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김정태’라는 이름은 일부에서 이미 브랜드로 취급되고 있다. 재미없는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금융업에서 그만큼 많이 뉴스에 등장한 사람도 없다. 그가 한해 동안 받은 CEO상만도 수십개에 달할 정도다. 금융계·재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김정태 행장을 ‘최고의 CEO’로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지난 한해 동안 한국 금융계 사상 최대 은행 합병인 통합국민은행장으로 은행 합병 업무를 순조롭게 진행했다는 것은 CEO로서 그의 능력을 검증해 보인셈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산규모 2백조원의 국내 최대은행으로 리딩뱅크의 역할도 해내야 했다. 개인적으론 주택은행장 시절 받은 40만주의 스톡옵션 이익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 기업인 기부문화에 촛불을 밝혔다.
김은행장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논리에 밀려 소외된 이웃에게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약속대로 67억원을 장애인·무의탁노인·수재민 등에게 전달했다. 거침없는 추진력은 합병 작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3월 첫 인사에서 부행장들을 대거 퇴진시키고 외부 영입파로 교체하면서 일사불란한 체제를 굳혔다. 인사기록을 없애는 등의 충격 요법을 통해 내부 반발을 잠재웠다. 11월 전산망 통합과 기업이미지(CI) 통합을 완료하면서 통합은행은 시너지 효과를 준비해 왔다.
정부의 관치에 대해서도 뚜렷한 자기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8월에는 “정부가 국민은행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조기 매각을 요구,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새 정부 출범후 은행장들이 교체될 가능성에 대해 “은행장이 (정권에 따라 바뀌는) 장관들이냐”고 반문했을 정도다.
김정태 은행장은 “올해는 합병 시너지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므로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 말 합병은행 출범 이후 전산통합 인적화합 등에 주력하느라 영업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통합이 마무리된 올해부터는 영업력이 눈에 띄게 증가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국 1천2백34개 점포와 1만8천3백47명의 정규직 인원은 영업에 있어서 엄청난 무기”라며 “국민은행의 판매망이면 충분히 최고 은행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최종 목표가 국내 1위 은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 그의 눈에는 아시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뇌명(61) 기아자동차 사장은 자동차 업계에서 보기 드문 해외 영업통이다. 1969년 입사해 2001년 8월 CEO에 오르기까지 국내영업지원본부와 기획실에 5년여 ‘외도’한 것을 빼고는 줄곧 해외영업본부에서 근무했다.
그래서인지 김사장의 가장 큰 강점은 글로벌 경영 감각이다. 스스로 “포니부터 시작해 엑셀, 테라칸까지 해외영업에 관해서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말한다. 기아차 사령탑에 올라 풍부한 해외영업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기아차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지난 2년새 기아차의 ‘글로벌 드라이빙 솜씨’는 쾌속항진 그 자체다. 소렌토와 카니발이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고, 중국 자동차 업계 3위인 ‘둥펑(東風)사’와 손잡고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데도 성공했다. 지난해 말 선보인 중국형 모델 ‘천리마’는 1월 판매 대수가 3천4백대를 넘어 연간 4만대 판매를 내다본다. 중국 소형차 시장에서 폴크스바겐의 야심작 ‘폴로’를 제치고 있는 것이다.
김사장은 승진이 더뎠다. 40대 초반에 임원으로 발탁되고, 50대 초반이면 사장으로 승진하는 것이 ‘대세’인 시대, 김사장의 프로필은 오히려 ‘만만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빨리 달린 것이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속도로 계단을 밟은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10년은 젊게 봐줄 만큼 젊어 보인다. 툭 터놓고 말하는 대화 스타일, 센스 있는 패션 감각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일요일 아침이면 무조건 교회로 향하는 독실한 크리스천. 술은 말술을 가리지 않지만 담배는 입에 대지 않는다.
30년 가까이 해외영업을 이끌다보니 ‘당연히’ 영어도 능통하다. 사내 영어경시대회에서 도맡아서 1등을 차지했다. 가운데 뇌(賴) 자가 발음하기 힘들어 영문 이름은 ‘로이(Roy)’ 또는 ‘노이(Noi)’로 통한다.
올해 담철곤(48) 동양제과 회장의 제일 목표는 중국에서 ‘오리온 초코파이’를 코카콜라 수준의 브랜드로 키운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시장을 노크했던 동양제과는 지난해부터 서서히 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올해는 해외시장에서 1천억원대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지난해보다 30% 이상 늘어난 수치.
대표 상품이 바로 오리온 초코파이다. 초코파이는 내년이면 출생 30년을 맞는 장수 브랜드. 지난 84년 “이제 소비자가 질릴 때도 됐다”고 해서 생산 중단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글로벌파이’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 내 파이 시장에서만 점유율이 63%에 이른다. 브랜드 구매율·충성도·인지도 등에서 4년 연속 톱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코파이 사례는 담회장의 경영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초코파이 생산 중단론’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말로 오히려 해외시장을 노크했던 것.
담회장은 동양그룹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의 둘째 사위. 지난 2001년 9월1일부로 오리온그룹이 동양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독자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IMF 위기 때 외식·케이블 TV·영화관 사업 등으로 손을 뻗치면서 그룹을 제과 중심에서 ‘먹고 즐기는 데 일가견이 있는 회사’로 키웠다는 평이다. 대신 생산라인에서는 구조조정을 단행해 1백80여종이던 상품을 70여개로 줄였다.
배종렬 삼성물산 총괄 사장은 삼성그룹의 ‘간판 CEO’ 중 하나다. 그래선가? 이력부터 남다르다. 한국은행 조사부를 시작으로 시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청와대 비서실을 거쳐 지난 1976년 삼성물산에 들어왔다.
93년 삼성그룹 비서실 차장(부사장)·중앙일보 부사장·제일기획 대표이사 부사장·제일기획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00년부터 친정격인 삼성물산의 조타수 소임을 맡고 있다.
그의 회사 운영방침은 ‘자율과 협력’. 임직원들에게 최대한의 자율을 부여하는 한편 그 자신은 뉴비지니스·프로세스·현 사업구조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면서 회사의 갈 길을 제시하고 누가 얼마나 더 열심히 하는가를 지켜본다. 또한 협력과 조정을 통해 임직원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하면 신나게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대한 연구에도 치중한다. 이것도 CEO 임무라는 생각에서다.
그의 경영철학은 한마디로 ‘사람’이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자본·노동·토지가 생산요소 였지만, 21세기 지식경영·인터넷경영 시대에서는 사람이 가장 큰 생산요소라는 얘기다.
사람을 어떻게 뽑고, 어떻게 운영하고, 어떻게 창의성과 능력을 발휘하게 하느냐에 따라 삼성물산은 물론 삼성그룹 전체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CEO는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고, 제대로 보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경영자 소임이 됐다는 설명을 한다.
그의 경영 스타일은 ‘핵심주의·신속결단·열린 경영’으로 요약할 수 있고, 기업철학은 ‘경영은 종합예술이다’로 압축될 수 있다.
좌우명은 ‘석수화향 심강무성(石壽花香 深江無聲)’. 돌처럼 꿋꿋하고, 꽃향기처럼 훈훈한 인간미를 깊은 강처럼 변함없이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돌처럼 꿋꿋하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설명. 거기에는 사람의 냄새를 짙게 맡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정이 있다는 것이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한국을 대표하는 CEO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명성은 오히려 외국에서 더 알아준다.삼성전자의 세계적인 위상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인물이란 평도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지난 2월 삼성전자가 홍콩 금융전문지 ‘에셋’으로부터 2002년에 이어 2년 연속 한국의 지배구조 최우수 기업으로 선정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는 ‘마른수건도 짜는’ 스타일이다. 삼성전자가 불황 때든 호황 때든 가리지 않고 구조조정을 상시화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직급에 관계없이 ‘정리’를 시킨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 그래서 얻은 별명이 ‘구조조정의 마법사’이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지만, 그는 이제 “겨우 먹고 살 단계”에 불과하다며, 다시 한번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의 목표는 삼성전자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의 실력이 발휘된 시기는 특히 IMF 때. 반도체 경기가 바닥을 치던 1996년12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와서 전직원 30%를 줄이고, 돈 안 되는 한계사업을 잘라버렸다. D램 메모리 반도체 위주의 수출영업을 다양화시킨 공도 크다. 이젠 삼성전자 수출의 3대 축에 휴대전화기 등 정보통신과 첨단 디지털 가전이 새로 포함됐다.
