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과학의 성립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을 토대로 하며, 그 정점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특히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토머스 쿤(T. Kuhn)이 말하는 의미의 패러다임(paradigm)(주1)에 걸맞는 것을 성취하였다는 데, 과학사가들과 과학철학자들은 동의한다. 뉴턴 연구자로 유명한 웨스트폴(R. Westfall)은 “최근의 쿤의 용어로 말한다면, 『프린키피아』는 근대 과학의 여러 영역에서 모방하고자 했던 패러다임을 확립했다”(주2)고 말했다. 또한 과학철학자 맥멀린(E. McMullin)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이후의 과학 및 과학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뉴턴 역학은 모든 자연과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패러다임이 되었다”(주3)고 평가하였다.
이 글에서 나는 뉴턴의 자연철학(주4)이 근대 과학혁명의 정점에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뉴턴의 업적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라고 하는 이 강연 시리즈 전체의 목적에 이바지하였으면 한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라는 이 강연 시리즈의 주제는 내가 이 강연을 수락한 내적 계기이기도 하다.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과학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학문의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기술하는 데 패러다임 이론(주5)보다 더 적절한 관점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쿤의 패러다임 이론의 관점에서 뉴턴의 패러다임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강연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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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훈 (경상대 철학과 교수)
- 2015~2016 경상대학교 총장 직무대리
- 2013~2014 경상대학교 교학 부총장
- 2011~2014 경상대학교 교무처장
- 2007~2009 한국과학철학회 회장
- 네이버 인물정보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전후하여 서양 과학에서 도대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것이 왜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인지, 나아가 『프린키피아』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이 강연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뉴턴의 자연철학의 주요 내용을 전체적으로 집약하고, 그것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이 강의의 서론 격으로, 여기서 뉴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전반적이고, 초보적 이해를 제공하고자 한다.
둘째, 근대 과학혁명 이전에 서양인의 자연 이해를 지배하였던 패러다임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자연철학을 집약하고, 그 아리스토텔레스적 패러다임이 어떤 위기에 봉착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을 위기에 빠뜨린 변칙 사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대안적 이론들이 등장하였는지를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우리의 논의를 다소 장황하게 만들 수 있지만, 뉴턴이 이 17세기의 천재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쩔 도리가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주6)
셋째,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자연관으로부터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의 큰 틀의 전환이 검토될 것인데, 특히 뉴턴의 실험철학의 대표적인 전임자인 데카르트의 기계론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넷째, 뉴턴의 자연철학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뉴턴의 방법론, 중력의 법칙에 도달하는 과학적 추론의 구조, ‘힘’, ‘시간’, ‘공간’, ‘운동’ 등의 개념 체계, 뉴턴의 형이상학 등이 논의될 것이다. 여기서 뉴턴의 자연철학이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기계론적 패러다임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뉴턴의 자연철학이 이론, 법칙, 방법, 도구, 형이상학적 전제 등 패러다임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는가를 검토할 것이다. 아울러 뉴턴의 자연철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름에 따라서 18세기 과학과 철학은 어떤 과제를 안게 되었는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특히 뉴턴의 실험철학이 제기하는 메타과학적 혹은 철학적 문제들을 동시대와 그 이후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설정하였는가를 살펴보겠다. 이 새로운 과학의 의미에 대한 메타과학적인 논의에 당시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참여하였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나는 서양 근대에 있었던 철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러한 상호 작용의 관점에서 근대 과학과 철학의 문제와 성과가 잘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철학적 관점에서 뉴턴 과학의 등장을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의 성립으로 이해할 때, 근대 철학은 그 둘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메타과학적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2. 뉴턴의 종합과 그 배경
1. 뉴턴은 1687년 6월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였다. 이 책의 원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이다. 전체 과학사에서 이 책만큼 그 중요성이 즉각적으로 인정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간행되는 데 기여했던 에드먼드 핼리(E. Halley)는 왕립학회가 발행하는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실린 이 책에 대한 논평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랫동안의 설득 끝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아무도 견줄 수 없는 저자는 이 논고에서 인간 정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보여주는 가장 진기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그는 자연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단숨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논증은 더 이상의 논의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그를 잇는 사람들이 할 일을 남겨놓지 않았다.”
핼리는 이 책의 내용을 집약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평을 마무리한다.
