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11 세계인구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지리산 아기반달곰 '잘 지내고 있어요' 올해 초 지리산국립공원에서 태어난 반달가슴곰(사진)이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최근 국립공원관리공단 멸종위기종복원팀의 현장조사로 확인됐다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15일 밝혔다. 아기 곰은 건강하며 몸길이 50~60㎝, 체중 8~9㎏에 이를 것으로 짐작됐다. 지난 1월 겨울잠을 자던 북한산 어미 곰 ‘엔에프(NF)-08’에게서 태어난 이 아기 곰은 2월 동면굴에서 어미와 함께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뒤 최근까지 보이지 않아 살아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멸종위기종복원센터는 지난달 현지에서 아기 곰의 것으로 보이는 털과 발톱 자국 등을 발견하고 아기 곰이 살아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센터 연구원들은 지난 11일 어미 곰의 서식지 둘레를 조사하던 중 아기 곰이 어미와 함께 나무 위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배근 센터 복원연구팀장은 “새끼는 몸 크기와 상태로 봐서 건강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어미한테서 먹이를 구해 먹는 방법, 나무 타기, 위험 대처 요령 등을 배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멸종을 막고자 2004년부터 러시아와 북한에서 새끼 반달가슴곰 27마리를 들여와 지리산에 풀어놓았다. 이 가운데 13마리가 죽거나 야생 적응에 실패해 다시 데려오고, 새끼 한 마리가 늘어 모두 15마리가 남아 있다.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한겨레 2009-07-15 오후 07:38:5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5996.html
- 금강산 관광 기념 (1998.11.18. 발행)
2008 - 금강산 관광객 북한군에 피격 사망 50대 여성 새벽 산책하다 군사지역 진입 금강산을 방문하고 있던 남쪽 관광객 박아무개(53·여·서울 노원구 상계동)씨가 11일 새벽 북한군의 총격으로 숨졌다. 정부는 12일부터 사건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오후 긴급 브리핑을 통해 “북쪽이 금강산 관광 사업자인 현대아산에 박씨 사망 사실을 통보해 왔다”며 “박씨는 11일 새벽 4시30분께부터 북한의 북강원도 온정리 금강산특구 내 해수욕장 주변을 산책하던 중 관광객 통제구역을 지나 북쪽 군 경계지역에 진입했고, 초병의 정지 요구에 불응하고 도주해 5시께 발포했다고 북쪽이 밝혔다”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래 금강산과 개성공단에서 남쪽 주민이 북쪽의 가해로 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사고는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당국간 대화가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남북관계 전반에 파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박씨 주검은 이날 오후 3시께 남쪽 속초병원을 거쳐 6시께 서울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국민이 희생된 데 대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지시했다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한다”며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합당한 상응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통일부는 12일부터 예정된 금강산 관광을 중단할 예정이며, 11일 현재 금강산에 남아 있는 관광객은 예정된 일정을 마친 뒤 귀환토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개성 관광은 계속된다. 김 대변인은 “우리 관광객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번 사고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진상규명과 관련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북쪽도 이런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 협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홍양호 통일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관계부처 합동 대책반이 진상조사 및 향후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아산은 11일 현재 금강산에 체류 중인 남쪽 관광객이 이날 방북한 680명을 포함해 1300여명이며, 이들은 순차적으로 귀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금강산 관광은 19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사건으로 40여일 중단된 데 이어 2003년 4월에는 사스(중중 급성 호흡기 증후군)를 이유로 60여일, 그해 8월에는 정몽헌 회장 자살로 일주일 동안 중단됐다. 손원제 권태호 기자 wonje@hani.co.kr /한겨레 2008-07-11 오후 03:14:3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8268.html
1989 -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Olivier, Laurence) 사망 올리비에 [Olivier, Laurence Kerr, 1907.5.22~1989.7.11] 영국의 영화배우 겸 연출가 로렌스 올리비에가 1989년 7월 11일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올리비에는 60년간의 배우생활중 연극 1백21편 영화 58편에 출연했고 아카데미영화상을 두번 수상하는 등 20세기 최고의 배우로 칭송을 받았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 해석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맥베스' '오셀로' 등 주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연출하거나 주연을 맡았다. 비평가들이 그를 '오셀로의 초상'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1987 - 유엔, '세계 인구의 날' 선포 세계인구의 날은 인구문제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국제연합이 지정한 기념일이다. 1987년 7월 11일 세계인구가 50억 명을 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제연합이 지정한 날이다. 인류가 장차 직면하게 될 심각한 사태에 대비하여 세계규모의 인구전략을 모색하는 연구가 이 날을 기해 발표되기도 한다.
