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희망
내 꿈은 놀고 먹는 것이다
나는 게으른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되도록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너의 밥을 훔쳐 먹을 생각만 골몰해왔다
내 머리 속은 놀고 먹을 궁리로 가득하다
놀고먹는 生의 秘訣을 터득하기 위해
꽃피고 잎 떨어지는 세월을 갈고 닦았다
정신의 폭포수와 눈보라같은 잠을 견뎠다
한 때 公衆浮揚의 기적을 꿈꾼 적이 있는 나는
족집게처럼 너의 인생을 알아맞히기 위해
고독한 토굴 속에서 온갖 벌레들과 싸웠다
놀고먹는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오늘도 나느 기약없는 침묵의 뜰을 거닌다
밥이 있는 한, 그 희망 포기할 수 없다
결심
깍아지른 절벽 하나를 세워야 한다
날카로운 그믐달 하나를 새벽하늘에 걸어야 한다
저 서릿발 고스란히 견디는 검은 나무
일억 년쯤 그 자리 지키는 바위의 침묵
내 목숨으로는 결코 가 닿을 수없는
아득한 저편이 분명 있어야 한다
디스플레이
소금장수가 될 순 없을까
소금을 팔러 밤마다 살얼음 강을 건너는
국경의 사나이가 될 순 없을까
아내가 꺼내준 칠부바지를 입고
아내가 썰어준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본다
아이들은 벌써 저희들끼리 노는데 익숙하다
장식장위의, 텔레비전 옆의, 오디오
위의, 큼직한 액자 속의 사진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다
이 공연은 너무 오래 되었다
이 낯익은 패키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옆집의 옆집의 옆집, 윗층의 윗층의 윗층,
아래층의 아래층의 아래층
남자들도 필경은 나처럼 앉거나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나의 전생은 일찍이 끝이 났다
반란의 불길을 가까스로 피해
결사항전의 칼을 갈 때
힘이 다한 몸의 장렬한 옥쇄를 결심할 때
푸른 불똥을 가진 짐승의 시간이
한 순간 내 목숨을 앗아갔다
나는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나는 한 때 나를 옹호하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너를 물어뜯은 적이 있다
너의 살을 뚝뚝 씹으며 포효한 적이 있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피의 날들,
주체할 수 없는 증오 때문에 너를 숙청한 적이 있다
너를 제거하기 위해 가장 은밀한 시간의 틈새로
자객을 보낸 적이 있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로 책을 불태우고
사람의 목을 댕강댕강 날린 적이 있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고 하늘이 갈기 갈기 찢기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붉은 노을이 간지러워 옆구리를 긁다가
피묻은 칼을 후두둑 던진 적이 있다
반성도 없이, 나는 갈 때까지 가다가
내 손으로 내 눈을 찌르고 내가 내 무덤을 파서
오래 전에 비참하게 죽은 적이 있다
너에게 처형당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