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생가지(대구 동성로 5길)..3.3.화 오후
대구여행
2015.3.2.월~3.4.월 (2박3일)
1편-동화사ㆍ2.28기념공원ㆍ국채보상운동기념관ㆍ동성로숙박
2편-약령시ㆍ경상감영ㆍ서문시장ㆍ중식ㆍ서원ㆍ달성공원ㆍ3ㆍ1만세로
ㆍ청라언덕ㆍ계산성당ㆍ이상화ㆍ서상돈고택ㆍ박근혜대통령생가터
3편-부인사 ㆍ동화사케이블카ㆍ대실역하차 강정고령보ㆍ대구83타워
2015년 3월 2일 06시45분 서울역발-동대구 10시34분착
무궁화 1203호 열차에 몸믈 싣고 대구로 향하다.
춘삼월 대지에서 움트는 새봄의 기운을 품으며
지하철이 있는 광역시를 찾아서 두번째 나그네길, 대구자유기행이다.
첫날은 영하의 추운날임에도 햇빛속엔 봄의 아롱이가 어른대며 봄소식을 알려오기도 했다.
둘쨋날은 일기예보대로 오전엔 눈이 내렸고, 오후엔 비로 바뀌었으며, 저녁엔 비가 그쳤다.
반갑게도 성급하게 꽃을 피운 노란 영춘화꽃을 만나면서 봄의 생동감도 맛 보았다.
특히나 이번 여행은 대구근대로의 여행,근대문화골목,골목투어가 이색적이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번에도 부산기행처럼 대구83타워에서 시간을 보내고
동대구역에서 19시49분 KTX 172 열차로
21시 49분 서울역에 도착하여 지하철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차를 이용한 대구 자유여행2
약령시ㆍ경상감영ㆍ서문시장ㆍ중식ㆍ서원ㆍ달성공원ㆍ3ㆍ1만세로
ㆍ계산성당ㆍ이상화ㆍ청라언덕ㆍ박근지ㆍ동화사앞숙박
여행 둘쨋날이다.
또 다시 시작되는 새아침은 어제와 또 다른 새로운 에너지가 대지에서 느껴진다.
일기예보대로 눈을 흩뿌리고 있었다. 우산준비를 못해 대형 우산하나 사서
님과 한 우산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며 한 그림으로 다녔다.
둘쨋날은 근대로의 골목여행을 일정을 잡았으나 하룻동안 여러코스를 다 돌 수 없어
몇군데를 정해서 자유롭게 찾아 다니기로 하곤 종일 대구중심을 휘젓고 다녔다.
밟았던 길도 되 밟으며 물으며 지도보며 보낸 여정이었다.
첫밤을 보낸 둥지가 있었던 동성로 번화가에서 조금 걸어가니 지하철
반월당역에 닿았는데, 바로 그 가까이에 약령시장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구 약령시(大邱藥令市)
조선시대 대구 약령시는 전국 최대의약령시장이었다.
대구약령시는 경상도관찰사 임의백(任義伯)이 효종9년(1658) 경상감영 내 객사
주변에서 봄.가을의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약재사장을 개설한데서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약령시가 열리게 된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정에 진상할 약재를 수집하고
일본에 약재를 수출하기 위하여 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약령시는 봄과 가을
두 번 열렸으며, 봄(春市)에는 객사(達城館)를 중심으로 남쪽에서 열려 이를 남시(南市)라
하였으며, 가을(秋市)에는 객사 북쪽에서 열려 이를 북시(北市)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일제에 의해 객사가 헐리게 되자 지금의 남성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1914년에는 일제에 의해 춘시가 폐지되었다. 쇠퇴하는 약령시를 회복하기 위하여
1923년에는 대구 약령시진흥동맹회를 조직하고 공정거래, 상업금융, 운임특혜 등
약령시의 부흥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약의 도입 등으로
점차 쇠퇴하여, 한국전쟁 이후 약령시는 현재의 남성로인 약전골목에서 상설 한약상으로
변화되어 옛 명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른아침이어서 점포도 대부분 열지 않았고 한산했다.
뚜벅걸음으로 걸으면서 여기저기 새로운 볼거리들을 챙긴다.
약령시한약박물관
9시 개관이어서 조금 기다리다 입장했다.
전시실이 잘 꾸며져 있었다. 우리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한의학 분야라서
관심있게 보게 되었는데, 다음일정으로 오랜시간을 보낼 수 없어
적당히 둘러보곤 언젠가 다시 하루 날잡아 와서 한의학 공부에 심취해 보리라.
