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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는 '보이지 않는' 물길이 있다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①] 서촌기행의 출발, 청계천 상류 백운동천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15.12.26.
글 : 유영호(ecosansa)
나는 우리 한반도 역사의 가장 중심에 있는 서울 곳곳을 걸으며 이곳에 켜켜이 쌓여 있을 과거를 상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발로 걸으며 느끼는 과거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꿈꿔보고자 한다.
서촌은 왜 서촌일까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의 마을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방위(方位)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일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소위 '북촌'으로 불리는 가회동 일대는 '동촌'이 돼야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청계천 이북의 모든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사료에 의하면 서촌은 지금의 정동 일대를 지칭한다. 그러나 경복궁 서쪽 마을이 워낙 대중적으로 '서촌'이란 명칭으로 인식돼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편리한 '서촌'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 여행의 시작점은 최근 서울 여행지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소위 '서촌'이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우리의 눈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 딛고 있는 서울시내 도로 저 밑에 흐르고 있을 청계천 상류인 '백운동천'(일반적으로 우리가 청계천이라 부르는 건 현재 복원돼 있는, 청계광장부터 흐르는 물길을 말한다. 그곳에서 최장 상류층까지는 따로 '백운동천'이라 부른다)을 따라 그 발원지 바로 옆에 위치한 창의문까지 걸을 계획이다.
또 그 출발점은 현재 복원된 청계천 시작점인 청계광장 소라탑이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백운동천'이 이곳까지 흘러와 청계천 본류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청계천의 물길을 상상하다
백운동천은 창의문이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계곡에서 시작돼 경복궁 서쪽 '자하문로'를 따라 흐르며 경복궁역과 세종문화회관 뒤편을 지난다. 그리고 현대해상화재 건물 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광화문 네거리 동화면세점이 입점해 있는 '광화문빌딩' 밑을 지나 청계광장의 소라탑에 이른다.
한편, 여기서 또 다른 청계천 지류인 '중학천'을 만나는데, 그것은 북악산에서 시작돼 삼청동을 지나 경복궁 동쪽 담장을 타고 내려와 교보문고 뒤로 흐른다. 이렇게 '중학천'과 만나 청계천 본류, 즉 종로와 나란히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만드는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 이곳은 우리가 수없이 지나는 곳이지만 이미 이 일대의 물길은 모두 복개돼 우리는 그 물길을 잊은 채 살아왔다. 그저 건물들 사이로 만들어진 '도로' 위를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 인간의 인공적 포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단지 그 물길이 조금 더 깊어지고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호우가 오면 두 물길이 합쳐지는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서 소위 '병목현상'을 일으켜 도로는 쉽게 물 속에 잠기는 것이다.
청계천과 한양의 풍수지리
한양은 한반도의 동고서저 지형과 반대의 서고동저 지형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도성을 관통하는 내명당수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러한 지형을 풍수지리에서는 명당이라고 한다.
참고로 조선시대 한양 도성은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축조됐다. 그런데 이 산들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고동저(西高東低)를 이룬다. 한반도의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과는 반대다. 이로 인해 한양 도성을 관통하고 있는 내명당수 청계천 역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東出西流) 외명당수 한강과 반대로 흘러 풍수상 좋다고 평가되고 있다.
흔히 풍수지리에서 서출동류(西出東流), 곧 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명당수로 보는 것은 서쪽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처럼 북서풍이 부는 곳은 북서쪽 지대가 높아야 찬바람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본다.
이렇게 청계천을 내명당수로 인식하며 도성이 축조됐지만,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명당수 부족과 오염이 점차 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 풍수가 최양선은 도읍의 명당수는 깨끗해야 하므로 개천에 오수를 버리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현실적으로 오염 방지는 불가능하며, 풍수로 도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맞섰다. 논란 끝에 결국 세종은 유학자 편을 들어 도성 안에 사람이 살다 보면 더러워지기 마련이라며 논쟁을 정리했다.
청계천 복개의 역사
이렇게 조선왕조 500년이 지나고, 1925년부터 차츰 청계천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백운동천, 옥류천, 사직천 등이 땅 속에 묻히면서 실개천에서 영락없는 하수구로 전락했다. 1920년대 이후 일제 총독부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 계획을 발표했다. 1926년에는 이를 복개하여 1만 평 택지를 조성하겠다고 했으며, 1935년에는 복개해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는 고가철도를 건설한다는 발표까지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1940년에는 복개해 위로는 전차, 밑으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그런데 이런 구상은 모두 당시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총독부의 이런 구상은 재정문제로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1937년 광화문일대에 약간의 복개만 이뤄졌을 뿐이다.
