다.

박정희와 협상을 벌인 끝에 보복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다짐을 받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그는 80년까지 국회의원을 지니며 안락한 삶을 이어간다. 

 

 

80년 이후 그는 예술가로 변신했다.

전원주택에서 도자기를 구으며 살아간다는 이후락.

 

박정희와의 협상에서 보복 방지를 약속 받을 만큼 막강했던 그의 비밀 창고는 아직도 열리지 않고 있다.

그는 일체 인터뷰 요청도 거절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만났어. 일 년에 한 번씩은.

언제 만나느냐 하면 7월 4일에.

요새는 건강도 별로 안 좋으시잖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난 이야기 안 할래.

원래 그런 거는 기록에 남기는 게 아냐.

내 자신이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아."

                                                        - 전 중정 고위 간부(63년~74년)  

 

"기록을 남기지 않겠다, 그 이유가 뭘까요?

아직도 덮어두어야 할 비밀이 남아서?

아니면 서로를 감싸려는 의리 때문에?

그 대답은 본인들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귀재의 재주도 절대 권력 앞에서는 추풍 낙엽 신세입니다.

이후락은 거리를 뒹구는 초라한 낙엽처럼 중앙정보부를 떠납니다."

                                                  -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그러나 이후락이 박정희에게 남기고 간 선물은 너무 많았다.

그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만든 최고 작품은 '유신'이었다.

 

장기 집권의 토대는 완전히 만들어졌고

유신은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빨갱이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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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 사건이 줄을 이었다.

진정한 사실은 유신 정권이 이미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문과 테러의 나날이었다.

 

유신을 하고 박정희는 꼭 7년을 더 살게 된다.

그 7년은 앞서 산 11년 보다 더 긴 기간이었다.

그만큼 정권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졌고 무리수도 더 많아졌다.

 

그때 박정희가 키운 중간 보스는 차지철 경호실장.

전두환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급기야 그 밑으로까지 진입해 있다.

 

장기 집권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박정희와 함께 한 정치 군인들의 권력 싸움도 이제 그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중앙정보부에 대한 견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엔 차지철 경호실장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동향의 김재규를 이번엔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합니다. 

 

전례의 경우로 본다면

차지철과 김재규를 서로 싸우게 하고

그 충성 경쟁에 열매만 따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계산이 그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차지철과 김재규.

18년의 권력은 이 두 사람의 권력 싸움에서 서서히 그 마감을 준비한다.

 

10.26이 일어나기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차지철과 김재규의 관계는 그렇게 극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지철에 대한 박정희의 과도한 신임이 그만 문제를 키우고 만다.

 

 

"대통령께서 김재규 부장, 차지철 실장 둘을 앉혀 놓고

"김부장! 김부장도 좀 차실장처럼 소신을 가지고 할 수 없어요!

자꾸 왜 그렇게 맘이 왔다 갔다 흔들려요! 차실장처럼 저렇게 소신을 가지고 해봐요! "

하고 차실장 앞에서 자꾸 김부장을 나무란다고 생각해봐요.

 

그리고 더구나 5.16 당시 차지철이는 육군 대위고,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와 동기니까 그때 원스타야, 육군 중장으로 있었거든, 진급이 높고 그랬지.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식들을 불러놓고,

동생 앞에서 "야! 큰놈! 너 임마 왜 형이라는 게 동생처럼 못해!" 자꾸 이야기 해보세요!..."  

                                                                                                 - 이만섭, 전 공화당 의원

 

서열을 중시하는 군인 세계에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거기에 차지철의 성격이 더해졌다.

 

차지철은 대놓고 김재규를 무시하며 부하 직원 다루듯이 했다.

원스타 앞에서 경례를 올려붙이던 그날 5.16의 차지철이 아니었다.

 

차지철은 권력을 나눠 갖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박정희를 독점했고, 그로써 박정희에게 통하는 라인은 모두 끊겼다.

 

"그때는 차지철이가 과거 김형욱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완전히 차지철이 세상이야! 완전히 차지철 세상!

이렇게 김부장 하고 사사건건 맞지 않으니까 모든 문제가 꼬이지.

 

심지어 차지철이 그 당시에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육군 소장인가 그랬거든.

