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1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2년 복원공사 끝 모습 드러낸 서울역사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물인 서울 동자동 옛 서울역사(사적 284호)가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 284’로 탈바꿈했다. 14일 낮 문화체육관광부는 약 2년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8월9일 재개관하는 역사 안팎을 언론에 공개했다. 사진은 벽난로가 붙은 옛 귀빈실(오른쪽)과 아치형 천장을 인 중앙현관 모습이다. 2009년 7월부터 시작한 복원 공사에서는 1925년 건립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내부 공간들을 역사적 중요성에 따라 상중하 등급으로 나누어 리모델링했다. 복원된 역사의 1층 중앙홀·(왼쪽)은 공연·전시·이벤트·카페 등의 다목적 공간으로, 일제강점기 양식당으로 유명했던 2층 그릴은 공연·전시·세미나·회의 등을 위한 다목적홀로 쓰이게 된다. 2층 나머지 공간은 아카이브·기획전시실과 사무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한겨레 20110714 22:2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7484.html
2005 -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어제의 오늘]2005년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ㆍ그는 슛을, 국민은 희망을 쏘았다 키가 150㎝ 정도인 중학생이 덩치 큰 선수들을 이리저리 제치며 축구장을 휘젓는다. 축구에 대한 재능은 있는데 왜소한 체격이 문제다. 제대로 된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멋진 축구선수가 됐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주전으로 2002 월드컵 16강 진출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3개 월드컵에서 연속해 골을 넣었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뛰면서 한국이 원정 첫 16강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지성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132114255&code=100100&s_code=ap005
2003 - 쿠바의 재즈 거장 콤파이 세군도(Segundo, Compay) 사망 세군도 [Segundo, Compay, 1907.11.18~2003.7.14] [책갈피 속의 오늘]2003년 쿠바 재즈거장 세군도 사망 ‘나는 알토 세도르에서 마르카네로 가고 있네/…당신에 대한 사랑을 감출 수 없어/입엔 벌써 군침이 고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가사는 연인을 만나러 걸음을 재촉하는 청년의 들뜬 연가(戀歌)같지만, 가락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사랑을 회고하는 듯 구슬프다. 전 세계에 쿠바 음악의 건재를 알린 노래 ‘찬찬(Chan Chan)’을 짓고 부른 사람은 아흔이 넘은 쿠바의 재즈 거장 콤파이 세군도였다. 재즈 밴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였던 그가 2003년 7월 14일 95세로 숨졌을 때 수도 아바나에서는 수백 명이 장례식 행렬을 뒤따르며 그를 기렸다. 세군도는 10대 때부터 낮엔 담배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바에서 연주를 하며 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선율이 어우러진 쿠바 재즈를 익혔다. 7현 기타 ‘아르모니코’를 발명했고 1940, 50년대에는 쿠바를 대표하는 재즈 음악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61년 쿠바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고 만다.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선 뒤 공산주의 이념을 담은 포크 음악이 주류를 이룬 대신 전통 쿠바 재즈는 밀려났다. 아바나의 공연장들도 문을 닫았고 세군도는 30여 년간 담배공장 노동자, 이발사 등으로 전전했다. 그렇게 나이 아흔이 될 무렵 예기치 않은 ‘구원’이 찾아왔다. 쿠바 재즈에 매료된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 라이 쿠더가 1996년 아바나에서 노장 음악가들을 찾아 나선 것. 세군도 등 일흔을 넘긴 노인 5명이 모여 6일 만에 녹음을 끝낸 앨범 한 장이 전 세계에 쿠바 음악 붐을 몰고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들이 과거에 공연하던 클럽 이름을 딴 앨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불티나게 팔렸고 그래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빔 벤데르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에서 세군도는 “내 나이가 아흔인데 여섯째를 낳으려는 중”이라며 시들지 않은 정열을 과시한다. 수십 년의 억눌린 세월을 보냈건만 맺힌 구석 없이 경쾌하고 진솔하다. 다큐멘터리에 찍힌 아바나 길거리에는 ‘우리에겐 꿈이 있다’는 빛바랜 문구가 걸려 있다. 아흔이 넘도록 솟아오르는 영감을 잃지 않았던 세군도의 ‘장수 비결’은 그 자신이 곧잘 말하던 ‘양고기 수프와 한 잔의 술’ 대신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동아닷컴 2005-07-14 03:0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50714/8209599/1
1998 - 맥도널드 햄버거의 공동 창업자 딕 맥도널드(McDonald, "Dick") 사망 맥도널드 [McDonald, Richard "Dick" J., 1909.2.16~1998.7.14] 딕 맥도날드와 맥 맥도날드 형제가 맥도날드점을 시작한 것은 1940년. 두 사람은 1954년 맥도날드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레이 크록을 첫번째 프랜차이즈 주자로 지정했더랬습니다. 레이 크록은 이듬해인 1955년에 일리노이주에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맥도날드사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이후 1959년 시카고에 1백번째 맥도날드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레이 크록은 1961년 맥도날드 형제에게 2백70만 달러에 맥도날드사를 인수했습니다. 이후 맥도날드는 급속도로 성장을 거듭, 현재 1백30개 국가에 수만개의 점포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sepum&folder=0
1993 -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朴貴姬) 사망 박귀희 [朴貴姬, 1921.2.6~1993.7.14] 인간문화재 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 여사(72)가 1993년 7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박 여사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국악 가락만 나오면 가던 걸음을 멈출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소녀였다.
