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맞이함에 있어서는 오래 사귀었어도 능히 공경하고 비록 노복이나 부리는 하인일지라도 반드시 속대 예복을 갖추고서 맞이하고 날이 밝아 새벽이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질하였으며 자제들을 맞이할 때도 게으른 모습으로 드러내심이 없었고 홀로 서서 기다림에 있어서도 당시 조정의 높은 관료들이 서로 분열하여 상당수가 여기에서 나와 저쪽으로 들어가고하였으나 거센 물살 가운데서도 능히 스스로 서서 시종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었다 선을 좋아하면서 사람들의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기예를 반드시 취했지만 한 사람이 다 갖추어 구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반드시 드러내어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구애받지 않고 뛰어나게 훌륭한 사람들로 즐겁게 하여 더불어 종사하게 하였다 마땅히 큰일을 맡아서 큰 의혹을 결단할 적에도 논의가 평온하고 부딪치거나 따르지 아니하며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분명하므로 구차스럽게 일찍이 합치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거스르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마음이 올바르고 기가 온화하며 고집도 없고 반드시 필요함도 없었으니 그러하지 아니겠는가 가난한 가운데서도 경학을 공부하고 천문 지리 역수 병가의 부류에까지도 두루 통하지 않는 것 없이 넘치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식암 황섬(息庵 黃暹 1544~1616)선생이 조선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약포 정탁선생의 행장을 찬한 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식암 황섬선생은 본관은 창원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 외 돈암(遯庵) 서울 출생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황응규(黃應奎)이며 어머니는 의빈도사 이수려(李壽旅)의 딸이고 정탁(鄭琢)의 문인이며 명종 19년(1564) 성균관유생이 되고 선조 3년(1570) 식년 문과에 급제 한성부참군 해운판관 황해도사 호조좌랑 등을 거쳐 1577년 서천군수가 되고 이 때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정언을 거쳐 사간 집의 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성주목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참지로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고 평안도모운사에 선임되어 군량 수운에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대가를 따라 해주에 이르러 모군(募軍)과 식량공급 등 당면 국방정책을 건의하였으며 1594년 안동부사가 되고 뒤에 다시 이조와 호조의 참의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호조 이조 예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지제교 등을 지냈으며 광해군 즉위 후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면서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14년 풍기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식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정익(貞翼)공이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콩죽과 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경서를 공부하다 즉 가난하여도 경서를 공부하다 라는 의미인 숙수경학(菽水經學)의 성어 발췌문을 읽으면서 예전이나 요즈음이나 또 앞으로 먼 미래에서도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간다면 사람은 늘 어떤 처지에 있든 그 처지가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처지를 비관하지 말고 그 극한 처지에서도 힘써 나아가면서 미래의 희망을 보고 긍정적으로 앞날을 내다보며 자신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궁구하되 책을 가까이하고 예전에도 선현들이 그랬듯이 과거 입시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의서와 수리와 물리등 다방면으로 공부를 하셨던 어르신들처럼 다양한 방면에 학문을 꾸준히 익힌다면 또한 예전에는 책을 구하지 못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한 경우가 허다했지만 요즈음은 예전보다는 책 구하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굳이 책을 통하지 않아도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기가 알고자 하는 방면에 지식은 충분히 쌓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남 탓 형편 탓만 하는 어리석은 자는 절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필자의 과거와 오늘의 현재를 되돌아보면 과거의 잘잘못을 후회하고 사는 그날까지 즐겁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로 오늘도 성어풀이에 심혈을 기우려 콩과 물로만 끼니를 때우면서도 경학을 공부하던 발췌문의 주인공 약포 정탁 선생의 올바른 학행이 아버지 정이충(鄭以忠)을 증이조 판서(贈吏曹判書)에 이르게 까지 하신 행장을 본받으며 숙수경학(菽水經學)을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