1979 - 美 첫 우주정거장 `스카이랩` 80년 임무 마치고 인도양 추락 우주정거장 '스카이랩' 귀환 미국의 첫 우주정거장 '스카이랩(SKYlab)'이 1979년 오늘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왔다.
1974 -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Lagerkvist, Pär) 사망 라게르크비스트 [Lagerkvist, Pär Fabian, 1891.5.23~1974.7.11] 스웨덴의 소설가·시인·극작가. 20세기 전반 스웨덴 문학계에서의 주요인물로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은 마을에서 전통적인 종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후에 현대의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고 선조의 종교와 단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년기에 받은 영향은 그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어 〈문학예술과 회화예술 Ordkonst och bildkonst〉(1913)이라는 선언문에 나타나듯이 예술과 문학의 급진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극장 Teater〉(1918)과 3편의 단막극인 〈고통스러운 시간 Den Svare Slunden〉에서도 그 비슷한 모더니스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쓴 작품 〈분노 Ångest〉(1916)에 퍼져 있던 극단적 염세주의는 〈영원의 미소 Det eviga leendet〉(1920)와 자전적 소설 〈현실의 손님 Gät hos verkligheten〉(1925)을 시작으로 서서히 진정되어, 독백체 산문인 〈삶에 대한 승리 Det besegrade livet〉(1927)에서 마침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후기 작품의 긍정적 출발점이 되었다. 1930년대초 폭력에 대한 새 법령이 선포되었을 때 그는 곧 그것의 위험성을 알아차렸다. 후에 극화된 산문 〈형리 Bödeln〉(1933)는 세계의 끊임없는 잔인성에 대한 항거를 보여준다. 〈혼없는 사나이 Mannenutan själ〉(1936)라는 희곡 역시 파시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때로 '무대성가극'이라고도 부르는 가장 독특한 희곡인 〈인간을 살게 하라 Låtmänniskan leva〉(1949)를 썼는데 이는 전역사를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동료를 심판하고 죽게까지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가 스웨덴 비평가들로부터 절대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던 〈난쟁이 Dvärgen〉(1944)를 발표하고 나서였다. 그리고 〈바라바 Barabbas〉(1950)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Evening Land=Aftonkand〉(1975)는 레이프 시외뵈리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의 66편의 시 또한 W. H. 오든이 운문으로 번역했다. 〈결혼축제 The Marriage Feast〉(1973)에는 19종류의 단편 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어 들어 있다. /브리태니커
1973 - 천마총 유물 출토 시작 원래는 황남동 98호 고분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을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막상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하니 아직 도굴범의 손때가 타지 않은 처녀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발굴단을 흥분시켰다. 1973년 7월11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유물이 출토됐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가물고 더워 발굴팀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주민들 사이에는 "왕릉을 파헤쳐 큰 가뭄이 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대박이 터질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월13일, 1500년간의 긴 잠에서 깬 신라금관이 출토됐다. 신라금관으로는 7번째, 광복후로는 최초였다. 8월23일, 발굴단의 눈을 의심케 하는 유물 한 점이 또 출토됐다. 천마도(天馬圖)였다.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고분 이름을 천마총으로 짓자 이번에는 경주 김씨 측에서 들고 일어났다. 김씨 성을 가진 임금의 무덤이 분명할진데 하필이면 왜 말 무덤이냐는게 그들의 항변이었다. /조선
- '지원의 얼굴' (공중전화 카드)