삼성전자 등기이사인 그는 2002년 최소 52억원의 연봉을 받아, 샐러리맨 갑부 대열에 올라셨다. 그의 연봉은 2001년에 비해 40%이상 늘어났다. 지난 연말 회장 승진 물망에도 올랐으나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그룹의 판단 때문에 현직에 머물고 있다.
한때 노무현 정권의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 하마평에도 올랐을 만큼 업계·관계·학계의 신임도 받고 있다.
‘경영 혁신의 전도사’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경영은 혁신의 연속이고 혁신 그 자체가 바로 경영이다”라는 말을 즐겨 한다. 적어도 CEO라고 하면, 당장 이익이 나는 사업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4∼5년 후에 과실을 따먹을 수 있는 ‘묘목 가꾸기’와 10년 후에 돈 되는 주력사업을 찾아 전략을 세우는 ‘씨앗 뿌리기’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경영철학이다.
김윤 삼양사 부회장은 경영의 핵심인 영업·인사·재무분야에 능통한 맞춤형 CEO다. 김상홍 그룹명예회장의 장남인 김부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루이스 드레이퍼스사 등 현지 기업에서 2년간 일한 미국통이다. 지난 1996년 삼양사 사장에 오른 후 제2의 창업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4년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인 수당 김연수 선생이 창립한 삼양사는 50년대 재계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중견 기업으로, 지난 회계연도(2001.7∼2002.6) 7천7백9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양사는 설탕과 밀가루를 제외하면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제품이 거의 없다. DDS(Drug Delivery System:의약물질 전달체계)라든가 폴리에스테르의 원료로 쓰이는 PTA같은 제품 비중이 크다.
그는 올해로 회사 설립 79년이 된 삼양사의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연봉제와 팀제를 도입하고 사업실적이 부진한 금융업과 무선통신사업을 과감히 포기, 계열사를 섬유·식품·화학 등 핵심사업군 관련 10개사로 정리한 구조조정에 수완을 발휘했다.
김부회장은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2천만 달러의 해외자본을 유치했다. SK케미칼과 합작으로 휴비스를 만들어, 기업의 기간사업 분야인 폴리에스터 사업 부문을 과감히 정리했다.
오너 일가지만 ‘책상물림’은 아니다. 그는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열차를 타고 단신으로 지방 공장을 순회하며 현장 목소리를 듣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격식과 허례를 아주 싫어한다.
언론에 자주 나서지 않는 이유도 “기업경영이나 잘하면 되지, 언론과 인터뷰해서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란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98년5월 일본 미쓰비시화학과 합작으로 반도체용 감광제인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등 위기대처 능력도 합격점을 받았다. 삼양사는 부채비율 60%대에 불과할 만큼 내실경영을 하고 있고, 외부 투자에도 소극적이다.
라응찬( 65) 신한금융지주회사 회장의 이력서는 짧다. 최종 학력이 고졸(선린상고 야간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1959년 농업은행에 입행한 후, 은행원 생활 32년만인 지난 91년 은행원의 꿈인 신한은행장에 올랐다. 지난 99년 2월에 신한은행 부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이듬해 10월 신한금융지주사 설립준비위원장으로 복귀, 2001년 신한금융지주회사의 대표이사회장 겸 사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라회장에 대한 은행 안팎의 평가는 소신과 결단력으로 모아진다. 신설 신한은행장으로 있을 때 정치권이나 정부 관료들로부터 대출 청탁이 와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한보 등 부실채권을 과감하게 회수하는 선견지명을 보여 주주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국내 최초의 은행장을 세 번 연속으로 연임한 것은 그의 이같은 능력에 기인한 것. 은행 내부에선 ‘파벌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직원 동문회와 향우회 등을 금지했다.
지난 91년 신한은행장에 첫 취임한 날, “상고 출신으로 은행장이 된 내가 더이상 뭘 바라겠는가. 신한은행 발전을 위해 내 몸을 태우고 재가 돼서 떠나겠다”는 말로 전 은행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 신한은행의 한 임원은 그의 경영스타일에 대해 ‘서두르지는 않지만 기회가 오면 몸을 던진다’고 평했다.
동향을 살피다 결정적인 순간에 승부수를 던진다는 것. 그가 총괄 지휘하고 있는 조흥은행 인수건이 대표적인 예. 2003년 2월 현재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협상을 진행 중이다.
라회장은 2003년을 신한금융지주회사의 본격적인 도약의 해로 보고 있다. 그는 올 신년사를 통해 “대형화를 통해 수익과 외형면에서 진정한 선도 은행의 입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해 조흥은행을 적극적으로 인수할 뜻을 분명히 했다.
조흥은행 인수를 발판으로 동북아의 리딩뱅크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또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뉴욕증시 상장을 올해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겠다”고 올해 목표를 밝혔다.
LG전자는 올해 시무식을 본사가 입주해 있는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가 아닌 역삼동 LG강남타워에서 치뤘다. 강남타워는 정보통신 사업부가 위치해 있는 곳. LG전자가 정보통신 부문에 전사적인 역량을 쏟아 붓겠다는 의지를 시사한 것이다.
이날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난 구자홍(57) LG전자 회장은 “휴대전화 단말기 생산량을 지난해보다 20% 이상 늘려 세계 톱5에 오른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LG가 그룹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있는 ‘일등 LG’의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구회장이다. 특히 지난해 말 회장에 승진하면서부터는 세계 시장에서 진검 승부를 펼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틈날 때마다 “각 사업본부별 매출 목표를 지난해보다 20% 이상 높게 달성할 것”을 독려한다.
일등에 대한 대우는 파격적이다. 20∼30대의 나이라도 전문 분야에서 능력이 인정되면 언제든 발탁인사를 하겠다는 것. 실제로 LG 전자 올해 승진 임원의 평균 연령은 44세에 ‘불과’했다. 핵심 인재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외부에서 인사를 스카우트할 때 상한선을 두지 않는 계약금을 일시불로 주는 ‘사이닝 보너스’를 시행 중이다.
이렇게 경영은 파격적이지만 속내는 ‘부드러운 CEO’가 구회장이다. 구회장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세 가지 면모에 놀란다. 미국인들도 ‘코메리칸’으로 착각한다는 수준급의 영어 실력이 첫번째다.
깍듯한 에티켓과 말쑥한 옷차림 역시 구회장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리고 디지털에 대한 확신이 세번째. 국내에서 최초로 사내 이메일을 도입하고, LG전자 대리점 간판을 ‘디지털 LG’로 바꾼 사람이 바로 그이다.
구회장은 항렬로 따지면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5촌 당숙이 된다. LG산전이 부친인 구태회 그룹 창업고문의 몫으로 분리되면서 한때 “LG산전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올 초 회장으로 승진했다. 가끔 빨간색 나비 넥타이 차림으로 ‘액센트’를 주는 멋쟁이다. CEO의 빼어난 디자인 감각 ‘덕분’인지 LG전자는 디자인에 관한 시상식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다.
남용(56) LG텔레콤 사장의 ‘산악경영’이 최근 업계의 화제다. 10회 걸쳐 산 정상에 올라 019 휴대폰의 통화 품질을 직접 테스트하고 미비점을 개선하는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색행보를 보인 이유는 간단하다. SK텔레콤·KTF 등 국내 이동전화 3사 가운데 ‘만년 3위’의 서러움을 극복하기 위한 포석이다.
그는 야누스적인 기질이 있다. 동적인 듯 하지만 정적이고 정적이면서도 동적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일을 못하는 직원들에게는 ‘견디지 못하면 조직을 떠나라’는 일침도 잊지 않는다.
그런 성격 때문인가. 그는 항상 ‘고(苦)’ 속에서 ‘낙(樂)’을 찾는다. 지난해 그룹 내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그룹 수뇌부조차 LG텔레콤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감마저 보인다.
2002년 말 시장점유율(가입자수 479만명)을 2004년 말 20%(700만명)까지 높인다는 복안이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영업이익을 낸 저력을 기반으로 올해는 동기식 사업을 통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전력을 펼치고 있다. 일단 이동전화 3강이 아닌, 3위 전력으로 ‘생존기반’부터 다지겠다는 각오다.
남사장은 1976년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LG전자에 입사한 LG맨이다. 해외업무를 담당하며 영어실력을 가꾼 정통 실력파. 당시 구자경 회장 시절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그룹 내외에서 실력을 과시하곤 했었다.
