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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헤이그 특사 이준「20일간의 외교기록」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54 14.04.27 21: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전

 

1907년 7월 14일 오후 7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선 한 한국인의 죽음이 있었다. 고종황제의 마지막 특사였던 이준. 그는 헤이그에 온지 20일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헤이그에서 치열하게 외교활동을 벌였던 이준 특사.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헤이그 특사 이준「20일간의 외교기록」

 

 

이준 열사가 서거한 것은 1907년 7월 14일 그러니까 오늘이 이준 열사가 서거한지 꼭 백년이 되는 날(그 당시를 말함)입니다. 그러나 이준 열사는 어떻게 헤이그에 특사됐는지 또 세계열강들이 모여드는 만국평화회의에서 그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업적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사전에선 이준열사 그의 헤이그에서의 행적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대한제국의 외교특사로 이준열사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머물렀었던 기간은 단 20일. 100년 전 헤이그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준 특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간 시기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은밀한 지령을 받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를 찾았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들은 우선 회의장으로 향했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은 헤이그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비넨호프 왕궁의 리더잘(Riderzaal). 만국평화회의는 식민지 쟁탈전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난 군비를 축소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회의다. 2차 만국평화회의에는 모두 45개국 2백여 명의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곳에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이 주권국가임을 알리는 것이 특사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첫날. 회의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특사 일행은 근처 자그마한 호텔(드용 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행장을 풀었다. 다음 날(1907년 6월 26일), 이준은 태극기를 호텔에 내거는 것으로 특사로서의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헤이그에 한국대표가 왔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만국평화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하기 위해 회의장을 찾았다. 만국평화회의는 특사들이 도착하기 열흘 전에 이미 시작돼 이미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준 특사 일행에게 회의장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식초정을 받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대한제국의 대표자격으로 당당히 헤이그를 찾은 이준 특사 일행. 하지만 이들은 왜 참가를 거절당한 것일까.

 

쿤 취스테르 교수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모든 열강들은 을사조약을 정당한 조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죠. 즉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다고 본거죠. 결국 공식적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참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의 참가국 모두 인정하고 있었죠.”

 

세계평화를 구호로 내건 국제회의였지만 약소국에는 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 특사일행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회의참가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간구한다. 우선 회의장 밖에서 각국대표들을 만나 청원서를 전달했다(1907년 6월 27일). 한국이 처한 상황과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일종의 호소문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외교권 침탈로 인해 세계 각국과의 외교단계가 단절되었으므로 우리는 각국대표들에게 헤이그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합니다. 또한 일본의 무자비한 침탈로부터 우리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중재를 해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한국 특사들의 모습을 스즈키 일본대표가 목격하게 된다. 그는 곧장 본국으로 이 소식을 전한다.

 

“한국인들은 모든 나라 수석대표에게 우리의 통치에 대한 항의서를 보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하겠습니다.”

 

조선통감부에도 이 소식이 전달됐다. 당황한 이토 히로부미. 대한제국의 실권을 쥔 자신도 모르게 헤이그로 특사가 보내졌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이토는 곧장 고종을 찾아가 이 일을 심하게 따져 물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몰래 헤이그로 특사를 보낸 것일까.

 

서영희 교수 한국산업기술대 교양학과

“고종은 1900년 이후에 러·일간의 각축 속에서 군비증강을 통해서 자위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열강의 중재를 통해서 한국의 중립 국가를 보장받거나 독립에 대한 지지를 받는 이런 하나의 방편으로 일본, 미국, 러시아 등지에 1901년 이후로 계속적으로 특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의 참석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해왔다. 이에 대한 증거를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서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와 관련된 모든 문서가 함께 보관되어 있는 외교문서집. 여기의 고종의 특사외교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의 외교문서가 있다. 당시 고종은 파리주재 한국공사를 통해 이 문서를 네덜란드에 전달했다.

 

헤이드 브링크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서

“이 편지는 당시 파리주재 한국공사를 통해서 1903년에 접수된 것인데요, 내용은 한국정부가 1899년 1차 만국평화회의이후에 열릴 2차 회의와 1864년 조직된 국제적십자 위원에 가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한국이 당시 국제사회에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독립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싶어 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당당한 주권국가로 참석할 수 있을 거란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만국평화회의를 제장한 사람이 당시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였기 때문이다. 제1차 만국평화회의는 1899년에 개최돼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전쟁규칙 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뒤 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7년에 열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제작진은 2차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정식으로 초청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는 네덜란드에 초청국 명단을 작성해 보낸다. 여기에 분명 한국이 초정국으로 기록돼 있다. 러시아가 한국을 초정한데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나름의 속내가 숨어 있었다.