1968 - 일본 도쿄에서 '권진규 조각전(테라코타)' 개최(11~20일) ・7월 11일~20일,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권진규조각전(테라코타)」 을 개최한다. 테라코타 30점으로 구성되었으며 출품작은 아래와 같다. 《 강원의 여인》,《 비구상》,《 재회》 (No.50),《 춘엽니》 (No.51),《 목욕 하는 여인》,《 志媛의 얼굴》(No.53),《 애자》 (No.55),《 휴식》(No.64), 《곤스케》 (No.58),《 선자》 (No.60),《 두상》 (No.20),《 봉숙》,《 목욕 후》,《 포즈》 (No.62),《 단지의 여인》,《 아침》,《 낮》,《 싫어》 (No.65), 《그 후》,《 이튿날 아침》,《 땋은 머리》 (No.67),《 혜정》 (No.70),《 영희》 (No.23),《 말》,《 명자》(No.38),《 청호동의 여인》,《 서강의 여인》,《 연실의 머리》,《 시녀》(No.71),《 댄스》 전람회는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고,『 도쿄신문(』7월19일 석간),『요미우리신문』(7월18일) 등에 소개된다. 『 도쿄신문』은「 근대적 구상조각의 재미 권진규 조각전」이란 제목으로 「 권진규는 1922년에 태어나, 전쟁 후, 무사시노미대에서 조각을 배우고 20년간 일본에 체재하였고 최근 10년간은 귀국하여 서울에 체제하고 있는 한국 작가이다. 소품의 전신나부상군과 흉상 20점의 합계 30점을 전시하였다. 전신상은 이 작가의 공부의 폭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르델이나 마이요르, 이집트 조각, 타나그라 조각 등을 흡수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이들 전신상은 개성적 집중력이 약하고 포즈의 표정에 의지하고 있는 약점이 보이긴 하지만, 흉상 작품군에서는 독자적인 것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있어 흥미롭다. 가슴에서 목까지의 형태를 삼각추의 양괴(量塊)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의 현대조각가 자코모 만주(Giacomo Manzu)를 연상시키지만, 물체의 안정감이나 크기는 잘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연속되는 얼굴은 불필요한 살을 깍아 내어 갸름하게 표현하였다. 표면적인 세밀함을 추구하지 않고 크고 무게 있는 안정감을 표현한 조각성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일본인의 감성과는 다른 풍토성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요소 요소에서는 날카로운 감각이 배어 있으며 근대적인 구상조각의 재미를 지니고 있다. 머리카락이 없는 작품《( 춘엽니》 등)이나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작품 《( 지원》,《 애자》 등)은 작품으로서는 완성된 느낌을 주지만, 욕심을 낸다면《 시녀》와 같이 머리카락을 제대로 파악하여 목과 가슴이 이루는 삼각추 형태와 어떻게 결합 하는가를 발전시켰다면 한 층 복잡하고 재미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라고 가능성을 포함한 평가를 한다. 『 요미우리신문』은「 강인한 리얼리즘」이라 평하고, 「 최근에는 현대조각이라고 하면 추상조각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적인 동향에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 일본인의 특징이다. 조각계도 전반적으로는 디자인에 근접하여 종래의 양감을 적용시킨 구상조각 등, 이미 구시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상조각 중에 뛰어난 작품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 잡는 작품이 존재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실력있는 구상조각를 기대하고 있는 작금에 있어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 10일까지 니혼바시화랑에서 열리는 권진규 조각전이다. 테라코타 작품 30점. 전신상이나 말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약 10점의 흉상이 주목할만 하다.《 지원》,《 춘엽니》,《 애자》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 모델을 두고 제작한 것인데,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깍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 이들 작품을 보면, 목에서 허리에 걸쳐 확인되는 요약된 형태에서는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 자코모 만주와 닮은 면을 볼 수 있다. 또한, 둥그스름한 머리나 높은 코, 크게 뜬 눈에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을 구축한 수메르인들의 원초적 초상조각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럽의 영향이 있다하더라도, 구운 흙 속에 대지의 생명이 지닌 솔직함이나 순박함과 함께 강인함을 불어 넣으려고 하는 작자의 조형 자세와 풍토는 분명히 동양 바로 그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자는 1922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전쟁 중에 일본에 건너와 종전후 무사시노미대 조각과를 졸업했다. 1959년에 귀국하여 지금은 서울의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 교수라고 한다. 어쨌든, 이들 초상조각에 보이는 강인한 리얼리즘은 구상조각이 빈곤한 현대 일본 조각계에 하나의 자극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라고 높게 평가한다. 출품한 작품 가운데《애자》(No.55)와《춘엽니》(No.51)는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에 기증한다. 이 전람회의 팜플렛에는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조각가 기노우치 요시(木内克), 미술평론가 혼마 마사요시(本間正義)의 글이 실려 있다. (평전) /권진규사이버미술관 http://www.jinkyu.org/sub2.html
1966 - 제8회 월드컵축구대회 개막 (영국) 1966년 오늘, 제8회 월드컵축구대회가 영국에서 개막됐다.