- 소파 방정환 탄생 100주년 기념 (1999.11.9. 발행)
1987 - 독립기념관 뜰에 소파 방정환 어록비 건립(계몽사 협찬)
1981 - 한국 여자농구, 최초로 존스컵국제여자농구대회서 우승 월리암 존스컵 국제여자농구대회 레나토 윌리엄 존스(Renato William Jones)를 추모하는 대회입니다. 윌리엄 존스컵 농구대회는 매년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개최되는 국제 농구대회로써 국제 농구 연맹(FIBA)의 창설 멤버인 레나토 윌리엄 존스(Renato William Jones)를 추모하는 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1977년에 시작되어 사스가 만연했던 200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초청대회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레나토 윌리엄 존스는 1906년에 태어나 1981년에 사망하였으며 유럽과 아시아에 농구를 보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1932년에 국제 농구 연맹 창설을 주도하고 1936년부터 총재를 지냈으며 그동안 농구를 올림픽 종목에 편입시켰습니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8399631
1969 - 축구전쟁 시작, 엘살바도르 공군 육군 온두라스 침공 [유레카] 축구전쟁 / 여현호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유혈사태로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전쟁이 꼽힌다. 멕시코월드컵 북중미 최종예선에서 맞붙은 두 나라가 격전을 치르다 2100여명이 전사하는 실제 전쟁까지 벌였다는 얘기다. 실제 역사는 조금 다르다. 축구 때문에 충돌이 빚어진 것은 사실이다. 6월15일 2차전에 원정 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홈 관중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두라스에선 엘살바도르인을 겨냥한 방화와 집단폭행으로 희생자가 속출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 수입금지로 대응했다. 6월23일 두 나라는 국교를 끊었고, 그 나흘 뒤 멕시코에서 열린 플레이오프에선 엘살바도르가 이겼다. 전쟁은 7월14일 엘살바도르의 전격 침공으로 시작됐다. 전쟁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온두라스에는 국경을 넘어온 30만명가량의 엘살바도르인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온두라스는 69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을 제외했고, 수만명을 추방했다. 양국의 국민감정은 축구 이전부터 이미 악화해 있었던 것이다. ‘축구전쟁’은 홍보전의 산물이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축구에서 지자 소요사태를 벌여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온두라스는 ‘한 엘살바도르 녀석이 온두라스 여인을 향해 오줌을 눈 것이 이 모든 사태를 촉발했다’고 맞받았지만,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세계인을 들뜨게 하는 월드컵이 다음달 11일 개막한다. 한국도 어제 ‘숙적’ 일본과의 평가전을 시작으로 월드컵 원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북한이 월드컵 본선에 함께 진출한 한반도에선 축제에 대한 기대감 대신 전쟁을 불사할 듯한 가시 돋친 말들만 오가고 있다. 홍보·외교전도 한창이다. 이런 모습은 나중에 어떻게 비칠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한겨레 2010-05-24 오후 09:36:54
1968 - 한국의 축구 선수, 감독 황선홍(黃善洪) 출생 황선홍 [黃善洪, 1968.7.14~ ] 황선홍(黃善洪, 1968년 7월 14일 예산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현 지도자이다. 현재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직을 맡고 있다. 개요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나 서울숭곡초등학교, 용문중학교, 용문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를 졸업했다. 긴 다리와 성씨가 '황'씨인 것, 어려운 가정 형편 덕에 학창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라도 채워 뒤뚱뒤뚱 뛰는 모습에 착안해서 '황새'라는 별명이 붙었다. 축구인 생활 /위키백과
1959 - 한국 최초의 원자로 기공식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는 서울 공릉동 한국전력공사 중앙교육연구원에 위치한 '트리가마크 II(TRIGA mark II)'이다. 지난 1959년 7월 14일 미국 제너럴아토믹사가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공급한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다. 1962년 3월 첫 운영을 시작한 '트리가마크 II'는 한국 원자력 역사의 기념비적 상징물이다. /대덕밸리정보넷 국내 첫 원자력 도입 이 기구들은 원전 타당성 및 부지조사 등 원전도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면서1957년부터는 연구용 원자로 도입도 추진했다. 이어서 미국 정부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계획에 따라 우리 정부에 35만 달러를 무상 원조하기로 해 트리가 마크 2(TRIGA Mark-Ⅱ)와 부속기자재를 72만 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http://www.idaegu.co.kr/list/gisa.html?code=gisa&page=11&uid= 175923&keyfield=gisa_part&key=%C6%AF%C1%FD
- Famous Clowns Joseph Grimaldi(1778-1831) Karl Adrien Wettach(1880-1959) Nicholai Polakovs(1900-1974) Hubert Jean Charles Cairoli(1910-80)