해방 후 수많은 피난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서울시는 전면 복개 결정을 내리고 1958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1961년 동대문까지 모두 복개해 도로를 개설했다. 그리고 그 후 사대문 밖의 복개도 계속돼 1976년 청계고가도로를 개통한 데 이어 이듬해 청계천 전면 복개 공사가 마무리됐다. 이로써 하천으로서의 청계천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도로 위 '사각철판'이 힌트다...靑 둘러싼 '보이지 않는 비밀' [청와대 백과사전]
중앙일보 기사 입력일 : 2022.05.31.
글·그림·사진=안충기 기자·화가
[청와대 백과사전 5 - 보이지 않는 물길]
▶청와대 백과사전 1- 걸어서 한바퀴(시설물과 등산로)
▶청와대 백과사전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청와대 백과사전 3- 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바퀴
▶청와대 백과사전 4- 전면개방까지 83년
▶청와대 백과사전 5- 보이지 않는 물길
▶청와대 백과사전 6- 풍수 이야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백악산 꼭대기에 내린 비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물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 북쪽 홍제천, 동쪽 삼청동천, 서쪽 백운동천, 남쪽 대은암천으로 흘러든다. 산책로가 있는 홍제천은 낯설지 않은데 나머지 하천 셋은 생소하다. 정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천은 있고 여전히 물이 흐른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들 하천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물길을 찾아 백악산 동·서·남쪽을 훑어봤다.
묻어 다 묻어
1900년대에 들어서며 일제는 조선 침탈 속도를 높인다. 이를 위해 철도와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적극 확장한다. 1899년에 경인선, 1904년에는 경부선을 개통한다. 500년 넘게 이어져 온 서울의 도시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사대문 안 도로 골격이 이즈음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다. 개발연대로 들어서며 서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1970년에 550만 명이던 인구는, 올림픽이 있던 1988년에 1000만 명을 돌파한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며 폭증하는 차량은 도시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늘려야 하지만 도심에는 그럴 만한 땅이 없었다. 하천 복개(覆蓋 뚜껑을 덮는 일)가 가장 쉬운 해법이었다. 돈 덜 들고, 민원 줄이고, 공사 빨리 끝내고, 주차장 공간도 생기고, 게다가 하수도 악취까지 묻어버리니 일거오득이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생활하수가 동네 개천으로 흘러 들어갔다. 큰비라도 내리면 온갖 쓰레기는 물론이고 오줌똥까지 섞였다. 지금은 복개를 하더라도 하수관로를 따로 만들지만 그때는 그냥 덮었다. 하천 대부분은 동네와 동네를 가르는 자연 경계이기 때문에 행정상 이해충돌도 적었다.
조선 시대 도성 안에는 청계천으로 들어가던 물길이 스무 개가 넘었다. 1977년에 청계천을 마저 덮으며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불과 70여 년 만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백운동천 대은암천 삼청동천도 땅속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편의를 얻었지만 도랑을 잃고, 가재도 잃었다. 환경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하천을 덮어 만든 길은 조금만 눈여겨 보면 알 수 있다. 길을 따라 수시로 맨홀이 나타나고, 아스팔트 위에 다리 상판처럼 콘크리트 이음매가 있다.
청와대 동쪽-삼청동천
지금의 삼청로, 그러니까 동십자각에서 건춘문(경복궁 동문)을 지나 삼청공원 쪽으로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이 삼청동천이다. 종로 11번 마을버스 종점에서 100m쯤 올라가면 삼청테니스장이 나온다.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여기서 땅속으로 들어간다. 삼청로를 따라 내려가면 수시로 맨홀이 나타난다. 길 아래에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인공수로인 사각형 암거(closed culvert)가 묻혀있다. 길 위 중간마다 철판으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맨홀도 보인다. 수로를 정비할 때 작업자들이 드나드는 입구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멱을 감던 시절 삼청동천에는 북창교, 장원서교, 십자각교, 중학교, 혜정교 같은 다리들이 있었다.
광화문이 삼청동천 옆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 일제는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며 그 앞에 버티고 선 광화문을 헐어버리려 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계획을 바꿔 1927년에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쪽으로 옮겼다. 이전한 광화문은 1929년 열린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쓰였다. 한국전쟁 때는 폭격을 맞고 허물어진 뒤 1968년에 지금 위치로 돌아왔다.
