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3천명이 넘게 왔다는 전갈이다. 줄잡아 탑 각층에 들어앉은 사람만도 1천5백명은 될 것이라는데... 그 소리를 듣자 불안해진다.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
30년 경력의 한옥건축 달인 김영일씨와 정통기법을 전수한 도편수 조희환 대목장..그리고 평생을 단청과 산 70노객 한석성옹도 천년도 끄덕 없다고 다짐한다.
이는 96년 3층목탑 준공식 때 나왔던 말이다.
얼마나 노심초사했고 심혈을 기울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렇다. 보탑사는 전통기술의 정수를 한 곳에 모은 것이다. 대목장 신영훈씨와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기술자들이 황룡사 9층목탑 복원의 꿈을 안고,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유일의 탑을 만든 것이다. 신라가 새로운 통일국가를 염원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듯이 남북통일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지은 탑이란다.
첫 만남
진천에서도 한참을 운전해서 고불고불 산길을 따라 나온 거대한 목조물..
그저 "와-" 라는 외마디만 튀어나왔다.
우선 산세를 본다. 사방이 나즈막한 연꽃모양의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그 안에 우뚝 솟은 3층 목조탑..바로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42미터.,,세계최대의 목탑이다. 현대 고층아파트 14층과 맞먹는 크기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탑은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법주사 팔상전을 둘 수 있는데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복원한 것이고, 쌍봉사 대웅전 역시 1984년 화재를 입어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그만큼 목탑이 귀하다.
더구나 두 탑은 겉에서 보면 다층이지만 안쪽은 아래에서 위까지 모두 트인 통층 구조다. 무늬만 3층이랄까?
그러나 새로 지은 보탑사 목탑은 1층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있다. 즉 황룡사 구층탑이래 처음으로 사람이 오를 수 있게 지어진 목탑인 것이다.
백팔번뇌의 의미를 담아 높이 108척 (32.7미터), 상륜부까지 포함하면 42.7미터이고...전통기법을 이용하여 금속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목재를 짜 맞추었다는 부분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목재도 국내산 적송만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마당에서 스님께 합장을 했더니 친절히 설명해 주신다.
미국 가서 "굿모닝" 이라고 해야지.."안녕하세요 "라고 할 수는 없잖아.
종교도 마찬가지다. 절에 가면 배례하고, 교회가면 기도해주는 것이 방문자의 예의가 아닐까?
오를수록 감동도 더해진다.
1층에는 동서남북으로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석가여래, 비로나자불이 사방에 계시고, 각각 협시보살을 모셨다. 즉 '四方佛殿'인 것이다. 이 탑의 중심이 되는 심주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고, 그 둘레를 간절한 발원이 담긴 999개의 백자탑을 조성하였다..
윤장대
2층은 대장전이다. 한가운데 티벳 불교에서 따온 윤장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4면의 벽에 한글 법화경을 돌에 새긴 석경이 서있다. 윤장대를 돌릴려고 했더니 꿈적도 안한다.
2층과 3층사이에는 인도와 중국, 우리나라의 목탑의 역사를 말해주는 사진 전시장이 있다. 천천히 음미해본다.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사진도 있구먼...
그리고 3층..계단을 오르면서 나타난 미륵 삼존불의 온화한 미소..
어찌나 화려한지.... 만약 창문을 열어 놓았다면 남쪽의 탁 트인 풍경을 보고 계실 것이다. 오르면서 탄성을 자아냈는데..역시 3층은 최고의 감동을 주기 위해 이렇게 미륵불을 배치한 것이다. 특히 광배를 유심히 보라..활활 타오른다. 그것이 용솟음 쳐 닫집마저도 황금빛을 품어내고 있다.
천장을 본다. 궁궐에서 보았던 연꽃의 화려함을 보느라 고개가 아플정도다.
사방의 창문을 열고픈 충동을 느낀다. 문고리에 힘을 주었더니...움직이지 않는다.
현상적인 창을 열지 말고 마음의 창을 열어볼까?
눈을 감아본다..
도솔천의 극락의 세계가 하늘하늘 펼쳐진다.
내려갈 때는 108 번뇌를 되새기며 계단을 밟는다.
탑을 나왔다..얼마나 기분이 상쾌한지...
내가 믿는 예수님의 친구를 만난 기분이다.
주님의 친구도 주님이지..
건물 외부
몇년 전에 로마 바티칸 성당의 규모에 압도된 적이 있다. 신이 어떤 존재이길래 인간이 저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을까? "그래. 나약한 존재겠지.. " 그저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조형물만 봐도 신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이곳도 그렇게 느껴진단 말이다.
다시금 탑돌이를 하면서 세세하게 뜯어본다. 튼튼하게 지어졌단 말이야. 1층엔 약사불전, 극락보전, 대웅보전, 적광보전의 편액이 부처님을 모신 곳임을 말해준다.