1959 - 스위스의 광대 그로크(Grock) 사망 그로크 [Grock ; Karl Adrien Wettach, 1880.1.10~1959.7.14] 본명은 Charles Adrien Wettach. 스위스의 광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마추어 곡예사가 되어 여름마다 서커스단과 함께 지냈다. 처음에는 공중제비 연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바이올린·피아노·실로폰 등을 연주했다. 그뒤 브리크라는 광대의 상대역이 되었고 1903년 그로크로 이름을 바꿨다. 그들은 프랑스·북아프리카·남아메리카에서 함께 활동했는데 브리크가 결혼하자 그로크는 유명한 안토네트와 한 팀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그들은 원형연기장이 아닌 무대 위에서 연기를 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무대기법을 익힌 뒤 1911년 런던에서 일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2년 뒤 그로크는 한 얼간이가 악기를 가지고 희한한 사건들을 저지르는 연기를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많은 유럽 관중들을 웃겼다. 예를 들면, 바이올린을 뒤집어 들고 연주하면서 줄이 모두 어디 갔을까 궁금해하는 식의 연기였다. 1924년 영국을 떠나 1954년 함부르크에서 고별무대에 설 때까지 유럽대륙에 머물렀다. 그로크는 책을 여러 권 썼는데 그중에는 자서전인 〈광대왕의 회고록 Die Memoiren des Königs der Clowns〉(1956)도 있다. /브리태니커
- 1st anniv. of the Revolution of July 14 - Abdul Karim Kassem
1958 - 이라크의 '7·14 혁명' [어제의 오늘]1958년 이라크의 ‘7·14 혁명’ ㆍ‘자유장교단’ 쿠데타로 왕정 뒤엎어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할 때 미국의 보수파 이데올로그들은 “오랜 독재에 시달려온 이라크인들에겐 스스로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을 몰아낼 능력이 없다”면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레짐 체인지(정권교체)’ 전략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라크 현대사에는 부패한 왕정을 몰아낸 혁명이 있었다. 1958년의 ‘7·14 혁명’이다. 2차 대전 뒤 유럽이 불황을 겪자 이라크 경제도 침체에 들어갔다. 물가가 치솟고 삶의 질이 떨어졌다.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갈수록 높아졌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13 17:54: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31754325&code=100100&s_code=ap005
- Alfons Mucha' - 'Princess Hyacinth' - 'The Slavs in their Homeland'
1939 - 체코의 아르누보 화가, 삽화가 알폰스 무하(Mucha, Alphonse) 사망 무하(뮈샤) [Mucha, Alphonse Maria, 1860.7.24~1939.7.14]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의 화가. 1860년 7월 24일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체코의 브르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무대 배경을 그리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1885년 부유한 귀족의 후원으로 뮌헨 아카데미에서 종교 벽화와 역사화를 공부하였다. 1888년 파리로 가 잡지와 책에 삽화를 그리면서 미술 공부를 계속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주연의 연극 포스터를 그리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달력, 일러스트, 상품 광고 등 폭넓은 분야에서 아르누보(Art- Nouveau: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 및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 양식)를 대표하는 대중예술가로 이름을 날렸고, 1901년 레지옹도뇌르훈장을 받았다. 1906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 등지에서 강의를 하며 틈틈이 전시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부유한 기업가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만나고, 그의 지원으로 가족과 함께 조국 체코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사망하기까지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슬라브 연작’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1938년 폐렴에 걸려 이듬해인 1939년 7월 14일 프라하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후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프라하에 건립되었다. /네이버
1938 - 히치콕 할리우드 진출 [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히치콕 할리우드 진출 “그의 죽음은 살아남았다. 죽은 병사의 손목시계처럼.”(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4/8466576/1 1933 - 독일에서 '신(新)정당 수립 금지법' 성립(나치스가 유일 합법 정당이 됨) 나치당 내각 성립 1929년 세계 대공황이 터지고, 독일의 경제는 혼란스러워진다. 히틀러는 이때다 하고 생각하여 국민을 선동한다. 그 말에 넘어간 국민은 히틀러를 지지하게 된다. 자본가와 군도 히틀러를 지지한다.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나치는 의원이 과반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정당인 독일국가인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나치에는 프릭, 괴링, 히틀러만 임명을 한다. 그리고 수상이 된 히틀러는 3월 5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국회를 해산한다. 일당 독재 히틀러는 정권을 잡고 독재를 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나치가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전권위임법으로 모든 정당을 해체 시켰고, 바이마르헌법을 페지한다. 그리고 전권위임법을 제국의회에서 통과시킨 뒤 다음날에는 동맹국인 독일국가인민당까지 해체시킨다. 그리고 10월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대를 재정비 하였다. (발췌) /위키백과
1933 - 독일 단종법(斷種法) 공포 [어제의 오늘]1933년 독일 단종법 공포 ㆍ‘인종 청소’ 나치 만행의 단초 만들다 “조선인들은 근본적 성격이 좋지 못한 민족이다.(중략) 그중 소수나마 몇몇 선인이 있을 것이다. 이 소수의 선인이야말로 민족부흥의 맹아다.” 친일문인 이광수가 1922년 5월 ‘개벽’에 발표한 ‘조선민족개조론’의 한 단락이다. 이 글에는 당시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을 휩쓸고 있던 우생학(優生學)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조선에 대해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득세하기 시작한 친일 지배층의 사회적 권위 획득을 위해 서구의 과학을 차용한 것이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13 17:36: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31736255&code=100100&s_code=ap005