“수많은, 그리고 너무나 가치 있는 철학적 진리가 여기서 발견되었고, 한 사람의 역량과 근면함에 의해서 과거의 논쟁이 종료되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주7)
뉴턴이 이룩한 업적이 어느 정도길래 이런 찬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뉴턴 당시의 과학은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뉴턴의 업적은 우리들의 세계 이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가 시도한 많은 연구 분야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내재하는 것인가? 뉴턴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존경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뉴턴은 특히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오늘날 뉴턴 연구가들이 가진 주요한 관심사이다.
과학자, 철학자, 역사가들은 뉴턴의 과학적 성취가 지난 16세기에 시작된 과학혁명의 정점을 표현한다는 데 동의한다. 과학혁명이란 자연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급격한 변화를 말한다. 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학자들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이 ‘뉴턴의 종합’(Newtonian synthesis)에 의해서 완결되었다고 평가한다. 코헨(I. Bernard Cohen)이 지적하듯이 ‘뉴턴의 종합’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주8) 그 첫 번째 의미는,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었고 긴밀한 연관성을 알 수 없었던 주제들이 단일한 과학적 구조 속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뉴턴은 지상에서의 물체 낙하운동, 조수 현상, 달의 운동, 행성과 위성들의 궤도운동을 단 하나의 물리 시스템으로 통합하였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보편중력이라는 힘의 결과임을 증명하였다.
‘뉴턴의 종합’의 두 번째 의미는 뉴턴의 물리학이 갈릴레오와 케플러뿐 아니라 데카르트까지도 포함하여 여러 과학자들의 개념, 법칙, 원리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물리학의 체계를 산출했다는 것이다.
‘뉴턴의 종합’의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수학적 사고와 입자적 사고의 종합이다. 뉴턴은 보일(R. Boyle)과 마찬가지로 자연이라는 책이 입자적 특징과 단어들로 쓰여진 것이라고 보는 동시에, 갈릴레오와 데카르트가 생각한 것처럼 그것을 한데 묶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수학적인 구문이라고 여겼다. 뉴턴이 보기에 물질의 입자적 구조는 수학적 역학을 자연에 적용하는 확고한 기반이었다. 뉴턴에 의한 수학과 실험의 종합이 근대적 자연관의 완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뉴턴의 종합’에 의해 이루어진 뉴턴의 업적은 그 자체로 ‘뉴턴 혁명’(Newtonian revolution)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뉴턴은 단지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혁명의 주역이었다. 그것은 광학, 수학, 그리고 물리학 분야에서의 혁명이다.
우리는 그 뉴턴 혁명의 주요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뉴턴은 빛과 색깔에 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태양광의 비균질성을 증명하였고, 색깔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정식화하였다. 이에 따르면 백색광은 실제로는 굴절률이 다른 여러 색깔의 광선들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뉴턴은 그의 유명한 실험에서 프리즘을 통과한 태양광선의 스펙트럼을 암실의 멀리 있는 벽면에 투사하였다. 그는 태양광이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광선들의 집합으로서, 그 각각의 색은 프리즘에 의해 고유한 각도로 굴절한다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뉴턴은 특정 분광대의 빛을 두 번째 프리즘에 통과시킴으로써 자신의 색깔 이론의 귀결을 확증하였다.
1704년 간행된 『광학』에서의 빛과 색깔에 대한 뉴턴의 분석은 색깔 지각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되었고, 18세기의 과학 연구의 어젠다를 제시하였다. 또한 그가 이러한 발견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분석과 종합의 방법’은 실험물리학의 일반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되었다. 이 발견의 부산물로 뉴턴이 발명한 반사망원경은 대물렌즈 대신 거울을 이용하여 상을 형성함으로써 색변이를 제거할 수 있었고, 이 기술은 오늘날에도 모든 망원경에 사용되고 있다.
둘째,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당시 변분법(fluxional method, 變分法)으로 불린 이것은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비상한 힘을 발휘하는 수학적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수학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전 기하학을 사용함으로써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과학자들도 그의 책을 수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코헨에 의하면 수학상의 새로운 발명을 통하여 뉴턴은 물리학을 수학화하고, 수학적 원리를 자연철학적 주장과 관련시키는 뉴턴적 스타일(Newtoian style)(주9)의 힘을 증명하였다. 뉴턴적 스타일은 단순화되고, 이상화된 자연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구성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자연에서 얻어진 관찰 자료들과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교정해나가며, 거기서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세계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스타일은 엄밀 과학의 문제들을 마치 순수 수학에서의 문제를 다루듯이 취급할 수 있고, 실험과 관찰을 매우 생산적인 방식으로 수학에 연결시킬 수 있다. 수학적 원인의 분석으로부터 힘(원인)의 물리적 속성으로 나아가는 그의 실험적 방법은 근대 과학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적 입장에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를 필두로 하여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과학에 대한 피타고라스-플라톤적 전통의 영향을 엿보게 된다.
