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용인 백암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7. 1:29
국내 시장백과 - 용인 백암시장
2023.11.06. 23:51조회 2
용인 백암시장
요약 용인 백암시장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형성되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5일장이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큰 우시장이 섰던 백암장은 이제 백암순대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1, 6일에 장이 서면 많은 사람들이
1. 용인 백암시장 개요
용인은 지리적으로 경기도의 중심에 위치해서 많은 물자들이 오고가는 통로였다. 그 때문에 예부터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었고, 백암장과 김량장이 두 축을 이루며 용인 지역의 상권을 이끌었다.
백암장은 조선시대부터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우시장으로 유명했다. 거래액이 큰 우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의류나 생선, 술, 과일 등을 파는 상인들도 자연스럽게 백암장으로 모여들어 장날이 되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또한 김량장은 1990년대까지 성남 모란시장과 함께 큰 규모를 자랑하던 시장이었다.
1970년 이후 산업화, 1990년대 유통과 소비 패턴의 변화에 따라 백암장과 김량장은 한때 위축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면서 사람들의 전통시장에 대한 관심과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되살아났고, 백암장은 봄철에 성시를 이루는 모종 시장과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백암순대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백암시장 풍경
파라솔과 천막 아래 다양한 물품이 거래된다.
2. 용인 백암시장의 어원
백암의 본래 표기는 배관(排觀)이다.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배관장(排觀場)이란 명칭이 처음 보이고, 이후 각종 《읍지》에서도 배관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그보다 50여 년 후에 출간된 《임원경제지》(1827)에는 배관에서 배감(排甘)이라는 표기로 바뀌었고, 오늘날 쓰이는 백암(白岩)이라는 표기는 20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이런 사정은 배관이 연철되어 장소를 나타내는 이가 붙어서 배관에서 배감으로, 그것이 다시 배감이, 이후 배개미로 변화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의 백암은 배개미를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용인 지역 시장의 형성과 발달 과정
용인은 경기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부터 남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해방 이후 영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이런 교통의 편리함에 힘입어 용인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와 양지·죽산의 ‘읍지’를 보면 당시 용인 지역에는 용인현 소재지의 읍내장과 김량장, 남사 지역의 도촌장, 그리고 양지 방면의 개천장과 백암장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의 자료인 《동국문헌비고》(1770년)에서도 용인에 읍내장(2, 7일)과 김량장(5, 10일), 도촌장(1, 6일)과 죽산 읍내장(4, 9일), 배관장(3, 8일)이 개설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금의 용인 지역에 서로 장날이 다른 장들이 개설되어 하루씩 돌아가며 장이 섰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장의 이름도 장날에 따라 ‘열흘닷새장(5, 10일장)’, ‘엿새하루장(1, 6일장)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개천장이 일찍이 소멸되고 나머지가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도촌장이 사라졌고, 현대에 들어서 송전과 원삼, 모현 지역에 새로운 장이 개설되기도 했다.
1) 김량장의 발달과 쇠퇴
용인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정기시장은 용인장이었다. 용인장은 조선시대부터 개설되어 있던 김량장(金良場)의 다른 이름이었다. 김량장은 지금도 5, 10일 장날에 처인구 김량장동에 장이 선다.
김량장이 서는 곳은 김량천 인근인데 김량천은 과거에 용인과 양지의 경계를 이루던 하천이었다. 이곳에 장이 서게 되면서 두 도시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인구 또한 증가했다.
김량장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1년, 지금의 기흥구 마북동에 있던 용인군청이 이전한 뒤였다. 이에 힘입어 1923년 상인들이 시장 부지를 비싼 값에 매수해 점포를 개설하고 상품과 가축 거래를 하면서 크게 융성했다. 김량장의 위세는 하천인 김량천, 과거 김량장리에서 김량장동으로 바뀐 지명에서도 알 수 있다.
김량장의 이름에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고려시대에 살았던 김량이라는 사람이 장을 개설했기 때문에 김량장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김량은 장수였는데 그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김량장동이고 그 때문에 그곳에 개설된 시장 이름이 김량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말도 전한다. 한편 김량천에서 금이 많이 산출되었기 때문에 김량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김량장은 유서 깊은 시장인 탓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김량장에 사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푸줏간 주인이 있었다. 손님이 찾아와 “사길이 고기 한 근 썰어주게”라고 말하면 야박할 정도로 정확하게 저울에 재서 고기를 주었고, “김주사 고기 한 근 썰어주게”라고 말하면 두 근 정도 될 분량을 저울에 재지도 않고 주었다. 그래서 먼저 산 사람이 자기의 고기가 적다고 따지자 푸줏간 주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손님은 사길이에게 고기를 샀고, 이분은 김주사에게 고기를 사서 차이가 나는 거요.” 푸줏간 주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과거 신분제가 지닌 어두운 그늘과 한편으로 당시 번성했던 김량장 우시장의 풍경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김량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 성남에 있는 모란시장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큰 정기시장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던 시장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친 대형마트와 백화점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 구조와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에 변화가 생기면서 김량장도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3대가 간다는 말처럼 한때 구하지 못할 것이 없는 만물상이었던 김량장은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김량장에는 인근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많은 사람들이 시장의 흥취를 느끼기 위해 찾는다. 열흘닷새장인 김량장은 오늘날 용인 중앙시장 인근인 금학천변에서 장이 선다.