1932 - 영국의 정치가 존 아처(Archer, John) 사망 아처 [Archer, John Richard, 1863.6.8~1932.7.14] John Archer John Richard Archer (8 June 1863 – 14 July 1932) was a British race and political activist. In November 1906, he was among the first people of African descent to be elected to public office in Britain as a councillor in Battersea, and in 1913, the first black mayor in London. Life and career http://en.wikipedia.org/wiki/John_Archer_(British_politician)
- Ingmar Bergman - 'Wild Strawberries', 1957
1918 -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Bergman, Ingmar) 출생 베리만 [Bergman, (Ernst) Ingmar, 1918.7.14~2007.7.30] 베리만은 스웨덴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웁살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미술·역사·문학을 공부했다. 일찍부터 연극에 관심을 갖고 각본을 쓰고 연기 및 연출 활동을 했다. 1944년 스벤스크필름인두스트리의 사장 칼 안데르스 뒴림의 의뢰로 집필한 각본 <고통 Hets>이 스웨덴의 유명감독 알프 시외베리가 영화화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자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가벼운 희극에서부터 심오한 형이상학적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특히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룬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1956), 노년에 대한 명상과 함께 인간 심리를 깊이 천착한 <산딸기 Smultronstalet>(1957) 등으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3부작 <유리를 통하여 어렴풋이 Sasom i en spegel>(1961)·<겨울빛 Nattsvardsgasterna>(1962)·<침묵 Tystnaden>(1963)은 신의 존재, 신앙 상실, 사랑의 가능성, 대화 단절 등 심오한 주제들을 탐구한 역작들이다. 그는 작가·감독·제작자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표현했으며, 총체적 영화제작자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브리태니커
"다른 어떤 예술 형식도 영화만큼 일상의 의식을 넘어서서 우리의 감정에 직접 작용하거나 영혼 내면에 깊이 이르지는 못한다."
- 잉마르 베리만
1913 -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제럴드 포드(Ford, Gerald) 출생 포드 [Ford Jr., Gerald Rudolph, 1913.7.14~2006.12.26] 미국의 정치가. 제38대 대통령(재임 1974~1977). 네브래스카주(州) 오마하에서 출생하였다. 미시간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41년 변호사로 일하였다. 1949년 미시간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한 후 1965년부터는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를 겸임하면서 정치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973년부터 S.T.애그뉴의 후임으로 부통령으로 있다가 1974년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실각한 대통령 R.M.닉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솔직한 인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으나 닉슨에 대한 특사, 인플레이션 억제의 실패 등이 원인이 되어 지지율은 급속히 떨어졌고,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민주당 후보 J.카터에게 패하였다. 1974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네이버
1912 - 캐나다의 교육자, 문학비평가 프라이(Frye, Northrop) 출생 프라이 [Frye, (Herman) Northrop, 1912.7.14~1991.1.23] 캐나다의 교육자·문학비평가. 유명한 비평이론서를 저술했다. 프라이는 토론토대학교, 토론토에 있는 에매뉴얼대학, 그리고 옥스퍼드대학교 머턴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939년부터 빅토리아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여 1952년에 영문학과 학과장이 되었고 이후 학장(1959~67)과 명예총장(1978~)으로 재직했다. 미국 여러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도 있었다. 1947년에 〈놀라운 대칭:윌리엄 블레이크 연구 Fearful Symmetry:A Study of William Blake〉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블레이크의 환상적 상징주의에 대한 개괄적이며 해박한 연구서였다. 〈비평의 해부 Anatomy of Criticism〉(1957)에서 다양한 문학비평 양식을 분석했고, 문학에서 전형적인 상징들의 반복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중의 저서들에서는 엘리엇(1963), 밀턴의 서사시(1965), 셰익스피어의 희극(1965) 및 비극(1967), 영국 낭만주의(1968)를 연구했다. 1970년에 〈엄격한 구조:비평과 사회에 관한 에세이 The Stubborn Structure:Essays on Criticism and Society〉, 1982년 성서에 나타난 신화와 구조를 연구한 〈위대한 법전:성서와 문학 The Great Code:The Bible and Literature〉을 출간했다. 다른 비평물들은 문학에서의 집단적 신화의 존재, 문학적 상징, 장르, 비평의 체계적 분류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1912 - 미국의 가수, 작곡가 우디 거스리(Guthrie, Woody) 출생 거스리 [Guthrie, Woody, 1912.7.14~1967.10.3] 본명은 Woodrow Wilson Guthrie. 미국의 가수·작곡가. 