98년 LG텔레콤의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토론을 중시하는 CEO다. 상하간의 토론을 통한 중간 합의과정이 없이 추진되는 일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토론과 합의를 거친 사안은 탱크처럼 밀어 붙인다. ‘코뿔소’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의 산악경영도 바로 이런 경영 스타일에서 비롯된 일이다.
‘국내 통신업계 흐름은 그의 손 안에 있다.’ 이 말은 이용경 KT사장을 표현하는 말이다.국내 IT업계에서 기술을 제대로 아는 몇 안 되는 경영자 중 한 명인 그에게 요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 최대 통신기업 KT의 민영화 이후 첫 사령탑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 하나에 국내 통신산업의 흐름이 바뀔 수 있고, 그의 생각 여하에 따라 수 백개의 중소 IT기업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는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풀이 죽은 IT업계 젊은이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다.
이사장이 KT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1년 4월 당시 이해욱 사장과 서정욱 부사장이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본격 유치하면서부터다. 이상철 현 정보통신부 장관·이상훈 현 KT기간망 본부장 등이 이사장과 같은 시기에 스카우트됐다.
서울대와 UC버클리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사장은 아직 광통신이 각광받지 않던 때에 이 분야를 전공해서 인정받은 케이스다. 특히 그는 광통신 상용화를 위해 공헌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 10명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뽑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연구 분야에 있던 그가 본격적으로 경영에 발을 들인 것은 2000년 3월 KTF 사장을 맡으면서다.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그는 독단을 배제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결단이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 냉철해 지는 것이 또한 이사장이다. 특히 지나가는 말처럼 지시한 내용을 6개월이 지나도 확인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과 세심함을 갖고 있다.
CEO들 가운데 애독가로 소문난 이사장은 요즘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Good to Great)’를 반복해 읽고 있다. 그가 자기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은 책은 ‘성경’.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 손수 주차 안내를 해 소탈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또 지난해 KT와 SK텔레콤이 주식 스와핑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당시 KT의 협상 대표로 나서 주식 스와핑을 무리없이 이끌었다. 재무실장으로 공기업 사상 최대규모인 KT의 해외 주식예탁증서(DR) 발행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KT 민영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재무뿐만 아니다. 남사장은 지난 2000년 KT의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 사업추진본부장으로 근무하며 KT가 IMT-2000 사업권을 따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오는 3월 공식 합병할 KTF와 KT아이컴 통합법인의 차세대 W-CDMA서비스를 통해 이통업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사업 추진에 적격자란 판정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남사장이 재무와 기술로만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아니다. 남사장은 ‘본질’과 ‘신뢰’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는 “업계 1위, 시장점유율 60%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객이 쓰고 싶어서 못 견디는 서비스, 투자가들이 어떻게 든 투자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좋은 회사다. 그것이 회사의 본질이고, KTF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말한다.
신뢰에 대해서 남사장은 “회사의 펀더멘탈이 아무리 좋아도 시장에서 신뢰를 잃으면 주가가 좋을 수 없다”며 “주가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높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남사장에게는 남다른 욕심이 있다. KTF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전문 경영인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준비 중인 카드는 두 가지다. 주주 구성을 글로벌화하고 이사회를 이사회답게 운영하는 ‘지배구조의 선진화’가 우선이다. 또 하나는 임직원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신나는 직장’을 만드는 것이다.
남사장은 “KTF에는 재벌 오너식의 절대적인 주주가 없기 때문에 이사회를 잘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외이사를 기업 설명회(IR)에 참석시키고, 소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10%대인 외국인 주주 비율도 법이 허용하는 수준(49%)까지 끌어 올릴 생각이다.나이가 아니라 분위기에서 젊은 조직을 만들어나간다는 구상이다.
김주성(56) 코오롱 사장은 원래 이동찬 명예회장 사람이었다. 1973년 코오롱상사 입사 후 78년부터 비서실 생활을 하면서 이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했다. 이회장은 김사장의 ‘꾀부릴 줄 모르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을 단박에 알아차렸고 김사장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냈다.
81년 비서실 인사팀 팀장이 된 데 이어 83년에는 부장 신분으로 비서실 실장이 됐다. 김사장 이전 비서실장이 부회장·사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인사였다. 84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이사가 되면서 코오롱 최연소 이사 신화를 이뤄냈다.
이후 비서실이 기획조정실로 바뀌면서는 기획조정 실장이 됐고, 95년까지 무려 12년간 이회장 측근 자리를 지켰다.96년 이웅열 회장이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세대교체가 이뤄졌지만 김사장은 달랐다. 기조실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잠시 하버드대에 가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익히고 오라”는 이회장의 배려가 있었다. 1년 후 김사장은 현업에 복귀했다.
코오롱 구미공장장·코오롱개발 사장·코오롱호텔 사장을 거쳐 98년 11월 구조조정본부 사장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경영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됐다. 전경련 기업경영협의회는 대기업의 구조조정본부장들의 모임이다.
김사장이 구조조정본부를 맡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세기통신 지분 매각을 추진한 일이다. 통신산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이회장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어렵다고 해서 미래를 팔 수 없다”는 논리였다.
김사장은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며 설득했고, 이회장이 신세기통신 지분 매각 결단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흐르고 매각이 옳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이회장의 김사장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졌다는 후문이다.
이 회사를 지난 97년부터 이끌어 온 인물은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의 차남인 서경배 사장(40)이다. 서사장은 IMF 환란 후 태평양 증권 등 비핵심 분야를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고급 화장품 시장과 프랑스 등 해외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태평양의 고급 브랜드인 설화수와 헤라는 지난해 매출액이 각각 2천억원이 넘어 섰다. 이에 외국인 투자가들은 지난해 태평양 주식에 잇단 러브콜로 화답했다. 서사장은 지난해 대주주 지분 정보제공업체인 에퀴터블에 의해 이재용 삼성그룹의 상무에 이어 40세 미만의 젊은 부호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서사장이 올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해외 진출’이다. 국내에서는 부동의 1위지만 세계적인 브랜드를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그는 늘 답답함을 느껴 왔다. 72년엔 미국 뉴욕에, 90년엔 프랑스에 진출했지만 변변한 성과가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지난 97년 파리에서 런칭한 ‘롤리타 렘피카’향수 .출시 첫 해 프랑스 향수 시장에서 매출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고가 화장품인 ‘아모레 퍼시픽’에도 서사장은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고 서성환 회장은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큰 이익을 주도록 하라’고 늘 강조했고 기업도 보수적으로 경영했다. 서사장은 이 소비자 중심주의에 글로벌화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유의 화장품으로 뉴욕과 파리 등 유행의 도시를 반드시 공략하겠다.” 서사장의 힘찬 각오다.
서사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뒤 지난 88년 태평양 기획조정실 과장으로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장에 취임해 태평양의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신춘회 농심그룹 회장이 그의 장인이다.
남승우(51) 풀무원 사장은 식품사업에 관한 한 원리주의자다. 그는 “내 자식들에게 먹일 수 있는 안전한 식품이 아니면 절대 팔지 않는다는 신념은 풀무원의 시작이자 끝”이라며 “사업 초기 유기농 제품과 국산원료만 사용했기 때문에 ‘자연식품은 풀무원’이라는 이미지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법시험에 네 번 낙방한 뒤 1978년 현대건설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가 뒤늦게 식품사업에 도전한 것도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을 개발하자’는 자신만의 원칙 때문이다.
그가 98년 연세대 공학관 건립에 40억원을 쾌척하며, 풀무원 기술연구소를 연대와 공동으로 설립한 것도 안전한 식품연구를 위한 그의 원칙에서 비롯됐다. 남사장은 솔선수범으로 직원들을 리드하는 스타일. 사업 초기에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막노동을 직접 지휘하며 직원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그 습관이 몸에 배어 요즘도 6시에 일어나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 뒤 7시 30분까지 출근한다.사업 부문별 사장에게 현장을 넘기고 총괄 CEO가 된 뒤에도 고객들의 불만이나 클레임을 확인하고 개선책을 강구하는 ‘고객기쁨위원회’는 매달 직접 주재하고 있다.
남사장은 “성공은 혼자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지않아 실패했다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애써왔다”고 지난날을 정리했다.풀무원은 두부와 콩나물로 더 잘 알려진 전형적인 식품제조회사. 하지만 남사장은 두부와 콩에서 첨단 바이오 산업을 이끌어낸다.
최근 미국 뉴욕에 두부공장을 설립하고 일본 업체와의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한 그의 최종 목표는 중국과 유럽시장을 공략해 세계적인 콩 가공 식품 전문회사로 키우는 것이다.