다짐하면서 여러점을 디카담기에 바빴다.
박물관내에서 담아 온 사진으로 한방 관련해서 공부같이 할까요?
박물관 마지막코너에 한복까지 마련해 둔 포토존이 있어 포즈를..
관람객이 없어 요런 독특한 사진도 담게 되었다.
일일 한의사가 되어 봅니다.
아프신분들 제게 꼭 한번 다녀가세요.
놀랍게도 반짝 치료가 될겝니다.
어떻게 아프신지 제가 명확히 알아들을수 있도록 말씀을 분명히 해주셔야
한의사인 제가 정확한 진단을 내려 아픈부위를 낫게 해 줄 수 있습니다.하하하
약령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약령서문으로 빠져 나온다.
흩뿌리던 눈은 빗물로 바뀌어 추적추적 내리는 비속을 걸어서
다음일정으로 발을 옮긴다.
경상감영(慶尙監營)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구역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었다. 각 도에는 중앙으로부터 감사가 파견되어 도의 행정을 맡았다.
경상도는 태종 13년(1413) 도역이 개편된이래 한말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는데,
17세기 말에는 그 소관 읍수가 71개의 고을로 1부, 2대도호부, 3목, 14도호부,
13군, 38현이었다.
조선전기 감영은 단지 도정을 종합하는 중심지 내지 감사의 巡歷時 일시
휴식하는 곳으로 경주부윤이 경상도관찰사를 겸하고 있어 감영은 경주에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 7년(1407) 경상도가 다른 도에 비해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낙동강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로 나누어 좌도는 경주부윤이,
우도는 상주목사가 긱긱 관찰사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원래대로
환원하면서 감영을 상주로 옮기고 상주목사가 관찰사를 겸하도록 했다.
임진란이후 선조 34년(1601)에 이르러서야 대구(현 경상감영공원)에 정착되어
고종 32년(1895) 지방제도가 8도에서 23부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대구에 감영이 정착하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각 고을을 다스리기에 좋은 위치였으며, 또한 물산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도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원표(道路元標)
서울 306km, 부산 154km, 대전 154km, 광주 214km, 포항 86km, 평양 499km
이 도로원표는 각 도시간 도로 거리의 기준이 되는 지점으로서 대구시 도로원표의
정위치는 이곳으로부터 동쪽 215m 떨어진 지하철 중앙로역 북편 출입구앞 네거리
도로중심으로서 차도상에 설치 할 수 없으므로 역사성이 깊은 이곳
경상감영공원으로
1999년 1월1일에 설치하였다. 좌표(座標)는 동경 128도 35분이다.
참고로
서울의 도로원표는 세종로 네거리 기념비각(고종 즉위 40주년 칭경비)앞에 있다
경상감영공원을 다 둘러 본 뒤
바로 앞에 위치한 대구근대역사관 관람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돼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됨.
2008년 대구도시공사가 매입하여 대구시에 기증.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2011년 1월에 문을 열었음. 지상 2층, 지하 1층
일제 강점기 대구 출신의 대표적 제1세대 서양음악가로는 박태원, 김문보,
박태준(가곡 '동무생각', 동요 '뜸북새' 작곡),
현제명(가곡'고향생각' 오페라 '대춘향전') 등이 활동하였다.
1960년 2월28일,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한국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전국민의 가슴에 민주화의 불길을 지폈고, 마침내 4.19 혁명으로
대단원의 막을 올림으로써 한국 민주헌정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삼성,대구에서 성장하다.
1938년 3월1일 이병철(1910~1987)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의 수동에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삼성상회는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의 능금,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이병철은 개업 1년만에 일본인의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대구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사업은 순조롭게 신장되어 1941년 6월3일, 삼성상회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
근대적인 기업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1947년 5월, 대구의 사업체는 간부직원들에게
일임하고 상경하여 이듬해 삼성물산을 설립하여 무역업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전쟁때, 북한 인민군에게 재산을 몰수 당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다행히 조선양조의 수입금 3억원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설립하였으며,
1954년 9월15일, 대구에서 제일모직 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삼성그룹의 모태를
마련하였다.
근대 상업도시, 대구
대구는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다.
