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종로 광장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5.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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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 종로 광장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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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4. 10:51조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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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종로 광장시장
요약 종로 광장시장은 조선시대 배오개시장의 명맥을 잇고, 1905년 광장주식회사의 설립과 함께 시장 개설 허가를 받아 오랜 전통을 가진 전통시장이다. 다양한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들이 많고, 포목과 구제 상품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1. 종로 광장시장 개요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허가한 시전, 서소문 일대에 있던 칠패시장, 흥인지문 일대의 배오개에 있던 배오개시장이 서울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칠패시장과 배오개시장은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맞물려 한양 주변의 누원점, 송파장 등과 연계해 민간 시장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재빠르게 서울의 상권을 장악했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 상인들이 서울의 시장을 지배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05년 과거 배오개시장이 있던 곳을 근거지로 한국인들이 자본을 모아서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이후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동대문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전쟁 이후 동대문시장은 구호물자와 미군 물자 중심으로 시장을 키웠다. 1960년대 초반 동대문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이 분리되었고 현재의 광장시장 형태로 바뀌었다. 광장시장은 포목과 구제 상품, 먹을거리 등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고, 2010년에는 광장시장에서 종로 광장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로 광장시장 입구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들이 가득한 종로광장시장의 내부 모습
2. 종로 광장시장의 어원
광장시장의 광장이라는 말은 구한말에 설립된 광장주식회사에서 유래했다. 광장주식회사의 이름은 과거 청계천에 있던 다리와 관계가 있다. 청계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회사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는 의미에서 다리 이름의 앞 글자를 따 광장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거기서 광장시장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다만 처음에는 광교와 장교의 첫 글자인 광장(廣長)이었지만 훗날 넓게 저장한다는 의미의 광장(廣藏)으로 한자가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3. 지역의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오늘날 광장시장의 위치는 조선시대에 배오개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배오개는 오늘날 종로구 인의동 남쪽에서 종로4가 예지동 일대였다.
배오개는 주변에 배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주장, 배가 올라오던 곳, 호랑이가 출몰해 100명이 모여야 넘는다는 의미의 백고개에서 배오개가 되었다는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한자로는 이현(梨峴), 즉 배 고개로 써 왔다. 한자를 보면 배오개라는 말은 배나무와 관련되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배오개 일대는 군인들이 기거하는 집단 거주지가 되었고, 17세기에 들어 동대문 바깥은 한양 주민들이 소비하는 채소를 재배하는 지역으로 성장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둔전을 조성하고 점포를 설치해 동대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 지구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원거리 무역이 발달하면서 한양 주변에 광주 송파와 양주 누원점 등이 새로운 상업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배오개 일대의 상업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배오개가 한양의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로 성장한 것도 상업이 활발해진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배오개를 대표하는 이현시장(배오개시장)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정조 연간에 박제가가 시전, 칠패시장과 더불어 이현시장을 도성의 3대 시장으로 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일출 전후로 서너 시간 장이 서는 새벽시장의 형태였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시전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양의 시장뿐 아니라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인 금난전권 영역 바깥에 있던 누원점과 송파장 등의 세력이 커졌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칠패시장과 이현시장 또한 크게 성장했다.
이현시장에서 주로 거래되었던 것은 의류와 목면, 미곡 등이었고, 특히 동대문 바깥에서 많이 재배되었던 채소를 도산매했다.
이렇게 서울의 상권을 이끌던 칠패시장과 이현시장 등은 개항과 함께 외국 상인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외국 상인은 주로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본 상인들은 일본 주재관이 있던 남산 주변에 자리를 잡고 차츰 영역을 넓혔고, 중국 상인들은 수표교와 남대문 일대, 일부는 광교까지 진출했다.
조선시대에는 쇄국정책을 쓰면서 외국인이 한양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외국인들이 점포를 개설해 장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개항과 함께 외국 사람들의 상주가 허용되었고 외국 상인들 또한 점포를 개설해 장사하기 시작했다.
중국 상인들의 경우 1882년 임오군란 때 군대를 따라 상인들이 40명이 들어와 장사했는데, 2년 뒤인 1884년에는 353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도성에 집을 구입하고 점포를 개설해서 장사했고 곧 큰 상권을 형성했다. 그래서 ‘성 내의 큰 집들이 모두 중국인의 집이 되었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