주로 보통사람과 그들의 고뇌를 노래한 그의 많은 곡들은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 15세에 집을 떠나 화물기차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면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해서 대공황 당시 유랑자와 떠돌이 노동자 숙소에서 환영받는 인물이었다. 고향의 전통에서 따온 노래를 부르고 소외 계층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곡을 써서 노동자와 민중의 정서를 음악으로 나타내는 대변자가 되었다. 〈안녕 So Long(It's Been Good To Know Yuh)〉·〈고달픈 여행 Hard Traveling〉·〈낡은 먼지투성이 길을 걸으며 Blowing Down This Old Dusty Road〉·〈노조의 시녀 Union Maid〉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에서 영감을 얻은 〈Tom Joad〉같은 노래들은 다른 가수들도 불러 점차 미국 포크송의 고전이 되었다. 뉴욕으로 간 그는 '알마낙 싱어스'(Almanac Singers)에 있는 피트 시거 등과 합류했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머천트 마린(Merchant Marine)에 복무했으며 그후 계속 그룹에 남아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공연했다. 1,000곡이 넘는 그의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땅은 당신의 것 This Land Is Your Land〉은 만년에 부른 노래이며 1960년대에 민권운동가들이 즐겨 불렀다. 말년에 뉴욕병원에서 신경계의 퇴행성 질병인 헌팅턴 무도병과 투병하면서 지냈다. 죽기 전부터 이미 민중의 신화적 인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976년 자서전 〈영광을 위한 도약 Bound for Glory〉(1943)이 영화화되었다. 아들 올로 거스리(1947 태어남)도 포크송 작곡가이자 가수로 크게 성공했고, 또 말년의 아버지 모습을 그린 영화 〈앨리스의 식당 Alice's Restaurant〉(1969)에서 아들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907 - 구한말의 항일애국지사 이준(李儁) 순국 이준 [李儁, 1859.12.18~1907.7.14]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서울을 출발한 것은 1907년 4월 22일이었다. 이상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위종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해 6월 25일 목적지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며 대회 참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한 의장국 러시아는 면담조차 꺼렸고, 영·일동맹의 두 당사자인 일본과 영국은 훼방을 놓았다. 사무국이 조선 정부에 신임장을 조회하는 전보를 보냈지만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통감부가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세 특사는 할 수 없이 각국 대표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신문을 통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열강 대표들이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준 열사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憤死)한다. 7월 14일이었다. 자결설·병사설·단식순절설 등 사인(死因)을 놓고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5일 뒤에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제는 분이 안 풀렸는지 궐석재판으로 세상을 떠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헤이그에 묻혔던 시신은 1963년에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조선
1900 - 제2회 파리 올림픽 개막 인류가 최초로 전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900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 제2회 올림픽이 개최됐다. 메인 스타디움도 없었고 개회식-폐회식도 없었다. 육상 경기장은 블로뉴 숲속, 버려진 경마장을 개조한 곳에서 열렸다. 잡초가 잔뜩 자라 발이 걸려 넘어지는 선수가 속출했다. 미국의 알빈 클렌츠레인은 60m 달리기, 110-200m 허들, 넓이뛰기 등 육상 4개 종목에서 우승한 파리 올림픽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손에 4개의 메달이 전달된 것은 폐막 2년 후의 일이었다. 20세기 최초 올림픽인 프랑스 파리 올림픽은 그렇게 어떤 상업주의도 어떤 정치적 의도도 끼어 들 틈 없이, 우정과 만남의 상징으로 열렸다. 20세기 올림픽은 전쟁 갈등 이해를 잠시 잊고 세계를 통합, 지구화로 가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었다. 여성이 처음 출전한 것이 파리 올림픽, 흑인이 처음 출전한 것이 4년 뒤인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었다. 최초의 비 서구권 대회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최초의 아시아권 대회는 1964년 도쿄올림픽이었다. 전쟁터에서 누가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뛰고 찌르고 던질 수 있느냐를 가르기 위해 시작된 올림픽을 한편으로는 평화의 마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능력의 한계에 대한 도전의 장으로 만든 것은 20세기적 인류가 마땅히 역사로부터 받아야 할 훈장이다. /조선
- 'Woman Holding Fan'