맥주업계 1위 하이트맥주의 사령탑 윤종웅 사장은 창업주 박경복 회장이 가장 아끼는 전문 경영인이다. 1975년 입사 이후 줄곧 경리업무에서 일해 온 자금통. 그는 지난 99년 경영위기를 맞아 회사가 어려울 때 박회장에 의해 대표이사로 발탁 됐다.
오너인 박회장이 윤사장에게 각별한 신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그가 ‘관리형 CEO’로 내실을 기하는 회사 정책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이트맥주 돌풍으로 되찾은 맥주업계 1위 자리를 7년째 지키고 있는 공신이다.
33년 하이트맥주 창사 이후 첫 전문경영인 윤사장의 경영 목표는 ‘빚 한푼 없는 무차입 경영이다.’
그는 “하이트맥주는 창사이래 69년간 오로지 주류업에만 전념해, 한국 유일의 토종 종합주류회사로 성장해 왔다”며 “IMF 이후 많은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외국기업으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 자본으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회사로 발전하기 위해 품질 제일과 고객 만족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윤사장은 이를 위해 모든 사업구조를 맥주사업 위주로 재편하는 한편 막대한 차입금 상환에도 주력했다. 그는 앞으로도 이 같은 ‘한 우물 정신’을 바탕으로 주력 사업에 핵심 역량을 집중, 시장 주도 브랜드 강화와 시장점유율 확대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대 경제학과 ROTC 출신인 윤사장은 75년 하이트맥주에 입사해 경리·판매·영업 분야 등을 두루 거친 뒤 24년 만에 사장에 올랐다. 잘 짜여진 조직과 마케팅 전략, ‘하면된다’ 정신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다.
좋아하는 스포츠는 농구다. 쉰을 넘긴 나이에 무슨 농구냐 하겠지만 그는 올림픽 선수촌의 길거리 농구단 멤버로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키 1백78㎝로 50대 치고는 큰 편에 속하는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운동선수를 꿈꾸었을 정도로 운동감각이 뛰어나다.장교 출신(ROTC 11기)이라서 그런지 영화는 전쟁영화와 무술영화를 특히 좋아한다.
(주)한진 사장의 인생은 물류를 빼 놓고서는 말을 할 수 없다. 66년 한진에 입사해 한진의 베트남의 항구 하역책임자로 1년, 대한항공에서 25년, 그리고 한진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육해공 물류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김사장은 대표이사 자리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맡았다. 직장 생활 35년만인 지난 2000년에 사장에 취임한 늦깍이 대표이사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업무 스타일을 매우 젊다. 직원들이 보낸 메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할 정도로 자상하다.
직원들과의 이런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것은 기업을 시계의 톱니바퀴로 여기기 때문이다. 김사장은 기업은 톱니바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할 때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유기적인 조직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사장은 ‘사람 아낄 줄 아는 최고 경영자’라는 평을 듣는다.
김사장이 강조하는 것은 서비스 정신이다. 물류업은 화물을 매개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다. 한진의 배송요원들은 김사장이 손수 다듬은 ‘3S’구호를 매일 아침 외친다.
‘서비스(service)! 정성을 다한다’‘세이프티(safety)! 원칙을 지킨다’‘세일즈(sales)! 판매를 더 한다’가 그것이다.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김사장은 직원들에게 ‘베스트 1’을 약속했다.
브랜드·고용·서비스·기술 부문에서 업계 1위에 오르는 게 ‘베스트 1’의 내용이다. 이를 위해 2000년 4월에는 업계 처음으로 PDA(개인정보 단말기)를 이용한 무선이동통신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정보화 사회의 손과 발인 물류의 첨단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사장은 투명하고 성실한 경영만이 고객·주주·직원 모두에 신뢰받을 길이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하원만(56) 현대백화점 사장은 골수 백화점맨이다. 그의 취임 이전까지 현대백화점의 최고경영자는 모두 현대그룹의 가신 출신들이었다. 하사장은 현대백화점 출신 최고경영자 1호인 셈이다.
1971년 설립된 현대백화점에 78년 입사한 뒤 줄곧 현대백화점맨으로 살아왔다. 88년 임원이 된 후에는 관리·영업·기획 등 백화점 업무를 두루 섭렵했다. 그래서 사내에서는 그를 ‘현대백화점의 산증인’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12월 현대백화점의 이사회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대백화점이 당시 부사장이었던 정지선씨를 그룹 총괄 부회장으로 선임, 본격적인 3세 경영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현대백화점 그룹은 3세 경영의 파트너로 백화점 실무 경험이 풍부한 하사장을 선임했던 것이다.
하사장이 올 신년사에서 밝힌 경영 방침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그는 기본 경영 방침으로 △실질경영 △고객중심 경영 △시스템 경영을 천명했다. 이 방침은 현대백화점의 명품·고급 이미지가 명품회사들의 직접 진출로 점차 퇴색하고, 롯데·신세계가 대대적인 할인점 사업을 확대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유통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하사장이 생각하는 현대백화점은 ‘국내 최고의 고품격 기업’. 지금까지 가꿔온 고급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백화점 매출이 할인점 등 신유통의 부상으로 다소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라며 “백화점은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하사장은 격의 없는 대화를 좋아하고 늘 부하직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덕장 스타일이다. 그러나 업무에 있어서는 매우 치밀하고 꼼꼼한 편이다.
지난해 현대자동차는 ‘사상 최고’의 실적을 달성했다. 98만여대를 수출해 역대 최고 기록인 2001년의 89만2천대 수출 기록을 1년 만에 갈아치웠다. 수출액도 지난해 78억 달러에서 올해는 88억 달러로 높이뛰기를 했다.
덕분에 한국의 자동차 수출도 한국전쟁 이후 50여년 만에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뒀다. 수출 대수로는 작년과 비슷한 1백50만대이지만 판매 금액은 15억 달러가 많은 1백37억 달러로 수익성이 대폭 개선된 것이다.
김동진(52) 현대자동차 사장은 이에 대해 “주력 수출 시장인 미국 경기 침체에 맞서 수출 확대를 겨냥해 RV(레저용차량)와 중대형 고급 자동차 시장을 공략한 게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기에 미국 자동차업체들이 주춤하는 틈을 타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국산차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설명이다. 김사장은 “올해도 역시 품질을 최우선의 경쟁력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김사장의 꿈은 발명가였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 탱크 개발을 위해 79년 현대중공업에 스카우트됐다. 이후 현대정공이 탱크 개발을 주도하면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현대정공 대표)과 인연을 맺었고, 최초의 국산 전차인 K1A1 탱크 개발을 주도했다.
98년 현대우주항공 부사장 시절에는 비행기를 만드는 일도 했다. 지금은 자동차를 만들고 있으니 배만 빼고는 탈 것을 모두 만든 셈이다. 여기에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대차 사상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김사장은 신중한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자기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한 뒤 경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스타일이다.
경영자로서 운도 좋다는 평. 2001년 7월 사장직에 취임하면서 현대차의 경영실적이 급상승 커브를 그리기 시작해 지난해까지 연이어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의 신임도 두터워 국내외 중요한 투자만 정몽구 회장의 사전재가를 받고 나머지 일상적인 업무는 전결로 처리하고 있다
2002년 2월 그룹 임원 인사를 단행한 후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이상운 신임 그룹 총괄사장(COO)에 대한 애정을 ‘일꾼 CEO’라는 말로 표현했다. 당시 인사에서 전무급인 전략본부장에서 사장급인 그룹 총괄사장으로 한꺼번에 두 계단 승진해 화제가 됐던 이사장은 그 때부터 효성그룹의 2인자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76년 효성물산에 입사한 이사장은 섬유공학 분야의 기술에 밝긴 하지만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임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IMF 위기로 효성물산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98년 이사장은 남들이 기피하던 자금 담당 임원을 자처해 눈길을 끌었다.
낮에는 돈을 빌리러 은행을 전전했고, 밤에는 사무실에 들어와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기며 혼신을 다했다. 그 덕에 효성물산은 정상화 됐고, 오너인 조회장 눈에 들어 회장 비서실장에 전격 기용됐다.
비서실장으로 활약하면서 이사장의 숨겨진 자질은 더욱 발현됐다. 그 동안 비서실장은 큰 비중이 없는 자리로 인식됐지만, 이사장은 스스로 계열사와 회장 사이의 관문 역할을 자처해 입지를 키워나갔다.