2) 백암장의 번영
용인의 처인구 백암면 백암리에 개설되는 백암장은 전통시장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김량장과 더불어 용인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정기시장이다.
18세기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1770)에 배관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암장의 역사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시장》(1924)에 보면 백암장이 수백 년 전에 현재의 백암리로 이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역시 백암장의 내력이 유구함을 알려준다.
그것은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했던 조선시대에 백암장이 위치한 지리적인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백암장은 경기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용인은 물론이고 인근에서 큰 장이 섰던 안성이나 이천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에 힘입어 19세기 초반에 3, 8일이었던 장날을 1, 6일로 바꾸고 당시 죽산에 개설되어 있던 이실장(3, 8일), 부내장(4, 9일)과 함께 시장의 상권을 형성했다.
조선시대에 백암장은 행정적으로 죽산에 속해 있었다. 백암장이 용인으로 편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무렵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백암장은 기존의 지리적인 이점에 더해서 경부선과 1925년에 개통된 천안과 안성을 잇는 안성선, 1931년 개통된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려선 등의 철도가 가까운 곳을 지나면서 교통의 편리성이 가미되어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크게 활성화되었다.
백암장의 거래 규모는 《조선의 시장》(1924)에 따르면 1913년에 매상고가 9만 원이었다. 그런데 1938년에는 물품 거래액이 30만 2,737원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100만 원이 넘는 인근의 안성장이나 수원장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용인 지역을 주도하는 상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암장은 보통 ‘쇠전’으로 불리는 우시장이 유명했다. 김량장도 큰 우시장을 갖고 있었지만 백암장을 따를 수가 없었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우시장이 모두 655개소였고, 경기도에 47개소가 있었다. 당시 전국의 우시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이 거래량이 2만 5,000두 이상이었던 함북 명천장과 길주장이었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정조가 정책적으로 시장을 키웠던 수원장과 용인 백암장으로 2만 두 이상 거래되었던 곳이다. 장날이면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든다는 수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으니, 그 규모는 짐작하고 남는다.
백암장에는 소를 사고팔기 위해 멀리 경북 영주나 상주에서 상인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우시장이 커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소를 거래하는 상인뿐만 아니라 의류나 생선, 술, 과일 등을 파는 상인들도 자연스럽게 백암장으로 모여들어 장날이 되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백암장에 정육점이 흥성했던 것도 우시장 때문이었다. 이는 훗날 ‘백암순대’라는 지역 이름을 딴 음식이 출현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과거 우시장에는 소를 전문적으로 흥정하는 거간들이 있었다. 이들은 소의 거래를 돕고 중간에서 수수료를 받았다. 그 중에는 장날 소를 여러 마리 사서 단기간에 사료를 먹여 살을 찌워서 다음 장날에 비싸게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서 점차 상인들의 소를 맡아서 체중을 늘려주는 일을 담당하는 마방이 발달하기도 했다.
백암장은 쇠전뿐만 아니라 쌀을 사고파는 싸전도 유명했는데,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인근의 이름난 시장인 수원장과 광혜원장에서도 백암장의 쌀을 사기 위해 상인들이 찾아왔다.
백암장은 소를 파는 쇠전과 쌀을 파는 싸전을 두 축으로 곡물과 생선, 채소, 유기, 소금, 생필품, 철물 등을 파는 점포 등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또한 거래 규모가 큰 쇠전이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 유곽과 도박장이 들어서 손님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최근까지 백암면에 다방이 많았던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백암장에 나온 강아지들
장터에는 닭이며 오리, 고양이 등의 가축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다.
소규모 노점상에서 파는 여러 가지 곡물들
* 백중놀이
백암장과 관련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은 백중놀이였다. 과거 축제나 놀이가 열리는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터였다. 특히 백중놀이는 단오나 백중날에 전국의 시장에서 열렸다. 백중날이 찾아오면 풍물패가 분위기를 띄웠고 씨름판이 벌여져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백중놀이가 벌어지면 볼거리와 먹을거리, 놀거리가 넘쳐났다. 백중날 가장 큰 관심이 쏠렸던 곳은 황소가 상금으로 걸려 있는 씨름판이었다.