1964 -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Thorez, Maurice) 사망 토레즈 [Thorez, Maurice, 1900.4.28~1964.7.11]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공산당 지도자. 12세 때 북프랑스의 파드칼레현(縣)에 있는 탄광촌에서 광부가 되었으며 1919년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0년 사회당과 결별하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1929년 국민의회 의원, 모로코전쟁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1930년 당 서기장, 1934년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의 결성에 진력하는 등 뛰어난 지략과 실전력을 발휘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 내부에서도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대독저항운동에 활약하다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43년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다. 1944년 드골의 파리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이듬해 총선거에서는 공산당이 하원의석 586석 중 153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고, 드골 내각에 국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이후 F.구앵, G.비도, P.라마디에 등 각 내각의 부총리가 되었으나 동서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라마디에 내각에서 밀려났다. 1961년 서기장에 재선, 1964년 건강이 악화되어 서기장직을 W.로셰에게 물려주고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로 가던 중 배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저서에 《인민의 아들 Fils du Peuple》(1937) 《프랑스의 정치 Une Politique de grandeur Fran aise》(1949) 등이 있다. /naver
- Mexico-S. Korea Diplomatic Relation, 40th Anniv., 2002
1962 - 멕시코에 한국대사관 개설 한국은 1962년 1월 26일 멕시코와 국교를 수립하고 7월 11일 주(駐)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8년 3월 11일에는 주한 멕시코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양국은 1966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나 별다른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교역량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 /naver [한국-멕시코 외교관계 연혁] 1962.01.26 - 한.멕시코 국교 수립 1962.07.11 - 주멕시코 대사관 상주공관설치 1978.03.11 - 주한 멕시코 대사관 상주공관설치 http://mex.mofat.go.kr/kor/am/mex/affair/relation/index.jsp
- 1st Television connection of the US and Europe through Telstar Satellite, July 11~12, 1962
텔스타위성 [Telstar] 미국 최초의 실용 통신위성. 1호는 1962년 7월 10일에 발사되어 근지점 948㎞, 원지점 5636㎞, 주기 157.6분의 궤도에 진입하였다. 무게는 77㎏이며 최초의 능동형 통신위성으로서 발사 다음날에는 미국∼유럽 사이의 전화 및 텔레비전 중계에 성공하여 우주통신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텔스타 1호를 이용하여 다중전화·사진전송·고속데이터전송·컴퓨터제어·일기도전송 등도 시도하였으나 4개월 뒤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고장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해 5월 7일 2호가 발사되었는데, 원지점이 1만㎞로 끌어 올려져 이용가능시간과 범위가 증대되었다. 현재의 통신위성은 이런 종류의 이동형이 아닌 정지형이며, 미국전화전신회사(ATT)도 그 뒤 통신위성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야후 백과
1961 - 북한,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조인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1961.7.11)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http://up.peacewomen.or.kr/main/?document_srl=16610
1953 - 삼남일보 '이 견통령(犬統領)' 오식 사건 이승만 정권의 '소박한' 언론 탄압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 Gershwin - Rhapsody in Blue..
1937 -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사망 거슈윈 [Gershwin, George, 1898.9.26~1937.7.11] 뉴욕에서 태어났다. 대중적인 경음악을 작곡하면서 재즈기교에 의한 수준 높은 관현악곡과 오페라를 창작하여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소년시절 개인교사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고 16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 음악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19세 때부터는 극장 전속 피아니스트로 근무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스와니》를 발표하여 히트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인기를 모아 리뷰나 쇼의 일류 작곡가가 되었으며, 1924년(26세) 폴 화이트먼이 위촉한 재즈의 기법을 따른 피아노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음악과 경음악을 조화시켜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1928) 《피아노협주곡 F장조》(1925) 및 오페라 《포기와 베스》(1935) 등의 본격적인 작품 외에도 많은 통속 희가극과 대중음악,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는데 뇌종양이 발병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naver
