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깊은 사찰과 고려의 왕릉
문화|역사|지리
체험코스
① 전등사 → ② 정수사 → ③ 강화 가릉 → ④ 강화 석릉
⑤ 강화 곤릉
총거리 : 28.1km
소요시간 : 1시간(차량이동 및 해설, 휴식 시간 제외)
교육과정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사회 2. 우리가 알아보는 지역의 역사
5학년 2학기 사회 1.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
[중학교]
사회 1 문화의 이해
사회 1 다양한 세계, 다양한 문화
역사 2 고려의 성립과 변천
역사 2 Ⅰ. 선사 문화와 고대 국가의 형성
역사 2 Ⅲ. 고려의 성립과 변천
[고등학교]
한국사 Ⅰ. 전근대 한국사의 이해
키워드
#강화 #전등사 #정수사 #고려의 능 #가릉 #석릉 #곤릉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과 남쪽에 남아있는 고려의 능
국내에서 4번째로 큰 섬인 인천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사에 이르는 다채로운 역사·문화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인 셈이다.
강화에는 단군의 세 아들과 관련된 설화가 남아 있는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삼랑성)이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와 아름다운 전각이 있고 물이 맑은 절인 정수사가 있다. 이곳들은 한반도의 역사적 장면을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서 보존해야 할 공간이다. 수도권에 널리 분포된 조선 왕릉은 익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강화에 있는 고려 왕릉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고려 왕릉은 대다수가 당시 수도였던 개경 근처 오늘날 북한의 개성에 분포하고 있다. 남쪽의 고려 왕릉은 강화에 있는데 강화석릉, 강화곤릉, 강화홍릉, 강화가릉으로 4기의 왕과 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비록 능호가 밝혀지지 않아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규모나 형식 면에서 왕릉급으로 추정되고 있는 능내리 석실분도 있다. 남쪽에서 볼 수 있는 고려의 왕릉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전등사 -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사찰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에 위치한 전등사는 삼국시대인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 381년)때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진종사(眞宗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전등사는 지금까지 1600여 년간 터와 사찰이 모두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사찰로 남아있다. 전등사는 고려시대부터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
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전등사로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정족산성의 일부인 동문이 있고 종해루라는 남문이 있다. 정족산성은 병인양요 당시 승려, 의병, 관군이 힘을 합해 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전등사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대웅전(보물 제178호)을 비롯해 약사전(보물 제179호), 철종(보물 제393호) 등 보물 6점과 여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대웅전과 약사전에 무수한 병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동문 앞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대웅전은 1605년 절반이 불에 탔던 것을 1614년~1621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678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방화로 정족산성 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이 방화되어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지만 당시 전등사 스님들이 정족산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문서를 토굴로 옮겨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전등사에는 철종도 있는데 중국 송나라 때 만든 무쇠로 만든 중국 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지금의 인천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옮겨놓은 것이다.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네 곳의 외사고(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중 한 곳이다.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가 실화사건으로 많은 사적이 불
타버리자 새로이 정족산성에 사고 건물을 짓고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옮겨졌다가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선원보각이 함께 지어졌다. 실록은 1910년 이후 서울로 옮겨졌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2. 정수사 -- 맑은 물이 솟아나는 곳의 사찰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사기리 산123-1)에 있는 정수사(精修寺)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 회정대사가 강화 마니산 참성단에 왔다가 그 동쪽에 좋은 기운이 넘치는 땅을 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활동하던 함허대사가 조선 세종 5년 (1423년)에 다시 지었는데,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고 한다. 정수사 대웅보전은 몸체와 툇간 부분의 공포가 눈에 띄게 달라 시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몸체는 조선 초기 주심포계의 전형으로 간결한 모습이지만, 툇간의 공포는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뚜렷하다. 대웅보전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화려한 연꽃이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이다. 또한 연꽃무늬가 조각된 문창살이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정수사 법당 뒤 오른쪽 언덕 위 약 100m 되는 지점에는 함허대사의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이 돌아가신 후 화장하고 남은 다비 등의 유해를 모신 묘를 말한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함허대사가 정수사에 입적하자 그의 수도처였던 뒷산 중턱에 현 부
도를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기단 위에 둥근 모양의 탑신을 놓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정상의 상륜(相輪)을 장식했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다. 조형수법이 세련미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주위에 장대석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3. 강화 가릉 -- 고려 원종 비의 능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2에 있는 강화 가릉은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김씨(順敬太后 金氏)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최씨 무인 집권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년)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였다. 원종 3년(1262년)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1274년)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4. 능내리 석실분
강화 가릉 뒤에 왕릉급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을 강화 능내리 석실분(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이라고 한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되었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5. 강화 석릉(사적 제369호) -- 고려 희종의 능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82번지에 있는 강화 석릉은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24년(1237년) 8월에 희종이 57세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자 낙진궁(樂眞宮)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덕정산(德政山) 남쪽 석릉에 장례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희종은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자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이어 용유도로,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1219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졌고, 법천정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묘역의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 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2단에 1기의 석인상, 봉분 옆에 1기의 석인상이 남아 있다. 특히 석릉은 강화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뒤편에 곡장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강화의 고려 왕릉을 확인하고 보수하였
으며, 매년 능참봉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일제 강점기 때에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2002년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최초로 발굴하여 유구를 확인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청자편을 비롯하여 관장식용 금속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6. 강화 곤릉(사적 제371호) -- 강화 강종 비의 능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75번지에 있는 강화 곤릉은 고려 제22대 강종(재위 1211-1213)의 비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종실 신안후(信安候) 성(珹)의 딸로 왕실 동성을 피하기 위하여 유씨라 하였으나 누구의 성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씨는 강종1년(1212년)에 왕비로 봉해졌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으며, 고려 23대 고종의 어머니이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었고, 1253년 정강(靖康)의 시호가 더해졌다. 곤릉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과 석축, 곡장(曲墻)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가 된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본래 묘역은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문·무인석의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묘표만 남아 있다. 상단에는 곡장이 파괴되어 없어졌고 그를 대신해서 봉분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담을 둘러쌓아 놓았고 그 안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하단 전면에는 둘레돌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2단 중앙에는 작은 묘표가 있는데, 묘표에는 ‘고려원덕태후곤릉(高麗元德太后坤陵)’이라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2단에는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곤릉에는 석물이 모두 유실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가 정비되어 있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