 

반닌 교수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합병을 반대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였습니다. 물론 러시아 국내 상황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도 뒤로 물러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봤을 때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으로 남길 원했습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고종. 그는 만국평화회의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회의에 참석하면 국제적으로 주권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고 일본의 침략 야욕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종에게 만국평화회의는 절망적인 한국의 상황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고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헤이그 특사들은 분주히 활동했다. 회의참가를 요청하기 위해 특사들이 찾은 곳은 만국평화회의의 부의장인 보폴트의 집. 보폴트는 3특사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출간된 보폴트의 일기 속에는 헤이그 특사들과의 만남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한국의 특사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머물고 있는 숙소가 적힌 명암을 건넸다. 동양적인 젊은 남성은 일본인보다 중국인을 더 닮은 듯 했으며 불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모든 기대를 거는 듯 했다. 왜냐하면 평화회의를 네덜란드에서 주최했으며 네덜란드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민족이며 이런 민족은 한국 문제를 무시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 듯 했다. 그들의 인상은 사기꾼 같이 않았고 그들은 왕의 전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네덜란드 정부와 상의하도록 권유했다.”

 

 

보폴트의 권유대로 헤이그 특사들은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회의참가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이 문서는 7월 1일자로 네덜란드 외무성을 통해 정식으로 접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헤이그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참가권을 얻기 위해 각국 대표들을 만나 설득하는 등 치열하게 외교 활동을 벌였다. 한편 만국평화회의 참가국 중 최대 규모의 특사단을 파견한 일본은 물밑작업을 통해 방해공작을 펼쳤다.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외교권이 이미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 있음을 주지시킨 것이다. 한국을 철저히 통제한다고 자부했던 이토는 그들이 어떻게 감시망을 뚫고 헤이그까지 갔는지 의문스러워했다. 그래서 한통의 전문을 보낸다.

 

“헤이그에서 운동중인 한국인 세 명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들의 배후에 미국인 헐버트라는 자가 지휘하는 것 아닌가?”

 

당시 일본은 소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통해서 조선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헌데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은 이준을 어떻게 헤이그까지 보낼 수 있었을까요. 이 의문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이 바로 미국인 헐버트입니다. 이토 통감이 헤이그 특사의 배후로 지목한 헐버트. 이 헐버트는 누구이길래 일본이 그를 주시하게 된 것일까요.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 미국인 헐버트의 묘가 이곳에 있다. 생전에 죽으면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얘기할 만큼 한국 사랑이 지극했던 헐버트. 헐버트는 고종을 최측근에서 보필했으며 미국 등 서방국가와의 대화창구 역할을 해냈다. 처음 영어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던 헐버트는 일본의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항일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에는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부정의 친서를 미국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동진 회장 헐버트 기념사업회

“헐버트 박사가 한국말을 아주 잘 하셨습니다. 여기 우리나라에 오신지 3년 만에 한글로 서민필지라는 교과서를 만드실 정도로 한글을 잘하시다 보니까 고종황제하고는 자연히 가깝게 한국말로 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종이 헐버트를 밀사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헐버트가 미국인으로 누구보다 신분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할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사실을 일본 당국은 이미 알아채고 항상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은 헐버트와는 별도로 헤이그 특사를 몰래 임명했다. 그가 바로 이준. 평리원 검사 출신으로 친일행동을 한 상사를 고소해 면직된 인물이다. 당시 이 사건을 눈여겨 본 고종은 이준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이계형 박사 국민대 박물관

“1907년 이준이 평리원 검사 시절에 보여주었던 어떤 강직함이라든가 아니면 뛰어났던 근대적인 법리해석 등이 고종이 이준을 평가하는 데에 남다른 게 있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당시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야 하는데 이준의 그럼 점들이 고종황제에게 각인이 되었고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얘기할 수 있고 일제의 침략성을 고발할 수 있는 그런 인물로 가장 적합하지 않았을까 보여 집니다.”