씨름판은 이제 TV에서나 볼 수 있지만 백암장에서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씨름판이 벌여졌고, 멀리 충청도에서도 씨름판에 참가하거나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전한다. 씨름에서 우승한 장사는 오늘날의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원래 시장의 성격이 그렇지만 백암장 또한 인근 주민들이 주기적으로 만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간이었다. 백암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천의 모가, 설성, 호법, 안성의 일죽면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장터에서 혼인을 주선하거나 세상의 소식을 들었다.
3) 정기시장의 변화
해방 이후에도 용인 지역에는 행정과 경제의 중심에 위치한 김량장(용인장)을 비롯해 백암장, 원삼장, 송전장, 모현장 등 꾸준하게 장이 개설되었다.
백암장의 경우는 해방 이후에도 꾸준함을 보였는데 1970년대 중반에 하루 거래액이 1만 7,080원에 이르고,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고정 상인이 40여 명, 하루 이용객이 600명 정도였다. 백암장의 우시장은 여전히 건재했고, 여기에 돼지 판매가 더해져 장날의 분위기는 여전히 흥겨웠다.
그러나 용인의 전통시장은 통계에 따르면 1975년을 기점으로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국사회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국적으로 상가와 상설시장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 백암장의 경우에는 시장을 좌지우지하던 우시장의 철시가 결정적이었다. 1963년 6월 축협의 가축 직거래가 이루어져 소의 유통망에 변화가 생기면서 우시장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백암장에서 쇠퇴일로를 걷던 우시장이 사라진 것은 1980년대였다.
우시장과 함께 두 축을 이루던 싸전 역시 농협 유통망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기 시작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지만, 최근에는 과거 뛰어난 품질을 가진 용인 쌀을 브랜드로 만든 백옥쌀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편 1990년대 유통 구조의 변화에 따라 크게 약화되었던 전통시장들이 2000년대에 들어서 시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한껏 움츠렸던 용인의 전통시장들도 조금씩 기지개를 펴고 있다.
용인장의 경우 상인들이 계속 증가해서 금학천변뿐만 아니라 역북동 초입까지 점포를 열고 있고, 한때 소멸되었던 모현장과 송전장, 원삼장 등이 다시 살아났다.
백암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백암순대를 앞세워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고 4~5월에는 한 달 동안 모종을 파는 시장이 성시를 이룬다.
골목마다 빼곡히 늘어선 노점상들
신발을 사려는 손님에게 어울리는 신발을 골라주는 상인
의류를 파는 노점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들
과일과 채소를 파는 노점들
4. 용인의 지리·지역적 특색과 생산 품목
용인은 동쪽은 광주, 이천시, 서쪽에는 의왕, 수원, 화성, 평택시, 남쪽은 안성시, 북쪽은 성남,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수도권의 외곽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2015년 기준 용인시의 인구는 98만 6,298명이다. 용인시의 59%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경지면적이 상대적으로 적고 농업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농업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역시 백암면이다.
지런히 진열돼 있는 가방들
주로 산출되는 곡물은 쌀과 보리, 콩 등이고 이들 가운데 보리의 생산량은 감소하는 추세이다. 또한 이동면과 원삼면, 양지면 등에서는 인삼을 재배하고, 특용작물과 참깨와 들깨, 땅콩 등을 재배한다. 용인의 특산물은 4대째 전수되고 있는 밥상인 이수자반상, 옥로주, 백옥쌀, 순지오이, 포곡상추, 백암순대 등이 유명하다.
꼬막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바구니에 담아놓은 꼬막들
백암장이 서는 백암리는 조선시대에는 죽산군 근삼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시장이 서면서 발전한 곳이다. 서쪽으로 원삼면 지역을 지나온 청미천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은 비교적 저지대를 이루는 청미천 가의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교류가 용이하다.
현재 용인에 남아있는 5일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백암장은 동쪽으로 박곡리, 서쪽으로 근창리, 남쪽으로 백봉리, 북쪽으로 근곡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주요 도로로는 중앙에 국도 17호선이 관통하고 있다.
말린 여주
건강에 좋은 여주를 차로 즐길 수 있다.
* 인근 볼거리
용인에는 1974년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만든 한국민속촌이 있다. 이곳은 TV의 세트장으로 많이 활용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장소가 되었다. 또한 가까운 곳에 놀이동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에버랜드가 있어서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즐겨 찾는다.
한국민속촌 내에서 열리는 시장은 지역의 큰 명물로 통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 장터에서는 인절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떡과 파전, 도토리묵, 식혜, 빈대떡 등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