셋째, 뉴턴은 수학적 원리에 입각한 합리역학(rational mechanics)을 확립하였다. 이것은 뉴턴 혁명의 중핵을 이룬다. 뉴턴의 역학 체계는 무한한 극한 과정과 순간적인 변화를 다루는 미적분 수학과, 새로운 힘과 질량 개념을 토대로 한 세 가지 운동의 법칙, 그리고 보편 자연법칙으로서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구성된다. 뉴턴은 이 세 가지를 하나의 과학 문제를 풀기 위해서 끌어들였다. 그 문제란 지구 및 천체 현상 모두에 대해 통일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단일한 수학적 물리 이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뉴턴은 보편중력의 원리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중력에 관한 양적인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법칙을 사용하여 “뉴턴적 세계 체계”(Newtonian system of the world)를 정교화하였고, 그럼으로써 천상과 지상의 현상을 단일한 수학 체계로 설명하였다. 그는 『프린키피아』에서 ‘분석과 종합의 방법’을 통해서 지상에서의 물체의 낙하운동을 일으키는 힘과 천상에서 달이 지구를 궤도 운동하도록 하는 힘이 동일한 힘임을 증명한 것이다. 실제로 뉴턴은 그의 달 실험을 통하여 달 궤도의 구심적 가속도로부터 계산된 달에 대한 역제곱(주10)의 힘이 지구 표면에서의 호이헌스 진자 실험으로부터 계산된 지상의 중력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뉴턴은 이러한 측정된 값의 일치로부터 달에 대한 구심력이 지상에서의 중력과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를 기초로 뉴턴은 우주 안의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들에 대해서 역제곱의 법칙에 따르는 인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합리역학의 체계화와 정교화, 그리고 중력을 토대로 한 천체역학에 기초하여 세계의 체계를 구성한 것이 뉴턴 혁명의 핵심적인 내용이다.(주11) 이를 통하여 그는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하였다.
2. 링컨셔의 울즈소프(Woolsthorpe) 출신의 시골 소년이었던 뉴턴이 어떻게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뉴턴 당시 과학의 상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뉴턴이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도착했을 무렵, 당시 유럽 대학의 교과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통해서 자연철학에 입문하였다.(주12) 대학들은 아직도 중세적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뉴턴은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에 기초한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1664년경 당시의 새로운 학문적 조류인 데카르트의 기계론 철학, 갈릴레오의 신과학, 가상디의 원자론 철학 등을 접하게 되고, 이것들은 뉴턴 사상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게 된다. 뉴턴은 새로운 생각과 논증에 이르는 길을 데카르트와 갈릴레오에게서 발견했다. 또한 뉴턴은 로크의 친구로서 그의 경험론적 사고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로크가 뉴턴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만큼, 뉴턴 역시 로크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최근의 뉴턴 연구를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주13)
뉴턴은 그에 앞선 사람들의 업적을 섭렵하였고, 자신을 그 저자들의 반열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당시 용어로 ‘자연철학자’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자연철학자에 가까웠다. 칼리지 2년차에 뉴턴은 자신의 독서의 열매를 기록하는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노트 앞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채워넣었지만, 맨 안쪽은 “몇 가지 철학적 의문들”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시작했다. 그 제목 위에다 “플라톤은 내 친구이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내 친구이지만, 진리가 더 훌륭한 내 친구다”라고 썼다. 그는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사물의 본질에 관한 뉴턴의 사변은 그 노트로부터 확장되었고, 일생 동안 계속되었으며, 1717년 『광학』에 추가된 물음들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사변들은 뉴턴의 과학적 업적의 기반을 형성한다. 뉴턴은 그의 독서에서 얻은 재료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45개의 주제들을 설정하였다. 그가 선택한 주제들은 새로운 자연철학의 토대를 제시했다. 양, 위치, 시간 연장, 기간과 영원성, 물질, 운동, 빛, 우주의 구조, 무거움, 유동성, 안정성, 축축함, 건조함, 열과 냉기, 자석의 인력, 색깔, 소리, 생성과 부패, 기억, 바다의 밀물과 썰물 등의 주제들이 여기 포함되었다.