 

헤이그 특사로 임무를 부여받은 이준은 1907년 4월 22일 홀로 길을 나선다. 아내에게조차 부산에 잠시 다녀온다고 말할 정도로 주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고 전한다. 이준이 서울을 떠난 뒤, 헐버트도 곧장 한국을 떠났다. 일본은 헐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일본의 첩보자료에 남아 있다.

 

“헐버트는 10일 오전 10시 20분경 고베시에 와서 시내 올리비아 호텔에 투숙했고 11일 오전 8시 18분 열차로 쓰루가 항구로 출발하였다.”

 

김동진 회장 헐버트 기념사업회

“헐버트 박사 나름대로는 자기가 일본의 표적의 대상이 되고 또 한국 특사들은 별도로 용의주도하게 한국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만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헐버트만을 주시하는 사이 이준은 무사히 한국을 빠져 나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 이준. 서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이준은 또 한명의 특사와 만난다. 한국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이상설. 그는 을사보호조약 이후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합류한 이준은 시베리아 열차에 몸을 싣는다. 두 사람은 헤이그로 향하기 전 들러야 할 곳이 또 있었다. 기차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9.300km가 넘는 거리를 쉼 없이 달렸다. 목적지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쌍트페테르브르크. 뱃길로 갔다면 한 달이 넘어 걸리는 거리다. 기차를 이용한 덕분에 두 사람은 보름 만에 쌍트페테르브르크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이준과 이상설은 전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을 찾았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은 외국에 있는 한국 공관을 패쇠하고 공간원들을 모두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은 일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러시아에 남아 있었다. 고종의 은밀한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을 만난 자리에서 이범진은 자신의 아들 이위종을 소개한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생활했던 이위종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이위종의 합류로 헤이그 특사단은 온전한 팀이 꾸려졌다.

 

쿤 취스테르 교수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한국 특사들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게 되는데요, 인물 면면을 살펴보면 먼저 이상설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당시 일본이 한국에 간 모든 구체적인 상황을 목격한 인물이고요. 그 다음 이준을 보면 법률가로서 을사조약의 법적 부당성을 설명할 수 있고 국제법적 관점에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죠. 세 번째 이위종을 보면 훌륭한 통역관이었습니다. 당시 외교원이 불어를 당시 능숙하게 했구요, 그래서 그는 한국 특사들의 대화창구가 될 수 있었고, 그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세 명은 한국의 상황을 잘 대변할 수 있는 완벽한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사일행은 곧장 헤이그로 향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십여 일을 지체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사 일행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를 만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고종의 친서만 전달하고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박종효 교수 모스크바대 한국학 센터

“그동안의 (러시아의) 정책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독립 지지정책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화해정책으로 변경됐습니다. 이것을 (한국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했지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의 독립지지 정책을 변경했다고 한국 특사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출장중이다, 바쁘다 이런 식의 변명을 했던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들이 러시아를 찾은 그때 러시아는 일본과 비밀협상(1907년)을 진행 중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한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하고 어떤 간섭과 방해도 않는다는 약속을 한다. 대신 만주와 외몽골에서의 권익을 승인 받았다. 또한 러시아 외상이 반전주의자인 이즈볼스키로 바뀌면서 일본과 화해무드로 돌아섰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더 이상 한국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 황제의 만남이 무산되면서 특사들은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이준 일행은 쌍트페테르브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 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때가 바로 1907년 6월 25일. 이준 특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만국평화회의가 개막한지 열흘이 지난 뒤였다.

 

서울을 출발한지 두 달 만에 만 이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서 이준 특사 일행은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셨다시피 이들이 도착했을 때 만국평화회의가 이미 시작됐고 한국은 참석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도움을 줄거라 믿었던 러시아 측의 배신 그리고 일본의 방해공작.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만국평화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헤이그 특사대. 이들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찾아간다. 그러나 넬리도프 의장은 이준 특사 일행을 만나 주지 않았다. 넬리도프는 이미 본국 러시아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은 상황. 이즈볼스키 외상이 보낸 전문이다.

 

“쌍트페테르브르크에 이준과 이상설이라는 2명의 한국인들이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혹시나 이 두 사람이 헤이그에 와서 백작께 뭔가 주선을 부탁할 경우 백작께선 이들과 교섭을 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사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 길이 없었고 만국평화회의 참석은 끝내 거부됐다. 그러나 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시민운동이 태동하던 시기로 식민지를 쟁탈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생겨났다. 그 와중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많은 시민운동가, 언론인들이 헤이그로 속속 모여들었다.