2층 구장전, 수다라전, 법보전, 보장전의 편액은 경전을 모시고 있음을 말해주고,
3층 용화보전, 대자보전, 미륵보전, 도솔타전의 편액은 미륵전임을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탑 속에 여러 절이 있는 것이다.
상륜부를 유심히 보라. 상륜은 높이만 10.4 미터로 구리만 4톤이 넘게 들었으며 금속공예 전문가 4명이 1달 반 동안 달라붙어 완성한 것이란다. 외면은 특수 제작한 5mm 두께의 순동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곳곳에 금도금한 연꽃무늬와 풍탁을 설치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녹스는 구리의 빛깔을 더욱 빛나게 배려한 것이다.
주변의 보련산이 낮고 탑 높이가 43미터에 이르기 때문에 낙뢰의 위험이 항상 도사린다. 그래서 구리나 금보다 열전도율이 높은 백금으로 피뢰침을 만들었고 그 위에 옻칠까지 하여 코팅한 효과도 냈다. 이렇듯 상륜부는 전통기술과 현대기술의 적절한 만남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탑사는 건축학도의 필수 코스가 된 것이다.
독특한 전각들
탑에 비해 전각들은 소박하다. 산신각은 굴피집처럼 보인다.
그렇지. 굳이 화려한 단청의 팔각 지붕으로 지을 필요는 없지.
지장전이 특이하다. 고구려 장군총을 모방한 것이다.
지장전은 땅속에 묻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전각이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목탑과 지하형태의 지장전은 음양의 조화라고 할까?
의외로 요사채는 수수하다. 대나무 담장의 시골집 같다. 참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아니나 다를까 이 절이 비구니 절이란다.
연곡리 석비(보물 404호)
이곳 연곡계곡은 때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상류의 이 골짜기엔 비문 없는 백비가 있는데 바로 연곡리 석비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일반형 석비인데, 이수는 9마리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태로서 비신에 글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귀부의 거북머리는 꼭 말처럼 보인다. 비각으로 둘러 쌓여 있어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연곡리 삼층석탑
웅장한 목탑에 그나마 구석에 닳아빠진 삼층석탑이 있어 절 집의 아늑함을 더해준다. 탑의 보존상태도 좋지 않지만 약수물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정수기통 같은 느낌이 든다. 신선한 정한수를 흘려주는 삼층석탑..이 탑 때문에 3층목탑이 더 빛을 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보탑사 가는길
동서울 터미널이나 남부터미널에서 진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진천읍에서 연곡리행 버스를 이용.
승용차..중부고속도로 진천 IC를 빠져 나와 진천 시내를 가다가 21번 국도를 탄다.
김유신 탄생지를 물어보면 된다.
연곡저수지
날씨가 그렇게 더운데도 얼음이 꽁꽁 얼었다. 강태공은 세월을 낚는 것인가?
김유신 생가
1983년 김유신이 태어난 터에 다시 지은 집이다. 뒤에 보이는 산은 김유신의 태를 묻은 태령산이다. 진천 사람들은 김유신을 배출한 동네라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곳이 등산코스가 상당히 좋다고 하던데..난 시간이 없어 통과.
맛집소개- 송애집
붕어찜에 관한 한 충청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초평 저수지다. 이곳에 붕어찜 집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송애집'이다. (1인분 1만2천원)
특히 요새 붕어는 알이 두둑히 담고 있어 그 알을 씹는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진천방문은 순전히 알을 씹을려고 겨울에 간다.
고기 맛도 좋아야하지만 무엇보다 육질을 다룰 양념이 더욱 중요하다.
그걸 송애집이 잘 하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다.
얼큰한 국물에 살코미 적셔진 시레기를 집어 먹는 맛..
캬...죽인다.
'씹을 수록 달콤하다.'란 말이 여기서 나왔나?
뒤져보면 수제비가 숨어있는데..양념에 밴 옹이를 한 입에 넣고 찜 국물을 털어 넣으면
세상을 다가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차만 없었으면 소주 한 잔 마시는 건데.....
우리나라 최대 탑을 본 걸로 만족한다. 약간은 외형적으로 투박한 감을 느낀다. 그러나 내구성은 천년을 장담한다니 우리 후손들이 확인해주길 바란다.
전통기법과 현대기술을 최대한 살려서 올렸다는 3층석탑이 1천3백년전의 황룡사 9층목탑의 규모에 절반크기 밖에 안 되는 것이 오늘날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장인의 혼이 현대까지 이어 졌다는 자부심...
그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온다. 탑을 올린 비용도 기업이 낸 뭉칫돈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들이 낸 시주이기에 더욱 아름다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