1934 -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Armani, Giorgio) 출생 아르마니 [Armani, Giorgio, 1934. 7. 11~ ] 패션 제왕 조르지오 아르마니 출생 1934년 7월 11일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이탈리아 북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밀라노에 있는 의과대학에 들어갔지만 입학한 지 2년 만에 군에 입대한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우연한 기회로 백화점에서 일하게 되면서 패션과 인연을 맺었다. 사람과 옷의 완벽한 조화를 패션 철학으로 여기는 아르마니가 디자이너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1980년대 도시적 감각의 패션을 선보인 데서 비롯됐다. 할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주인공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맡으면서 돈과 명성을 단번에 거머쥐었다. 아르마니는 전 세계에 5000명의 직원을 두고, 연간 13억유로(약 1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패션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프랑스의 크리스찬 디올에 이어 1982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인물에도 선정되었고,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04년 세계 갑부’ 순위에서 247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제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아르마니 재킷은 군살 없이 날렵한 몸매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이 됐다. /조선
1921 - 몽골 독립 몽골 역사 1755~ 反淸.反봉건.反식민지 운동을 계속 전개 1911 辛亥革命으로 淸이 붕괴되면서 獨立運動 확산 1912~1919 러시아 보호하에 자치주로 존립 1921.7.11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흐바타르(D. Sukhebaatar)는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中國軍을 몰아내고 독립선포 몽골은 이날(7.11)을 혁명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7.11~13을 몽골민족 최대의 축제인 "나담축제" 기간으로 선정 1924.11.26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人民共和國 선포 세계 2번째의 사회주의 국가 1946, 1947 중국은 外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나, 內몽골은 중국의 自治區로 편입 1961 UN 가입
(발췌) 청(淸)의 속국이 된 몽골인들은 결국 황폐한 초원지대로 밀려나 오늘날과 같은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갖게 되는데, 1911년 청(淸)조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탄생 속에 몽골은 가장 영향력 있는 활불인 제8대 젭춘 담바 호탁트를 국가수반(보그드 항)에 추대하면서 독립을 선언한다. (이때 내몽골 지역의 활동가들이 합류했고, 몽골족의 통합을 위해 내몽고지역에도 군대가 파견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민족통합운동은 러시아와 중화민국의 간섭으로 실패한다.) Mongol School /(몽골의 역사이야기) http://www.mongolschool.com/mongol/02ms-gol-his.htm
1920 - 미국의 배우 율 브리너(Brynner, Yul) 출생 브리너 [Brynner, Yul, 1920.7.11~1985.10.10] 미국의 연극·영화 배우. 〈왕과 나 The king and I〉에서의 시암 군주 역의 연기로 잘 알려져 있다. 몽골인 탄광기술자와 루마니아 집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13세에 나이트클럽의 민요가수가 되었고, 뒤이어 프랑스에서 서커스 곡예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네타기를 하다 사고를 당해 곡예일을 그만두고 1940년대초 순회극단과 함께 떠돌며 연극에 빠져들었다. 〈루트 송 Lute Song〉에서 동양의 왕자 역을 맡아 1946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1948~51년에는 텔레비전 연출자로 일했는데, 이때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뮤지컬 〈왕과 나〉에 시암 군주 역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위풍당당한 태도, 서정적인 목소리, 시원하게 민 머리와 이국적인 멋진 용모로 그는 그 역에 이상적인 배우임을 입증했고 뛰어난 연기로 즉각적인 찬사를 얻었다. 1951~54년 브로드웨이에서 그 역을 1,246회나 공연했고, 1956년에는 영화 〈왕과 나〉에 출연해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85년 마지막 커튼 콜을 받을 때까지 총 4,625회 시암 군주역으로 공연했다. 〈십계 The Ten Commandments〉(1956)·〈아나스타샤 Anastasia〉(1956)·〈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The Brothers Karamazov〉(1958)·〈위대한 7인 The Magnificent Seven〉(1960) 등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브리태니커
1903 - 소련의 정보장교 루돌프 아벨(Abel, Rudolf) 출생 아벨 [Abel, Rudolf (Ivanovich), 1903.7.11~1971.11.15] [역사 속의 인물] 맞교환 소련 스파이 1호 루돌프 아벨 루돌프 아벨. 본명은 빌리암 겐리코비치 피셔. 소련이 서방과 맞교환한 스파이 1호다. 1902년 오늘 영국에서 망명 중인 독일계 러시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후 부모를 따라 소련으로 가서 코민테른의 통역사를 거쳐 무선통신 훈련을 받고 KGB의 전신인 OGPU(연방국가정치보안부) 요원으로 발탁됐다. 1947년 에밀 로버트 골드퍼스라는 가명으로 캐나다를 거쳐 미국 뉴욕에 잠입,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미국 내 소련 스파이망을 지휘, 관리했다. 본국의 소환 명령을 받은 부하 레이노 헤이헤넨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정체가 탄로날 때까지 9년간 암약했다. 1957년 FBI에 체포돼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62년 2월 10일 독일 베를린 근교의 글리니케 다리에서 소련 정찰비행 중 격추된 CIA의 U-2기 조종사 개리 파워스와 교환됐다.(이후에도 이 다리에서 두 차례 더 스파이 교환이 이뤄졌다) 루돌프 아벨은 체포되기 전 그가 소련으로 보낸 전문에 쓴 이름이다. 체포됐음을 뜻하는 암호였다. 미국에서 냉대를 받은 개리 파워스와는 달리 레닌훈장을 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본업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신원이 드러난 이상 스파이로서의 가치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1971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7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6828&yy=2011