삼청동천의 하류인 동십자각에서 청계천까지를 따로 중학천이라 불렀다. 조선 사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중부학당 앞을 흘러서 붙은 이름이다. 중학천 옆에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집터가 있었다. 정도전은 1398년 1차 왕자의난 때 이방원에게 죽는다. 그 뒤 정도전 집 마구간 자리에 사복시(司僕寺)가 들어섰단다. 왕실의 말과 마구를 관리하는 관청이다. 일제강점기 사복시 터는 군마대와 수송공립보통학교, 광복 뒤에는 서울지방경찰청 기마대가 됐다. 지금의 이마(利馬)빌딩, 종로구청, 종로소방서 자리다.
삼청동천은 1965년에 덮어 길을 냈다. 2009년 서울시는 교보문고 뒤쪽인 청계천에서 종로구청까지 340m를 중학천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했다. 하지만 자연하천과는 거리가 먼 전시용 인공하천일 뿐이다.
청와대 서쪽-백운동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 능선에 창의문(자하문)이 있다. 이 일대를 조선 시대에는 백운동이라고 불렀다. 청계천의 본류인 백운동천(白雲洞川)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경복궁역으로 내려가는 자하문로 밑이 백운동천 물길이다. 자하문로를 따라 내려온 물길은 경복궁역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흐르다가 동아일보사 앞에서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백운동천은 상류 일부를 빼고 1920년대부터 덮이기 시작했다. 물길이 살아있을 때는 신교, 자수교, 금천교, 종침교 같은 다리들이 있었다.
백운동천에는 청풍계, 옥류동천, 사직동천, 경희궁 내수, 경복궁내수 같은 지류가 있다. 경복궁내수를 빼고는 모두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다. 청운동에 있는 청풍계와 수성동계곡에서 내려오는 옥류동천은 조선 시대 명승으로 이름났다. 옥류동천은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 앞에서 백운동천과 만난다. 사직동천은 사직단을 지나 서울시경 앞으로 흐르고, 경희궁내수는 궁에서 나와 세종대로 사거리 쪽으로 흘렀다. 경복궁내수는 경회루 남쪽에서 나와 정부서울청사 뒤를 지나 백운동천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광화문광장 개선공사를 하며 땅을 파니 옛 문헌과 지도로만 보던 조선 시대 육조거리가 드러났다. 본래의 자연퇴적층 위에, 임진왜란 전후, 경복궁 중건기, 일본강점기, 현대가 시간별로 착착 쌓여 있다. 물길도 드러났는데 위치로 보아 경복궁내수가 아닌 하수를 흘리던 도랑으로 보인다. 백운동천 주변에는 겸재 정선, 송강 정철, 김상헌 집터가 있다. 이중섭 가옥, 박노수 가옥, 신익희 선생 옛집, 이상범 가옥, 김정희 옛집, 홍종문 가옥, 배화여고 캠벨 기념관 같은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다.
청와대 남쪽-대은암천
백악산 남쪽 골짜기에서 청와대를 지나 경복궁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 대은암천이다. 경복궁의 금천(禁川)이다. 금천은 궁궐이나 왕릉 들어갈 때 건너가는 물길을 말한다. 물을 건너며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다는 의미가 있다. 궁궐마다 금천이 있는데 경희궁내수(경희궁), 정릉동천(덕수궁), 옥류천(창경궁), 북영천(창덕궁)이 그들이다. 금천의 물은 궁궐에 불이 나면 소방수가 된다.
대은암천 물길은 두 개다. 1번 물길은 청와대 관저~녹지원 옆~경호실과 여민관 사이~신무문 오른쪽 담장 아래 수문~향원정~경회루에 이른다. 청와대 앞길만 지하로 흐르고 나머지 구간은 온전히 드러나 있다. 물길이 지나는 청와대 녹지원 일대는 숲이 우거져 운치 넘친다.
2번 물길은 영추문 북쪽에서 궁의 담장 아래를 지나 경회루로 들어가는데 발원지가 아리송했다. 청와대 경내를 오르내리며 지형을 꼼꼼히 살펴봤다. 처음에는 본관 뒤쪽 계곡에서 나오는 물길이 1번 물길과 녹지원 앞에서 만난다고 추측했다.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본관 뒤에서 나온 물길은 영빈관을 거쳐 효자동 방향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영빈관 부근이 조선 시대에 팔도배미(임금이 손수 농사짓던 땅) 자리였으니 당연히 개울이 있었겠다. 청와대 본관은 노태우 정부 때 지었다. 토목공사를 할 때 계곡 바닥에 콘크리트관을 묻어 물길을 내고, 그 위에 본관과 대정원을 조성했을 테다.
영빈관 쪽에서 나온 2번 물길은 분수대, 진명여고(목동으로 이전) 터의 옆을 돌아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궁으로 들어가는 자리에 있던 다리가 서금교(西禁橋)다. 금천의 서쪽에 있는 다리라는 뜻이다.
