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걷기여행] 곰배령
안개 걷히니 천상의 화원이 눈앞에
곰배령 출입초소~강선마을~곰배령~강선마을~곰배령 출입초소
남설악의 바람이 지나는 길목. 바람이 몰고 온 습기는 수시로 안개로 변해 이 고원(高原)을 두텁게 덮는다. 이곳은 설악산과 등을 맞대고 있는 점봉산의 동쪽 봉우리로 곰이 배를 보이고 누운 형상이라고 해서 곰배령이라 불린다. 졸방제비꽃, 양지꽃, 금강제비꽃, 한계령풀, 홀아비바람꽃, 노랑무늬붓꽃, 난쟁이붓꽃…, 온갖 야생화들이 피고 져 천상(天上)의 화원(花園)이란 별칭도 가졌다. 가는 길도 크게 어렵지 않아 산책과 등산 사이쯤 된다. 강선계곡 따라 곰배령으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 보자.
【곰배령 출입초소-강선마을】지도 1~3
불법과 편법을 통해서라도 가고팠던 길
곰배령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곰배령의 야생화와 점봉산의 원시림을 보호하기 위해 1987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가 22년 만인 2009년 7월에 개방되었다. 하지만 그전부터 산림청에 소위 ‘빽’이 있거나, 곰배령 가는 길의 강선마을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드나들 수 있던 불법과 편법의 길이기도 했다. 곰배령과 그곳으로 가는 길은 그런 식으로라도 ‘통행의 욕망’을 채워야만 했을 만큼 아름답다.
이런 통행의 욕망이 대중적으로 퍼져나간 계기는 공중파 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야생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곰배령의 사계절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이 방영되자 아는 사람만 찾던 곰배령을 모든 사람이 찾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는 조금 색달랐다. ‘곰이 배를 깔고 누운 형상이라…’. 이 말을 듣고 연상된 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 등장하는 토토로의 동그랗고 볼록한 ‘배’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알록달록 피었을 야생화를 상상하자 곰배령을 향한 갈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곰배령이 정식으로 개방됐다고 하나 출입절차는 꽤 까다롭다. 1일 출입인원 제한(50명-2009년 12월 기준)이 있어 인제국유림관리소로 미리 입산 신청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지 출입초소(1)에 도착해서도 일일이 명단 확인을 거친 후 받아든 노란색 조끼를 입고서, 탐방객들과 함께 출입초소 직원의 일장연설을 듣고 난 후에야 곰배령으로 향할 수 있다.
출입차단기가 열리자 마치 마라톤 경주의 스타트를 끊듯이 사람들이 걷기 시작한다. 짙다 못해 어둑한 여름의 숲으로 이어진 곰배령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숲속 산책로다. 길 왼쪽에 시원하게 흐르는 강선계곡이 흥을 돋운다.
이 길에서 그저 걷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감탄할 만한 이곳의 풍경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쉴 새 없이 카메라로 풍경과 일행을 담는다.
요란스런 분위기가 싫어 난 일부러 걸음을 늦춰본다. 먼발치로 사람들이 멀어져가자 길엔 숲의 소리만 남는다. ‘쏴~’ 강선계곡의 물소리, ‘춥춥, 쪼로로록’ 보이지는 않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산새소리, ‘졸졸졸’ 길섶 약수터의 물소리. ‘샤르르~샤르르~’ 바람결에 나뭇잎이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 어떤 잡음도 섞이지 않은 온전한 자연의 소리다.
자연을 벗 삼아 여유자적 걷던 길에서 반으로 자른 통나무에 강선마을 1.3㎞라고 쓰인 이정표(2)를 만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마을로 향하는 전깃줄이 길 위로 이어져 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아무리 오지라도 전기 안 들어오는 오지마을은 없을 거다. 그리고 곧 사람의 흔적을 만난다. 숲과 계곡만 있던 길에 대나무울타리와 조립식 건물이 보이면 강선마을(3)이다.
【강선마을-계곡쉼터】 지도 4~6
자연인들이 살아가는 숲속 마을
놀랍다. ‘월든호수’에 살던 소로우의 삶도 이와 비슷했을까? 비록 전기, 자동차 같은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있지만 강선마을에서의 삶은 겨울철 눈이라도 한번 내리면 길이 막혀 걷는 것 말고는 세상과 통행할 수 없는, 문명의 혜택이 극도로 제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얻고, 그래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아야 되는 삶. 그야말로 문명의 이기(利器)에 길들여진 도시인의 눈에는 꿈 같은 생활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도시의 삶을 버리고 온 도시인이었다고 한다. 오지생활을 택하게 된 사연이야 다양하겠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생활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여느 영화나 소설 속의 삶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지붕을 보수하거나, 마당에서 목공예를 하는 등 마을을 지나면서 본 그들의 삶이 평화롭다.
마을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몇 분 걷자 Y자로 길이 나뉜다(4). 그러면 주민들이 세워놓은 듯한 분홍색의 아담한 이정표가 점봉산·곰배령 방향을 알려준다. 키 큰 잣나무 숲을 지나자 이 길의 마지막 민가가 나오고 정면의 얕은 계곡엔 징검다리라고 하기엔 너무 넓고 판판한 돌이 깔려 있다(5).