- 'Destroyed Town', Rotterdam 1890 - 러시아 출신 프랑스의 조각가 자킨(Zadkine, Ossip) 출생 자킨 [Zadkine, Ossip, 1890.7.14~1967.11.25] 러시아 태생 프랑스의 조각가. 파리파(派)에 속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형태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편인데, 대표적인 작품은 로테르담의 기념비인 〈파괴된 도시 The Destroyed City〉(1951)이다. 그리스 라틴어 교수의 아들로, 어린시절부터 공부보다는 점토로 모형을 만드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인의 훌륭한 예의'를 배우도록 그를 영국에 보냈지만, 그는 그곳에서 장신구 제작자로 일했다. 런던과 스몰렌스크를 오가며 살다가 파리로 가 에콜 데 보자르에서 조각을 공부한 뒤 1911년 전시회를 가졌다. 초기에는 입체파와 고전적인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았지만, 1920년부터는 우아한 느낌을 주는 〈음악가들 Musicians〉(1924)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개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39년 느릅나무를 재료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를 제작했는데 팔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연상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해야 했다. 그뒤 미국으로 가서 뉴욕의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 돌아왔으며 폭격당한 로테르담을 방문한 후 그곳의 황폐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이 동기가 된 〈파괴된 도시〉는 실물보다 큰 인물상이 공포에 떨며 두 팔을 뻗고 있다. 기법적인 면에서는 복합구조인 〈형태의 탄생 Birth of Forms〉(1947)에서처럼 볼록면·오목면·선·평행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신선한 리듬감과 다차원적 공간의 결합을 보여준다. 195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1960년 파리에서 주최한 전람회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1960년대에는 예루살렘과 암스테르담 등 여러 도시로부터 조상(彫像) 제작을 의뢰받았다. /브리태니커 - Labor Day, Cent., 1990.5.1
1889 - 제2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창립 1876년 해체됐던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 재건됐다. 이날 집회엔 20개국에서 391명의 사회주의 정당 및 노조 대표가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제1인터내셔널에서 채택한 `만국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 구호임을 확인했고 1890년 5월 1일을 `메이데이(세계 노동자 해방투쟁의 날)`로 선포했다. 이 밖에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반드시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해야 한다는 결의도 다졌다. 이날 대회는 1864년 런던에서 결성된 국제노동자협회와 구분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로 불렸다. /조선
- 국제어 에스페란토 발표 100주년 기념 (1987.7.25 발행)
1887 - 자멘호프, 국제어 에스페란토 창안을 발표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는 1859년 12월 15일 유럽 리투아니아의 비얄리스토그(당시 폴란드령)의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안과 의사가 되었다. 그 곳은 당시 러시아가 점령한 폴란드의 일부였는데 산업 혁명 무렵 직물업의 중심지였다. 1861년 당시 러시아의 농노 제도가 폐지당할 때 러시아 제국주의가 폴란드 말을 금지시키고,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들이 혼합해 거주하는 도시들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어나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을 매일처럼 보고 자란 자멘호프가 여러 민족의 공통어가 있으면 이와 같은 싸움이 없어진다고 느꼈고, 그 자신이 유태인이어서 유랑민이란 편견과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188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 11세 암살 사건의 범인이 폴란드인이었으나 러시아 정부가 유태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전국에 유태인 대학살 바람이 불어 하루에 만오천 여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했다. 관련자료 :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교과서 '생활의 길잡이'
1881 - 서부 무법자 ‘빌리 더 키드’ 사살 [역사속의 인물] 서부 무법자 ‘빌리 더 키드’ 미국 서부시대 가장 유명한 무법자는? 서부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다. 실제 21명을 쏜 ‘전설적인’ 총잡이였을까. 최근 연구에는 그의 행적이 부풀리고 왜곡됐다고 한다. 본명은 헨리 맥카티였고 1859년 뉴욕에서 태어나 가난한 부모를 따라 서부로 흘러들어왔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78년 뉴멕시코주 ‘링컨 카운티 싸움’부터다. 목장주 간에 토지 분쟁을 벌이다 존 툰스톨이 살해되면서 촉발된 사건이다. 툰스톨의 목장에서 일하던 키드와 카우보이 10여명은 자경단을 조직, 범인 1명을 죽이고 상대 편을 들던 보안관과 조수까지 사살했다. 그 후 동료들은 사면받았지만 키드 일당은 쫓겨다니다 보안관 팻 가렛에게 체포됐다. 교수형 집행 1달 전 보안관 조수 2명을 살해하고 감옥을 탈출했지만 1881년 오늘, 팻가렛에게 사살됐다. 21살이었다. 극악무도한 무법자가 아니라 우연히 사건에 휘말린 천진난만한 풋내기였다는 주장이 많다. 툰스톨 살해에 관련된 지방 유력자들에 의해 실체가 과장됐다는 것이다. 진위가 어쨌든, 죽이고 빼앗는 서부시대의 ‘전설’은 그만큼 추하다.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09년 07월 1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1438&yy=2009
- Gustav Klimt - 'Woman', detail of Fresco, Palais Stoclet, Brussel - 'Hygeia' - 'The Kiss', detail
- 'The Kiss' - 'The Kiss', detail
- 'Adele Block-Bauer I', Abstract - 'Mada Primavesi', detail
- 'Judith I'
