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63 - 북서쪽 3피트 아래에 묻다 호주를 세로지른 로버트 O.버크(18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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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4.26. 19:48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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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북서쪽 3피트 아래에 묻다
호주를 세로지른 로버트 O.버크(1861년)
요약 1851년, 호주에서 금 노다지가 발견돼 로버트 O. 버크가 호주를 남북으로 지르기 위해 나섰다. 그는 지독한 모래바람에 탐험대를 나눴다. 캠프 65에서 기다리던 윌리엄 브라에가 말린 고기와 밀가루 등을 묻고 나무에다 유명한 말인 ‘북서쪽 3피트 아래를 파라’고 글을 남겼고, 버크는 돌아오는 길에 지쳐 쓰러졌다.
쉬고 싶다
탐험의 역사에는, 목적지에 도달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숨을 잃은 사례가 많다. 버크 · 윌스 · 킹도 돌아오다가 지쳐서 죽었다.
1606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던 네덜란드 배가 풍랑에 떼밀리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다. 1644년 이 대륙 북쪽을 탐험한 네덜란드인 타스만은 '야만인들만 사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보고했다. 그뒤로 네덜란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손을 뗐다. 1770년 쿡 선장이 동해안을 탐험하자, 영국은 1788년 1월 1,003명(그 중 죄수가 726명)을 보내 남동해안에 시드니 시를 세웠다.
이 땅이 큰 섬이자 대륙임을 밝힌 사람은 영국 해군 매슈 플린더스다. 그는 1801년부터 3년간 이 대륙을 배로 한 바퀴 돌았다. 그뒤 영국은 대륙 안쪽을 탐험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사막과 물 없는 들판뿐인데다 열매를 따먹을 나무나 사냥할 짐승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1851년 이 '버림받은 땅'에서 금노다지가 발견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늘에서 오리온과 페가수스 별빛이 쏟아지는 것말고는 바랄 것이 없던 이 대륙을 밝히고자 멜버른에 탐험위원회가 생겼다. 그들은 먼저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기도 하고, 경찰관인 로버트 O. 버크를 대장으로 뽑았다.
1860년 8월 20일 멜버른 시가지는 시민들의 환호로 가득했다. 버크는 말 23마리, 낙타 25마리와 짐마차 3대에 소총 37자루를 갖추고 북쪽으로 곧장 나아갔다.
9월에 접어들어 머레이 강을 건너자 날씨는 갈수록 거칠어졌고, 비바람과 서리도 한층 심해졌다. 그들은 문명인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땅으로 들어서 사나운 원주민 바르킨지족과 싸우며, 지독한 모래 바람과 진 흙수렁을 뚫고 수백 km를 행군한 끝에메닌디에 닿았다.
버크는 탐험대를 둘로 나누어, 자기가 8명을 이끌고 나머지는 메닌디에 남아 있다가 멜버른에 연락하여 지원대를 얻어 뒤따라 오게 했다.
늪지대와 사막을 지나서 버크 일행은 11월 11일에 쿠퍼 강의 갈래인 윌슨 강을 건넜다. 그들은 큰 물웅덩이 옆 언덕 위에 '캠프 65'를 세웠다. 물이 꽤 있었고, 경치도 썩 아름다운 곳이었다.
버크는 캠프 65에도 윌리엄 브라에를 비롯한 다섯 사람을 남겼다. 그는 브라에에게 지원대가 메닌디를 거쳐 캠프 65에 도착하면 잠깐 쉬었다가 자기 뒤를 따라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석 달이 지나도 자기가 돌아오지 않으면 브라에와 다섯 사람은 모두 멜버른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했다.
12월 16일 아침, 버크는 세 사람(윌리엄 윌스 · 로버트 그레이 · 존 킹)을 데리고 캠프 65를 나섰다. 그들은 1861년 새해 첫날을 남위 25도에 있는 매카티 호숫가의 '캠프 80'에서 맞았다. 1월 7일에는 해밀턴 강을 가로지르는 남회귀선을 지났다. 네 사람은 동경 140도를 따라 북으로 북으로 나아갔다.