그의 승진 비결에 대해 자신은 “기술 지식과 마인드를 잘 갖춘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회장 뜻을 받들어 효성을 초우량 회사로 키우려는 일꾼으로 봐달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누구보다도 조회장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때문에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여전히 섬유 분야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조회장은 이사장과 기술 문제에 대해 자주 토론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현재 그룹 총괄사장과 전략본부장을 겸임하고 있는 그는 그룹 2세의 경영 코치 역할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장을 신임한 조회장이 아들인 조현준 전무·조현문 상무·조현상 이사를 모두 전략본부에 배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국내 최대의 포털업체인 이재웅(36) 다음커뮤티케이션 사장에게 2002년은 아주 의미 있는 해였다. 그동안 닷컴업계에 쏟아졌던 불안을 고스란히 씻어내는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다음이 기록한 매출은 2천2백52억원. 영업이익은 1백53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이었다. 특히 영업이익은 2001년 2억6천만원에서 5천8백%나 증가해 ‘투자 가치’가 있는 기업으로서도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공격적인 경영에 나설 생각입니다. 특히 다음의 장기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이사장의 올해 화두는 ‘확실한 1위’이다. 그래서인지 이사장은 연초부터 ‘대대적인 마케팅’ ‘공격적인 경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사장에게 2003년은 위기이자 기회로 여겨지고 있다. 올해부터 전자상거래 매출 집계 기준이 거래액에서 수수료로 바뀜에 따라 전체 매출의 70%를 전자상거래에서 올리고 있는 다음은 매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어 닷컴업계 매출 1위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NHN같은 경쟁자들과 ‘진정한 1위’를 향한 뜨거운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NHN은 올해 1천3백억원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혀 일종의 선전포고를 한 상황. 증권가에서는 지난해 매출(2천2백52억원)의 절반인 1천∼1천4백억원 대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사장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사장은 지난 2년 동안 연 50억원 미만에 그쳤던 마케팅 비용을 올해 대폭 올리는 것과 함께 위기를 기회로 삼아 경쟁력 강화에 전력 투구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네티즌들의 뉴스 소비를 수익화와 신뢰성 제고로 연결시킨다는 전략 하에 미디어본부를 신설, 운영하고 있고 그동안 경쟁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검색·게임 등의 서비스도 적극적으로 강화할 방침이다. 이는 수익모델을 다각화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사장은 이와 함께 해외진출에도 힘을 쏟을 생각이다. 노하우와 기술력을 가진 현지 업체를 인수 합병한 후 다음의 자본력을 더하겠다는 구상이다
경기도 성남시 야탑동 코리아디자인 센터. 이 건물 5층에 MP3 플레이어 시장 점유율 40%를 자랑하는 디지탈웨이가 입주해 있다. 우중구(41) 사장은 “기술력은 기본이다. 디자인에서 앞서가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회사 주소만 봐도 “MP3가 디자인 산업”라고 강조하는 그의 지론을 읽을 수 있다.
2000년 중반 MP3 플레이어 업체 수는 무려 2백여개가 ‘난립’했다. 한 때 MP3를 하겠다는 업체들은 ‘손만 들면’ 투자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수요가 받쳐주지 않으면서 MP3 제조업체 수는 불과 2년 만에 10분의 1로 줄었다. 이런 가운데 디지탈웨이는 삼성전자와 더불어 업계 수위를 다투는 회사다. 바로 디자인이 차별화 포인트다.
“MP3 플레이어는 소비자를 직접 대하는 상품이라서 디자인에서 성패가 갈립니다. 그래서 저희는 ‘디자이너가 먼저 제품을 만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회사에선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내놓으면 엔지니어가 디자인 콘셉트를 살린 제품을 만듭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자체 개발한 ‘엠피오’ 브랜드는 일본 시장에서 소니와 파나소닉을 제치고 시장점유율 30%대에 달하는 인기 아이템. 지난해에는 독일의 MP3 플레이어 마케팅 전문회사인 ‘폰티스’사를 인수해 유럽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우사장이 유명세를 탄 것은 지난해 8월 김정태 국민은행장·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분 사장·안철수 안연구소 사장과 함께 ‘비즈니스위크’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별 25인’에 선정되면서부터.
지금이야 ‘햇볕이 쨍쨍’하지만 우사장은 누구보다도 ‘눈물 젖은 빵’의 맛을 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 출신으로 삼성중공업에서 근무하다 90년 무역회사를 차려 주로 수입업을 했는데 IMF 사태로 좌절을 겪었다.
주로 대형 백화점과 거래했는데 업체가 부도나고, 창고에 불까지 나면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 이듬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디지탈웨이를 창업해 현재는 매출 5백억원을 앞둔 유망기업을 일구었다. 불과 5년 만에 ‘인생 역전’을 이룬 것이다
“이제 로커스의 무대는 국내가 아니라 아시아입니다.” 콜센터 솔루션 전문업체로 유명한 로커스는 KT 114 광역안내·SK텔레콤 등 국내의 굵직한 수요를 휩쓸고 있다. 국내시장 점유율이 자그마치 70%대.
대표적인 1세대 벤처기업가로 꼽히는 김형순(42) 사장은 벌써 13년차 CEO가 됐다. 김사장은 국내 기반이 탄탄해졌다는 판단 아래 ‘글로벌 로커스’ 전략을 차근차근 시행에 옮기고 있다.
지난달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36층 로커스 사무실에서는 ‘아주 오랜 만에’ 김사장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국과 태국의 로커스 현지법인에서 낭보가 날아왔기 때문. 로커스 해외법인이 통신장비 업체인 어바이어(Avaya)로부터 최상급 파트너인 ‘플래티넘 파트너(Platinum Partner)’로 선정된 것이다.
중국과 태국을 거점으로 한 ‘아시아 비즈니스’에 열을 올리고 있는 로커스로서는 기다리던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김사장은 중국시장에 대한 기대가 크다. 지난 2001년 말 출범한 로커스 중국법인은 설립 초기임에도 세계 최대 규모인 중국 콜센터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사장은 회사의 전열을 새롭게 정비했다. 자회사인 플레너스의 지분을 CJ엔터테인먼트에 넘기면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한발 물러나게 된다. 플레너스를 통해 김사장은 IT(정보기술)와 ‘딴따라’ 분야에서 능력을 ‘전천후 CEO’로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지난해 ‘연예인 PR 비리’가 문제되자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젊은 시절 영화감독을 꿈꿨던 영화광. 연세대 재학 시절 영화감독을 꿈꾸며 미국 유학을 택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비즈니스의 길로 들어섰다. 90년 뉴욕의 한 사무실에서 대학 친구 2명과 창업해 설립, 10여년 만에 매출 1천억원대의 회사로 일구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김선길씨가 부친이다. 벤처기업협회 부회장과 한민족글로벌벤처네트워크(INKE) 의장을 맡고 있다.
조현정(47) 비트컴퓨터 사장은 색깔로 표현하면 ‘빨강’이다. 또 도형으로 표현하면 끝이 뾰족하고 밑바닥이 안정된 ‘이등변 삼각형’이다. 정열적이면서도 안정돼 있다는 의미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밀고 나가는 대단한 추진력도 그런데서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문에 불필요한 주변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의료 정보 사업과 함께 학원 사업을 하고 있는 비트컴퓨터가 나중에 추진한 학원사업에서 일부 오해를 받는 것도 조사장의 그런 성격과 무관치않다.
조사장은 비트교육센터 입학생 면접에 직접 참여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불합격의 쓴 맛을 보는데 이들이 “돈 주고 배우겠다는 데도 입학을 안 시키냐”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 하지만 자격이 안 되면 배울 수 없다는 게 조사장 생각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한다.
묘한 것은 조사장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이런 고집스러움이 밑거름이 됐다는 점이다. 조사장은 20년 전에 비트컴퓨터를 세웠다. 대학 3학년 때다. 청량리에 있는 옛 맘모스호텔 방 하나를 빌려 친구 2명과 함께 창업했다.
창업 이유는 오로지 SW 산업에 대한 믿음이 전부였다. 학교 때 배운 SW 기술을 사회에 적용해 부가가치를 올려야 한다고 믿었던 것. 적용 분야는 의료였다. 그리고 20년. 오로지 이 한 길만을 걸어왔다. 이제는 ‘의료정보=비트컴퓨터’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덕분에 비트컴퓨터는 ‘벤처 바람’과 함께 수많은 중소 IT 기업이 명멸한 상황에서도 SW 분야 1세대 벤처 기업으로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사장이 터미네이터같은 건조한 맛만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측면이 강한 CEO 가운데 하나다. 임직원에 좋은 사무 집기를 사주고, 식당을 만들어 좋은 밥을 먹이면서 기쁨을 찾고 이를 자랑할 줄 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사재를 털어 장학재단도 만들었다. ‘냉철한 CEO’면서 ‘다감한 오너’. 모두 다 ‘빨강’의 이미지다.
