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수제비가 '벤또' 였던 시절
1950~60년대 궁핍과 배고픔을 달래주던 구휼(救恤)식품의 상징이었던 수제비가
어느새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울에만 100여 곳의 수제비 전문식당이 문을 열고 있으며 오래된 수제비 전문식당은
전국적인 명성과 함께 길게 줄을 서서 수십 분을 기다려야 겨우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가 가벼운 60~70대 노인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수제비를 요즘 젊은 층이
별미 음식이라며 즐기고 있습니다.
한 음식 평론가가 수제비를 젊은 층뿐 아니라 외국인도 선호하는 K-Food라고
치켜세우는 글을 쓴 걸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수제비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고향 동창들의 모임이 있을 때 수제비집에는 가지 못합니다.
동창들 중에 수제비를 싫어하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살면서 수제비를 지겹게 먹어 수제비만 보면 멀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 동창들의 수제비 기피현상의 이면에는 눈물어린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수제비 그릇을 대할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 숙연해지고 목이 멜 때가 있습니다.
항구도시인 내 고향 군산에는 1950년대 초반 이북에서 피란 온 실향민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황해도와 평안도 해안지역에서 서해바다를 통해 피란 온 실향민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인천과 군산에 정착했습니다.
당시 군산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교회가 있는 개복동이란
동네의 나지막한 언덕에 천막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말이 정착이지 교회 인근의 땅에 미군부대에서 제공한 군용 천막을 치고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을 설치한 게 전부입니다.
미국 원조로 만든 밀가루의 포대에는 팔거나 다른 물건과 바꾸지 말라는 말이 씌어 있었다.
급히 피란길에 오른 그들에게 변변한 살림도구며 입을 옷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시청과 교회 사람들이 합동으로 가가호호를 돌며 피란민(당시에는 그렇게 불렀음)을
돕기 위한 물품을 거두러 다녔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운 때라 실향민들에게 나눠줄 식량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저녁나절이 되면 어머니가 멀리 피란민촌을 바라보시며 “저들은 오늘 저녁도
굶는 모양이다”라고 혀를 끌끌 차던 게 기억납니다.
화덕에 불을 지피면서 나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막촌의 화덕에서 일제히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원조 물자인 밀가루 포대가 실향민들에게 배급된 것입니다.
성조기를 배경으로 악수하는 두 손이 그려진 밀가루 포대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천막촌 집집마다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원조 밀가루는 보름에 한 번씩 배급되었는데 실향민들의 허기를 달래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을 것입니다.
밀가루가 배급된 날부터 일주일은 하루에 두세 차례 화덕의 연기가 올라왔지만
나머지 일주일 정도는 하루 한 번만 연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초등학교)는 당시 초과밀 학급이었습니다.
실향민 아이들이 한 반에 20여 명씩 배정되다 보니 한 학급에 70명이 넘는
그야말로 콩나물 교실이었습니다.
4학년이 되어 오후 수업을 하게 되면서 점심시간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오전 수업이 끝나갈 무렵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교실 유리창 밖에서 몸뻬 바지 차림에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아주머니들이 자기 아들을 향해 손짓을 합니다.
실향민 아주머니들은 각자 작은 항아리를 손에 들고 와 아들들에게 점심을 가져왔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는 미국 원조 밀가루로 끓인 수제비가 들어있었습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자식에게 수제비를 먹이기 위해 행여나 식을세라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서 한달음에 가져온 것입니다.
나중에 실향민 동창에게 들어보니 그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한 끼라도 더 먹일 요량으로
자신은 굶은 채 수제비 항아리를 학교까지 가져왔다고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항아리를 받아든 실향민 친구가 교실에서 항아리 뚜껑을 열자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가 정말 맛있어 보였습니다.
변변한 양념도 없이 선창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바지락을 넣고 된장이나 간장으로
간을 맞춘 수제비였지만 내게는 침을 꼴깍 삼킬 정도로 맛있게 보였습니다.
비록 잡곡밥이지만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주신 벤또
(당시는 도시락이란 말을 쓰지 않았음)가 갑자기 맛이 없어 보였습니다.
나는 실향민 친구에게 내 도시락과 바꿔 먹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말이냐?”라고 되물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도시락을 그 앞으로 밀자 그는 수제비 항아리를 얼른 내게 주고는
다른 실향민 친구 자리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 친구와 도시락의 밥과 수제비를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실향민 친구들은 너무도 밥이 먹고 싶다는 사실을,
수제비는 할 수 없이 먹지만 정말 지겨워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교무실로 오라는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저를 본 담임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며 “수제비가 그렇게 맛있더냐?”라고 묻더니
"어머니께 말씀드렸으니 내일부터 ‘벤또’를 한 개 더 싸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속으로 선생님 도시락을 어머니가 준비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우리 반에서 밥술이나 먹는 집 애들은 다 도시락을 두 개씩
싸 왔습니다.
내과병원 집 아들, 제과점집 아들, 가위공장 사장 아들 등 열 명가량이 하나씩 싸 온
여분의 도시락이 열 개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중학교 선생의 아들이었지만 부농인 외갓집 덕분에 먹는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5학년 1학기 마칠 때까지 도시락을 두 개씩 싸 가지고 다녔는데
여분의 도시락은 실향민 아이들의 몫이었고, 그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가져다줄
수제비로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웠을 것입니다.
6학년이 되자 그처럼 힘들게 살던 실향민들이 어느새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 하나둘
천막촌을 떠나기 시작했고 점심을 굶는 친구들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실향민 아이들은 모두 나이가 나보다 한두 살 많았습니다.
피란길에 나서느라 학년을 제대로 맞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실향민 친구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설명에 얼마나 집중하는지 옆에서 보는 나도 따라서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몇 명을 제외하고 실향민 친구들은 나와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해 초중고 동창이
되었고 대학을 나와 법조인, 의사, 사업가, 교수 등이 되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제 70대 노인이 되어 은퇴한 동창 친구들이 가끔 모임을 갖는데 그중에 실향민
아닌 친구가 “이제는 수제비집에서 만날 때가 되지 않았냐”는 짓궂은 농담을 해
함께 웃기도 했습니다.
수제비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으로 뚝뚝 떼어 넣어 끓인 수제비는 그 모양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가장 맛있는 수제비는 항아리 수제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 그릇을 앞에 두면 60여 년 전 교실 밖 창가에서
수제비 항아리를 안고 자신의 아들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들의 그윽하고 간절한
눈망울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