1901 - 멕시코의 법학자 마리오 드 라 쿠에바(de la Cueva, Mario) 출생 드 라 쿠에바 [de la Cueva, Mario, 1901.7.11~1981.3.6] Mario de la Cueva y de la Rosa (1901-1981) was a Mexican jurist and rector of the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UNAM) in 1940–1942. De la Cueva studied law at the Escuela Nacional de Jurisprudencia of the UNAM, as well as at the Humboldt-Universität in Berlin. From 1929 to 1961, he taught constitutional law and labour law at the UNAM, where he received several academic honours. He is mostly noted for his works on labour law, Derecho Mexicano del Trabajo (1938) and El Nuevo Derecho Mexicano del Trabajo (1972), which remain in wide use as textbooks across Latin America. Infused with the spirit of the Mexican Revolution of 1910, they conceptualized Mexican labour law as having the protection of workers' rights as its chief purpose. De la Cueva was also a leading advisor in the 1970 revision of the Mexican Labour Code. http://en.wikipedia.org/wiki/Mario_de_la_Cueva
1890 - 영국의 공군 원수 아서 테더(Tedder, Arthur) 출생 테더 [Tedder, Arthur William, 1890.7.11~1967.6.3] 영국의 공군 원수.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 원정군의 부사령관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통신시설을 폭격하고 공군력으로 지상 작전을 근접지원하는 정책을 통해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1944. 6. 6)을 성공으로 이끌고 독일 서부전선을 궤멸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13년 영국군에 입대해 1916년 영국 비행대로 옮겨갔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영국 공군에 남아 극동지역 공군 사령관이 되었으며(1936~38), 그뒤 연구개발부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중동지역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나중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국의 모든 공군 작전 지휘권을 행사했다. 1942년 기사작위가 수여되었다. 그는 다른 연합군과 협조해 적의 보급선을 폭격으로 차단하는 한편, 연합군 지상 부대를 전술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을 패퇴시키고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진주(1943)할 수 있도록 했다. 1944년초 아이젠하워를 돕는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서유럽에서의 모든 연합군의 공군 작전을 통제했던 그는 노르망디 해변을 공중 봉쇄하고 연합국 교두보에 독일 증원부대가 도달하지 못하게 저지함으로써 초기의 성공을 재연해냈다. 독일 수송망을 폭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연합군의 진격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1946년 귀족의 지위에 올랐으며, 평화시 최초의 공군 참모총장과 공군 위원회의 선임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회고담 〈편견을 가지고 With Prejudice〉(1966)를 집필했다. /브리태니커
- 'The 14th July'
라 프레네 [La Fresnaye, Roger de, 1885.7.11~1925.11.27] 프랑스의 화가. 르망 출생. 처음에는 아카데미 쥘리앙에 다녔으나 후에 모리스 드니와 폴 세뤼지에에게 배웠다. 세잔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입체파에 공명하여 새로운 회화운동을 추진, 특유한 시적(詩的) 정감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입체파 화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 되어 40세로 생애를 마쳤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의 작품이 재평가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트럼프놀이》(1912) 《믈룅의 풍경》《부부생활》(1913) 등을 비롯하여 《파뤼트를 위한 삽화》《그레코 예찬》 등이 있다. /naver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김구는 일제침략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며, 해방후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초년에는 한학을 공부했다. 17세 때 동학에 입교하고, 이듬해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에서 선봉장으로 싸우다 패한 후 은신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일본군 장교를 때려 죽인 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으로 대항하기보다 국민을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1900년경부터는 구국을 위한 교육과 계몽사업에 투신했다.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석방자로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때마침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일하면서,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재무장을 거쳐 1940년대에는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본토를 수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8·15해방을 맞아 27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좌파에 반대해 모든 계급의 공동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세우려 했고, 이승만에 반대했으며, 단결해서 친일파를 숙청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외세를 배격해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브리태니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한다>(1948. 2. 13)에서