중계기에 목숨을 건 사나이’. 정준(39) 쏠리테크 사장을 한마디로 아우르는 말이다. 중계기에 인생의 승부수를 모두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서울대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두뇌의 소유자다. 명문인 미국 스탠포드대 박사를 거쳐 한국통신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한국통신 재직 시 그의 능력을 탐낸 외부의 스카우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중계기시장의 전망성을 파악한 후 당시 사내벤처격으로 오늘의 쏠리테크를 1998년 창업했다.
완벽한 기술(회사이름인 쏠리테크가 바로 이런 뜻이다)만 있다면 창업과 성공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했다.중계기라는 한 우물을 파고 있는 그의 정성은 이제 어느 정도 결심을 맺고 있다는 평이다.
건물 내 음영지역을 커버하는 인빌딩 중계기·지하철이나 지하상가에 필요한 하이파워 HFC 중계기·디지털서비스에 필요한 디지털 중계기·IMT-2000서비스를 겨냥한 IMT-2000용 디지털 중계기·캡필러 등이 그의 주요 작품들이다.
국내 양대 공룡 이동통신사업자인 SK텔레콤과 KTF가 그의 고객들이다. 쏠리테크 매출의 95%가 이 두 업체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매출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게 아니냐는 걱정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2003년 매출 목표는 5백60억원인데, 국내시장에서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외국진출을 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시장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 수출 목표는 약 60억원. 아무튼 그는 이같은 기술력을 무기삼아 2005년 국내 5위 통신기술업체로 떠오른다는 밑그림도 그려놓은 상태다.
그는 상복이 많은 인물이다. 2002년 10월에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2003년 기술개척자 40인 중의 한 명으로 선정돼 지난 1월에 다보스에서 열린 이 포럼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1년11월에는 2001년 벤처기업대상(산업자원부장관 표창)을, 2001년7월에는 중소기업청에서 수여하는 ‘이달의 벤처기업인상’을 각각 수상하기도 했다.
벤처기업인이지만 학생 때나 지금이나 사회운동에도 관심이 많다. 소장·개혁적 학자들이 대거 포진한 민간 연구단체인 ‘미래전략연구원의 이사를 맡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연구원은 노무현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일례로 연구원장을 맡아 지난 2001년에 연구원 설립을 주도한 당시 윤영관 교수(서울대)는 새 정부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꺼운 안경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보안업체 김영달(36) 아이디스 사장에게선 카이스트(KAIST) 공학박사 다운 면모가 물씬 풍긴다. 정연하게 자신의 논리를 펴 가는 말투나, 회사 경영에 대한 기본 생각들을 들으면 그가 한 우물만 파는 전형적인 기술 CEO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기술 개발에만 집착했더라면 창업 5년만에 디지털영상기억장치(DVR) 분야 국내 1위 업체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이끄는 아이디스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에 비해 1백% 증가한 4백3억원을 돌파했다.
각종 벤처와 관련한 스캔들이 봇물을 이룬 요즘 아이디스가 흔들리지 않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데는 김사장의 현실적인 경영관이 한몫 했다.
김사장은 항상 “좋은 기술도 시장 흐름을 모르면 실패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박사 과정을 밟던 1996년 실리콘밸리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창업을 결심했던 그는 시장에서 현재 어떤 제품을 요구하고, 그걸 만들기 위해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를 제1차 과제로 삼았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아이템이 아직 아날로그에 머물러 있던 보안분야였다. CCTV를 대체할 차세대 제품으로 DVR을 택한 김사장은 그 때부터는 연구 개발에만 매달렸다. 시장을 읽은 안목과 탄탄한 기술력이 아이디스가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지난해부터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유럽·미국 등지를 돌며 기업설명회(IR)도 열었던 김사장은 2004년 매출 1천억원을 달성해 세계 DVR 시장 석권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앞으로 자신처럼 한 분야의 최고를 꿈꾸는 후배 공학도를 지원하는 벤처지주회사도 만들고 싶다는 그는 올해 증권계가 가장 주목하는 코스닥 기업 CEO 중 한 명이다
안철수(42)사장은 좀처럼 사람들에게 잊혀지기가 어렵다. 잊혀질 만하면 나타나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그를 다시 뉴스의 중심으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1·25 인터넷 대란때도 안사장에게 세간의 시선이 모였다. 그만큼 그가 보안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1백20여개 보안업체의 대표기구인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KISIA) 이사회에서 차기 회장으로 추대됐다. 높은 도덕성과 명망을 갖춘 안사장이 협회 회장이 되면 협회의 활동 범위와 힘이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란 게 그를 추대한 이유다.
이처럼 국내 CEO 중 안사장만큼 회사 안팎에서 고른 평가를 받는 사람도 드물다. 그가 CEO로 활동하면서 수상한 상만 수십여개. 직원들은 물론, 투자가·언론·시민단체까지 모두 안사장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그만큼 그의 기업관이나 경영 철학이 투명하고 뚜렷하다는 얘기다.
그는 평소 기업을 이윤 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해 왔다. 실제 안철수 연구소도 단순히 바이러스 백신으로 돈을버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무료 백신을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나눠주고 시시때때로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그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
"기업으로서 이익을 내서 직원과 주주 등 구성원에게 적절한 과실이 돌아가게 하는 건 기본이지만 그게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안연구소를 1백년, 2백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좋은 기업일 아니라 위대한 기업으로 만들자는 것. "지금은 안철수라는 한 인간이 너무 앞에 나와 있습니다다. 안철수 연구소가 훌륭한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좋은 회사가 돼야죠."
엔씨소프트 김택진(36) 사장은 ‘리니지’ 하나로 국산 온라인게임 시장을 석권한 인물로 유명하다. 지난해 경영진의 내분, 중국진출사업의 지연 같은 악재 때문에 주가가 출렁이면서 그가 지닌 엔씨소프트 지분의 평가액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총액’은 여전히 1천억원을 웃돌고 있으며, 그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코스닥 갑부’다. 엔씨소프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코스닥 대표주다.
지난1997년 현대정보기술 인터넷 사업부 팀장으로 일하던 중 ‘돈되는 인터넷 게임시장’의 단초를 읽고서는 동료 16명과 함께 자본금 1억원으로 엔씨소프트를 세웠다.
설립 당시 그의 신분은 현대정보기술 직원이면서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몸담고 있던 학생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창업에 뛰어 들었다. 당시 설립 초기에 그에게 투자한 투자자들은 한결같이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내려올 정도다.
아무튼 그는 설립 3년 만에 엔씨소프트를 인터넷게임 분야의 국내 최정상 반열에 올려 놓았으며, 그 자신은 업계의 신화로 부각됐다.2002년 성적도 눈부시다.
매출은 1천5백48억원으로 전년보다 24.1%나 늘었고, 당기순이익은 5백3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백53.8%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이상은 엔씨소프트를 세계적인 게임업체로 육성시킨다는 것이다. 이미 이에 도전장을 냈다.
그가 올해 특히 신경을 쓰고 있는 시장은 미국·일본·대만 등 외국시장. 한데 공을 들이고 있는 주 타켓인 미국시장 공략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그의 커다란 고민이다. 그래선가. 그는 올해 경영 화두를 ‘내실 경영’과 ‘도전 정신’으로 잡고 있다. 세계 진출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들이라고 보면 된다.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리니지2’‘리니지 포에버’를 올 상반기에 선보여, ‘포스트 리니지’시대에 대비한다는 전략이다. ‘샤이닝로어’‘에버퀘스트’같은 엔씨소프트가 배급하는 게임에 대한 마케팅도 강화할 생각이다. 이 게임들로 리니지가 손대지 못하고 있는 시장에도 손을 대겠다는 계산에서다.
숙원사업이던 중국 합작법인이 설립된 것을 계기로 거대한 중원대륙을 ‘리니지 신화’로 감싸버리겠다는 작전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다. 세계 최대 게임박람회 E3에 처음으로 독립부스를 마련, EA·소니·MS 같은 세계적인 유명한 게임업체들과 한판 승부를 겨룬다는 계획도 이마 마련해 뒀다.
