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 근방에 있는
선비의 상 앞에서
무심님과 레드썬님
선비의 상 근처에 있는
문경새재 탐방로 안내도
조령 제 1관문(주흘관) 앞에서
무심님과 레드썬님
문경새재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타고 뻗어내려 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서남으로 방향을 튼다. 그 백두대간의 북쪽 한강 유역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잇는 고개로,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늦게 개통된 ‘새 길’이었다. 이화령은 새재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 닦은 ‘신작로’다. 다른 고개들도 그렇지만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양을 중심으로 온 나라를 잇는 길의 체계를 만들었는데, 여섯 대로 가운데 하나인 이 길이 동래와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428㎞인 데 견주어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가면 380㎞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새재는 조선시대 내내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일본 등 외지의 사신들, 우마차를 끄는 소들의 발길까지도 묵묵히 받아내며 ‘영남대로’의 대동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조선 초기에 새재를 열고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곳곳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새재 넘어 첫번째에 있는 가장 큰 역은 유곡(幽谷)이었다. 유곡역의 중요성을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조령산과 주흘산의 깎아지른 골짜기 ‘새’로 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경상도에서 ‘쌔’라고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그 이름에 연유하여 한자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했다. 아마 이 모두가 저마다 ‘새재’로 부르게 된 까닭이 되었을 것이다.
새재 곳곳에는 산신각, 성황당이 많다. 지금도 새재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정성껏 산신과 성황신에게 제를 지낸다. 이런 마을 풍속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곳이 변치 않았다는 뜻도 될 터이다.
새재 일대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니만큼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끊이질 않았으니, 삼국시대 이래로 축성된 산성도 많다. 그 중 조령성은 임진왜란 후에 공사가 시작되어 숙종 연간에 완공되었다.
새재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임란 전에 왜군에 대비해 산세가 험한 새재에 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왜군은 죽령·새재·추풍령 세 갈래로 나뉘어 북상했다. 그 중 주력부대는 새재 방면으로 길을 잡았는데, 새재에 이르러 그 험준함에 놀랐으나 정작 방비가 전혀 없었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그곳을 통과하였다. 탄금대에 이르러서야 신립 부대와 접전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신립 장군은 목숨을 바쳐 싸웠으나 결국 대패하였고 왜군은 곧장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 새재가 뚫리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에서 수도가 함락당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새재는 한양을 사수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것이다.
새재 길에는 임란을 겪은 뒤인 1594년, 충주 수문장 신충원의 건의에 따라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였다. 관문 자리로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으나 가장 험준한 곳, 곧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아 있고 나무를 걸치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곳이 24곳이나 되는 응암(鷹巖)이 관문을 설치할 자리로 선정되었다. 그곳이 고개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는 지금의 제2관인 조곡관(鳥谷關)이다. 이어 숙종 때에 이르러 고개 정상 가까이에 제3관인 조령관(鳥嶺關)과, 문경에서 새재를 넘는 초입에 제1관인 주흘관(主屹關)을 두고 성을 쌓았다. 그 뒤로 이 새재 길은 과거보러 가는 뭇 영남 선비들, 서울로 향하는 영남의 각종 물산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특히 영남의 선비들은, 남쪽의 추풍령으로 가면 과거에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주르륵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새재길을 가장 애용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새재를 더는 걸어서 넘지 않는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기차라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수안보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이화령이 1925년에 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로 닦이면서 이 새재 길은 길손을 잃고 ‘옛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옛모습을 잃어버린 죽령이나 이화령과는 달리 걸어서 넘을 수 있는 길의 면모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981년에 이 일대가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산책로가 단장되면서 가벼운 등산이나 산림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문경관문은 사적 제147호로,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에는 관문이 셋 있다. 옛 영남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을 따라, 문경 쪽으로부터 수안보를 향해 주흘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1관문, 조곡관이란 현판이 걸린 제2관문, 조령관이라 불리는 제3관문이 차례로 놓여 있다. 