평양, 강경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유명한 서문시장은 '대구부읍지'에
'대구읍장'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칭은 읍성의 서문 밖에 위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1923년 천왕당 못이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금까지도
대구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 최대의 약재시장이었던 약령시는
1658년(효종9) 경상도 관찰사 임의백에 의해 봄, 가을에 객사 주변에서 열렸으나
1908년 객사가 헐림에 따라 지금의 남성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약령시 춘시가 폐지 되었으나 1923년 약령시 진흥동맹회가
조직되어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광복 후 다시 봄, 가을에 열리다가
상설시장으로 변하였다.
순종황제(1909년 1월7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대구 방문
1909년 1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는 전국 순행을 떠나
7일과 12일 대구를 방문하였다. 전쟁이 아닌 때에 어가가 궁문 밖을
나온 적이 없었던 조선 왕조에서 순종의 순행은 일종의 '대사건'이었다.
황제의 순행은 1909년 신년 하례식 자리에서 통감 이토(伊藤博文)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겉으로는 민심의 안정과 지방 순시를 목적으로 한 순행이었지만
실제로는 순종의 황제 즉위 뒤의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해산에 대한
저항으로서 의병전쟁 등의 항일 움직임을 무마시키려는 일제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1월7일 오후 3시25분 도착과 함께 연화(화포)가 발포되고, 지붕이 없는
황제 전용 가마(봉련,鳳輦)를 타고 행재소가 설치된 관찰도청에
도착하였다. 또한 대구역에는 아치가 세워지고, 행재소로 이르는 길에는
흰색의 모래를 깔아 위엄을 더했다.
헬렌켈러(1937년7월12일)
"마음의 눈 마음의 귀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다"고 설파한 헬렌켈러"
그녀는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의 삼중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자이자
인권운동가였다. 그녀는 장애자의 생활환경과 복지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였다. 역사적인 대구 방문은 1937년 7월 12일
오전 9시 45분 대구역에 도착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언론은 삼중고의 성녀(聖女)라 칭송하였다.
그녀은 자신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에게 특유의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면서 대구공회당에서 역사적인 강연을 시작했다.
그녀는 '사방에 좋은 산과 향기로운 능금나무가 몰려있는
풍치좋은 대구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라며 강연을 시작했다.
"조선부인에게 특히 전할 말은 없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관련시설의 확충에 앞장 서 달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그녀는 역사적인 강연 뒤 서울로 향했다.
마를린먼로
미국 전설의 여배우 마를린 먼로의 위문 공연
세기의 스타 마를린 먼로가 1954년 2월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대구를 찾았다.(나이아가라 Niagara)(1953)에서 주연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마를린 먼로는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 독특한
매력을 가진 세계적인 영화배우이자 가수였다. 그런 최고의 여배우가
1953년 7월 휴전이후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자서전인(My story)에서 밝히고 있듯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 출신 조 디마지오(Joseph Paul Dimaggio)와의 신혼여행 도중
바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마를린 먼로는 미공군이 사용하고 있던
대구 동촌비행장을 찾아 팔공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사단을 찾아 위문하였다.
대구읍성
멀리보이는 이층누각은 영남제일관이며 사람들의 배경이 되는 누각은
1870년 대구읍성을 수리할 때 읍성 서편에 증축한 주승루(籌勝樓)로 추정됨
(일본 가쿠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대구읍성 연대기(大邱邑城年代記)
261년 신라 첨해왕(沾解王) 15년(261)에 달벌성(達城土城)축조
1390년 고려 공양왕대 달성토성을 石城으로 개축
1590년(선조23) 최초의 대구읍성으로 府使 윤방(尹昉)이 선조23년(1590)에
선산, 군위, 인동(仁同)등 3개 읍민을 징발하여 대구부민과 함께 축성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
1664년(현종5) 관찰사 이상진(李尙眞)이 축성을 건의하였으나 이루지 못함
1736년(영조11) 관찰사 민응수(閔應洙)의 건의로 읍성을 돌로 再築하고 축성비를 세움
1870년(고종7) 관찰사 김세호(金世鎬)가 7만전(七萬錢)의 공사비로 크게 보수
1906년(순종1) 대구부사 박중양(朴重陽)이 부산의 인력을 동원해 일부 해체후
중앙정부에 철거 허가를 요청
1907년(순종2) 1907년4월 대구 전 동민을 동원하여 성벽 철거 완료
1908년(순종3) 대구약령시를 객사로부터 남성로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름
대구향교 대성전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1605년 교동에 건립되었으며 193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음. 일본 가쿠슈인대학
서문시장
달서문 밖에 위치하던 서문시장으로
1920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전의 모습임.가쿠슈인대학
대구 근대역사관 2층까지 관람을 마치고..