클림트 [Klimt, Gustav, 1862.7.14~1918.2.6] 오스트리아의 화가, 빈 분리파의 창시자. 빈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1883년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실을 열었다. 빈 시립극장(1888)과 미술사 박물관의 계단에 그린 벽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회화를 보여준다. 1897년 클림트의 성숙한 양식이 출현했으며, 그는 아르 누보 계열의 고도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화가들의 단체인 빈 분리파를 창설했다. 그뒤 곧 빈대학교 강당의 천장에 3점의 우의적인 벽화를 그렸지만 선정적인 상징적 표현과 염세주의가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이 벽화들은 거절당했다. 후기의 벽화인 〈베토벤 프리체 Beethoven Frieze〉(1902,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와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에 그려진 벽화들(1909~11)은 정확한 선묘, 평면적·장식적인 양식의 색채, 금박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클림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는 〈입맞춤 The Kiss〉(1908, 오스트리아 미술관)이 있고, 〈프리차 리들러 부인 Frau Fritza Riedler〉(1906, 오스트리아 미술관)·〈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부인 Frau Adele BlochBauer〉(1907, 오스트리아 미술관)과 같이 빈의 상류층 부인들을 그린 일련의 초상화가 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인물 주변의 그림자를 생략하고 평면적이고 구성이 매우 화려한 장식들로 인물을 에워쌈으로써 건강하고 육감적인 피부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 Emmeline Pankhurst Statue, Emmeline Goulden and Sophia Jane Goulden
팽크허스트 [Pankhurst, Emmeline Goulden, 1858.7.14~1928.6.14] [역사 속의 인물] 여성참정권 전사 에멀린 판크허스트 1858년 오늘,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에멀린 판크허스트는 22살 때 24살 연상의 리처드와 결혼, 남편과 함께 여성 참정권을 위한 신념을 공유하고 행동에 나섰다. 1898년 남편이 죽은 후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을 결성하고 여성 참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과격한 '전투적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다. 여성 운동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라선 동료들을 추방, 독선적 면모를 보이면서 항상 급진적 입장을 취했던 판크허스트는 감옥을 들락거리며 단식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녀의 성장한 세 딸 크리스타벨과 실비아, 아델라도 어머니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어머니가 '방화'를 시위 수단으로 선택하자 장녀 크리스타벨은 어머니를 지지한 반면 실비아와 아델라는 이를 반대, 어머니 곁을 떠났다. 여성 참정권은 마침내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에 대해 허용되었다가 8년 뒤 전 여성으로 확대됐다. 과격한 방식이 논란을 낳기도 했으나 여성 참정권에 큰 영향을 미친 판크허스트는 1928년, 70세에 숨졌다. 결별한 뒤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은 두 딸과의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6월 1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0481&yy=2011
- Whistler
- 'Portrait of Mother' 휘슬러 [Whistler, James (Abbott) McNeill, 1834.7.14~1903.7.17] 미국 출신의 화가. 매사추세츠주 로웰 출생.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지내고 귀국 후 워싱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55년 파리에 유학하여 C.G.글레르에게 사사하였다. 그러나 G.쿠르베의 사실주의에 끌리고 마네·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그 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회화의 주제 묘사로부터의 해방을 주장, 《하얀 소녀 The White Girl》(1863) 등으로 차분한 색조와 그 해조(諧調)의 변화에 의한 개성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구성상의 요소를 추상적으로 다루면서 주제성(主題性)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음악과의 공통성에 착안, 작품의 부제로 ‘심포니’ ‘녹턴’ 등을 사용하였다. 1877년 《불꽃》 등을 선보인 개인전을 런던에서 열었을 때 J.러스킨의 혹평에 대해 소송을 일으켜 승소하였지만, 이는 몰이해한 공중을 한층 더 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본거지를 런던에 두었으나 파리에도 체재하며 활약하고, O.와일드와 교유하여 그의 강연집을 말라르메로 하여금 불역(佛譯)하게 해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에칭에도 뛰어나 판화집을 출판한 외에, 동양취미를 내세운 피코크룸(현재 워싱턴의 프리어미술관으로 옮겨서 보존)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한때 영국미술가협회 회장으로도 있었다. 주요작품에 《자화상》《수를 놓은 커튼》《6점의 습작》 등이 있다. /naver
- 'Madame de Staël' by Francois Gerard
1817 - 프랑스의 평론가, 소설가 제르맨 드 스탈(Staël, Germaine de) 사망 스탈 [Staël, Germaine de, 1766.4.22~1817.7.14]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소설가. 본명 : Anne-Louise-Germaine Necker, baronne de Seaël-Holstein 보통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ël)이라고 부른다. 루이 16세 때의 재정가 ·정치가인 J.네케르의 딸로서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주프랑스 스웨덴 대사인 스탈 남작과 결혼하였다. 소녀 시절에 어머니의 살롱에 모이는 계몽사상가들과 교유한 영향으로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사상을 품고 프랑스혁명 시대에 입헌 군주주의를 신봉하였다. 이같은 성향 때문에 여러 차례 국외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입헌사상의 획기적 저서인 《입헌 정치론》으로 유명한 B.