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블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허블 울트라 딥 필드(HUDF, Hubble Ultra Deep Field)’ 사진이다.
인류가 찍은 가장 먼 우주의 모습이다. 총 노출기간은 무려 11일로, 4개월에 걸쳐 촬영했다.
<출처: D. Magee, and P. Oesch,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 R. Bouwens,
Leiden University; and the HUDF09 Team>
지구에는 명확한 방향이 있다.
동서남북, 위, 아래. 이는 지구의 모든 장소가 다 다른 질량을 가지고, 다른 물체로 채워져 있어,
구별 가능한 물리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의 모든 곳이 같은 물질, 같은 밀도로 이뤄져 있고 끝도 없는 공간이라면 우리는 그때도 어디가
‘동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주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물론 우주 공간에서.
‘우주가 등방(等方, isotropic)하다’는 것은 지구 위에서 관측할 때 우주의 방향성을 구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처음 우주등방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1920년대 즈음이다.
현대의 우주론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다.
시작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 격자가 변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깼고,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질량이 있는
곳에서는 공간도 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비한 자연의 전부는 아니었다.
같은 시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기이한 천문학 관측 결과가 회자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성운이라고 알려져 있던 외부 은하들이 모두 지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로웰 천문대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베스토 슬라이퍼가 관측한 자료였다.
우주는 정적이고 영원하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러시아의 물리학자 알렉산더 프리드만은 공간격자가 동적일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주는 일정한 속도로 팽창하고 수축한다는 팽창우주론을 제시했다.
계산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그는 우주에 물질들이 균일하고 또 등방하게 분포하고 있다고 가정했다.
이를 우주원리(Cosmological Principle)라고 한다.
당시 주류 학자가 아니었던 프리드만의 우주 모형은 인정받지 못했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기에는 천문학 기술이
충분히 정밀하지 못했다.
하지만 9년 뒤, 에드윈 허블은 외부은하의 적색편이와 우주거리를 동시에 관찰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프리드만의 예측대로 우주의 공간은 동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가 등방해야 한다는 논란은 그 이후에 등장한다.
외부은하들의 적색편이. 허블 울트라 딥 필드(왼쪽)에서 일부 은하 모습을 확대한 사진이다.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적색편이는 은하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출처: NASA, ESA, R.Bouwens and G.Illingworth at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
1930~40년대에는 우주의 초기조건이 중요한 논란 거리로 떠올랐다.
우주 팽창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팽창하는 우주라면 과거에는 모든 물질이 한 점에 모이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빵빵한 풍선이 부풀어오르기 전 필연적으로 하나의 점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빅뱅우주론’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에너지의 특이점을 피하기 위해, 프리드만이 가정했던 공간적인 균일을 넘어 시간을 포함한
시공간의 균일을 도입했다.
이들은 팽창과 함께 우주밀도가 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팽창하는 은하 사이의 공간에서 새로운 물질이 생성된다는
‘정상우주론(定常宇宙論, steady-state theory of the universe)’을 주장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우주 팽창의 과거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빅뱅을 피할 수가 있다.
공간의 균일함이냐 시공간의 균일함이냐. 초기 우주조건을 둘러싼 싸움은 결국 빅뱅우주론의 승리로 돌아간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우주배경복사였다.
우주배경복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주의 진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팽창하는 우주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들이 생성되는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물론 빅뱅의 에너지 특이점은 아직 현대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온도까지
우주가 식게 되면 기초과학을 적용해 우주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
우주의 진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과정은 빛이 전자의 감옥을 탈출하는 과정이다.
빛은 전자를 만나면 산란하게 되는데, 한번 산란을 하게 되면 그 이전의 정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는 마치 호숫가의 안개를 헤쳐 나오지 못하는 빛과 같다.
빛은 물방울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안개를 쉽게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산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안개
속의 호수를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주 초기에는 전자의 밀도가 높아 빛이 자유롭게 나아가지 못한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전자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는 시기가 오면 빛은 전 우주 공간을 거쳐 동시에 복사
(radiation)하게 된다.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라 한다.
이 시기는 대략 빅뱅으로부터 30만 년 이후로,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137억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 태초의 빛은 동일한 시간대에서 복사하고,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여행했기 때문에 똑같은 복사에너지 온도로
관측될 것이다.
역으로, 우주배경복사 에너지가 사방에서 같은 온도로 관측된다면 빅뱅 우주론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우주배경복사는 1964년 미국 벨 연구소의 연구자들에 의해 우연히 관측된다.
이들은 위성과의 교신을 위해 전파를 관측하던 중 사방에서 알 수 없는 노이즈가 ‘균일하게’ 발견되는 것을 관측했다.
미국 프리스턴대의 로버트 디케 교수는 이 노이즈가 바로 우주배경복사라는 것을 알아냈고,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같은 세기로 도착한 우주배경복사는 우주의 등방성을 증명했다.
