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에 놀러가다
-상주는 작은 도시가 아닌 큰 도시다
1
낙동강을 끼고 개발된 경천대는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달리는 선남선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 방문 코스인 자전거박물관을 가보고 나서야 명백해졌다.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터라 방문객이 별로 없는 공원 전체는 새들이 내는 맑고 청명한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나무가 많이 우거진 숲이어서 대체로 고요했다.
이색적인 조각물 공원을 아내와 말없이 돌아보고 나오는데 용의 자태를 하고서 잔디 위를 기듯 나아가는 소나무를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영락없는 파충류의 비늘 형상으로 각도를 달리해서 뒷모습만 찍으면 잔디밭에 출몰한 악어라고 해도 영판 속아 넘어갈 판이다. 소나무가 사람처럼 누운 채 자라고 있는 것이다. 신기해서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2
‘경상도’의 어원이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합성어라는 것은 이 곳 상주박물관에 와서 알았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는 ‘발해’이하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8주(州)를 세웠는데, 상주는 경상도에 있는 두 개의 주중 하나였고(그 나머지 하나가 경주), 조선전기에는 이백 년 가까이 상주에 목사(牧使)를 두었다고 하니 이 도시의 옛 면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지방에 놀러가 보면 웬만한 곳에는 모두 박물관을 지어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대도시는 대도시답게 규모도 크고 내부시설도 현대적인데, 어떤 곳은 천정에 어떤 곳은 한 쪽 벽면에(대개 중앙부에 위치) 영화관 규모의 대형 스크린을 만들어 방문한 그 지역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소개하는데, 자못 화려하고 위압적이어서 방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 맞추어 영화관람 하러 영화관에 들어가듯 준비된 주변 의자에 모여든다. 그리고 준비된 내용이 끝날 때까지 대개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다.
대도시는 이렇다 하지만 중소 도시는 어떤가. 박물관이 아직 없는 곳도 있다. 박물관을 지을만한 지자체의 경제적 여력이 우선 문제고 무엇보다도 인구수가 적어 문화적 토양에 대한 관심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을 방문하지만 대개 계절적 특성을 지닌 축제 때문이고 해서 행사가 끝나면 곧 떠나버려 방문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식은 갖추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는 중소도시도 적지 않다. 있을만하지 않은 도시인데도 버젓이 있는 경우가 많고. 상주박물관은 그중에서도 중소도시답지 않은 시각을 보존하고 있다. 자리한 주변 지역도 생태공원과 경천대 등 낙동강 근처의 산림이 풍부한 자연이 품고 있어 아늑하다.
내부는 다재다능한 건축가가 인테리어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수려한 미적감각을 드러낸다. 화려하지 않지만 로비에서부터 창의적인 공감각을 펼치며, 특히 박물관에 어울리는 격조 높은 실내조명과 색채감은 다양한 유물과 전시물을 바라보는 방문객으로 하여금 몰입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게 하는 전시효과를 발휘한다.
인쇄와 출판문화의 역사와 현재에 관한 기획 전시가 특히 두드러졌고, 어느 시민이 기증한 조선시대 내방과 사랑방에 있음직한 가구들 일체를 전시품으로 내놓아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상주의 역사를 가늠할 구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발굴 유물들과 사료들을 가장 큰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규모는 대도시에 밀려 작을지 몰라도 박물관이라는 역할만 놓고 본다면 전시내용이 알차고 맵시가 돋보이는 실력이다. 상주에 사는 시민들은 자신의 터전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3
그 자부심은 인근에 위치한 자전거박물관에서 증폭되어 확인된다. 1가구당 2대의 자전거 보유대수로 전국 최고를 자랑하는 상주시는 일제 강점기 상주에서 처음 개최된 전조선 자전거경주대회에서 일본인을 누르고 1등과 2등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하면서 민족적 긍지를 느꼈고, 자전거가 전국에서 최고 많이 이용되는 도시로 그 기록을 지금까지 이어오더니 마침내 자전거박물관을 짓게 되었다.
상주역사박물관 내부가 은은한 간접조명으로 그 격을 올렸다면 이웃한 자전거박물관은 내부의 밝은 조명과 투명한 유리창을 이용해 수많은 다양한 자전거를 모형부터 실물까지 훤하게 구경할 수 있다.
상주는 구릉이 많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형과 달리 지질학적으로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자전거가 유입되자마자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자전거박물관은 자전거의 성지답게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발달되어 자전거를 탈 줄 알면 상주 여행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4
상주중앙시장의 장날이라고 해서 코스를 잡았는데 주차가 여의치 않아 일전에 당진에서 했던 것처럼 근처 도서관을 찾아 잠시 주차하고 시장으로 부지런히 갔다. 도서관 주차장에는 일요일임에도 책을 사랑해서 찾는 상주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몇 공간 남지 않았다.
자두와 토마토가 싼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얼른 주워 담는다. 상주장은 크지 않다. 참외와 토마토, 수박 등의 과일을 조그만 광주리에 담아 파는 과일코너가 주를 이루고 나이 많으신 할머니들이 직접 채취해서 가져온 듯한 나물과 채소를 파는 좌판이 그 다음인데 팔겠다고 준비한 양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외 옷을 팔거나 뻥튀기, 생선과 산삼을 파는 코너 등이 보인다.
젓갈류를 파는 아저씨는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는지 사겠다는 아주머니가 몇 번을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다. 시장을 구경하며 돌던 내가 소리를 질러 깨워주려고도 생각해봤지만 아주머니가 조금 있다 다시 오겠다며 자리를 떠버린다.
-무슨 나물인데 저렇게 많이 넣어주지? 그거 얼마치에요?
시장을 돌던 아내가 놀라 물어본다.
-삼천 원이에요.
-어머, 싸네.
무슨 생각인지 아내는 바로 사지 않고 조금 더 지나 가보자고 한다. 똑같이 생긴 나물을 빨간 조그만 플라스틱 광주리에 산처럼 쌓아두고 파는 할머니가 또 나온다.
-할머니, 얼마에요?
-이천 원이우.
-네에!
마치 공짜로 거저 받는 아낙처럼 아내는 얼른 지갑을 열어 이천 원을 할머니 손에 쥐어드리고 넘칠 것 같이 나물이 가득 찬 검은 비닐봉지를 낚아채 듯 들려는데 무슨 인심인지 잡초 같은 채소나물 한두 개를 솎아낸 후 큼지막하게 한 손 가득 나물을 더 담아주신다.
입을 벙글거리며 받아드는 아내가 있고 그 뒤에 자두와 토마토 봉지를 들고선 처음부터 그 장면을 구경하는 내가 있다. 그 할머니는 틀니를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말소리도 조그맣고 어눌해 잘 들리지도 않는 저 산골짜기에서 방금 내려오신 것 같은 세상 물정이라곤 모르는 오래 전에는 자주 보았지만 지금은 잊혀진 우리 할머니 얼굴이었다.
*방문코스 : 낙동강경천대 – 상주역사박물관 - 자전거박물관 – 임란북천전적지 – 상주중앙시장
(20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