“올해에는 ‘닷컴=내수산업’이라는 등식을 반드시 깨겠다.” 인터넷 포탈사이트 네이버(www.naver.com)와 게임사이트 한게임(www.hangame.com)을 운영하는 NHN 이해진 사장의 각오다. 전혀 허장성세로 들리지 않는다. 일본에서 오픈한 한게임 서비스가 야후에 이어 2위를 유지하는 등 손익분기점을 눈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NHN은 닷컴기업들의 희망이다. 처음으로 닷컴기업 순익 1백억 시대를 연 곳도 NHN이다. 닷컴 열풍 이후의 후폭풍으로 NHN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지난 2000년 12월 이사장은 이사진에게 “신규투자를 받지 못하면 앞으로 6개월 안에 현금이 바닥난다”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닷컴기업인 NHN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그로부터 3개월 후 NHN은 게임서비스 유료화에 나섰다. 주위에서는 성공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지만 이사장은 밀어부쳤다. 2002년 말 NHN의 성적표는 매출액 7백40억원, 영업이익 3백억원, 순이익 2백10억원이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이사장은 출근하는 게 즐거운 회사를 지향한다. 어려웠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 가장 먼저 이사장이 눈을 돌린 곳이 사원 복지다. NHN는 입사 3년차 이상 직원들에게는 해외배낭 여행의 왕복항공료를 지급한다.
이사장도 올해 이 제도의 수혜대상자여서 네팔로 산악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학원에 다닐 시간들이 없는 직원들을 위해 무료 외국어 강좌도 사내에 개설했다. 파격적인 우수사원제도도 업계의 화제다.
지난 연말에는 12명의 우수사원을 뽑아 각각 1천만원 상당의 상금과 상품을 시상한 바 있다. 이사장은 올해를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삼고 있다. 해외진출이 바로 그것이다. 닷컴기업의 수출이라는 그의 꿈은 다른 닷컴인들에게도 또 다른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현재 등록된 특허 20건, 출원된 특허 64건. 시스템 업체에서 디지털 가전업체로 돌아선 우리기술은 특허에 있어 대기업 못지 않은 저력을 자랑하는 벤처 기업이다.
이렇게 이 회사가 특허 전문 기업으로 비칠 수 있었던 데는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김덕우(42) 사장의 공이 크다. 회사 내에서 아이디어맨으로 통하는 그는 유연한게 변화를 수용하는 소탈한 CEO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변화에 대한 그의 열린 자세는 창업 10년을 맞은 우리기술이 주력 사업을 과감히 전환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1993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후배 5명과 함께 우리기술을 창업한 그는 초기에는 전공을 살려 발전소용 감시제어시스템 개발에 주력했다.
그러나 시스템 시장 자체의 성장성에 한계를 느낀 몇 년 전부터 디지털 가전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쉽지 않았을 이런 변신 시도는 일단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
디지털 가전 첫 작품으로 셋톱박스에 DVD 플레이어 기능을 더한 내장형케이블 셋톱박스(DCP)를 내놓은 김사장은 미국 모토로라와 제조자설계생산(ODM) 방식으로 2백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후속제품으로 내 놓은 오디오비디오(AV)리시버 사업 역시 지난해 프랑스 최대 가전업체 톰슨의 자회사인 TTC의 AV리시버 사업부를 인수함으로써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했다.
‘묻지마 투자’에 휘말릴 수 없다며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90년대 후반 코스닥 등록을 포기했던 김사장은 2000년에야 코스닥에 입성하는 바람에 그 열풍의 단맛을 느끼진 못했다. 그러나 지분 문제로 시끄러운 다른 벤처와 달리 10년이 지나도록 창립 멤버 5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인간애 넘치는 회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은 크다
VAN(부가가치망) 업체 KMPS의 권도균(40) 사장은 IT업계에서는 용병술을 아는 CEO로 통한다. 그는 이니텍과 이니시스 등 자신이 설립하고 대주주로 지분참여를 하고 있는 벤처업체 2개를 잇따라 코스닥 시장에 등록시킨 엔지니어 출신의 기업가다.
회사가 매출규모와 조직규모 등의 측면에서 일정 반열에 오르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자신은 다시 새로운 둥지를 틀기 위해 자리이동을 반복하는 안주를 싫어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권사장은 경북대 전산학과를 졸업, 데이콤 중앙연구소에 입사해 8년간 보안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았다. 지난 1997년 4월 퇴직금과 우리사주를 판 돈 등으로 PKI(공개키기반구조)전문 정보보안 업체인 이니텍을 창업했다.
그가 안정된 직장 데이콤을 나와 이니텍을 창업한 이유는 독자기술이 없는 설움 때문이라고 한다.
권사장은 “지난 95년 데이콤에서 인터넷 검색프로그램 ‘모자이크’의 한글판 개발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이 프로그램의 핵심인 암호 알고리즘과 프로토콜이 미국 정부가 정한 군수품목이란 이유로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다”며 “그때부터 정보보안 기술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고, 이니텍을 창업한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니텍은 설립 3년째 2000년 매출 68억원에 순익 18억원, 2001년 매출 1백5억원, 순익 17억원을 올린 건실한 재무구조를 갖춘 알짜기업으로 성장했다. 2000년 2월 그는 한국 HP에서 전자상거래 담당 이사를 맡고 있던 김재근(47)씨를 이니텍의 대표이사로 영입, 2001년 11월 코스닥에 등록시켰다.
이후 권사장은 첫 코스닥 등록 1년만에 역시 자신이 창업한 전자지불 서비스업체인 이니시스 대표이사를 맡아 회사를 성장시킨 끝에 코스닥 등록 행보를 이어가게 된다. 그는 지난 1월 이금룡 전 옥션 사장을 이니시스의 대표이사로 영입하고, 자신은 SK와 공동 투자한 KMPS로 자리를 옮겼다.
휴대폰 생산 전문업체인 강원희(42) 인터큐브 사장이 회사 내에 갖고 있는 조직은 ‘머리’에 해당되는 연구개발 밖에 없다. 공장이나 생산, 판매시설은 아예 없다. 모두 아웃소싱으로 해결한다.
그가 꿈꾸는 회사는 삼성전자를 능가하는 ‘초우량’ 회사다. 그동안 R&D(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충분히 해 온 만큼 올해부터는 10%가 넘는 영업이익 달성이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이 정도면 삼성전자나 노키아 못지 않은 이익률이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원가경쟁력의 원천 역시 ‘아웃소싱’이라고 말한다. 올해 예상 매출은 지난해 실적(4백80억원)보다 4배 이상 많은 2천억원이다. 예상 경상이익은 5백∼6백억원 정도.
강사장이 노키아·모토로라·삼성전자·소니·에릭슨 같은 전세계 초대형 강자들만의 격전장인 휴대폰 시장에 뛰어든 계기는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지난 1997년 무선통신과 관련해 기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중소기업의 사장을 도와주다 아예 창업에 나섰다.
연구개발로 특화된 전문기업이라면 강자들의 전쟁터인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어도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87년 현대전자 통신연구소에 입사한 이후 97년 창업 때까지 10년간 연구원으로 재직한 실력파다.
그의 경영 스타일은 ‘핵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수 정예 인력들이 특화된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기업 정신에서 나온 작품들이 2000년에 개발해 LG텔레콤에 공급한 세계 최소형‘카이코코’휴대폰(개발명:C-500 시리즈)이다. 이 휴대폰은 출시 6개월만에 65만대나 팔려나가 ‘최단기간 최다판매’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0만대 이상 팔려 나간 저가형 30만원대 컬러휴대폰 ‘C나인’도 인터큐브 작품이다.
그는 내수보다는 매출의 대부분이 일어나고 있는 수출에 더 치중하고 있으며, 중국·태국·호주시장 등을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아 뛰고 있다.
지오인터랙티브는 미국·캐나다 등 해외에서 더 이름이 알려진 벤처기업이다. 지오는 전세계 PDA(개인휴대단말기) 게임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북미 시장에서 오프라인 게임 시장 60%·온라인 시장 30%를 석권하고 있다.
PDA를 갖고 있는 미국인 둘 가운데 하나는 지오의 게임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덕분에 사실상 세계 1위의 모바일 게임 업체로 평가받고 있다.
“지오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세계 1위의 모바일 게임 회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올해 두 가지 일을 할 겁니다. PDA 게임은 미국 시장을 기반으로, 유럽과 아시아 시장까지 집중 공략하는 겁니다. 그리고 휴대폰 게임은 한국과 일본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모든 기기를 ‘게임기’로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김병기(40) 사장이 해외로 진출한 것은 지난 1998년. 삼성전자에서 노트북 PC를 미국에 첫 수출한 주역이기도 했던 김사장은 97년 회사를 설립하자마자 PDA의 성장 가능성에 눈을 돌려 이듬해인 98년 초 ‘윈CE’ 기반의 PDA용 골프게임 ‘팜 골프’를 선보였다.
