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르기를 앓으며
김 진 영
‘이상한 거 아니야! 그냥 눈감고 먹어 봐.’ 이런 말은 어떤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할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부담스러운 말이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말인 것 같다.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었을 때 했던 말이 있다. “이걸로 내가 위험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내겐 특정한 음식 알레르기가 있다. 20년 가까이 된 일이다. 대학 때 친해진 친구들이 있다. 늘 세 명은 붙어 다녔다. 친구들은 이십 대가 되고 나서 마음대로 술을 마실 수 있으니, 틈만 나면 술을 즐겼다. 어떠한 신념으로 인해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친구들과 술자리에 가면 음료를 마시며 친구의 자리를 함께했다. 감당하지 못할 술을 자주 마시는 두 명의 친구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원치 않는 술자리에도 마지막까지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막창을 구워 먹으러 가자고 한다. 물론 그때 다른 메뉴를 먹자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의견을 굽히기엔 친구들의 고집이 대단했다. 막창을 못 먹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였다. 자신만 믿고 먹어보면 분명 나도 막창을 좋아할 거란 자신감을 내세웠다. 그때까지도 삼겹살의 기름도 싫어해서 살코기만 먹는 나였기에, 기름 덩어리만 구워서 먹는 건 거부감이 들었다. 친구들이 너무 좋아하는 메뉴였기에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 막창집에 가보기로 했다.
가게 안은 기름진 공기와 술에 취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친구들의 들뜬 막창 사랑은 내게 강요되었다. 첫입, 한번 깨무는 순간 냄새와 물컹한 식감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가게에서 뛰쳐나와 헛구역질했다. 마음을 진정하는 데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듯하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열심히 먹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실망감이 몰려왔다. 내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으면 같이 따라와 줄 수도 있지 않나? 나는 그들의 실수까지도 다 마무리 지어줬었는데 말이다. 화장실 바닥에 구토해서 청소까지 해주기도 했고, 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 주변까지 일부러 둘러 갔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에 서운함이 자리 잡았다. 무언가를 크게 바라고 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술에 취해 막창을 먹으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환멸이 났다.
그들과는 다른 일들로 인해서 불화가 생겨서 관계를 정리했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안 좋아 보였다고 한다. 훗날 그들과 다시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정중하게 사과해 왔다. 사과는 받아주었다. 그때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그로 인해서 좋은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이후로, 막창과 술에 대한 거부감은 더 심해져 갔다.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과 눈이 붉어지고 어지러운 상태까지 이르렀다. 막창이 들어간 음식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막창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막창 가게는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직장 회식이 있어서 막창집에 갔다. 양해를 구하고 불판에 돼지고기를 따로 구웠다. 막창을 구워왔던 기름진 팬이 보이는 순간 찝찝함에 다른 음식까지도 깨작이게 되었다. 그날 밤, 피부가 가려워서 긁으며 차가운 물에 계속해서 샤워했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는데, 그것들을 강요하는 이가 있으면, 날카롭게 반응하게 됐다.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년째 막창을 먹자며 장난치는 지인에게 매번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조금 강하게 이야기했다.
SNS에서 글을 본 적이 있다.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권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란 것이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공감되면서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며 위로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에게 이 말을 했다. 다행히도 이번엔 말이 통했다. ‘이건 내가 이상한 거네!’라고 한다. 본인도 음식 알레르기가 있으며, 싫어하는 음식도 있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내가 아픈 것, 속상한 것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으니 말이다.
제 생각을 억누르고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을 때 그 당시는 기분이 좋았다. 아니!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 속였다. 속상하거나 화나는 마음을 숨겨둔 채…. 그것이 쌓여서 화를 내면,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화내는 이상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막창과 술 알레르기가 원래 있었는지, 어떠한 계기로 인해 생긴 것인지에 대한 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알레르기를 앓으면서 값지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모든 사람 취향에 나를 끼워 맞추려 하는 건 나를 학대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친구였던 이가 지인이 되고, 지인이었던 사람이 몰랐으면 좋을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알레르기처럼 그렇게 이상한 관계로 변해 간다.
음식 알레르기는 그것을 먹지 않으면 된다. 인간관계의 알레르기는 단순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거나 관계를 끊어버리면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마음속에 남아서 꾸준히 나를 괴롭힌다. 알레르기 같은 인간관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것들은 나를 더 날카롭게 집요하게 나를 헤집어 놓는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일이 없었던 일로 여기는 것과 그 사람들은 전정으로 용서하는 일인 것 같다. 인연을 이어 갈 것이면 내가 친구에게 좋은 모습을 더 본을 보이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계라면 ‘그러려니’ 하며 포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변화를 원치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다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을 가만 놔두어야 할까.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게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인 듯하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나를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