중식은 따끈한 갈비탕으로..
옛, 구암서원 전통문화체험장으로 이동이다.
안내판을 보고 중식해결한 그 좁다란 골목에 위치해서 관람하게 되었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암서원은 달성 서씨의 문중서원이다. 조선 현종6년(1665)에 서침(徐沈)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현 대구초등학교의 서남쪽 언덕인 연구산에 숭현사를 세우고
선생을 제향하였다. 숙종 44년(1718)에 동산동 229번지로 이전하였으며 그 뒤
서거정, 서성, 서해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정조 2년(1778)에 서원 수계를 받고
1788년에 경례재, 누학재를 세워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웠으며
1943년에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주변 일대가 도시화 되는 등 달성서씨
문중에서 서원의 자리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1996년에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 내
현 위치로 다시 옮겨가게 되었다. 당시 서원 내에 있던
숭현사(대구시문화재자료 제2호)와 묘정비 비각 등만 이전해 가고 출입문인
경앙문(景仰門) 및 강당, 제수청 건물은 그대로 남게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오는 4월 세계 물의 날 행사에 맞추어 개통할 대구지하철 3호선은
경전철, 모노레일로 건설되었다. 경전철 3호선 서문시장역의 모습
서문시장의 내부. 천정이 높고, 시원하며, 또한 깨끗했다
대구 달성공원앞 도로이다.
대구달성(大邱達城)
이곳은 달서천 중류의 서쪽에 형성된 낮은 구릉지대를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뼈로 만든 화살촉, 민물이나
바다에서 자라는 조개껍데기, 돼지턱뼈, 사슴뿔. 복숭아씨 등이 발견되어
삼한시대부터 삶의 터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한시대 생활유적들 위에 흙을 쌓아서 토성을
만들었다. 성의 밑넓이는 20~30m로 추정되며, 성 안쪽 높이는 4m이며
전체 둘레는 1,300m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조선전기까지 군대의 창고와
우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달성의 주변으로 뻗어 나간 남서쪽 구릉에는 달서면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는 커다란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주변의 큰 무덤과 성을
연관시켜 볼 때. 달성은 삼국시대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성곽의 하나로 평가된다.
'시민의 문' 현판은 고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시민들의 편리를 위하여 2000년 4월부터 무료입장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꽃이
봄물을 받아 먹느라 여념이 없다.
요 비가 그치면 노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며 화사한 봄노래를 들려 주겠지.
동물원의 독수리다. 독수리를 가까이서 보긴 처음인것 같다.
하늘의 제왕답게 위풍당당히 그러나 박제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대신사수운최제우상(大神師水雲崔濟愚像)
동학(東學)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
시계탑 시간은 오후 1시20분을 가리킨다.
'나의 침실로' 이상화시비가 비에 젖어 얼룩져 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 모르는 나의 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거기로
이상화(李相和)는
호를 (尙火)라 하며 1901년 4월5일 이시우(李時雨)선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943년 3월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난 대구가 낳은 애국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등이 있으며
이 비는 우리나라 문단 최초로 세워진 시비라는 점에서
한국문학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구향토역사관(달성공원내)
대구의 약사
대구는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BCE 3,500~BCE 2,000) 무렵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 후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쳐
기원 원년 전후 진한 및 변한 24국 중 한 연맹체로서의 읍락국가(邑落國家)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5세기말에서 6세기초가 되었을 무렵 신라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문왕 9년(689)에는 신라 도읍을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고까지 하였다.
고려시대의 대구는 신라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으나, 12세기부터 점차 위상이 상승하기 시작하였고, 무신정권기에는
대구 부근에서 발생한 민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고 침입때에는 부인사에 수장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으며,
제5차 몽고 침입때에는 공산성에서 대구지역 주민들이 대몽항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 대구는 농업의 주요 생상지로, 또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 후 세조 12년(1466)에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이후 영남지역의 행정.교통. 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던 시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국내 최초로 대구에서는 절미.금연.금주를 통하여
기울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 당하자, 1915년 영남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대구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 중 하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 귀환동포와 월남한 피난민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보게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 대구에서 일어난 2.28 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대구는 성장을 계속하여 영남지역의 중심도시로 발전, 1995년
광역시가 되면서 7개 구와 1개 군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성장하였으며,
2002년 월드컵을 치르고 2003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는 등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함안 조씨가 11대째 살아오고 있는 초가로 된 일반 민가로서
조선 중기에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지은 것으로 전한다.
한덤마을은 해발 800m나 되는 경사가 급한 깊은 산골 마을이다.