 

쿤 취스테르 교수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각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는데요,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회의장 주변에서는 평화, 평등을 부르짖는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모여들었고 특히 150이상의 언론인이 모여들 정도로 당시 평화회의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들 기회로 특사들은 장외외교 활동에 들어갔다. 시민운동가들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윌리엄 스테드. 평화주의자며 언론인인 그는 회의 기간 동안 일간지인 평화회의보를 발행했다. 한국대표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스테드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이준, 이상설, 이위종에 대한 기사를 평화회의보에 실었다. 회의 기간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였던 만국평화회의보. 그 일면에 한국에 관한 기사가 대서특필된 것이다. 신문에는 한국 대표들의 사진과 함께 이위종과의 인터뷰 내용이 상세히 소개됐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체,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것을 잊으셨군요.”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한국 특사들의 이유 있는 항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스테드. 그는 한국 특사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다.

 

“오늘 회의에서는 한국에서 온 이위종 특사의 연설이 있을 예정입니다. 주제는 ‘한국의 현상황. 한국에서 일본이 자행한 만행과 위협’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한국은 산이 많고 그 산의 골짜기 하나하나가 천연요새입니다. 우리 2천만 국민은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요. 지금 일본은 한국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외세가 침략했다고 손쉽게 무릎을 꿀 나라가 아닙니다.”

 

이위종의 연설은 큰 방향을 일으켰다. 연설회에 참석한 기자들 중 몇 명은 한국에서 일본 만행을 중단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서방 언론들이 한국이 처한 현실들을 자세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헤이그 특사들의 외교활동은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에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특사 일행은 짧은 기간 동안 굉장히 열정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런 예상치 못한 활약에 일본은 점점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남습니다. 이준 특사가 헤이그로 출발한 뒤 한국을 떠난 헐버트가 아직까지 헤이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헐버트는 이준 특사 일행이 장외 외교 활동에 한창일 7월 10일에 헤이그에 도착합니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헐버트가 도착한 당일 저녁에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다음날 이위종도 러시아로 떠나고 말죠. 평화회의는 앞으로 3개월이 남은 시점. 이 두 사람은 왜 갑자기 헤이그를 떠나야 했던 것일까요. 이때부터 이준 특사 일행의 행적이 의문투성입니다.

 

특사들의 장외외교가 한창이던 7월 10일 고종의 또 다른 특사였던 헐버트가 헤이그에 도착한다. 이준 특사 일행과 한자리에 모인 헐버트. 이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비록 만국평화회의에 참가는 못했지만 장외외교 활동을 통해 소기의 성과는 거둔 상태. 세계적으로 한국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긴 이때를 이용해 다시 한 번 미국의 지원사격을 부탁하고자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헐버트는 곧장 헤이그를 떠난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이위종도 헤이그를 떠나 쌍트페테르브르크로 향한다.

 

러시아로부터 부인이 아프다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이그에는 이준, 이상설 두 명만 남게 됐다. 그동안 입이 되어 주었던 이위종이 떠나자 두 사람은 외부와의 소통이 어려워졌다. 이위종이 러시아를 떠난 지 3일 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이준의 사망. 헤이그에 특사로 온지 20일 만에 이준은 돌연 호텔 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준은 왜 갑자기 죽은 것일까.

 

백년의 세월을 넘어 제작진은 그 죽음에 단서를 찾아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헤이그 시립문서보관소. 이곳에는 지난 2백년 간 헤이그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제작진은 이준의 사망 기록부를 찾아보기로 했다. 1907년 7월에 사망한 사람들의 기록부. 이 책자 속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 이준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법률가며 한국 서울에 살았고 7월 14일 7시에 사망... 나이는 49살이었고 한국에서 태어났고 기혼자군요.”

 

그러나 사인은 없었다. 사망기록부에는 왜 이준의 죽음의 원인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일까.