제1관문부터 제2관문까지는 3.0㎞, 제2관문에서 제3관문까지는 3.5㎞, 합하면 6.5㎞로 10리에 5리를 가고도 조금 더 가야 하는 길이다. 새재를 넘는 길은 영남사람들이 서울 가는 방향대로 문경 쪽에서 수안보로 가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서울에서 문경으로 오는 방향으로 수안보에서부터 넘는 방법이 있다. 문경에서 수안보로 가는 1—2—3 관문 차례는 오르막길이고, 그 반대는 내리막길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문경새재의 세 관문 중 옛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드나드는 홍예문은 높이가 3.6m이며 관문의 전체 길이는 5.4m이다. 양옆 석축은 높이 4.5m, 길이는 188m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1708년에 세워졌다. 세 관문 가운데 제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양옆으로 버텨선 성축도 비교적 온전하며 개울물이 흐르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수구문(水口門)까지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성벽 동쪽에는 높직한 곳에 끼어 있는 큰 돌에 글씨가 있으니, ‘康熙 辛丑’ 곧 경종 원년(1721)에 별장 이인성이 개축했다고 새겨져 있다. 그 아래쪽에는 석수의 우두머리인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이라는 이름자도 있다. 이들의 지휘 아래 수많은 석수들과 역부들이 돌을 뜨고, 나르고, 정으로 쪼고, 네 귀를 맞추어 엇물리게 쌓아 지금처럼 견고한 성벽을 이루었을 것이다. 저 성돌 하나하나에 그들의 땀방울이 스며 있으리라. 이 새김글말고도 주흘관 성벽에는 개축 기록이 여기저기 있다. 무진년이라는 각자는 영조 28년(1748)의 일이다.
또 경진, 병술이라는 간지는 고종 17년(1880)과 고종 23년(1886)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또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성축을 개수한 것은 무엇을 막으려 함이었을까. 문경관문에는 1728년 이인좌의 난 때와 1871년 경북 영해의 동학교도 이필제를 붙잡았을 때 군사가 대규모로 주둔했었다. 또 그뒤의 일이지만 제 2, 3관문은 1907년에 국권을 되찾자고 일어선 의병들을 토벌하는 토벌대에 의해 훼손된 적도 있다.
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꽤 규모를 갖춘 집 한 채가 들어앉아 있다. 새재 성황신을 모신 성황당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숙종 26년(1700)에 세웠고, 헌종 10년(1844)에 다시 지었다고 하니, 길게 잡으면 300년, 짧아도 150년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성황당 안에는 곱디고운 여신상이 모셔져 있는데, 조선 인조대의 명신 최명길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몇 걸음 옮기면 비석들이 즐비하다.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정비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이 갈려 나갈 때에 선정비를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대개 향리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대개 정말 백성을 아끼는 목민관보다는 이런 과시적인 ‘공적’을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그 민폐가 더 심했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관찰사, 현감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위장까지 한몫 끼어 있는 것은 참 가관이다. 돌비석들 사이에는 철로 된 비까지 있다. 그 많은 선정비, 송덕비, 영세불망비들······. 과연 얼마나 많은 ‘선정’이 베풀어졌을까. 저 돌비, 철비를 세우느라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땀과 눈물을 바쳤을까. 그런 중에도 그 사이에 들어 있는 전나무비는 다른 비들에 비해 다소 나아 보인다. 1978년에 쓰러진 600년 된 전나무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관문을 잇는 새재길을 한적한 산속의 오솔길로 연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폭 5m 안팎의 흙길로 단장했는데, 옛모습을 고스란히 지닌 부분은 참 귀하게 되어버렸다. 자동차가 서로 조심스레 엇갈려 지나갈 만한 너른 길이지만 자동차 통행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 길을 따라 얼마쯤 오르면 돌담을 높직이 두른 조령원터에 다다르게 된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무나 사사로운 용무로 지나다니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장방형 터에 돌담을 쌓고 한 곳에 문을 내고 긴 돌을 가로 얹었다. 그 안에 들어가보면 그 규모가 퍽 큰 데에 우선 놀라게 된다. 1977년에 이루어진 발굴 결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집터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옛날 온돌시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덮어버렸고 그 앞에다 그저 ‘조선온돌지’, ‘고려온돌지’라는 팻말만 세워놓았을 뿐이다. 집터에서는 그릇조각, 기왓조각, 담뱃대, 가위 등 여러 가지 일상용품이 나왔다. ‘고려온돌지’ 팻말이 꽂힌 곳은 고려시대의 건물 터전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된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온돌난방법이 이미 고려시대에 이곳까지 전해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온돌난방법이 남부에까지 일반화된 시기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보면 이 집터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다. 발굴 뒤에 그냥 흙무더기로 덮어두지 말고 집터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를 해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얼마를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주막’ 표지판이 의젓하게 걸려 있는 집 한 채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픈 다리도 쉬어갈 겸, 마른 목도 축일 겸, 새재 넘는 기분도 살릴 겸 기대를 품고 들어서지는 마시라. 이 집은 새재를 넘기 전에 이쯤에서 쉬어갔다는 옛이야기에 따라 어림으로 건물만 덜렁 지어놓았을 뿐이지 술이나 안주를 팔기는커녕 지키는 사람조차 없다.
