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양산 남부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7.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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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 양산 남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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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양산 남부시장
요약 양산 남부시장은 통도사로 잘 알려진 양산에 있는 전통시장이다. 오랜 전통을 지닌 정기시장과 함께 개설되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특산물, 인근의 동해에서 운송된 수산물, 잡화, 공산품 등이 판매되고 있다.
1. 양산 남부시장 개요
양산 지역은 산지와 구릉지가 많은 한편 낙동강이 흘러가며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수로 교통이 발달했던 조선시대에는 낙동강으로 인해 교통의 요충지였다. 게다가 동래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도로 교통 또한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양산 지역 4곳에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6개로 증가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에도 인구가 꾸준하게 증가하면서 시장을 통한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양산 남부시장은 오랫동안 지역의 상권을 이끌던 정기시장, 즉 양산시장이 폐시된 이후 양산의 중심 시장이 되었다. 정기시장은 그대로 남아 여전히 장날이면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시장이 선다. 매실과 딸기 등 지역의 특산물을 비롯해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양산 남부시장은 2016년에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다.
양산남부시장 입구
아케이드가 설치된 시장 내부 모습
2. 양산 남부시장의 어원
양산 지역의 옛 이름은 삽량주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양주(良州)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는 양주(梁州)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양산(梁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옛 이름인 삽량주의 삽은 맹세를 다짐하며 희생의 ‘피를 마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신라와 가야 사이의 맹세를 다짐하는 삽혈(歃血)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양산 남부시장은 지역의 이름과 방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 양산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양산 지역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는 곳이다. 그것은 <고향의 봄> 시를 쓴 이원수의 고향이 양산이기 때문이다. 노래에 따르면 양산은 산지가 많은 곳이다. 산에는 복숭아꽃과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어났다.
또한 그 산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보사찰로 불리는 통도사가 위치해 있다. 통도사는 영축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름난 승려가 많던 승보사찰 송광사와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사찰로 불리는 해인사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사찰로 꼽힌다.
또한 양산 지역은 낙동강이 지나는 곳이기에, 수로 교통이 핵심이던 조선시대에 강을 통해 부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근래에 부산과 이어진 신도시가 건설되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물금 지역은 원래 낙동강 주변에 위치한 넓은 평야 지대였다. 물금 지역은 1905년에 완공된 경부선이 지나며 양산의 입구 역할을 맡았던 곳이다.
이렇게 양산 지역은 예부터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과 낙동강이 일구어놓은 평야를 통해 농업과 상업이 활발하게 발달했다. 또한 인접해 있는 부산과 수로와 육로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근대에 들어서도 철도와 고속도로, 공항 등으로 인해 시대에 따른 교통의 변화를 경험하며 상업이 꾸준하게 발달해 온 지역이었다.
따라서 시장 또한 일찍부터 활발하게 개설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 따르면 당시 양산 지역에는 4곳에서 시장이 서고 있었다. 양산 읍내장(1, 6일), 감동장(3, 8일), 황산장(5, 10일), 용당장(3, 8일)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양산 지역은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에 위치해 역과 원, 나루가 발달해 있었다. 북쪽에 있는 밀양의 삼량진과 남쪽의 김해 칠성포와 부산포를 연결하는 물류 유통의 거점으로, 보부상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양산 지역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꼽히는 가야진은 낙동강 수로의 중심지였던 밀양의 삼량진과 김해의 칠성포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라시대 눌지 마립간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였기에 가야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에 낙동강은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며 오늘날의 고속도로 같은 역할을 했다. 가야진은 낙동강 하류 거의 끝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인근에 세곡을 보관하는 조창인 김해 불암창이 있었다. 가야진은 중요한 상업의 거점이었다.
이 가야진을 기반으로 형성된 시장이 용당장이었다. 용당장은 원동면 용당리에 개설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낙동강 유역에 있어 땅이 비옥해 논농사가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용당장이 개설된 것도 낙동강의 수운과 풍부한 물산 때문이었다.
용당장이 쇠퇴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경부선 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철도가 부설되면 물류가 발달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었는데, 용당장의 경우는 반대였다.
그 까닭은 먼저 경부선이 마을의 용당 벌판 사이로 지나가면서 용당리를 낙동강과 철도 사이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마을 외부로 나가는 길은 철도 건널목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철도가 부설되면서 강폭이 줄어들어 조금만 비가 내려도 마을을 비롯해 논과 밭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용당리 사람들의 삶은 곤궁해졌고,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 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쌀을 구경하기 힘든 가난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용당장 또한 경부선이 개통된 이후에 곧 사라지고 말았다.
《동국문헌비고》에 나오는 감동장 또한 낙동강 수운과 관련이 깊은 시장이었다. 감동장은 양산에 있던 조창인 감동창이 있던 곳에 개설되던 시장이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감동창 주변에 300여 호에 달하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감동장 또한 경부선 부설 이후 수로 교통을 통한 수운이 쇠퇴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들과 달리 육로 교통의 이점을 활용해 개설되던 시장이 황산장이었다. 황산장은 육로 교통의 중심인 황산역이 있던 곳에 개설되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세조 연간에 만든 40개 찰방역 중 하나로 11개의 속역을 둔 중심 역이었다.
황산역에는 역리 7,638명과 남녀 노비 1,176명이 소속되어 있었고, 말이 46마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황산역이 종6품에 속한 찰방이 주재하던 찰방역이 된 것은 부산 동래와 밀양, 김해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산역은 1857년 낙동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기는 바람에 물금읍 물금리에서 상북면 상삼리로 이전했고, 1895년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다. 황산장은 황산역의 이전과 폐지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원래 황산장이 섰던 물금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화산장이 개설되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후기에 양산 지역에 개설되어 있던 시장들은 양산 읍내장을 제외한 황산장, 감동장, 용당장은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전후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는 한반도의 물류를 장악해 수탈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철도와 이른바 신작로라고 부르는 도로를 개설했다.
또 하나 수탈의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산업조합이 있었다. 산업조합은 주요 시장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1932년에 전국 31곳에 만들어졌는데, 양산에도 설치되었다.
양산의 산업조합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양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직물이나 한지 같은 특산물의 생산을 장려하고 집산해 판매했다. 그러나 물량이 부족해 흑자를 내지 못하자 산업조합에서 특산물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팔리는 농산물도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