콩스탕과 친하게 지냈고, 자유사상을 탄압한 나폴레옹과의 불화로 1803년 국외로 추방되어, 독일 ·이탈리아를 거쳐, 장기간 스위스의 코메에 체재하면서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1789 - 바스티유감옥 함락 (프랑스혁명) 1789년 프랑스, 수년 전부터 몰아닥친 지독한 흉작으로 크고 작은 폭동이 빈발하고 있을 때, 성직자·귀족·평민 세 신분층으로 구성된 3부회가 175년 만에 소집(5월 5일)되고, 평민과 자유주의 귀족들이 서로의 단결을 약속한 ‘테니스 코트 서약’(6월 20일)이 이뤄지면서 프랑스 전역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3부회 최고 책임자가 파면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파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가로에 바리케이드를 치며 경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14일에는 분노한 1000여명의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가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대포를 철수시키고 무기를 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감옥에는 죄수가 7명밖에 없었지만 다량의 무기가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무기는커녕 총탄세례가 쏟아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시민들은 감옥을 점령해버렸다. 1370년 영국과의 백년전쟁 중 요새로 지어졌으나 17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면서 사람들에게는 전제정치의 상징물로 여겨졌던 바스티유였다. /조선
1762 - 프랑스의 교육자, 정치가 라카날(Lakanal, Joseph) 출생 라카날 [Lakanal, Joseph, 1762.7.14~1845.2.14] 프랑스의 교육자. 프랑스 혁명기 동안 교육제도를 개혁했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1792년 국민공회로 알려진 혁명의회 회원으로 선출되어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투표를 했다. 국민공회의 공립교육위원회 일원으로서 1793년 6월 국가가 무상 초등학교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국민교육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 계획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 정권이 몰락한 후 교육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해 10월 초등학교 교육에 관해 약 1년간 보강해 온 계획서를 제출했다. 또한 중등학교에 관한 계획을 제시하여, 1802년 리세가 설립될 때까지 방향을 제시했다. 1795년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를 창설했다. 1815년 제2차 왕정복고 이후, 국왕을 살해한 국민공회의 당원으로 공표되어 미국으로 갔다가 1834년에 돌아왔다. /브리태니커
- Derzhavin, by Borovikovsky 1743 - 러시아의 시인 데르자빈(Derzhavin, Gavrila) 출생 데르자빈 [Derzhavin, Gavrila Romanovich, 1743.7.14]~1816.7.20] 위대하고 독창적인 18세기 러시아의 시인. 뛰어난 서정시와 송시를 많이 남겼다.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762년 사병으로 입대했고 1772년 장교로 임관되었다. 17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26년 동안 올로네츠와 탐보프의 지방장관과 상원의원, 법무장관을 지냈다. 〈펠리차에게 부치는 송시 Oda k Felitse〉(1782)를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바쳐 여왕의 총애를 얻었고, 한동안 여왕의 개인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정치성향 때문에 1803년 공직에서 물러나 즈반카에 있는 영지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송시가 갖고 있는 장중함과 엄숙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제약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 형식을 발전시켰고 주제와 어조를 좀더 개인적이고 서정적으로 변모시켰다. 그의 송시는 시구가 자아내는 웅대한 이미지로 유명하다. 송시 이외에 여러 장르의 시를 썼다. 고결하고 이상주의적인 도덕주의와 생명에 대한 강렬하고 관능적인 인식을 모두 표현한 그의 작품은 고전주의 시가 얽매였던 구속을 깨뜨리는 데 이바지했다. 대표적인 서정시와 송시로는 〈메시체르스키 공의 죽음에 바쳐 Na smert knyazya Meshcherskogo〉(1779)·〈신에게 바치는 송시 Bog〉(1784)·〈폭포 Vodopad〉(1791~94)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223 - 프랑스 카페왕조의 제7대 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사망 필리프 2세 [Philippe II, 1165.8.21~1223.7.14] 프랑스 카페왕조의 제7대 왕(재위 1180∼1223). 존엄왕(尊嚴王:Auguste)이라고도 한다. 봉건군주로서의 왕권충실을 위해 정력적이고 교묘한 정책을 펴, 오랫동안 약화된 프랑스 왕권의 위신을 높였다. 영국 플랜태저넷왕조와 날카롭게 대립하여 처음에는 영국왕 헨리 2세와 다투어, 1189년 마침내 헨리에게 신종의무(臣從義務)를 확인시켰다. 1190년 영국왕 리처드 1세(Richard I,1157~1199, 재위 1189~1199)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전쟁(Third Crusade, 1189–1192)에 참가하였으나 전쟁 중 잦은 불화를 겪었다. 리처드와의 불화와 시급한 프랑스내 영토문제, 그리고 전쟁 중에 얻은 질병은 필리프 2세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열의를 식게 만들었다. 결국 1191년 여름 리처드 1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1194∼1199년 영국의 왕제(王弟) 존과 결탁하여 리처드와 싸워 그를 패사(敗死)시키고 노르망디에 침공하였다. 1199년 존이 영국왕이 되자 그를 적대시하였고, 브르타뉴에서 대(對)존 반란이 일어나자, 봉건법(封建法) 위반을 이유로 존의 대륙령(大陸領) 몰수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노르망디 ·멘 ·앙주 ·투란 ·푸아투 등을 탈환하여, 프랑스 왕령(王領)을 확대하였다. 존이 플랑드르백(伯) 및 신성로마황제 오토 4세와 동맹하여 반격을 가해 오자, 필리프는 그 연합군을 부빈의 싸움에서 격파함으로써(1214) 프랑스왕의 권위를 부동의 것으로 확립하였다. 또, 알비주아 십자군 때에는 신중하게 개입하여 남쪽에 왕권을 침투시켰다. 왕령의 관리를 위하여 국왕대관(國王代官) 제도를 확립하고, 파리에 새 성벽을 축조하여 수도의 위용을 갖춘 것 등은, 이후의 왕권신장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유대인(人)에게는 가혹한 박해정책을 취하였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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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