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파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사고하였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은 자율적으로 조정이 된다고 생각했다.
맑스는 그러한 시장을 민주주적 체계 속으로 가두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맑스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사회와 분리된 시장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같았다.
19 세기 세계무역을 지탱해 준 것은, 금본위제도였다. 그러나, 좌파나 우파나 신앙처럼 생각했던 금본위제도는 각국의 화폐가치를 자동적으로 조정을 해주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배경에는 금본위제도의 모순이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환원시키면서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면서 촉발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유럽 각국은 금 본위제도를 지키기 위해 각국의 화폐 가치를 안정 시켰으나 패전국을 시작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기 시작했다.
각국은 금본위제도를 포기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세계 경제는 마비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금본위제도로 환원하려는 각국의 실패가 그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자유시장(자유무역)의 근본을 이룬 화폐제도는 인류의 문명을 거대한 파국으로 몰아 넣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를 지키지 못한 때문이다. 시장은 사회의 가치와는 별개의 원리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자유시장은 스스로 움직이는 시장이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으로 강제를 해야 가능한 유토피아 였던 것이다. 자유시장은 1 세기가 지나지 않아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에 저지를 당했고 그것이 세계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자유시장을 바탕으로 한 근대 국가의 출현은 시장의 불평등을 법과 제도를 통한 복지 정책으로 해결하였다.
법과 제도(권력과 행정)을 통한 복지 제도는 돈이 근본이 되고, 따라서 복지가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가치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몇년전부터 저소득 노인들을 위한 요양사들을 교육시키고 지금은 요양사들이 직접 현장에 파견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복지와 여성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절묘한 정책이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런데, 여성 요양사들의 애로사항 중에 기가 막힌 일들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들은 주로 노인네들의 섹스 부분이다. 포르노 비디오를 같이 보자는 둥, 모텔에 같이 가자는 둥, 거부하면 욕도 하고.....
이제, 급기야는 복지라는 아름다운 포장지가 벗겨지는 순간이다.
일자리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찾겠다는 여성들의 자부심도 점점 사라지고....
사실은, 그 부분이 법과 제도로 이루어지는 복지 정책의 가면이 벗겨지는 단서를 제공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이라는 것이 전부 돈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돈이 미친 인간들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될 줄 안다. 그러나, 돈으로는 절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사회(공동체)다. 지금의 사회는 겉으로는 사회인척 착각하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마치 돈 없고 정신 나간 노인네가 요양사 아주머니에게 모텔 가자고 하는 순간 처럼.....
그 노인네는 요양사 여자가 나라에서 돈 받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왕 나를 돌 볼 거면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섹스나 하자고 했던 거다. 정신 나간 노인데로서는 별로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요양사 여자가 돈 받도 온 여자가 아니라면, 그 정신 나간 노인네가 그런 말을 했을까?
아마, 자신을 돌보는 것이 미안해서 무척 감사해하고 몸 둘 바를 몰라했을 것이다.
과거, 농촌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는 동네 외로운 노인네들을 마을 아줌마들이 돌보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이를테면 사회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때 혹시 정신 나간 노인네들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런 훼괘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일에 돈이 끼여들고 그것이 법으로 제도화 되는 순간, 가치는 사라진다.
이것의 실체가 소위 일부 좌파들이 주장하는 사민주의 사회복지라는 거다.
요즘, 공공장소에서 젊은 사람들이 잘못을 해도 함부로 꾸짖지 못한다.
얼마 전에도 심심치 않게 청년들의 잘못을 지적한 노인네들이 맞아 죽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과거 공동체(사회)가 살아 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동네에서 감히 담배를 피고 다닐 수가 없었다. 동네 어른들이 무서워서였다.
교육 역시 사회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아이들은 학교와 함께 사회가 같이 키워야 한다.
사회와 학교가 분리되는 순간 교육은 엉망이 된다.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도 쓸모가 없다.
복지와 교육 그리고 그 어떤 가치도 사회와 분리시켜 법과 제도만으로 다루려는 순간 그 가치는 사라진다.
시장이 이토록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 역시 시장이 사회와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좌파나 우파들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장을 자유롭게 풀어 놓거나 아니면 민주적 틀 속에 가두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는 법과 제도의 가치와 근본적인 생각이 다르다.
인간의 자율적인 행동과 사고가 바탕이 된 자율적인 사회관이다.
유럽의 근대 국가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그들의 플랜테이션 농업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 임금을 아무리 줘도 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그들의 공동체적 생활 관습과 제도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공동체의 파괴이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는 근대 유럽 자유국가들이 만들어 오고 지금도 존재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