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세을 일기로 보은의집에서 사시다가
그제 오전 8시 12분경에 돌아가신 고 최화진(개정)영가의
발인식을 갖기 위해 오전 8시 반에 출발을 해서
원광대 천도장례식장을 가면서,
보은의집에 계신 어르신들께 카네이션을 국장더러 바로
챙겨서 달아드리도록 한뒤
"나도 오늘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했더니,
뒤에서 이 말을 들은 여직원이
"그래도 원장님은 행복하시네요."한다.
그 여직원은 전화를 해도 받을 어머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것이다.
여직원의 말을 듣고 '그렇지, 전화를 해도 몰라보시지만
목소리를 듣고 서로 통화를 할 수 있는 자체만도
무척 행복한 일이지.'하면서
전화도 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있는 그 여직원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전 9시에 발인식을 마치고 군산승화원으로 향했는데
그 도중에 자택이 있어 자택을 영정사진이 한번 둘러보았다.
그런뒤 바로 화장터에 도착해서 화장이 들어가 입장식을 가진뒤
가족납골당인 문중 추모관에 유해을 모시고 또 입장식,
그리고 바로 교당으로 와서 안치식을 마치니
시간이 오후 1시 40분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모든 상장을 마치고 점심을
임피교당 교도가 운영하는 황소고을에서 버섯전골로 먹으면서
유가족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유족 중의 한 분이 중앙 일간지의 전북주재기자인데
10년 전 장모님 상을 치룰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때는 장례를 좀 간소하게 치룬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럼 그 때보다 좀 복잡한가요?" 하고 물었더니
"복잡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엄숙해서 하는 말입니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냐고 하면서 "그 때는 교무가 한 사람이 하다보니 그렇고
지금은 셋이서 하니까 아마 그럴거예요." 하면서
한산이 앞에 앉아 있다가 답을 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이번에 돌아가신 고 최화진(개정)영가의
가족들이 종교는 없지만 하나같이 각종 의식에 적극 협력을 해서
더욱 더 정성이 오롯하게 쏟아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특히, 다른 때와 달리, 돌아가시고 나서 오전 10시 독경,
오후 4시 독경, 저녁 8시 독경을 아주 정성스럽게 모셨고
또한 그 때마다 꼭 법어봉독을 하고 그 부연설명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정성이 어루러진 결과를 다른 유족들도 느꼈다고 한다.
자녀들이 원 없이 아버지를 잘 보내드려서
원불교의식으로 하길 참 잘했다고 하면서 흐뭇해 했고
고인의 조카인 보은의집 직원도 이렇게 발인식에서 안치식까지의 과정을
처음으로 봤는데 정말로 엄숙하면서도 거룩했고
많은 것을 깨우치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유가족들이 뿌듯해하고 흐뭇해 하는 상장을 마치고
보은의집에 와서 그래도 못난 자식이지만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께 그곳 직원을 통해서 전화를 올렸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보고싶은데 왜 안 오냐며 추궁을 하시면서
셋째 아들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네 번씩이나 네가 누구냐고 묻고 확인하셨다.
그리고서 너희들을 보고 싶어 죽기는 싫은디
봐도 잊어버리고 들어도 잊어버리니 사는 것이 막막해
어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다."고 하셔셔
마음이 먹먹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치매에 걸려 아들을 몰라보지만
전화라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금방 들은 것도 잊어버리는 치매로
그저 막막해 어서 죽고 싶다는 음성이라도 들을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 어버이날이었다.
반면에 내 자식은 아들놈은 거제도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아무 말도 없이 어버이날이라도
그냥 전화했다고 하여 건강관리 잘 하라고 부탁을 했고
딸은 서울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카톡으로 다음과 같은 톡을 보내왔다.
"아빠 오늘 어버이날이라 카톡 드려요. ㅋㅋ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하고 항상 지지해주셔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역시 아들 보다는 딸이 정이 더 간다.
첫댓글 은혜롭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