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롬 !!
23.8.2(수) 경항공기 지역 신우회 예배말씀
오늘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물론 성경말씀 모두가 믿음으로 입니다만, 이삭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을 보아왔고(지난 주간에 이삭의 믿음에 대해서 였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얻어 그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에 비해 성경에 나온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가 증거입니다. 순종의 삶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말도 더듬거렸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실수한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하셨습니다. 야곱은 에서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자권을 갖게 되고 그 형 에서를 다스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야곱을 사기꾼이나 약은자로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장자권을 훔치고 그 벌로 고생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에서를 보면은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에 장난치듯 넘겨주고, 아버지 이삭에게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고 남은 것이라도 있으면 저에게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축복이 그렇게 값없이 이사람 저사람에게 주는 것인가요. 성경에 내용은 뒤집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말씀에는 헛된 것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우정에 관련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질문해 보아야 겠습니다. 항상 엉뚱한 일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만을 의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받을 복은 평화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복이 바로 평화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받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말씀 : (창27:33-38, 새번역)
이삭이 크게 충격을 받고서,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더듬거렸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오기 전에 나에게 사냥한 고기를 가져온게 누구란 말이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그것을 이미 다 먹고, 그에게 축복했으니, 바로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에서는 소리치며 울면서, 아버지에게 애원했습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에게도 똑같이 복을 빌어 주십시오” 그러니 이삭이 말했습니다. “네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복을 가로챘구나,: 에서가 말했습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왜 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갔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지난번에는 맏아들의 권리를 저에게서 빼앗았고, 이번에는 제가 받을 복까지 빼앗아갔습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에게 주실 복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너를 다스리도록 했고, 그의 모든 친척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니, 나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에서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비실수 있는 복이 어디 그 하나뿐입니까? 저에게도 복을 빌어 주십시오, 아버지” 이 말을 하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말씀선포 : 우정 : 믿음으로 이삭은 (According to faith, Isacc is )
모든 하나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그들은 모두 가문을 이끌 자녀와 관련한 고민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오랜 시간 동안 지연되며 가문을 이끌 장자가 없었던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다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 리브가와의 관계 속에서 결혼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쌍둥이 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형의 뒤꿈치를 잡고 간만의 차이로 둘째로 태어났기에 야곱이라고 명명됐던 동생은 장자로서 가문을 이끌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인해 쌍둥이 형과 여러 번 마찰을 일으켰고 이삭은 이로 인해 쉽지 않은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삭이 더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쌍둥이 동생이 형, 즉 장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 말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리브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마음에 두었고, 이삭이 눈이 멀어 가문을 이끌 장자의 복을 에서에게 주려고 했을 때 야곱과 더불어 장자의 복을 동생이 받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이삭은 대놓고 자신을 속이는 아내와 둘째 아들의 계략에 속아 장자에게 주어질 복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복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복을 동생이 가로챈 것에 분개하며 왜 야곱인지를 확실히 알았다고 동생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야곱은 형의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쌍둥이 동생 야곱이 장자로서 가문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셔서 이삭 집안에 큰 어려움을 주셨던 것일까요? 교회는 이와 관련해서 그저 오랫동안 하나님이 야곱의 개인적 욕망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형성되게 하셨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신 일을 눈이 먼 이삭의 연약함과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의 비뚤어진 욕망을 통해 자신의 거룩하신 일을 행하셨다고 교회는 말합니다.
교회는 이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래부터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야곱을 장자로 마음에 품고 계셨으며, 엄마 태중에서부터 야곱보다 힘이 셌던 에서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먼저 태어나서 장자가 되었지만 주님은 결국 자신의 은혜로운 뜻을 따라 야곱이 장자가 되어 가문을 이끌도록 인도하셨다고 말입니다. 즉 야곱이 아닌 에서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걸림돌이 되었지만 주님이 그 일이 바로 되도록 선하신 뜻을 이루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넘길 정도로 가볍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이와 달리 맏아들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의 장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열심은 예수님이 마태복음서 19장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이름, 즉 주님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버릴 정도로 열정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첫째가 된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이 첫째가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정확히 에서와 야곱의 관계가 역전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위협에서 벗어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던 중 하나님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그들과 항상 함께 하셨던 것처럼 자신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복을 받은 일에 대해서 징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살펴볼 때 야곱이 단순히 이기적인 욕망을 통해 장자의 복을 찬탈했다는 식으로 보는 관점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 누구보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이 아들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확신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삭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따라 에서와 야곱의 장래를 축복했다고 말합니다. 이삭은 분명 처음엔 야곱과 아내 리브가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 후 자신에게 계속 축복해달라는 에서의 간청에도 장자로서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는 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문을 이끌어 갈만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확신했습니다. 그는 동생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게 된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야곱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거룩하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그가 힘을 보태야 한다는 복을 남깁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삭이 에서가 칼을 의지하고 산다고 말한 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후손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에서의 후손들이 어렵게 살도록 만든다면 그 잘못된 일에 충분히 맞설 수 있다고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과 깊은 우정 속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뜻대로 번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런 이삭의 진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 때도 그가 지혜롭게 주님의 뜻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