거기서 완만한 오르막길을 걷다가 문득 오른쪽을 쳐다보면 판판하고 큰 바위면이 드러난다. 그냥 바위려니 하고 스쳐 지나칠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바위면에 양각, 음각으로 두 개의 비석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바위면에 탑이나 부처를 새긴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비석을 새긴 것은 흔하지 않다. 소중한 것을 바위면에 새기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이러한 ‘마애비’를 어디에서 또다시 볼 수 있을까? 옛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재미있다.
한 비면에는 ‘己丑年五月懸監李冕善政碑’(기축년 오월 현감 이면 선정비)라고 새겨져 있고 그 옆 다른 면에는 ‘李冕愛恤碑己丑四月’(이면 애휼비 기축 사월)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이면이란 사람이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긍휼히 여긴 것을 치하하여 같은 해 4월과 5월에 연거푸 비를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를 새긴 기축년은 1889년으로 여겨진다. 거창하게 세운 선정비들이 그 지방관이 갈려가기가 무섭게 돌을 맞고 깨어지고 넘어진 것이 수두룩한 터에 이처럼 든든한 바위에 새겨놓으면 세월이 지나도 깨지거나 뽑혀 사라질 염려가 없으니 그야말로 ‘영세불망’(永世不忘)할 만한 방법이겠다.
마애비를 지나면 산의 정취는 더욱 깊어지는데 ‘交龜亭址’라는 표지가 하나 서 있다. 떠나가는 관찰사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장소로 즐겨 이용했다고 하는데 아마 신임 관찰사를 맞아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던 곳이 아닌가 한다. 교구정의 건립은 문경관문이 설치된 시기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1484년(성종 15)의 일이었다. 현감 신승명이 8선녀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팔왕폭포(용추)의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건립했다고 한다.
교구정터를 지나 더 올라가면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대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에는 고졸한 필치로 ‘산불됴심’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 이 비석은 처음 세워진 때부터 여지껏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듯하다. 요즈음에도 흔한 표어 ‘산불조심’ 자체가 낯익기도 하지만, 한글로 새겨져 있어 더욱 이채롭다. 이를 귀히 여겨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로 지정했다.
‘산불됴심’비를 지나면 큰길 옆으로 옛 오솔길이 계곡을 끼고 돌거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은 형국을 지어내며 큰길과 같은 방향으로 나 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곳에 제2관문(조곡관)이 버티고 서 있다. 조곡관은 세 관문 가운데 맨 처음인 1594년 임란 직후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발굴기록에 따르면 신라 때의 기와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새재가 고려 태조 때 열렸다고도 하고, 조선 태종 또는 세종 때 열렸다고도 하는 것은 꼭 그때 처음으로 길이 생겼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삼국시대부터 있던 길이요 요충으로 여겨져오던 곳이었지만, 한때는 그 중요성이 덜해졌다가 다시금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길이 열렸다’고 한 것일 듯싶다.
