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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품
느헤미야 13:1-9
주제-거룩, One point-거룩함의 회복
루마니아의 독재자인 차우세스쿠가 통치할 무렵 오라티아의 제2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처음부터 기도를 강조하는 사역을 펼쳤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고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아울러 이 목사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인들이 습관적인 죄들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교회가 참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루마니아는 농장과 공장이 모두 국가의 소유로서 노동의 산물이 정부에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농장과 공장에서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것을 훔쳤고 이것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그러한 것도 잘못이라고 설교했고 정부의 것을 훔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 냈습니다. 또한 이 목사님은 금주맹세를 촉구했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포도주의 주산지였기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도 음주는 용인된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술을 마시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고 믿었고 그래서 금주 맹세를 촉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강력한 설득에 의해 교인들은 거룩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믿는 모든 행동에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6개월 후 정결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많은 불신자들이 회심하였습니다. 부흥이 시작되기 전 500명이었던 이 교회가 매년 10명 정도의 새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974년 6월부터 12월까지 250명, 그 다음 2년에 걸쳐서는 대략 400명의 새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금지되고 잘못하면 순교할 각오까지 해야 하는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부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부흥은 이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고 루마니아의 복음주의 교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붙은 이 거룩함의 불이 15년 후 차우세스쿠 공산 부패정권을 전복시키는 궁극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새 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줄까봐 그들과 다르다거나 극단적이거나 지나치게 영적으로 보이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거부감을 주지 않으려고 세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세상을 초청하는 대신에 우리가 세상을 본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교회가 세상과 같아진다고 해서 불신자들이 교회에 오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자기와 똑같은 사람들한테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루마니아의 오라티아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기로 작정했을 때 한 때 그들을 조롱하던 불신자들이 불가항력적으로 그리스도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지난 3월 초 한국목회자 협의회에서 발제를 맡았던 감신대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 125년의 역사 속에 지금이 최고의 위기시대라는 진단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먼저, 출산율이 감소하고 전통 가족가치가 붕괴되는 인구학적인 변화를 꼽고 있습니다. 둘째는 국민소득 증가 및 민주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수순향상으로, 이러한 시대에는 종교를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종교이동의 한계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북한으로부터의 이동과 농촌교회에서의 이동, 그리고 작은 교회로부터 큰 교회로의 이동으로 교회가 성장하였는데 이제는 작은 교회가 붕괴되면서 이러한 쏠림현상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한국교회의 낮은 신뢰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지금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가톨릭이 38.9%, 불교가 23.1%, 그리고 기독교가 10.8%입니다. 가톨릭의 3분의 1도 안 됩니다. 불교의 반도 안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지금 125년의 역사 속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으로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원규 교수는 이 최대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성장 중심으로 나아 왔는데, 이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중심에서 실천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교회중심에서 지역사회중심으로, 조직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을 때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한국성도들이 거룩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낮은 신뢰도를 보이게 되었습니까? 왜 다른 종교보다 한참 낮은 신뢰도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돈이 없어서입니까? 열심히 없어서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장을 지상목표로 삼으면서 성숙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성장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세상과 똑같은 모습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신임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과 똑 같아질 때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될 때 거기에 큰 역사와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느헤미야 8장부터 13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오라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 일어난 대 부흥의 이야기입니다. 그 부흥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의 언약은 구체적이었습니다. 주위의 불신 민족과 통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안식일에 매매를 금하였습니다. 성전과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동의했습니다.
그 후 느헤미야가 파사로 돌아가 일정기간 머물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은 예전에 맺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유지관리에 소홀했습니다. 신앙이 다른 이방여인들과 결혼했습니다. 가장 터무니없는 잘못은 암몬 사람 도비야 가문과의 혼사였습니다. 도비야는 일찍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별 짓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경계심이 약해지고 예전의 적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기야 도비야 가문과 제사장 엘리아십 가문이 사돈이 되었고 도비야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변화는 분명 하루아침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 가지 타협이 또 다른 타협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관용의 정책을 내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런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고 신앙생화를 계속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았던 느헤미야는 대단히 분노하였습니다. 거룩함을 소중히 여긴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도비야와 그의 모든 세간을 말 그대로 성전 밖으로 내던졌고 더럽혀진 방들을 정결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악한 상활을 성토했고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왜 이러한 일들을 그렇게 큰 문제로 여겼습니까? 그는 왜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까요? 왜 자신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모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 참견했을까요?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고 또 바랬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때문에 끔찍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의 이야기와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스스로 신자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종교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죄를 짓는 허가증으로 바꾸었습니다. 관용의 정신이 진리에 대한 사랑을 눌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암몬 사람 도비야가 성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음욕 탐욕 물질주의 분노 이기심 교만 육욕 이혼 기만 불경건한 오락 세속적인 철학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인된 원수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들을 교회 안으로 맞아들여 아예 방까지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길 잃고 타락한 자들이 교회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너무 노력한 나머지 죄에 대한 회개도, 삶의 변화도, 하나님의 임재도 거의 없는 상황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겠습니까? 그런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편 45편 7절을 보면,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였더니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십니까?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에게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자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자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거룩함은 부흥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고 성도들이 거룩하지 못할 때 그곳에서는 부흥의 역사나 행복의 역사나 그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어떤 상태인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낸시 레이드모스 여사는 그의 책 <거룩함-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품>에서 우리를 향하여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 인생의 거룩을 쭉 검토한다면 어떨까? 모든 재산, 당신이 읽은 모든 책과 잡지, 수집해 놓은 시디와 디비디, 수표책, 소득신고기록, 일기, 수첩, 통화기록, 편지, 이메일, 인터넷 사용기록, 전부가 공개된다면 어떨까? 아무도 보는 이 없다고 생각하고 내린 선택들까지 사진처럼 다 들여다본다면 어떻게 될까? 거기다가 당신의 생각, 태도, 숨은 동기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 우리들은 이런 모습에 대해 사실 너무 관용해져 있습니다. 도비야가 성전 안에 들어와 살았던 것처럼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삶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별 거부감이 없습니다.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회개하지 못하고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그것을 용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불신자들이 올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함만이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할 때 거기에 행복과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함의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죄악을 몰아내고 거룩함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즐거움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를 성경은 7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인생의 다른 목표에 밀리는 후순위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원하셨고 계획하셨고 준비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새 마음을 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여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그 분의 임재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성에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7번째는 사람의 행복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거룩함과 죄 둘 다 잘 자랄 수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정신과 행동에서 죄의 잡초가 자라나도록 방치하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은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죄짓는 수단과 유혹거리를 가차 없이 잘라내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30)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죄악 된 육체를 죽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거룩함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벗기만 하고 입지 않으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의를 입어야 합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서 사랑 평안 감사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성들을 입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은 결혼식이 봄보다 가을에 더 많다고 합니다만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입장하는 신부가 복장이 불량하다고 하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있고 얼굴은 화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드레스는 잔뜩 구겨져있고 얼룩얼룩 때가 묻고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고 하면 신부를 맞이하려고 서 있는 신랑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그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이렇게 결혼식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신랑의 눈은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신부가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결혼식을 볼 때마다 떠올려야 할 최후의 결혼식입니다. 신랑은 거룩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거룩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 결혼식에 참여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깨끗한 모습으로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지금 그 결혼식이 열린다고 하면 여러분의 복장은 어떨 것 같습니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준비해야 합니다. 고백하고 버려야 할 죄가 있습니까? 끊거나 회복해야 할 관계가 있습니까? 없애버려야 할 물건이 있습니까?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배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꼭 하시길 바랍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당신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을 위해 꼭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거룩함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고후7:1)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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