1664년 케임브리지의 역사상 최초의 수학 교수로 아이작 배로우(Isaac Barrow)가 임용되었다. 뉴턴은 그의 강의에 출석하였고, 장학생 선발 시험의 일부였던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시험을 배로우의 주관으로 치르게 된다. 배로우는 뉴턴의 천재성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뉴턴에게 수학을 공부하도록 격려하였고, 광학에 대한 관심도 갖게 하였다. 뉴턴은 독학으로 수학을 마스터하였고,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비롯한 당대의 수학을 섭렵하여, 머지않아 대학 수학을 배우는 학생으로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수학자로 성장한다. 그가 이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은 1665년에서 1666년 사이의 불과 2년 동안의 일이다.
1665년 뉴턴이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영국에는 페스트가 창궐하였다. 그 해 7월부터 세 달 동안에만 런던 인구의 10분의 1이 이 질병으로 죽었다. 대학은 문을 닫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냈다. 뉴턴도 울즈롭에 있는 그의 생가로 돌아갔고 여기서 1667년 대학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머물렀다. 약 18개월의 고립된 생활 가운데서 뉴턴은 장차 세상에 내보일 그의 업적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사가들은 이 시기를 ‘경이의 2년’이라고 부른다. 뉴턴은 만년에 쓴 소고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일은 1665년과 1666년의 대유행병이 휩쓴 2년 동안에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나는 발명을 위한 절정의 나이에 있었고, 그 후의 어느 때보다 수학과 철학에 마음을 집중시켰다.”(주14) 그가 역학과 광학, 그리고 수학에서 이룬 업적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미 착상되고, 상당히 성취되었다고 많은 뉴턴 연구자들은 믿고 있다. 1667년 케임브리지에 돌아온 뉴턴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초급 연구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에는 상급 연구원이 된다. 그것은 스승인 배로우가 그를 신임한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1669년 배로우는 수학과 광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26세의 뉴턴에게 그의 자리를 양도하고 은퇴한다. 그 무렵 출간된 광학에 관한 책의 서문에서 배로우는 뉴턴의 도움을 치하하고, 그의 비범한 능력과 재주를 아낌없이 칭찬하였다. 이후 뉴턴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672년 29세의 나이로 왕립학회 회원에 선출되었다.
3. 1660년 영국에는 왕립학회, 정확히 말해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진전을 위한 런던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Natural Knowledge)가 창립되었다. 이 학회는 당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가 자연에 대한 탐구를 진작하기 위해서 허락한 학회였다. 이 학회는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이라 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모토로 내세웠다. 왕립학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연 연구의 방법으로 자연사적 방법을 권장하였고, 그들의 연구에 있어서 실험의 중요성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여기서 자연사적 방법이란 세계 속에 공존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감각적 성질의 집합”만을 관찰하고 경험하여 그것을 토대로 대상의 자연사를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의 자연사가들은 순수히 관찰 가능한 대상과 사건에 대한 귀납적-기술적 과학을 강조한다. 그들에 있어서 관찰 가능한 것의 성질이나 원인을 설명하거나 발견하기 위해서 관찰 불가능한 대상에 호소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고 비과학적인 일이다.
이 무렵 행성 운동의 문제는 왕립학회의 많은 회원들의 공통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행성이 케플러의 법칙에 따라 타원의 궤도를 돌기 위해서는 태양과 행성 사이에 어떤 힘이 작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였다. 당시의 왕립학회 회장인 크리스토퍼 렌(C. Wren) 경(卿)은 이 문제를 두고 현상금을 걸 정도였다. 그 문제 해결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은 후크(R. Hook)였다. 그는 태양과 행성 사이에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였다. 1684년 천문학자 핼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뉴턴을 방문하였다. 그는 뉴턴에게 행성이 태양 쪽으로 역제곱의 법칙에 따르는 힘에 의해서 이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행성이 그리는 궤도는 무엇이겠는가를 물었다. 뉴턴은 즉시 “그것은 타원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핼리는 그 대답에 대한 수학적인 증명을 요구하였고, 며칠 후 뉴턴은 『운동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에서 그 문제에 대한 수학적인 증명을 제시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과학적 저술이라고 인정되는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이 책은 우리가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 책의 중요성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 밖의 동시대 지성인들에 의해서도 즉각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들은 뉴턴이 천체 현상 연구에서 사용했던 방법을 자신들의 연구에 열광적으로 도입하였다.
(다음회에 뉴턴, 근대과학의 정초 (2)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