1번과 2번 물길은 경회루 옆에서 만나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90도 꺾는다. 이 지점에서 경복궁내수가 갈라져 남쪽으로 나가고, 대은암천(금천)은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흘러 동십자각 남쪽에서 삼청동천과 만난다.
길바닥 아래 숨은 역사
청계천은 다시 햇살 아래로 나왔다. 주변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훌쩍 자란 나무들은 제법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한강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이 지천이고, 돌에는 다슬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물가에는 직장인들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크고 작은 개울들은 여전히 묻혀있다. 물길 다시 살아나면 서울은 자연스레 생태환경 도시가 되지 않을까. 청와대와 경복궁 주변을 걸으며 틈틈이 길바닥을 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발 아래에 서울의 과거와 미래가 있다.
백운동천 물길 따라 걷는 경복궁 서쪽 길 [문화지평 답사기]
미디어파인 기사 입력일 : 2021.07.19.
[미디어파인 칼럼=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지난 5월 1일 오전 10시 30분 백악산 창의문 입구서 ‘물길답사’가 시작됐다. 이번 물길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란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문화지평은 청계천을 이루는 서울의 주요 5대 물길에 대한 답사와 함께 3D, 동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진행한다. 답사 대상은 백운동천을 비롯해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 청계천을 이루는 5개 지류 발원지부터 청계천 합수 지점까지다. 이번 답사는 5개 지류 중 첫 번째 코스인 백운동천 물길이다.
백운동천 발원지와 물길 흐름
백운동천은 서울의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길이가 가장 길어 청계천 본류로 불린다. 백운동천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청계천 최상류 지명이 백운동이었고 물줄기가 백운동을 감싸고돌아 흘러 내려왔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한다. 창의문 입구에는 ‘청계천 발원’를 나타내는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이 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發源地)로 정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양의 북쪽 주산인 백악은 조선의 사상과 정기가 서린 곳이다. 면악, 공극산으로도 불렸으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렀다. 일부에서 북악이라고 불렸는데 현대에서는 ‘일부’가 대세가 됐다. 여담이지만 백악 이름 되찾기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백악이란 이름은 고려 명종(재위 1170~1197년) 때, 한양 백악에 새 궁궐을 조성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나온다. 북악산을 백악으로 부르게 된 데 대해 사학자들은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입각해 조선을 건국하고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청계천지천연구’에 따르면 백운동천의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 산1-76 부근과 두 번째 지점은 종로구 청운동 7-18 부근 지점으로 추정된다. 각 지점은 백악산의 청와대 경비를 맡고 있는 군 시설 부근과 자하문터널 남단 일대다. 군 시설 부근을 ‘최장발원지’라 하고 자하문터널 남단 일대를 ‘역사적 발원지’라고 부른다. 역사적 발원지에는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白雲洞天’이란 바위 각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최장 발원지는 접근하기 어렵지만 역사적 발원지인 ‘백운동천’ 각자는 열린 공간이라 언제든 가볼 수 있다. 위치는 청운동 자하문터널 입구 우측에 있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교회역사센터 뒤쪽에 있다. 이곳은 조선말기 문신과 이후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동농 김가진(1846~1922)의 별서 터가 있던 곳이다.
백운동천 각자 옆으로는 노출된 바위틈으로 역사적 발원을 증명하듯 졸졸 거리며 흘러내리는 물길이 보였다. 이곳에는 김가진의 별서 이후에 콘크리트와 타일을 사용해 지었던 현대식 주택 바닥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물길을 복개한 흔적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 모를 돌탑과 예 주택 흔적이 여럿 보인다. 과거엔 숲이 깊어 무속인들이 모여 살았음직한 추측이 가능한 몇몇 부재도 눈에 띈다.
백악산 양 갈래서 발원된 백석동천 물길은 경기상고 앞에서 합수돼 자하문로를 따라 경복궁역 사거리까지 거침없이 흐른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복개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발 밑으로는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물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몇 개의 다리가 놓여있었을 테고 또 몇 개의 지류들이 합수됐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덮여 있지만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표지판을 설치해 두었고 관련된 이름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경복궁사거리에서 물길은 왼쪽 11시 방향으로 살짝 꺾여 한국생산성본부와 종교교회 앞으로 지나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흐르다 세종대로사거리 동아일보사 앞에서 청계천과 합수하면서 그 이름을 다한다.
백운동천 지류
백운동천을 이루는 지류에는 옥류동천, 대은암천, 사직동천, 경복궁내수, 경희궁내수 등이 있다. 행정동 경계에 의해 크게 분류하면 백운동천·옥류동천과 사직동천·경복궁내수·경희궁내수 두 분류로 구분된다. 백운동천은 백악산과 인왕산 자락 일대에서 물길이 시작해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세종로 일부, 옥인동 일부로부터 물이 모여 하계가 형성된다.
