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득남 장군 충신정려 [이희용 칼럼]
이희용 칼럼니스트,
포천신문 자문위원 (주)포천신문사
조선시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시대에 우리 포천출신으로 충과 의를 지켜 나라로부터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은 세분을 3충신이라 일컫고 있다.
3충신이 어떤 분인가 하면,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처참하게 처형당한 사육신 유응부 선생이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군수로 의병을 일으켜 결사항전하다 순절한 권종 선생,
인조 병자년에 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하다 순국하신 조득남 장군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전쟁의 기세가 불리해지자 대부분의 아군은 적군에 투항하며 자신의 목숨만을 구걸했던 상황에서도, 불타는 애국심으로 끝까지 항전하다 목숨을 다하신 조득남 장군은, 포천 화현면에서 출생하여 1621년(광해군13) 무과에 급제 출사하여 종4품인 병마만호(兵馬萬戶)에 이르렀던 분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장군은 유흥치(劉興治)가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평정하였으며,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했을 때도 최선을 다해 진압했었다.
특히 인조14년에 청태종이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입하여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을 때,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이 자신의 안위만을 찾아 조정의 명을 거역했을 때도, 장군은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왕을 호위하며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또한 청나라가 10만 대군의 침략에 손쓸 겨를도 없이 피해야만 했던 산성에서는 북문을 지키며 결사항쟁 했으며, 요즘으로 말하면 게릴라전술인 유군을 이끌고 청군을 무찔렀을 때는 임금이 술을 하사하고 공조정랑을 제수하기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무수한 화살이 떨어지는 성문 밖 전투에서 장검을 빼어 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 수많은 적군을 죽이며 용감하게 싸우다가 애석하게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때 장군의 전사소식을 들은 인조는 슬피 애도하며 수포를 내려 수의를 짓게 하고, 북문아래 매장하였다가 전란이 끝난 후에 포천 운악산 아래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그 후 영조 무렵에는 경연(經筵)에서 신하들의 건백(建白)으로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내렸고, 격동의 세월 속에 무심하게도 장군의 귀한 정려(旌閭)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포천의 유림과 후손이 모은 성의와 자치단체의 노력으로 2001년 5월에 가산면 마산리 둔지고개 마루에 소실된 정려를 복원건립하게 되었다.
충신정려와 관련한 기록을 인조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왕명출납을 담당한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업무를 매일 기록했던 『승정원일기』 고종4년 정묘(1867) 9월 15일 원본2718책, 탈 초본128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에게 홍문관이 아뢰기를 “병자년ㆍ정묘년에 전사한 사람들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들이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병자록(丙子錄)》 및 《존주휘편(尊周彙編)》의 배신전(陪臣傳) 등 책을 조사하였습니다. … ” 하여 양대 호란 때에 전사자를 조사하였다.
그 내용 중에 “…宣傳官李柟, 萬戶趙得男, 義兵將朴東榮, 出身李元吉, 吳東亮, 皆戰死, 得男·元吉, 贈官, 旌閭。… 선전관 이남(李枏), 만호 조득남(趙得男), 의병장 출신 박동영(朴東榮), 이원길(李元吉)ㆍ오동량(吳東亮)도 모두 전사하였는데, 조득남과 이원길은 추증하고 정려하였으며, 오동량은 복호하였습니다.…” 라는 기록이다.
우리는 조득남 장군의 충신정려 복원을 보면서 흔히 조상의 공덕은 후손이 똑똑해야 제대로 모실 수 있다는 말을 회고하여, 스스로 직계조상도 예를 갖추지 않는 요즘세태에서 자칫 잃을 뻔했던 문화재를 기록 확인을 통해서 치유 복원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 올바른 책임감으로 정체성을 확립하여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줘야 할 것이다.
이 희 용
대진대학교 박사과정원우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