예전에는 15호 가량 살았으나 현재는 6호만 남아 있다.
이 집은 약 200년전에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라 한다.
안채,사랑채,아래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아래채는 나중에 고쳐
지은 것이다. 안채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헤 서향으로 지어져 있다.
남부형에 속하는 평면구성으로 2탄 마루의 왼쪽에 큰방과 부엌을 ,
오른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자연석 주초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기둥만 둥근 기둥을 세웠다.
3량집의 간소한 구조인 이집은
싸리 기둥에 칠기봇장집(칠기나무로 된 보를 사용한 집)임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초가로는 드물게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이며
안채의 창문도 옛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조길방은 이 집이 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에 살던 사람으로 지금은
작고하였으며 그 부인이 집을 지키고 있다.
3.1운동로,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길
청라언덕(靑蘿-푸른 담쟁이 언덕)
내가 겪은 3.1운동
"하루는 상급생 언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우리도 이 운동에 나가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 붓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이방저방에 쫓아 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나갈 의복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우리학교 학생들의
의복은 검정치마에 흰저고리가 교복같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치마에 옛날에 입던 끈이 달린 치마허리는 다 내 버리고
반드시 조끼허리를 만들어 치마에 달아 준비하라는 특별지시를 받았다.
그 이유는 그날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면서 달리며 뛰어 가는데
안전하기도 하려니와 일경에게 체포당하면 어떤 악형과 모욕을 당할지
모르니 꼭 조끼를 만들어 치마에 달아 입으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크게 만들어 의복속 가슴에 매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학생들의 치마가 조끼허리로 변하여 진 것이다.
(3.1운동 당시 신명여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김학진 할머니 친필회고록 중에서)"
청라언덕에 오르다
대구 동산병원 구관 현관
이 현관은 제중원을 전신으로 한 대구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대구 동산병원 구관은 제2대 동산병원장 플렛치가 1931년 신축했으며,
2002년 5월31일 등록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대구동산병원 구관은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병원으로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경찰병원으로 사용되었고
1950년 6.25전쟁시에는 국립경찰병원 대구분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축물은
중앙의 돌출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대구
향토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0년 대구도시철도
3호선 공사로 인하여 현관부분만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박태준.1901~1986)
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이 '동무생각(思友)'이다
바로 이곳이 푸른(靑) 담쟁이(蘿) 넝쿨이 휘감겨 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란다.
박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 곳에 노래비를 세운다.
이 언덕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길 기원하면서
동무생각(작곡;박태준, 작사:이은상)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00여년전 서양음악의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우리국민의 정서를 잘 반영한 작품들로 일제치하 속에 국민들의
고된 마음을 달래주던 작곡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며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의 지평을 연
박태준선생이라고 한다.
대구에서 출생한 박태준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기러기>와 최초의 가곡 <동무생각>을 비롯하여
<오빠생각>, <맴맴> 등의 곡을 지었으며,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벅궁>, 가곡집 <물새발자욱> 등을 발간하였다고 한다.
경남 마산 창신학교 교사, 경성여의전 교수,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고,
그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구제일교회
90계단 위 청라언덕에서 내려다 본 계산성당 풍경
계단길 아래쪽 길 건너편에 있는 계산동성당을 가기 위해
청라언덕에서 90계단 3.1로운동길을 다시 내려온다.
대구 계산동성당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프랑스인 로베르신부가 설계하였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송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청탑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상화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에 비탄에 빠진 우리정서를 시적 언어로 끌어
올림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이정표를 세운 민족시인이다. 본 고택은
이상화가 말년(1939~1943)을 보냈고, 그의 마지막 작품 '서러운 해조'가
탄생한 역사적인 장소로 이상화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상화시인의 생애..윗글 옮김
이상화(李相和, 1901년 4월5일(음력)~1943년 4월25일)는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尙火),무량(無量),상화(想華),백아(白啞)이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이며, 어머니는 김신자이다.
4형제중 둘째아들이고 큰형 상정은 독립운동가이다.
여덟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하였으며, 열아홉살 되던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거사를 모의 하다
주요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집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백조)동인에 참여했고,
1922년(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시 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번역에도 힘썼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와 1933년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을 가르쳤다.
1943년 3월에 위암진단을 받고 투별하다가 4월25일 계산동 고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48년 3월14일 김소운의 발의로 이윤수, 구상등이 참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이상화시인의 시는 감상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 민족적 비애와
국토예찬으로 나눠지고 특히 40년대에 문인들 거의가 친일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 받았다.