우주배경복사를 처음으로 발견한 미국 벨 연구소의 혼안테나(horn antenna). 2차 세계대전 중 전파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관측기계들이 대형화되던 시기였다. 혼안테나는 의도치 않게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하는 쾌거를 이뤘다.
여기에 더해 1989년 우주배경복사를 정밀하게 관측하기 위해 발사된 코비 위성은 다파장대에서 복사에너지를 측정했다.
복사에너지의 온도는 대략 2.7 K로 가장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 사이에 10 μK(10만 분의 1 K) 정도의 차이만 보였다.
이로써 우주의 등방성은 정설이 되는 듯 보였다.
WMAP가 발견한 ‘악의 축’, 등방성을 흔들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우주에는 은하가 있는 공간도 있고, 없는 공간도 있다.
어떻게 균일하다는 걸까.
빅뱅이 일어나고 30만 년 정도 된 초기우주는 약 10만 분의 1 정도의 비균일도가 있다.
즉, 전체적으로는 균일하고 등방하지만, 10만 분의 1의 정밀도로 보면 차이가 있다.
주변보다 약간 고밀도인 곳에서는 은하 같은 천체가 태어나고, 저밀도인 지역은 텅 빈 공간으로 진화한다.
이 비균일도는 초기 우주의 급팽창이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우주가 등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비균일도가 통계적으로 어느 방향이나 동일하다는 의미다.
10만 분의 1의 정밀도로 우주배경복사 에너지를 관측하면 오늘날 관측되는 은하 등의 구조를 만드는 미세한 요동이
존재한다.
이 미세 요동은 우주 곳곳에서 다르게 나타나지만, 요동의 표준편차와 같은 통계적 특성은 모든 방향에서 동일해야 한다.
우주배경복사지도는 점점 정밀해지고 있다. 코비 위성,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 위성(WMAP),
플랑크 위성이 촬영한 우주배경복사 지도를 합친 사진이다. 정밀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배경복사 에너지의 온도를 색으로 표현한 것으로, 붉은 색에 가까울수록 높은 온도다. <출처: NASA, ESA>
그런데 2003년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 위성(WMAP, 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은
우주 등방성에 도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을 한다.
WMAP은 100만 분의 1의 정밀도로 우주배경복사 에너지의 등방성을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을 가지고 있었다.
WMAP이 관측한 비등방 지도를 분석한 결과 특정 방향으로 치우침 현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치우침이 일어나는 축을 당시 유행하던 정치 용어에 빗대어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 가설대로 우주가 특정한 축을 기준으로 진화했다면, 한쪽 방향에서는 은하가 더 적게 생성되고 다른 방향으로
가면서 더 많은 은하들이 생성되는 방향성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의 축 이론은 정밀한 검증이 불가능하다.
우주의 방향성이 인과론적인 지평선에 가까운 곳에서만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평선 너머의 우주는 알 수 없는 곳이니 악의 축이 우주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방향성인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값을 측정하기에는 모집단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의미다.
비록 우리가 관측한 하나의 우주에서는 이상현상이 발견되었을지라도, 지평선 너머에도 이런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최근 이런 미제에 도전하는 연구결과들이 눈에 띈다.
지난 9월,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과 임페리얼칼리지런던 공동연구팀은 특정 방향으로의 뒤틀림이
악의 축을 만든다고 가정하고, 이 뒤틀림 때문에 특정한 방향성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우주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질 확률은 12만1000분의 1이었다.
즉,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악의 축이 어떤 요인에 의해서 생기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뒤틀림에 대한 변수만으로 모든 가능성이 단순하게
기술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우주에 특정 방향이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연구 결과였다.
우주 등방성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우주배경복사의 비등방 지도뿐만 아니라 은하의 분포를 이용한 검증도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우주에 방향이 없다면 은하의 통계적 분포 역시 어디서 관측하나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2014년 북반구에서 관측된 은하의 구조와 남반구에서 관측된 은하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측정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오차 범위 밖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처럼 많은 연구진들이 우주의 등방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관측되는 우주의 등방성이 깨진다는 것은 어느 특정 방향으로 물리적 현상이 특이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이유로 이 우주가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보편성을 믿었다.
우주가 한쪽 방향으로 특이한 진화를 한다는 것은 현대 과학이 기반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흔드는 발견일 것이다.
- 글
- 송용선 (ysong@kasi.re.kr) |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시카고대 연구원,
- 포츠머스대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국천문연구원에 재직하며 우주론을 연구하고 있다.
주석
- 1
- 도플러 효과에 따라 광원이 관측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빛의 파장이 짧아지고, 반대로 멀어지면 빛의 파장이
- 길어진다. 전자를 청색편이, 후자를 적색편이라 한다. 외부은하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면 얼마만큼의 속도로
- 가까워지고, 멀어지는지를 계산해낼 수 있다.
- 적색편이는 별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쓰이는 현상이다.
- 2
-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02년 연례 국정연설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켜
-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이라며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 3
- 관측자로부터 빛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