 

마르텐 박사 헤이그 시립 문서보관소

“이 사망 기록부는 의사가 건네준 사망 진단서를 바탕으로 작성되는데요, 하지만 사망진단서는 이 사망기록부가 작성된 지 1년 뒤에 폐기합니다. 모든 사망진단서들이 모두 그렇게 폐기처분되죠. 그래서 우리는 이준이 왜 죽었는지 그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신문에는 보도가 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 왕립도서관에서 이준 죽음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에선 1900년 이후부터 발행된 신문자료들을 검색할 수 있다. 1907년 7월 16일자 뉴코란트 신문에서 이준 장례식에 관한 기사를 찾았다.

 

김건동 네덜란드 코디네이터

“장례연설은 없었고요. 아주 조용하고 침묵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같이 왔던 한국사람(이상설)이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고 자기의 삶을 앗아간 것처럼 심하게 통곡을 하였다.”

 

 

또한 헤이그 발 뉴욕타임즈에서 이준의 자살설이 돈다는 기사가 짧게 실렸다. 그러나 어느 신문에도 명확한 사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제작진은 이번엔 일본의 첩보기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당시 일본은 헤이그에서 활동한 한국인들의 동정을 매일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 헤이그에서 일본으로 보낸 많은 전문들 중에 이준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전문에는 예상 밖의 내용이 실려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말한 단독(丹毒)이란 어떤 병인가. 세균이 피부에 침투에 생기는 단독은 얼굴에 큰 흔적을 남긴다. 단독에 걸릴 경우 상처부위는 크게 염증을 일으키고 살은 곪아 들어간다.

 

장경애 박사 피부과 전문의

“단독이라는 것은 피부 국한된 감염성 질환입니다. 피부에 염증이 생기고 피부가 붓고 진물이 날수도 있고 그 자체로 죽을 순 없습니다. 환자 자체가 면역이 굉장히 떨어진 상태. 암환자로 항암치료를 많이 했거나 에이즈 환자거나 그래서 면역이 떨어지면 단독이 생겨서 그게 혈액을 통해서 패혈증이 되어서 죽을 수는 있지만 단독이 생겼다 해서 죽은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준이 죽기 열흘 전 평화회의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얼굴엔 별다른 징후가 없이 건강한 모습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준이 단독이란 병으로 죽었다고 여론몰이를 했다. 왜 일본은 이준의 죽음을 병사로 몬 것일까.

 

이계형 박사

“일제가 이준을 병사설로 몰아갔던 것은 더 이상 이준의 사인을 두고 일어날 분란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이준이 만국평화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서구 열강이 동요할 여지가 충분하였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절망과 좌절. 이것이 이준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 러시아로 떠났던 이위종은 이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헤이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만국평화회의보에 이준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쌍트페테르브르크에서 그가 죽었다는 급보를 받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절대생각치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기 몇 시간 전 그는 의식을 잃은 것처럼 누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깨어나서는 소리쳤습니다. ‘조국을 구원하소서.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사명으로 헤이그를 찾은 이준. 그러나 세계열강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먼 이국땅에서 느꼈을 나라 없는 국민의 설움과 울분. 이러한 상황에서 이준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었다. 헤이그에서의 이준의 죽음은 국내에도 전해졌다(1907년 7월 18일). 당시 항일논조가 강하던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할복 자결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결말이 전부는 아니었다. 타국에서 벌인 이준의 외교활동과 죽음은 민족의 혼인 독립정신으로 이어졌다. 식민지시대 일제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져온 항일구국운동. 그 밑바탕에 이준이 있었다.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을 퇴위시킨 일본은 또 한 번 용서받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준을 상대로 재판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 한 것이다.1)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준을 상대로 재판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후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준 열사의 유해는 오래도록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를 잠시 외면했다. 헤이그 특사로서의 활동도 죽음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체, 이준은 먼 이국땅에서 근대사의 아픔을 말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헤이그에서 쓸쓸히 숨져간 이준 열사의 유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6년이 지난 1963년이 돼서야 조국 땅에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나라가 힘없이 쓰러져 가던 구한말의 역사는 분명 우리 역사에서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는 그런 시기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를 묻어만 둔다면 과거의 실패를 오늘의 역사에서 되풀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던 그 시절 낯선 외국 땅에서 외로이 외교활동을 펼쳐온 이준 열사의 노력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준 그 죽음이 남긴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글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KBS 한국방송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사용용도는 금합니다.

* 주

1) 헤이그특사 사건 궐석 재판(1907년 8월 9일), 이상설 사형형, 이위종 종신형, 이준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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