노리스 [Norris, George William, 1861.7.11~1944.9.2] 미국의 정치가. 변호사, 하원의원을 거쳐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하이오주(州) 샌더스키 출생. 1883년 인디애나주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 1885년 네브래스카주에서 개업하였다. 1903~1913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으로 활약,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의장 J.G.캐넌의 전제적 지배에 반대하여 1910년 개혁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13년부터 30년간 상원의원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W.윌슨의 제1차세계대전 참가정책에 반대하였고, 1933년 테네시 계곡(溪谷)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배권에 반대하여 TVA(Tennessee Valley Authority:테네시강유역개발계획공사) 창설법안 가결에 힘썼다. 또한 노동쟁의 중지명령의 남용을 제한하는 ‘노리스-라가디아법’을 기초하였다. 1936년 공화당을 탈당, 중립이 되었으나 다음 선거 때 낙선하였다. 저서로 《Fighting Liberal》 등이 있다. /naver
1859 -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를 출판하다 [어제의 오늘]1859년 ‘두 도시 이야기’ 출판 ㆍ프랑스 혁명 소용돌이 속 처절한 사랑 1859년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출판됐다.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을 향해 치닫던 18세기 후반, 두 도시는 파리와 런던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102118365&code=100100
- Brasil, 5000 Cruzeiros (banknote)
1836 - 브라질의 작곡가 안토니우 카를루스 고메스(Carlos Gomes, Antonio) 출생 카를루스 고메스 [Carlos Gomes, Antonio, 1836.7.11~1896.9.16] 브라질의 작곡가. 캄피나스 출생.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수학한 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유학, 그곳에서 몇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에 성공하였다. 1895년 파리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했으나 다음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브라질의 국민오페라로 알려진 《과라니족(族) Il Guarany》을 비롯하여 7편의 오페라와 가곡, 피아노곡 등이 있다. /naver
- Alexander Hamilton (1755/57.1.11~1804.7.12)
1804 - 해밀턴(Hamilton, Alexander)과 버(Burr, Aaron)의 결투 1804년 7월 11일 미국 정치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에어런 버가 결투를 벌였다. 이 결투에서 해밀턴은 버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결투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해 4월 한 디너 파티에서 해밀턴이 버에 대해 야비한 말을 했다는 이유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랜 정치적 적수였던 해밀턴과 버 사이의 악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미국독립전쟁 시기 자신의 부대를 조직해 트렌턴 전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 되었다.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제헌의회에 뉴욕 대표로 파견되면서 <연방주의자>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해 미국연방헌법 비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밀턴은 이후 워싱턴의 초대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맡았으나 연방파의 지도자가 되면서 공화파를 이끈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과 번번이 맞섰다. 그런데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해밀턴은 선거인단 투표 결과 같은 표를 얻은 공화파인 제퍼슨과 버 중에서 제퍼슨을 지지했고, 1804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도 버와 경선을 벌인 공화파 후보를 지지해서 버의 분노를 샀다. 해밀턴과의 유명한 결투 때문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버는 필라델피아로 도망간 뒤, 멕시코를 공격해 독립정부를 세우려고 계획했다가 반역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767 -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애덤스(Adams, John Quincy) 출생 애덤스 [Adams, John Quincy, 1767.7.11~1848.2.23] 제2대 대통령 J.애덤스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유럽으로 가서 공부하였으며, 1787년 하버드대학 졸업 후 법조계로 들어갔다. 1794년 네덜란드주재공사, 1797년 프로이센 주재공사가 되었다. T.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자 귀국하여 1802년 매사추세츠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그 이듬해 매사추세츠의회는 그를 연방상원의원으로 선출하였다. 하버드대학교수, 러시아주재공사, 영국주재공사를 역임한 후 J.먼로가 대통령인 때는 국무장관이 되어 ‘먼로 선언’의 기초를 맡았다. 1824년 선거에서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의회 내에서의 정당 간의 불협화음으로 그의 대담한 국내개발계획 등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828년 선거에서는 A.잭슨에게 패하였고, 1831년 하원의원으로서 정계에 복귀하여 사망할 때까지 17년간을 하원의원으로 활약하며 노예제 및 멕시코전쟁을 반대하였다. 냉철한 성격 때문에 일반인에게 큰 인기는 얻지 못하였으나 높은 지성과 교양은 크게 평가되었으며, 자연과학분야에서도 스미스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설립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naver