주위에서는 긴가민가 했지만 김사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덕분에 세계 3대 PDA 제조업체인 카시오 제품에 탑재됐을 뿐만 아니라 MS사의 공식 파트너로 선정돼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미는 계기가 됐다.
김사장은 이어 세계 최초로 PDA에서 3차원 그래픽을 완벽하게 구현한 ‘지오 골프’ 시리즈를 출시, PDA 게임 수준을 한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텔·MS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을 제휴사로 확보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올해에도 ‘타이거 우즈 골프’ 등의 대작형 PC 게임으로 점유율을 높여갈 계획이다. 최근에는 국내 시장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지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3% 늘어난 5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당기 순익 3억원을 달성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백32억원, 순익은 25억원이며, 수출 비중을 늘려 전체 매출의 50%를 넘길 계획이다.
홍지준(47) 코캄엔지니어링 사장은 세계 최초로 리튬 폴리머 2차 전지를 개발한 엔지니어다. 그는 이같은 공로로 지난해 정부로부터 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는 서울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하고 동양나일론과 현대전자 등에서 근무하다 1993년 각종 기계 장비를 제작하는 회사를 차렸다.
98년 그는 장비제작으로는 고부가가치 창출이 어렵다고 판단,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개발하지 못한 리튬 2차 전지 개발에 도전했다.
주위에선 무모하다며 말렸다. 전세계에서 리튬 폴리머 배터리를 개발한 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벤처기업이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전지 개발에 대한 그의 신념은 굴하지 않았다.
수백번의 실험을 거쳐 전지의 음극과 양극으로 이뤄진 셀(Cell)을 여러 겹으로 연결하는 폴더 투 폴더 방식을 이용하면 2차 전지 개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후 1년여 만인 99년 시제품 생산에 성공해, 지난 2001년 7월 세계 최초로 리튬 폴리머 전지 양산 체제를 갖췄다.
2차 전지는 충전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전지로, 휴대전화·노트북·캠코더 등 주로 소형 가전과 모바일 기기의 핵심제품 중 하나다. 최근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따라 D램 반도체를 이을 차세대 핵심 주력 상품으로 2차 전지를 선정하고 연구개발에 나서는 등 업계에선 누구나 눈독을 들이는 사업이다.
코캄의 2차 전지는 최근 판매가 급증하면서 월 1백만개 배터리 생산규모인 충남 논산 공장으론 모자라 올해 중 충북 진천에 8천평 규모의 세계 최대 배터리 생산공장을 건립할 계획이다. 홍사장은 “지난 13년간 사업하면서 모은 돈과 외부 투자를 빌어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기자동차용 전지개발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장흥순(43) 사장은 1988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 박사과정 시절 5명의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벤처기업을 만들었다.
당시 산학협동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다 일제 일색인 산업용 기계와 부품시장을 보고 ‘제대로 된 국산 제품을 만들어 보자’는 일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을 이용, 동료들과 ‘몰래 집회’를 가져가며 사업계획을 세웠다. 창업의 산실은 당시 KIST가 있던 서울 홍릉 근처 물고기어항 가게 2층에 4.5평짜리 단칸 사무실로 정했다. 기술과 열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처음 3년까지가 힘들었습니다. 상아탑에 갇혀 세상물정 모르던 사람이 회사를 차리고 물건과 기술을 팔겠다고 나섰으니, 맨땅에 머리 부딪치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그를 믿고 따라주는 사람들에게 월급도 못 주는 ‘못난 사장’이란 자책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모함에도 희망이 보였다. 89년 상공부 주최 신제품 발표회에서 수십억원대의 수출대체 효과가 있다는 호평을 받으면서부터다. 여기저기서 ‘사업자금을 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 홍릉에서 청계천의 24평짜리 사무실로, 또 원효로의 1백평짜리 사무실로 옮겼다. 그런 고단한 과정을 통해 터보테크라는 튼실한 벤처기업을 만든 것.
하지만 장사장이 이쯤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업도 사람과 같아서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회사의 규모에 맞춘 안정된 조직과 시스템을 갖추는 한편, 소비자와 시장의 요구에 따라 관련 분야로 계속 뻗어나가야 합니다.”
회사의 성공만큼이나 많은 영예도 따랐다. 98년에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차세대 지도자 1백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고, 2000∼2001년 연속으로 각종 경영자 대상을 받았다. 과학기술부가 선정하는 ‘올해의 테크노 CEO상’도 수상했다.
지난 2월28일에는 벤처기업협회 5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2000년 3대 회장으로 선출된 후 벌써 3대째 연임이다.
핸디소프트의 안영경(49) 사장은 벤처기업 최장수 사장 중 한 명이다. 올해로 13년째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쯤되면 ‘장기집권’이라고 비난받을 만도 하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그의 이런 장기집권에 대한 시각이 그리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너무 쉽게 부침하는 벤처업계의 속성과 달리 안영경 핸디소프트 사장은 꾸준히 한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1991년에 창업해 그간 많은 위기와 고비가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핸디소프트의 선장 노릇을 하고 있다.
핸디소프트는 국내 그룹웨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요즘은 흔한 게 벤처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안영경 핸디소프트 사장이 창업할 당시만 해도 벤처라는 말조차 생소했다.
핸디소프트사가 창립된 것은 91년 2월. 당시 KAIST 전산전공 박사과정에 있던 안영경 사장은 박사학위 대신 창업의 길을 택했다. 쉽고 편하게 PC를 다루게 하자는 의미에서 핸디소프트란 간판을 달았다.
주력 제품은 그룹웨어. 기업들의 LAN 통신망을 지원해 주는 소트프웨어다. 창업 3년 만인 94년 5월 핸디오피스란 신제품이 나오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팔려 나갔다. 사용자들의 입선전 덕분이었다. 국내 그룹웨어 시장을 손쉽게 선점해 버렸다.
핸디소프트는 벤처기업 중 드물게 인재관리도 뛰어나다. 인적자원관리 컨설팅회사인 왓슨와이어트가 아·태지역 12개국 5백여개 공개기업을 대상으로 조사, 지난해 말 발표한 “아·태지역 인적자본지수(HCI)”에서 핸디소프트는 90점으로 한국기업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왓슨와이어트 측은 “핸디소프트가 투명한 보상과 협조적이고 유연한 고객 중심의 직장문화 구축에 많은 투자를 해온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셋톱박스 시장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변대규(43) 휴맥스 사장은 이름난 축구광이다. 변사장은 꽃피는 3월엔 다시 축구화를 고쳐 매야겠다고 다짐한다. 3백5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축구를 다시 벌여 볼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외치려고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변사장은 경력 14년의 고참급 벤처 CEO. 지난 1989년 서울대 제어계측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뒤 지하 단칸방의 실험실에서 ‘인생의 벤처’를 감행했다. 같이 연구하던 동료와 후배 6명은 ‘자동화기기 영상감지 시스템’을 아이디어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저 연구만 하던 책상물림들이 좌충우돌 부딪치며 거의 ‘몸 팔아서’ 사업을 벌이다시피 했다”며 “판로가 없어 그냥 망하는 줄 알았다”고 창업 초기를 회상했다.
변사장은 집념의 사나이다. 얼굴 곳곳에 집념의 흔적이 가득하다. 우선 흰머리. 고민의 밤을 뜬눈으로 지샌 세월의 흔적이란다. 이빨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울퉁불퉁하다. 스스로 곱씹은 다짐의 입질로 생긴 전투력의 상징이란다.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던 시절. 그는 유럽 셋톱박스를 일반 소비자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소수정예의 ‘마케팅 특공대’를 조직했다. 그 저돌성이 현재 휴맥스 셋톱박스를 일반 소비자시장에서 톱랭크에 위치시킨 뿌리라고 회상한다.
변사장은 최근 10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셋톱박스 경기가 침체 국면을 맞자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디지털가전의 새 영역에 도전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는 평소 손수 자신의 애마 에쿠스를 운전한다. 대외 활동상 필요할 때는 택시기사를 부른다. 불필요한 곳에 돈 쓸 필요 없다는 소신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 할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변사장은 최근 드러커가 언급한 ‘절정기에 있을 때 밑바닥을 준비하라’는 경구가 자신의 최대 화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