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줘봐”란 말 한마디
문채원은 담백한 콧소리가 들어간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한다. 말꼬리를 살짝 빼기도 한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동갑내기에게 “야, 줘봐”라는 말을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 장면은 ‘문채원 애교’라는 연관검색어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문채원과 대화를 해본 이라면, 그가 “야, 줘봐”라고 한마디만으로도 남자들을 설레게 할 수 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별난 성격임에도 사랑스러워야 할 로맨틱 코미디의 여자 주인공으로 이보다 더 적합한 이가 있을까. 하지만 문채원은 만나자마자 “저 로맨틱 코미디에 출연하고픈 생각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로맨틱 코미디란 장르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거든요.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재밌게 본 적도 없고요.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재밌게 보고도 미뤄두고 있었죠. 누군가 ‘서른 되기 전에 (로맨틱 코미디) 한번 해보지 그래?’라는 말을 했을 때 저도 제가 하는 로맨틱 코미디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릴러나 미스터리 같은 장르에서 드라마가 많은 캐릭터를 찾았는데, 그런 식으로 에너지를 몇 년씩 쓰다 보면 그것도 소진이 돼요. 관객들도 비슷한 캐릭터를 보면 지겨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
지난해 미혼 남녀 사이에서 가장 많이 쓰였을 단어 ‘썸’에 관한 영화다. ‘뭔가(something) 있는 이성 관계’를 의미하는 썸은 지금까지 남녀 사이에서 형성된 미묘한 긴장관계를 단박에 설명했다. 이둘운 초등학교 교사와 ‘날씨의 여신’이라 불리우는 기상캐스터로 18년 동안 연인인 듯, 아닌 듯 연인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이들은회사의 유부남 상사를 사랑하다가 상처를 받고, 여자친구와 100일 이상을 사귀지도 못한다. 서로 친구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서로에 대한 애매한 감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서로의 감정을 살피고 이리저리 재다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하는 요즘 세대를 반영한 영화다. 문채원은 “장애물이 있는 극한 상황 속에 현실적인 감정을 불어넣는다. 현실적인 부부나 연인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영화를 마치 실제로 있는 일처럼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다. 18년 동안 남자와 여자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남자가 여자를 계속 좋아했다는 설정은 현실적이지 않다. 하지만 내 옆에 있을 것 같은 캐릭터로 이 영화를 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혹시 같은 경험이 있냐고 많이들 물어보세요. 어릴 땐 마음을 재다가 썸을 탔다고 상대가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근래에 와서 그러진 않아요. 예전에는 상대가 마음을 키워왔는데 제가 너무 늦게 안다거나, 그 반대이거나 했던 거죠. 18년 지기 친구나 유부남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때의 제 경험과 가치관을 많이 반영했어요. 캐릭터에 맞춰서 그때 느낀 감정을 더 증폭시켰죠. ‘이 상황에서 나는 이랬는데, 이렇게 느꼈겠지?’ 이러면서요.”.
서양회화 전공한 화가 지망생
문채원은 예고를 나와 대학 때 서양회화를 전공했다. 공부를 하던 중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지금 그림을 그리진 않지만 전시를 틈틈이 본다. 공부가 아닌 창의성에 중점을 둔 미술을 하다가 연기를 하게 된 건 좋은 것 같다. 다시 그림을 그릴 생각도 있다”고 했다. 문채원은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파고드는 편이라 연기와 그림을 병행하지 못했다. “한 가지만 해야 미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좋은 문화를 접하다 보면 아무래도 표현이 늘지 않을까요? (탁자 위 꽃을 가리키며) 저 예쁜 꽃을 본 적이 있는 사람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꽃이 핀 들판에서 표현하는 감성이 다르지 않을까요?
문채원은 약간 느린 듯한 특유의 말투로 “여배우가 두려움이 생기는 때는 작품을 하지 않을 때인 거 같다”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와서 조급함은 없다”고 했다. 막 서른이 된 그는 “여자로서, 한 집안의 딸로서 하게 되는 고민이 늘어났다”고 했다.