그런데 차지철이 청와대 들어가면 "거 김계원 좀 내려오라 그래!" 막 이랬다구요."     

                                                                               - 이만섭, 전 공화당 의원

 

정보부장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김계원.

 

("선생님께서 가장 측근에서 보신 분이시기 때문에 저희가 그 부분에 대해 대개 궁금하거든요?")

 

"뭐 궁금해요. 이미 다 공개되고 각종 신문이라든지 잡지 이런데 다 났는데요."

 

 

 

박정희의 연단은 점점 높아져 갔고

그와 함께 차지철이 앉는 자리도 높아져 갔다.

 

차지철의 권력욕은 어떤 정치 군인보다도 높아져 갔다.

전두환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차지철의 최측근이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최측근임을 뜻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 되어 떠난 뒤에는  

그 자리를 노태우가 이어 받는다.

 

 

차지철은 경호원가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박정희는 이미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계속 권좌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 그것은 장기 집권자의 말로였다.

 

"그해 4월~5월경에 나 혼자 생각에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지 않으면 자살할거다', 난 그렇게 봤다고.

그때 난 차지철이가 박대통령을 암살할 줄 알았어.

차지철이가 암살하고 정권을 잡을 욕심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결국은 거꾸로 김재규 부장이 시해를 했는데..."

                                                                             - 이만섭, 전 공화당 의원

 

장기 독재의 휴유증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그 모든 책임은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부마 항쟁이 터지자,

배후에 야당이 있다고 본 박정희는 김재규를 힐책했다.

 

"정보 좀 수집해 봐!"

 

 

 

 

 

 

사태를 잘못 본 쪽은 김재규가 아니라 박정희였다.

어떠든 그해 여름부터 정보부장 경질설이 나돌기 시작한다.

 

김재규는 초조해졌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없는 소리까지 지어내기에 이른다.

 

"어제 일요일인데도 청와대에 불려갔어.

막사이주(사이다와 막걸리의 배합)를 얼마나 마셨는지 아침까지 힘들군."

 

그는 박정희의 신임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차지철은 점점 더 안하무인이 되어갔고

김재규는 점점 더 밀렸다.

 

김재규의 불안은 가속화 되었다.

차지철을 싸고 도는 박정희에 대한 원망도 높아갔다.

둘 사이의 긴장감은 폭발 직전 상태였다.

 

누구보다 권력 지향적이었던 전두환.

그는 정권 말기 권력 싸움을 아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권력의 저울은 평형이 되어선 안 됩니다.

중앙의 최고 권력자가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다른 한쪽이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그런 싸움이 계속 되어야만 최고 권력자의 정치는 쉽습니다.

 

그러나 시이소를 평행으로 놔 두고 내려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게임의 종말은 파산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박정희의 용인술 계산에 놓친 것이 바로 이점일 지 모릅니다."

                                                -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그해 10월 26일밤.

김재규는 끝내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쏜다.

그리고 박정희도 쏜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 18년은 막을 내린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에 체포되어 사형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11기들의 12.12 쿠데타가 터진다.

 

7.6 쿠데타 실패 이후

16년만에 그들은 마침내 쿠데타에 성공한다.

 

김종필을 비롯해 정치 군인들은 또 한 번의 하극상의 쿠데타를 겪게 되고  

전두환은 중앙정보부를 장악한다.

 

1980년 마침내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다.

 

"우리는 중앙정보부장들의 권력 투쟁이라는 렌즈를 통해

박정희 정권 18년을 간단히 돌아보았습니다.

 

국민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부장일수록

국가 안보를 정권 안보로 착각했고

정권 안보를 자기 안보로 악용했습니다.

 

그것은 물론 나라의 안보를 위해 목숨마저 던져가면서

음지에서 묵묵히 헌신해온 숱한 중앙정보요원들의 수고와 희생을 배반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공간을

단지 권력 투쟁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던 것은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결코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 정운영, <다시 읽는 역사, 호외> 진행자, 중앙일보논설위원

 

이제 이 나라에서 다시 쿠데타가 가능하리라고 보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것은 육사 대통령 30년의 세월을 다 겪어내고서야 얻은 처절한 전리품이다.

 

30년!

그것은 너무 길었고!

역사가 받은 상처는 이미 충분하다!

 

 

(감사합니다!~늘 좋은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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