문루는 1975년에 복원한 것으로 옛 이름은 ‘조동문’(鳥東門)이었지만 지금은 ‘조곡관’(鳥谷關)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높이 4.5m의 석성이 관문 동쪽으로 400m, 서쪽으로 100m 가량 뻗어 있다. 석성 너머로는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과연 일당백의 요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발 380m로, 생각보다 그리 높지는 않다. 오른쪽에 연결되는 산줄기의 최고봉이 1,106m 높이의 주흘산 주봉우리이고, 왼쪽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1,017m의 조령산이다. 그러나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정작 길에서는 산봉우리가 잘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조곡관 동쪽의 산세는 조곡계곡으로 뻗어나가는데, 그 등성이를 따라 5㎞쯤 가면 주흘산에 이른다. 이 조곡관의 동쪽으로 ‘어류성’(御留城)의 존재를 알리는 팻말이 보이는데, 고려 태조 10년(927) 7월 초에 태조 왕건이 이곳에 와서 당시 이 지방 호족이었던 고사갈이성의 성주 흥달의 귀순을 받았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조곡관을 들어서면서 눈여겨보면 ‘옛 오솔길’을 알리는 나무표지가 눈에 띈다. 옛길을 예대로 남겨둔 곳인가 싶은데, 200여m로 끝나 못내 아쉬운 감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돌이 많고 험한 새재를 우마차가 제대로 넘을 수가 없어 비가 올 때 길이 패이지 말라고 박석을 깔아놓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옛 오솔길’에서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문경새재 제2관문에서 제3관문으로 오르다 만난 옛 오솔길을 지나 얼마를 다시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7~8m 키의 나무가 박달나무라는데, 원래 단단하기로 소문이 나 방망이 등의 재료로 즐겨 쓰였다고 한다. 길을 걷다가 잠시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청신한 새소리가 귀를 말끔히 씻어준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는 까마귀, 때까치같이 귀에 익은 이름을 가진 새들말고도 붉은머리오목눈이, 직박구리같이 이름이 재미난 새들도 산다.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걷다보면 저기 제3관문(조령관)이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제2관문(조곡관)이 임란 직후 건립된 데 비해 이 조령관은 숙종 34년(1708)에 지어졌다. 그러나 숙종 때의 문루는 1907년 의병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 보는 홍예문과 그 위의 누각 그리고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조령관 부근에는 산신각도 있고 약수터도 있어 한번 들러보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일 만하다. 이 약수는 1708년 조령성을 쌓을 때에 발견했다고 전해오는 것이니 내력도 만만치 않은 데다 사철 수온이 일정하여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수많은 길손들에게 더없이 달고 시원한 피로회복제 노릇을 했을까. 조령관에서 동쪽으로 난 길은 조령성의 북문을 거쳐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곧 지금 미륵대원이 있는 등산로로 이어지니 결국 지릅재[鷄立嶺]와 연결된다.
약수 위쪽에 있는 조그마한 전각이 산신각인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새재가 개척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조정에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 장계가 전달되지 않자 충주 목사가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피 묻은 옷이 발견되었다.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더니 임금이 노해서 “호랑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군사 100인이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대신 제를 올리고 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때부터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냈으며, 이후 새재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경새재는 가벼운 산행을 하기에 제격이어서 철이 바뀔 때마다 많은 이들이 찾는다.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경계에 위치한 이화령 휴게소에서 문경으로 난 3번 국도를 따라 약 6.5㎞쯤 가면 길 왼쪽에 진안리 검문소와 함께 문경새재 제1관문으로 가는 2번 시도로가 나온다. 2번 시도로를 따라 약 2.5㎞쯤 가면 제1관문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부터는 걸어서 문경새재를 넘어야 한다. 제1관문 주차장 주변에는 음식점과 여관 등 관광단지가 형성돼 있다.
제1관문부터 제3관문까지는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제3관문에서 내려가면서 문경새재를 돌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제3관문으로는, 충주 수안보에서 이화령·문경 쪽으로 난 3번 국도를 따라 약 6㎞ 가면 소조령에 닿게 되고 소조령에서 왼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1.5㎞ 가면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면 제3관문이 나온다. 휴양림 입구에서 제3관문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휴양림 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며 주변에 숙식할 곳이 여럿 있다.
문경 시내(점촌)에서 제1관문까지는 100번과 200번 시내버스가 하루 11회 다닌다. 문경읍에서 제1관문까지 역시 100번과 200번 버스가 하루 5회 다닌다. 문경 시내(점촌)에서 문경읍으로는 20분 간격으로 시내버스가 다닌다. 충주에서 문경새재 제3관문으로 가려면 수안보를 거쳐 소조령까지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시내버스를 이용해 소조령에서 내려 조령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제3관문까지 걸어가거나 수안보에서 조령산 자연휴양림까지 택시를 이용해 가는 방법이 있다. 충주나 수안보로는 서울·수원·대전·괴산 등지에서 고속버스와 직행버스가 자주 다닌다.