“필모그래피가 없었을 때는 막막하고 조급했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무서웠어요. 필모그래피가 쌓이다 보니까 저의 장단점을 알아가고 보는 사람들도 저에 대해서 아는 게 생기니까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편안해졌어요. 아마 작품수를 더 늘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많은 작품을 하는 것보다 제가 하고 싶고, 원하는 캐릭터를 잘 소화하고 싶은 바람이 커요. 단편영화에 출연하게 된 건 〈최종병기 활〉 때 함께 했던 박해일 선배의 영향이 컸어요. 평소에 워낙 말수가 적은 선배인데 어느 날 저한테 ‘넌 여주인공만 하고 싶니?’라고 물었어요.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기회가 될 때 규모와 장르, 역할 구분 말고 다양한 작품을 경험해보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박해일 선배는 신인 감독들의 영화나 단편, 예술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한 경험이 있잖아요. 이번에도 그때 생각이 났어요. 역할이나 이야기가 좋으면 뭐든 반가워요. TV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는 여배우가 그런 데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들 하시는데, 제가 닫혀 있지 않다는 걸 다들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연기를 그만둘 수 있어’란 마음으로
〈오늘의 연애〉가 개봉할 무렵 문채원은 영화 〈그날의 분위기〉를 촬영하고 있었다. 부산행 KTX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신인 조규장 감독의 첫 상업 장편이다. 문채원은 “〈비포 선라이즈〉가 떠오르는 멜로 영화다. 어머니와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멜로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한다. 여배우가 희로애락을 보여주기에 사랑 이야기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오늘의 연애〉에서 보여준 통통 튀는 매력을 누르고 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한다. “평범하고 여성스럽고, 다소 수동적이지만, 자신의 그런 성격을 싫어하는 여자”란다.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힘들어요. 요즘 쉬는 날에는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들을 보고 있어요. 속은 독특하지만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결코 쉽지 않은 건데, 제가 할 수 있는가 보고 싶기도 해요. 극단적인 캐릭터는 저를 극한으로 밀어넣는 건데, 평범한 캐릭터의 연기는 세밀하고 미세한 부분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1년에 많아봤자 두세 편”이라고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소개했지만, 문채원은 여배우들 중에서 꽤 폭넓은 이력을 갖고 있다. 사극과 멜로, 드라마에 고루 출연했고, 악역으로도 인상을 남겼다. 그는 “특정 직업을 표현하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면서 “아직 액션 연기에 대한 관심은 없다”고 했다. “특정 직업을 표현하는 건 주로 남자 배우들이 많이 한다. 〈굿 닥터〉 때 의사 역할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생각, 그리고 직업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라디오 DJ처럼 목소리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에 그것과 비슷한 기상캐스터 역할이라 좋았다”고 했다. “기자 역할을 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더니 “게으르고 실수를 많이 해서 선배들에게 혼나는 기자라면 해볼 만할 것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TV와 영화에 많이 나왔던 능력 있고, 똑부러진, 전형적인 여기자는 싫다는 얘기다.
“뭘 연기하든 눈빛이 중요해요. 눈으로 거짓말하긴 힘들잖아요. 많은 배우들이 강렬한 캐릭터 연기를 하면서도 또 어떤 작품에선 순수한 모습도 보여야 하는데, 눈이 그런 걸 표현하지 못하면 설득력이 없어요. 〈파이란〉에서 건달 강재가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다 눈빛 덕분이에요. 제가 언제까지 배우를 할지 모르겠지만 깨끗한 눈빛을 가지려면 쌓인 걸 비워가는 과정도 필요해요. 사람이 변하면 다들 알더라고요. 눈빛이 변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상대를 판단하곤 하는데, 저도 마음을 유지하는 게 참 힘들어요.”
배우가 인터뷰 도중 ‘언제까지 배우를 할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젊은 배우들은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겠다’ ‘이것 말고 다른 건 상상할 수 없다’는 식으로 연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문채원은 “연기, 물론 좋아한다. 하지만 이걸 평생 하겠다고 하는 건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제가 이런 얘기하면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이 제일 오래한다고 놀린다”며 웃었다.
“솔직하게 살고 싶은데 배우는 또 그러면 안 되잖아요. 상처받지 않으려면 독해져야 하기도 하고요. 배우는 독하면서도 세상 누구보다 여리게 자신을 만들어야 하기도 해요.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 힘들지만 개인적으로는 없어선 안 될 과정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평생 연기자를 하고 싶다는 말은 못 하겠어요. 미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만두었고, 지금 또 그리워하고 있잖아요. 사람도 좋아했다가도 질리고, 그러면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매 순간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언제든 연기를 그만둘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지금이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지막일지 몰라!’ 제가 외우고 다니는 주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