계곡을 건너면 산책로가 산길로 바뀐다. 울창한 활엽수림 사이로 지금까지 넓었던 길과 달리 한명만 지나갈 만한 조붓한 길이 그어져 있다. 경사가 점차 생겨 걸음도 조금씩 느려진다. 출입초소에서 같이 출발했던 탐방객들은 이 좁은 길에서 출퇴근길의 자동차처럼 줄을 서서 곰배령으로 향하고 있다. 무리에 섞여 30~40분 가량 꾸준히 길을 오르자 많은 탐방객들이 뿔뿔이 흩어져 간식을 먹거나 바위에 앉아 쉬고 있다. 계곡 옆을 지나치는 길에 잠시 나오는 평지로, 한숨 돌려가는 쉼터(6)역할을 한다.
【곰배령-곰배령 출입초소】 지도 7~8
해발 1108m, 야생화의 천국
마을 끝에서 쉼터까지 온 거리만큼 다시 길을 걷는다. 길섶 풀밭 사이에 알록달록한 야생화 한 두 포기가 드문드문 섞이기 시작하더니 숲 안으로 뽀얀 안개가 스며든다. 그러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숲은 온데간데없고, 앞서 가던 사람들은 낮은 탄성을 내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얼굴에 닿는 물 입자가 느껴질 만큼 짙은 안개 속에 가만히 서서 시력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린다. 능선 너머로 불어온 바람결에 안개는 깊고 고요한 강물처럼 서서히 흐르고 있다.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보니 이슬 몇 방울 맺힌 하얀색 꽃잎에 보라색 줄무늬가 선명한 금강제비꽃. 풀밭으로 그어진 듯 좁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가자 이 평원에는 보라, 분홍, 노랑, 주황색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엄지손톱만 한 야생화가 빼곡히 피었다. 자연스레 이곳이 곰배령(7)임을 깨닫는다.
점봉산으로 넘어가는 길목(백두대간)엔 출입금지 표지판이 서 있다. 산림대장군, 산림여장군이라고 각각 적힌 두 개의 장승과 헬기장도 눈에 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바닥이나 바위에 앉아 쉬거나 야생화 사진을 찍고 있다. 뒤처졌던 사람들도 야생화 밭 사이의 좁은 길로 줄을 이어 도착한다. 이곳에선 안개와 천연색의 야생화에 몸과 마음이 물들어간다.
갈 수 있는 길은 여기까지. 출발했던 곰배령 출입초소(8)로 걸음을 돌린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자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점봉산 가는 길’이 더 신비롭다.
[ 워킹 팁 ]
출입허가는 미리미리, 교통편은 승용차로
곰배령을 찾기 위해선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우선 인제국유림관리사무소(033-463-8166~7)로 신청자의 주소와 이름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와 뒷자리의 첫 번째 자리(예 : 100101-1*****)를 통보해야 한다. 1일 입산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선착순으로 허가가 난다. 특히 휴가철의 경우엔 신청 인원이 많으므로 여유 있게 신청해야 곰배령 탐방이 가능하다. 대중교통편은 매우 불편하다. 가급적 승용차를 이용해 곰배령으로 가길 권한다.
코스 가이드
▶걷는 거리 : 총 10㎞(단축 없음)
▶걷는 시간 : 2시간30분~3시간(단축 없음)
▶난이도 : 무난
▶대중교통
인제읍(인제터미널)에서 설피밭(곰배령)행 직행버스는 없다. 인제읍에서 현리(아랫길)행 버스로 이동한 뒤, 현리에서 다시 설피밭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설피밭 정류장에서 곰배령 출입초소까지도 다시 3㎞를 걸어야 하는 불편이 있으므로 가급적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서울→인제터미널
동서울터미널 06:15~19:50(22회 운행)
상봉터미널 06:05~18:00(16회 운행)
인제터미널→현리(아랫길)
08:00 09:20 12:40 14:00 15:30 16:40 17:30 18:30 19:40
현리→설피밭(곰배령)
06:20 09:30 17:30
▶승용차
서울·춘천고속도로를 이용해 동홍천IC까지 간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인제·신남 방향으로 우회전 후, 44번 국도를 타고 5㎞ 가량 이동하면 철정교차로다. 내촌·철정 방면으로 우회전, 451번 지방도를 따라 45㎞를 더 가면 기린면의 진방삼거리에 도착한다. 우회전해 15분 정도를 이동, 조침령 터널을 지나기 전의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면 진동분교를 지나 곰배령 출입초소에 도착한다. 내비게이션 검색어 - 진동분교.
주차 - 곰배령 출입초소 앞의 주차장(N38。 02´ 10.9˝ E128。 28´ 18.5˝ )을 이용한다. 유료(3,000원)
▶숙식(지역번호 033)
*숙박-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 민박 한뫼마루(463-1110), 방동리에 마당바위쉼터(463-5703), 밤나무쉼터(462-9039) 등이 있다.
*식당-진동리에 진동막국수(463-7342), 두무대송어양식장(463-1020), 방동리에 오류동막국수(461-1948) 등이 있다.
*매점-코스 내 없음
*식수-코스 내(지도 1~2번 지점)
*화장실-곰배령 출입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