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를 위한 시쓰기
최 소 영 ( 한국시치료연구소 )
1. 상실에 대한 치유의 시쓰기
한국의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의 초두에 이르는 1930년대 후반의 한국의
시문학사는 그 절정을 이룰 만큼 작품 활동이 활발하여 그 성과가 매우 탁월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 시기는 아시다시피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암흑기라고 할 만큼 매우 어려운 시대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그만큼 어느 때 보다도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대다수의 시인들은 고향상실에 대한- 시적형상화를 그려 내어야만 했다.
이명찬 (1999), 1930년대 후반의 한국시의 고향의식연구,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209
그 중에서 백석은 고향, 가족 상실에 대한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내는데, 그야말로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시 쓰기였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에서의 좌절을 어린 날의 풍요로움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정신적 퇴행 (이명찬 , 위의 같은 글 , p.100)
으로 자기 방어기제를 삼았다. 그것이 좌절되고 상처로 얼룩진 현실에 대결하여 자기를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시가 매개가 되어 시를 쓰는 문학적 행위를 통해서 그런 고통의 시간을 그나마 견디어낼 수 있었고, 시 쓰기를 통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시는 백석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이야기 체’시는, 시적 내러티브를 기초로 하여 언어로 구체화 시켜 명료하게 하고, 그의 내면의 찌그러지고 억눌린 것을 풀어내고 있는 것을
‘버텨주기’하고 있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그의 ‘흰바람벽이 있어‘ 에서는 가족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은 상처였고, 시쓰기는 그 현실의 아픈 상처를 통찰하게 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 높은 것으로의 언어로 담아 승화시켜 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에서는 처음에는 대상 상실에 대한 불안과 분리되지 못한 편집성, 그리움이 뒤엉켜 토로하다가 점차적으로 써내려 가면서, 자신의 현재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 더 크고 높은 것을 향해’‘갈매나무’라는 것으로 정화로 응결 되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 에서는 가족, 고향,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 더 이상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맞닿은 ‘ 하늘이 귀애하는 높은 것’이 되었다. 이명찬 (1999), 1930년대 후반의 한국시의 고향의식연구,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99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
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
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
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
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
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
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
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
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족’은 현실에서의 좌절된 상처를 일제 시대 이전의 유년의 고향에 대한 아슴아슴한 옛 추억을 살려내며 풍요로운 과거로 투사시킨다.
이것은 유년으로 퇴행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다시 자기 성찰을 하고 초월이라는 동경을 하게 된다.
언어의 유희까지 있어 입가에 웃음까지 돌게 한다. 성숙한 적응형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다시 자신의 현실을 재구조화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기 그의 시적 활동을 볼 수 있다.
후기 그의 작품 활동이라는 승화된 북한체제에서의 현실을 완전히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희망과 꿈의 상징인 어린이를 위한 동화시를 썼고 동화문학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