옥류동천의 경우 옥인동과 누상동에서 물길이 시작한다.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으로부터 물이 모여 하계가 형성된다. 수성동 계곡에서부터 내려오는 옥인동천은 현재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남쪽에서 백운동천과 합수된다. 조선시대에는 옥류동천 본류 일대(수성동계곡서 박노수미술관으로 내려오는 길)를 인왕동, 현 옥인동 47번지 일대(GS남촌 리더십센터 인근)를 옥류동이라 했고 이 둘을 합친 것이 오늘날의 옥인동이 됐다.
사직동천의 경우 사직동 일대에서 물길이 시작해 사직동, 필운동, 체부동, 내자동, 내수동, 적선동, 도렴동, 당주동, 신문로1가로부터 물이 모여 하계가 형성된다. 경희궁내수는 신문로2가에서 하계가 형성되고 경복궁내수는 위치상으로는 적선동, 도렴동 일부로부터 물길이 만들어진다.
백운동천 공간 이야기
백운동천이 흐르는 경복궁의 서측마을인 서촌지역은 경복궁과 인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조선 초기인 15세기 기록에 따르면 인왕 자락의 인왕동과 백운동, 그리고 백악 서편의 쌍계동이 경관이 좋은 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유상지(노닐며 관상하는 곳)에 거주공간을 두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백악이나 인왕 자락에는 민가가 들어설 수 없었다. 관료들도 출퇴근의 편리성(?) 때문에 인근에 많이 살았지만 궁궐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에 집터를 잡았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로 변하면서 서촌은 양반과 이서(중인, 하급관리와 서출) 계층의 거주지로 급부상했다. 주요 사대부 가문의 양반들은 경치 좋고 도성이 내려다보이는 인왕 쪽에, 이서 계층은 경복궁주변의 관공서와 인접한 인왕 아래쪽의 비교적 고도가 낮은 곳에 거주했다. 북촌도 높은 곳은 양반, 낮은 쪽은 서민들이 자리 잡는 등 같은 패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곳을 점한다는 것은 권력과 비례한다.
경복궁 서북의 청운동에 위치한 청풍계는 병자호란 때의 충신으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이곳에 청풍각, 와유담, 태고정 등을 짓고 거주하던 명승지였다. 상류는 청풍계천, 중하류는 개천이었다. 그것이 일제가 ‘청계천’으로 이름을 바꿨고 지금도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름이 됐다.
대한제국기에는 법부대신를 지낸 동농 김가진은 별서 백운장(白雲莊)에서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다. 백운장은 김가진 일가의 중국망명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고급 요리집(요정)으로 사용되었던 기록과 사진이 확인되고 있다. 이날 함께 답사를 했던 일행 중 한분도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일대가 큰 요정이 있었다고 했다.
수성동 계곡으로 불리는 옥류동천 본류 상류 역시 조선시대에 명승지로 유명했다. 접근도가 좋아서 청풍계보다 훨씬 규모가 큰 명승지였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에 등장하기도 했다. 또 옥류동 계곡으로 불리는 지류 일대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해지는 ‘玉流洞’(옥류동)이 새겨진 바위가 있었으며 1950년대 이후 사라졌다가 2019년에 재발견됐다. 그 일대에서 조선 중기에 중인들이 모여 결성한 시사의 이름도 옥류동천의 이름을 따 옥계시사, 이들의 문학을 여항문학이라고 했다.
백운동천 물길 주변에는 겸재 정선 집터와 외가, 송강 정철 집터, 김상헌 집터, 육상궁, 선희궁지, 이중섭 가옥, 박노수 가옥, 신익희 선생 옛집, 세종대왕 사가, 이상범 가옥, 배화여고 캠벨기념관, 필운대, 김정희 옛집, 홍종문 가옥, 사직단, 청송당 유지 등 역사 문화자원이 다수 분포돼 있다.
백운동천 물길 답사코스
창의문(백운동천 최장발원지)-동농 김가진 집터(역사적 발원지, 백운동천 각자)-경기상고(청송당유지)-백세청풍 각자-선희궁 터-벽수산장 부재-송석원 각자 터-옥류동천 본류(수성동계곡)-박노수 미술관-이상의집-이상범가옥과 화실-세종문화회관 뒤편-종교교회(종침교)-동아일보 일민기념관-청계천 합류지점
■ 일시 : 2021. 5. 1(토) 10:30~13:00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해설 :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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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주변 물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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