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4. 부활절 세 번째 주일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1029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205 권시혁
예배로 부름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시95:6-7a)
예배 기원
사랑의 하나님! 광야와 같이 고달픈 세상 길에서 저희와 동행하여 주시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여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거룩한 주일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 몸과 마음에 건강을 주셔서 예배하는 백성으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삼위일체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이 시간,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게 하시고 구속하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의 온갖 무거운 짐과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게 하시고, 넓으신 주님의 품에 안겨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주는 귀한 보배(81)/구주를 생각만 해도(85)/어저께나 오늘이나(135)/ 부활하신 구세주(162)/예수를 나의 구주삼고(288)/어두운 내 눈 밝히사(366)
고백의 기도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죄인들에게까지도 한량없이 베풀어 주실 용서와 사랑을 의지하여 회개합니다. 지난 한 주간 저희는 주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지만, 저희는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욕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건만 저희는 멸망으로 이어진 넓은 문을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쾌락을 이루는 일에 물질과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주님의 명하심을 따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경건함을 잃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이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0414빌립에게 전도 받은 에티오피아 내시. 행8:26-39.
☞ 마음 문을 열고
연상호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 〈사랑은 단백질〉이 있습니다.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인데, 그 설정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치킨집 사장이 닭인데, 하숙생들이 치킨을 야식으로 시키자, 치킨집 사장은 족발집 사장인 돼지에게 대신 배달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하숙생들이 치킨을 먹으려 하자, 치킨집 사장인 닭이 찾아와 울면서 말합니다. 당신들이 먹으려 하는 그 치킨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름은 닭돌이, 나이는 여덟 살. 유난히 눈이 맑고 이 못난 애비를 끔찍이 따르던 착하디 착한 아이랍니다. 부디, 부디 그것을 알고 먹어 주시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이 영화를 보면서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이 TV에 출연해서 하는 말을 듣고는 모두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게 바로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살아 보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만, 결국 잡은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고, 자신의 건강만 해치게 될 뿐인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내시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나가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1:8). 또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핍박과 관련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사역을 위해 선발되었던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6:4-5)이 돌에 맞아,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7:54-60),
이 일로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8:1).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 중, 역시 구제를 위해 선택된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빌립도 피난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에는 빌립이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복음을 전해 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인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내시였다고 기록합니다.
내시가 어떻게 에티오피아 왕국의 국고를 맡아 관리하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의아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내시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 왕국의 왕은 하늘의 아들로 신성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왕은 세속적인 일들을 담당하지 않고, 나라의 모든 살림을 대비인 왕의 어머니가 관장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맡은 여왕을 가리켜 ‘간다게’라고 불렀습니다.
이집트의 왕을 ‘바로’라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 여왕의 명에 따라 모든 국고를 책임지는 관리라면 권력의 최상부에 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시였습니다.
여왕에게 신뢰를 주면서 잘 보좌할 수 있는 역할에 어쩌면 내시가 가장 적합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려고 일부러 내시가 된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니 말입니다. 그 덕에 그는 에티오피아 최고의 권력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코 만족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만족스러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 채워야만 채울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 채우려 해도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내시인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습니다. 한번 내시가 되면 다시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부와 권력은 그에게 아무런 만족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의 하나님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고넬료처럼 이방인이었지만 율법을 준수하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가면 갈수록 더욱 갈급함이 커졌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다른 이방인에 불과했기에 예루살렘 성전 외곽지역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성전 안의 성소나 지성소는 물론이고 여인의 뜰이나 유대인의 뜰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내시로서 하나님의 회중에 들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신 23:1).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이중 삼중으로 막혀 버린 상태였습니다. 권력을 획득함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그는 아무런 위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우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것 같지만, 단 한 번도 우리를 자비롭게 대한 적이 없습니다. 우상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생수를 공급할 것 같지만 결국 그 신기루를 찾다가 갈증 속에서 죽어가게 만듭니다.
그처럼 우상은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내시는 그가 원하는 최고의 권력을 얻었지만, 결코 행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에 올라가기 전에는,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더 이상의 원은 없을 거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를 얻고 난 뒤에도 그는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지위를 차지하게 된 순간 행복한 것 같았지만, 이내 그의 갈증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직업을 갖는 이유가 그 직업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우리를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우상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직업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최고 권력을 얻어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결국 자신의 남성성만 잃어버린 삶으로 전락해 버린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행복을 얻으려다 정작 중요한 것을 빼앗기고 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줄 알고 올인 했는데, 그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건강을 잃어버리고 가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직업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우상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이 내시에게 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셨고, 그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빌립은 원래 예루살렘 북쪽의 사마리아로 피난했습니다(8:5). 사마리아로 간 빌립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며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특별하게 나타나 남쪽으로 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지금의 가자지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가사로 가는 길은 광야 길이었습니다. 거기서 빌립은 에티오피아의 관리인 내시를 만났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에티오피아로 가는 가장 편리한 길은 로마가 닦아 놓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사로 가는 길과 가사에서부터 해변가 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다시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읽게 된 성경 두루마리는 이사야의 말씀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읽고 있던 부분은 메시아의 고난을 그린 5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이 말씀에 주목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5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채 읽고 있던 내시에게는 거의 무의미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큰소리로 성경을 읽었을 것이고, 그때 빌립이 그에게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내시에게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53:10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씨’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 이사야 56:3-5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사 56:3-5).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고자였던 내시에게 희망과 같은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까? 고난받는 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메시지가 그의 마음이 꽂혔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고난 받는 종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질문이 떠올랐을 때, 빌립이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증언했습니다. 사실 자신의 욕망을 얻기 위해 달려갔던 내시에게는 치킨 집 사장처럼 마른나무와 같은 육체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시에게 소망의 빛이 전해졌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해 주신다는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약속하지만, 결국은 우리에게서 모든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된 구세주로서 소망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당할 죽음을 대신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3. 내시는 참된 기쁨을 얻었습니다.
내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내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얻을 수 없었던 기쁨을 드디어 얻게 되었고, 기쁨으로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내시는 빌립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거나 바울처럼 선교사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다시 자기가 가던 길로 갔다고 기록할 뿐입니다(8:39). 그 이후의 삶은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에 대해서 더 깊은 조사를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자가 어떤 경우에는 성직으로의 부르심을 동시에 깨닫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시는 다시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직업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직업이 자신의 욕망(우상)을 추구하는 수단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행복이 주어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나 그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숙의 과정을 밟아나갔다면, 에베소서 6장에 있는 직장 윤리를 따라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 6:5-7).
이렇게 일하면 내가 원하는 지위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기쁨이 그 마음에 있으므로, 넘치는 그 기쁨으로 성실하게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 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그 자리에서 기쁨으로 사역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욕망이라는 우상을 마음속에 품고 억지로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는 기쁨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