그의 작품활동 초기에는 '백조' 그룹등과 함께 하면서 '나의 침실로' 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6년경을 고비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식민지하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얼룩진 시비가 꼭 눈물 흘리며 울고 있는 듯..
학창시절에 많이 읊었던 시를 만나니 옛시절이 뇌리속에서 되살아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1926)
서상돈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이상화고택과 마주해 있다.
본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으로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곳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자 나라 빚을 갚자는 모금활동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본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으로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서상돈' 조선고종때의 민족운동가
서상돈은 1850년 10월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866년
병인사옥당시 천주교신자 박해를 피해 대구로 피난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서상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대구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대구제일의 거상이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친척들의
고난과 순교를 목격한 뒤부터 천주교의 전교활동과 구제, 자선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일생동안 천주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1894년에서 1903년까지 정삼품 통정대부, 탁지부 세무시찰관으로
경상도의 세정을 총괄하였다.1898년 독립협회 부설 만민공동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상돈은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그 운영을 도왔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건물에 한문서당인 해성제(海星齊)를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1908년에는 이 해성제를 성립학교로 바꾸어 개교하였다.
1905년 달서여학교를 설립을 적극 지원했으며 1906년에는 교과서,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한 대구광문사를 조직하였다.
1907년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원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신분을 초월한 전국의 모든
남녀노소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났고 이 운동을 제안한 서상돈은
1913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중구 근대화 골목투어를 마치고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5길 25(삼덕동1가 5-2)
박근혜 대통령이 태어난 옛집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도시개발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고 해설안내판만이 상가건물 한 귀퉁이에
쓸쓸히 세워져 있었다. 당시에는 기와를 얹은 한옥이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일정으로 찾은 박근혜대통령 생가터이다.
안내지도에서 보게 되었는데 찾기도 힘들었고 행인들에게 물어도
아는사람이 없어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전시해설자가
그려준 자세한 안내약도로 찾게 되었다.
대구의 명동이라는 동성로 번화가 복판,
지금은 파리바케트 빵집이 있는 곳이다.
1952년 2월2일 이곳에서 박정희전대통령과 육영수여사 사이 장녀로
태어나 이곳 한옥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 후 서울 신당동에서
지내다 청와대 생활을 하고 어머니 육영수여사가 비명에 돌아가시자
퍼스트레디를 대신하였고 부친의 서거후 잠시 쉬고 있다가 야당인
한나라당을 이끌고 정치에 투신하여
드디어 2013년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근혜대통령 생가터를 마지막 일정으로 마치고 나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 둘쨋밤은 다음날 동화사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동화사입구에서 보내기로 하곤 또 2.28 중앙공원앞까지 걸어나와
급행버스1번을 타고 동화사입구에 이른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서서히 어둠이 내리더니 동화사입구에 이르니
까만 밤이 되어 있었다. 급행버스엔 운전기사와 동료한분, 그리고 우리 둘,
큰버스에 사람이라곤 모두 넷뿐이었다.
오후에 비가 그쳐 햇님도 얼굴 내밀더니 밤엔 별도 반짝반짝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조용한 밤, 고요한 밤이다.
저녁을 버섯전골로 냠하면서 따끈한 식당방에서 종일 뚜벅걸음으로
지친 다리도 풀며 하루를 알차고 실속있게 잘 보낸 하루를 자축하면서
짜안~ 백순당 생막걸리로 건배도 마치고 숙소로 든다.
공교롭게도 동성로 첫밤을 보낸 이름과 같아서 놀라웠다.
아 ~ 앞에 'T' 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군.
따뜻하게 잘 보낸 별 부담없는 궁전같은 숙소였다.
동화사케이블카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하늘이 보이는 '티.포유' 로
위사진은 이튿날 밝은 아침 측면에서 찰칵!
종일 우산쓰고 대구중구근대화골목을 누비며 근대로의 여행에 심취했었다.
도심에서 개화기 근대문화의 발자취를 느끼기에 충분했고
골목 곳곳에는 선현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과 옛정취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품격있는 아름다운 길에서 많은 것을 느낀 실로 알찬 하루였다.
큰 별들의 탄생지이기도 한 대구의 모습을 여행중 새롭게 인식하면서
잘 꾸며진 대구 도심지 근대路의 여행을 마친다. 하룻동안 긴여행길이었다.
3편에선 동화사입구에서 걸어가는 부인사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사진편집및글: 찬란한 빛/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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