조령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문경새재 제3관문으로 가려면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장료를 내야 한다.
① 문경새재 제1관문 조금 못미처 길 오른쪽에는 문경새재박물관이 있다. 문경새재박물관은 문경새재, 문경의 문화, 문경의 자연과 산업을 주제로 여러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또한 문경의 특산물인 도자기 등을 판매하고 있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따로 없다. 모두 문경새재도립공원 입장료와 주차료에 포함돼 있다.
연중무휴. 여닫는 시간 9:00~18:00
② 조령산과 더불어 문경새재를 이루는 주흘산은,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늠름하고 웅장한 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흘산 정상에 서면 확 트인 전망이 시원하다. 주흘산은 여러 산행 코스가 있으나 제1관문→여궁폭포→혜국사→샘터→정상→계곡합류지점→제2관문→제1관문으로 되돌아오는 코스가 대표적인 코스이다. 산행 거리는 약 13㎞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행을 시작하면 바로 만나는 여궁폭포는 거대한 바위 절벽에서 숨은 듯 쏟아져 내리는 약 20m 높이의 폭포로, 아래에서 쳐다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여인의 하반신과 같다 해서 여궁(女宮)이라 이름 붙었다.
[주흘관~용추] 구간 탐방로 도중의
촬영세트장 입구에서
무심님과 레드썬님
용추에서
무심님과 레드썬님
용추
용추를 소재로 한
퇴계 이황의 한시
꾸구리 바위를 바라보고 있는
무심님과 레드썬님
꾸구리 바위에 관한
안내문
[꾸구리 바위~조곡 폭포] 구간 탐방로 도중의
폭포 앞에서
레드썬님
조곡 폭포 앞에서
무심님과 레드썬님
조령 제 2관문(조곡관) 근처에 있는
휴게소
조령 제 2관문(조곡관) 근처에 있는
휴게소에서
전과 손두부를 안주로 하여
오미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무심님과 레드썬님
조령 제 2관문(조곡관) 앞에서
무심님과 이성수
조령 제 2관문(조곡관) 앞에서
무심님과 레드썬님
올랐던 길로 되내려 오면서
조곡폭포 앞에서
무심님과 이성수
조곡폭포
용추를 배경으로
무심님
문경새재 더불어 탐방기
산 : 문경새재
산행코스: [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 - 조령 제 1관문(주흘관) – 용추 – 조곡폭포 -
조령 제 2관문(조곡관) - 조곡폭포 - 용추 –
조령 제 1관문(주흘관) -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 ]
일시 : 2014년 07월 26일(토요일)
동참 더불어님들 : 레드썬님, 무심님, 이성수 (총 3분)
날씨 : 가랑비가 내린 날씨
산행코스 및 산행 지점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3시간20분 소요)
07:20~09:50 승용차로 서울 천호역 6번 출구 전방 국민은행 앞에서 출발하여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으로 이동 (157km)
09:50~10:05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에서 산행출발하여 조령 제 1관문(주흘관)으로 이동
10:05~10:40 용추로 이동
10:40~11:00 조령 제 2관문(조곡관)으로 이동
11:00~12:10 조령 제 2관문(조곡관) 근처에 있는 휴게소에서 전과 손두부를 안주로 하여 오미자 막걸리를 마시면서 휴식
12:10~13:10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으로 회귀
13:10~13:35 승용차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을 출발하여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있는 수옥폭포로 이동 (17km)
13:35~13:50 수옥폭포에서 사진촬영 후 휴식
13:50~13:55 승용차로 수옥폭포를 출발하여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있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으로 이동 (2km)
13:55~14:30 조령산 자연휴양림에서 탐방 출발하여 조령 제 3관문(조령관)으로 이동
14:30~14:35 조령 제 3관문(조령관)에서 사진촬영
14:35~15:05 조령산 자연휴양림으로 회귀
문경새재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