탐험대는 하루에 12시간씩 걸었다. 남위 22도쯤에 이르자 그들은 몹시 지쳤다. 흐릿한 정신으로 겨우겨우 발을 옮겨 놓는 더딘 행군이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버크 일행이 가는 길에는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지평선,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시간이 있을 뿐이었다. 밤에는 커다란 캥거루가 어둠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클롱커리를 지나자 옆대의 찌는 듯한 더위와 장대 같은 폭우가 그들을 괴롭혔다. 메뚜기와 흰개미들은 지겹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망에 빠져 미쳐 버렸을 것이다. 사건이란, '캠프 119' 근처 강물이 짭짤한 데다 때맞추어 밀물과 썰물이 일어남을 발견한 것이다. 가까이에 바다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네 사람은 남은 힘을 다 쥐어짜 앞으로 나아갔다.
1861년 2월 11일. 버크 일행은 마침내 카펀테리아 만에 닿았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가슴 벅찬 장면 –바닷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아름다움-은 보지 못했다. 버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바다를 보려고 무척 애썼지만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더운 지방의 바닷물이 밀려드는 진흙땅에 자라는 키 작은 나무들. 이름하여 홍수림(紅樹林). 버크 일행은 마지막 순간에 홍수림에 가로막혀 돌아섰을 것이다. 비록 바닷물에 발을 담그지는 못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처음 종주한 영광은 이 네 사람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여섯달 동안이나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2,640km를 걸은 사람들이 아닌가.
버크 일행에게는 넉 주일치 식량밖에 남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낙타 4마리 가운데 2마리를 잡아먹었다. 2월과 3월 그들은 지칠 대로 지친 끝에 얼이 빠져 버렸다.
1861년 4월 17일. 세 사람이 쿤지 호숫가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레이의 무덤이었다. 한 주일 전에 그들은 말까지 잡아먹었지만, 너무나 허기져서 구덩이 하나 파는 데 하루가 걸렸다. 캠프 65까지 남은 거리는 아직도 112km나 되었다.
캠프 65에서는 브라에가 하루에 빠짐없이 지평선을 살피고 있었다. 북쪽의 버크나 남쪽의 지원대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세상은 온통 뜨거운 곳에서 지원대가 원주민에게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브라에가 알 리 없었다.
1861년 4월 17일 아침 캠프 65. 기다리다 못한 브라에는 말린 고기와 밀가루 · 설탕 따위를 땅에 묻고, 옆에 있는 나무에다 버크에게 전하는 글을 새겨 놓았다.
'DIG 3FT NW'(북서쪽 3피트 아래를 파라)
이 글은 뒷날 오스트레일리아 탐험 사상 가장 유명한 기록이 되었다.
브라에가 캠프 65를 떠난 지 9시간 반 만에 버크 · 윌스 · 킹이 그곳에 도착했다. 캠프 65를 떠난 지 127일, 카펀테리아 만에서 돌아선 지 69일 만에 돌아온 것이다. 멜버른에서 떠나온 지 여덟 달에 그들이 지나온 거리는 3,840km나 되었다.
9시간 반, 14km 차이가 버크 일행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들은 식량을 파내자 곧 브라에를 뒤쫓았으나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말았다. 낙타 2마리마저 쿠퍼 강의 진흙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벌판을 헤매던 세 사람 가운데 윌스가 먼저 주저앉았다. 그는 구덩이 파는 힘을 아끼게 하려고 자기를 그냥 두고 가라고 했다. 7월 1일 버크도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탐험을 끝냈다. 그렇지만 더 헤쳐나갈 힘이 없다.'
캠프 65를 떠난 브라에는 도중에 지원대를 만나 함께 캠프로 되돌아갔지만, 버크 일행이 다녀간 뒤였다. 10월 15일, 구조대가 한 토박이 마을에서 뼈만 남아 죽어가고 있는 백인을 발견했다. 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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