- 'The Surprise Letter'
쿠아펠 [Coypel, Charles-Antoine, 1694.7.11~1752.3.14]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왕립 아카데미에서의 강의와 행정관리를 주요공적으로 들 수 있으며 원장으로서 열성적이며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쿠아펠의 첫번째 스승은 아버지인 앙투안 쿠아펠로서 그의 다소 경직된 양식을 계승했다. 1722년 아버지가 죽자 궁정에서 아버지가 맡았던 회화 및 도안 작업을 이어받았고 오를레앙 공작의 수석 화가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루브르 궁에 들어가 지냈다. 1747년 왕립 아카데미의 원장이자 왕의 수석 화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걸작으로는 돈 키호테 이야기를 그린 대작(1716)을 들 수 있다. 베르사유의 성과 트리아농의 예배당을 위한 여러 작품을 주문받았으며 왕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서도 일했다. 1747년 폴란드의 여왕을 위한 태피스트리를 의뢰받아 연극에서 따온 다양한 장면들을 다룬 연작을 제작했다. 한편 루이 15세, 오르레앙 공작 등 정치적·종교적 인물들의 초상화와 연극 배우들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활기나 독창성이 부족하며 자연에 대한 탐구보다는 연극 무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는 산문·시·비극(2편)과 여러 편의 희극 등도 남겼다. 가장 대표적인 문학적 업적으로는 1747, 1751년 루브르에서 있었던 전시에 관한 평론을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1561 - 스페인의 시인 공고라 이 아르고테(Góngora y Argote, Luis de) 출생 공고라 이 아르고테 [Góngora y Argote, Luis de, 1561.7.11~1627.5.23] 17세기 초 에스파냐의 시인. 코르도바 출생. 살라망카대학에서 수업하고, 1585년부터 성직에 들어가 코르도바 성당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성직자의 신분으로 시를 쓰는 등 경박한 행동을 하였다. 1599년에는 부제(副祭)가 되었고, 《대가집(大歌集)》과 《에스파냐 명류시인 명시집(名流詩人名詩集)》 제1편에 아름다운 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1612년에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겨, 이듬해 국왕 전속 신부가 되었다. 수년 후에 코르도바로 돌아왔으나,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끝내 졸중(卒中)으로 죽었다. 작품은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초기의 작품으로서 《레트리야 Leterillas》 《로만세 Romances》 등 에스파냐 고래(古來)의 형식에 따른 것인데,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모두가 소곤거리고 있다》 등은 모두 평이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러나 1609년경부터 시풍은 변화하여, 그때까지의 단순하고 매혹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난폭한 언어의 전위(轉位)나 부자연스러운 대구(對句), 과장된 비유와 근거가 불명한 우화의 사용 등을 특색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난해한 시는 이른바 교양 있는 지식층만을 대상으로 한 데에서, 이것을 ‘교양주의(敎養主義)’ ‘공고리스모(G ngorismo) ’라고 하게 되었다. 이 종류의 작품에는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 F bula de Polifemo y Galatea》(1613)와 《고독 Soledades》(16l3)이 대표작이다. 이 작시법(作詩法)은 L.베이가와 케베이드의 비난을 받아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으나, 후일에 와서는 비난한 사람들도 이 작시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naver
1533 - 교황, 헨리 8세(Henry VIII) 파문 잉글랜드 왕 헨리8세의 주요 관심사는 대포·신학·여성이었다. 해군부를 창설, 영국을 해양대국으로 발전시켰고, ‘신앙의 소유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학에도 해박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욕정으로 왕비도 6명이나 갈아치웠다. 형이 죽어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8세의 첫 결혼생활은 그런대로 순탄했다.
1405 - 정화 남해대원정 출항 [어제의 오늘]1405년 정화 남해대원정 출항 ㆍ유럽보다 80년 앞선 ‘대항해 시대’ 15세기말 유럽 각국이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와의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적은 자본으로 신대륙의 금과 은을 약탈해 한몫 잡겠다는 구상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연 것보다 80년 이상 앞선 시기에 동양에서는 이미 수백척의 선단과 수만명의 병사를 거느린 대규모 원정 함대가 인도양을 지나 중동·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제국의 명성을 떨치고 교역을 시작했다. 초라한 범선 몇 척에 100여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대박을 꿈꾸며 항해에 나선 유럽 아메리카 원정대의 ‘소규모 벤처사업’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 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10 17:57: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01757015&code=100100&s_code=ap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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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