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Gipsy)와 보헤미안(Bohemian)
정열적인 집시음악과 플라멩코 공연 모습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고 조상 대대로 방랑생활을 하는 민족들이 몇몇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민족이 집시(Gipsy)이다. 집시(Gipsy) 혹은 보헤미안(Bohemian)으로 알려진 부족인데 첫 이미지는 ‘영원한 방랑자’, ‘자유로운 영혼들’, ‘아름답고 격정적인 집시음악’, ‘강렬한 터치의 기타(Guitar) 음악’, ‘강열한 리듬의 플라멩코(Flamenco) 춤’ 등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점쟁이, 도둑질, 매춘(賣春), 불결한 위생,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 굶주림,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민족’....
우리나라 유럽 관광객들이 출국 전, 귀에 못 박히게 듣는 말이 ‘집시들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심리는 묘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집시(Gypsy)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를 갈망하는 본능이 있는가 하면, 항상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고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자신을 감추고 싶은 본능도 있다고 하니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 것 같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Bush Man), 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들, 중동의 사막 지역에 유랑하는 베두인(Bedouin)족, 순록(馴鹿/Reindeer)을 따라 끝없이 방랑하는 스칸디나비아 북쪽 라플란드(Lapland)의 사미(Sami)족....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족은 이들 말고도 많이 꼽을 수 있다.
새 중에도 철새(候鳥)와 텃새(留鳥)가 있는 것처럼 인간도 본능적(Instinctive)으로 방랑하거나 소속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는 모양이니 신기하다.
집시(Gipsy)족은 코카서스(Caucasus) 인종에 속하는 소수 유랑민족으로,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印度) 북서부라는 것이 가장 유력하나 확실한 정설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집시의 고향이 인도의 서북부, 혹은 히말라야산맥 부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이들의 언어가 명백하지는 않으나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 계(系)의 언어(梵語)와 유사하며 집시어(語)의 격(格)이 산스크리트어와 비슷한 8개의 격(格)을 가지고 있는 것이란다.
집시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소아시아에서 발칸반도를 거쳐 14~5세기에 유럽 각지로 흘러 들어갔는데, 나치(Nazi) 시절에는 ‘집시 박멸정책’이 시행되어 유태인처럼 학살 대상이었고, 이때 50여만 명이 넘는 집시들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집시는 방랑인 기질의 종족이지만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슬픔이 배어 나오는, 정서에 다분히 예술적 기질을 지닌 민족이다. 집시를 부르는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자기들 스스로는 롬(Rom)이라 부른다고 하며 시리아에서는 돔(Dom), 아르메니아에서는 롬(Lom)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처음, 집시를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이집트인(Egipcyan/이집션)이라 했는데 이 단어가 두음소실(頭音消失)로 ‘E’가 떨어져 나가 집션(Gipcyan), 다시 뒷부분이 변형되어 ‘집시(Gipsy)’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안(Bohemian), 북유럽과 북부 독일에서는 타타르(Tatar)인 또는 사라센(Saracen)인, 남부 독일에서는 찌고이너(Zigeuner),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히따노(Gitano)....
아버지를 모르는 집시 아이들 / 부제스쿠 호화주택 / 집시들의 고향 보헤미아
현재 전 세계 집시 인구는 약 200만으로 추정되는데 유럽에 75만~150만, 근동(近東)에는 6~20만,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10만 내외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보헤미아(Bohemia)라는 나라는 없어졌지만, 오스트리아, 독일 바이에른과 국경을 접하던 왕국이었는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통합되었고 1993년부터는 체코(Czech)가 다시 슬로바키아(Slovakia)와 분리되면서 지금은 루마니아(Romania) 영토가 되었다.
집시들은 가난과 멸시 속에서 살았지만, 일부 집시들은 그들의 전승수공업인 금속공예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집시의 억만장자들은 자기들의 고향이었던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uresti)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보헤미아 지방 부제스쿠(Buzesku)에 엄청난 호화주택을 짓고 부촌(富村)을 이루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부자 마을로 소문이 났는데 약 800채의 호화건물들로 들어차 있다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집시들이지만 그들의 예술만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활동 무대인 술집을 중심으로 서점, 화랑, 살롱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의 규범과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 활동으로 예술가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의 공연 중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 중의 하나가 집시의 음악과 무용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플라멩코(Flamenco)’ 공연이다.
14세기부터 발전한 플라멩코는 집시, 안달루시아인, 아랍인, 유대계 스페인인의 민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19세기에 들어와 집시들이 직업적으로 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면서 플라멩코가 집시음악과 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보통 기타(Guitar) 음악 토케(Toque)와 즉흥춤 바일레(Baile)을 수반하여 노래 칸테(Cante)로 구성되는데, 심오하고 장중하며 비장감을 동반할 뿐더러 죽음과 번뇌, 종교 등을 주요 테마(Thema)로 하는 것이 정통 플라멩코이다.
중간조의 플라멩코는 덜 심오하나 음악에 동양적 색조가 가미되는 경우가 많고, 경쾌한 플라멩코는 사랑, 시골의 전원생활, 일상의 즐거움 등을 소재로 한다고 한다.
독무로, 혹은 군무로 공연되는 이 플라멩코에서 남성들은 발끝과 뒤꿈치로 탁탁 소리를 내는 등 복잡하게 펼쳐지고 여성들은 발놀림보다는 손과 전신의 아름다움, 열정의 표현에 치중한다.
공연을 보노라면 복잡한 리듬의 손뼉 치기, 손가락 튕기기(Finger Flick), 추임새가 수반되기도 하며, 종종 캐스터네츠도 등장한다. 이 플라멩코 공연은 유네스코에서 세계 인류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르는데 보헤미아(Bohemia)지방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집시와 관련된 음악들을 간추려보면, 헝가리(Hungary) 작곡가 리스트(Liszt)의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 스페인(Spain) 작곡가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의 바이올린 독주곡 ‘찌고이너바이젠(Zigeunerweisen)’, 독일(獨逸) 브람스(Brahms)의 ‘헝가리 무곡(Hungarian Dance)’, 체코(Czech) 드보르작(Dvořák)의 ‘슬라브 무곡(Slavonic Dances)’, 이탈리아(Italy) 푸치니(Puccini)의 오페라 ‘라 보엠(La Boheme)’....
1975년 영국 출신 록 밴드 퀸(Rock Band Queen)이 발표한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도 있고, 불꽃 같은 정열의 여인 카르멘의 사랑을 다룬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프랑스 작곡가 비제(Bizet)가 남긴 불후의 명작으로 주인공이 집시 여인 카르멘이다.
보엠(Boheme)은 프랑스어로 ‘보헤미아인’ 즉, 집시처럼 방탕한 습관, 방랑자, 불량배 등 사람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