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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별빛산악회
서울시연맹 교육기술위원
▶등반경력
03년 파키스탄 트랑고타워 등반
03년 설악산 미륵장군봉 좌벽 루트개척
05년 용대리 매바위 강풍20 단독개척
07년 울산암 우벽 개척 및 보수등반
▶등산 관련 자격
07년 등산가이드 2기
08년 등산강사 2급
▶수상경력
07년 제1회 네파컵 익스트림대회 2위
08년 제2회 네파컵 익스트림대회 우승
08년 적벽 무라길 속도대회 신기록(38분대)
박준규(朴俊圭·42·호상사)씨는 등반의 의미를 쾌감에서 찾는다. 아마추어 복서 출신인 그는 고교시절 TKO 왕이었다. 누구든 그의 주먹에 걸리면 여지없이 쓰러졌다. 9번 경기에서 판정승으로 이기고 진 게 한 번씩이고, 그밖의 승부는 모두 TKO로 끝냈다. 난타전 도중 상대방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이고, 휘두르는 주먹이 보이는 순간 그의 주먹은 여지없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보지도 않고 되돌아 자기 코너로 돌아가는 순간 쿵! 소리가 나고, 캔버스에 누운 상대방은 심판의 카운트 소리가 끝날 때까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려운 등반을 끝내면 이렇게 권투 경기에서 이긴 듯한 쾌감을 느낀다.
“산에 있는 시간이 1이라면 산 밖에서 2를 머물렀어요”
- 박준규는 지난 가을 인공등반 국내 최고수로 꼽히는 두 명의 클라이머와 설악산 적벽 무라길에서 경기를 펼쳤다. ‘무라’는 ‘무서워라’를 줄인 말이다. 그만큼 난이도와 고도감이 대단한 길이다. 그는 두 클라이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경기가 열린 무라길 제3피치는 A4급 인공등반루트예요. 실크랙에 간간이 헤드를 박고, 사이사이 손톱이 겨우 걸릴 만큼 작은 돌기에 훅을 걸고 오르는 등반로죠. 헤드나 훅이 빠지면 길면 20m 가까이 추락하는 루트예요. 막판 4~5m는 5.10급에 지나지 않지만 인공등반에서 체력이 바닥나고 고도감이 한층 높아진 뒤라 쉽지 않아요. 잠시 고민했어요. 성공과 추락 가능성이 반반이었으니까요. 머뭇거리다 보면 평생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아 밀어붙였죠. 되더군요. 마지막 볼트에 도착하는 순간 통쾌했어요. 무라길을 KO로 눕힌 기분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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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중순 판대 아이스파크 인공빙벽.
- 청소년 시절 그는 모험을 좋아했다. 고교시절인 84년 여름 LA올림픽 기념 자전거 대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구의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광장까지 가서 행사에 참가하곤 또다시 자전거를 타고 구의동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이게 그때 받은 열쇠고리예요(박준규씨는 인터뷰 도중 24년이 훨씬 지난 열쇠고리를 보여주었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요. 쫄쫄 굶고 행사를 마친 뒤 열쇠고리 하나 받고 돌아오자니 어찌나 힘들던지-. 지금처럼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없어 수시로 찻길로 올라오거나 가로질러야 했기에 더욱 힘들었어요. 황당한 행동도 많이 했죠. 잠실대교 부근의 돌산에서 놀 때는 형들이 ‘해봐, 해봐’ 하기에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으니까요. 어린 마음에 남자는 용감해야 한다, 생각했던 거죠.”
중2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동네 뒷산 격인 아차산을 찾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야영을 하면서 라면을 끓여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친구 두 명 모두 땅거미가 몰려오자 겁을 집어먹곤 모두 내려가 버렸다. 남자가 이까짓 것 하는 마음에 혼자 버텼다. 밤 10시를 넘어서자 비까지 내리면서 텐트 밑으로 차츰차츰 물이 스며들면서 상황이 나빠졌다.
- “아침이 올까 싶었어요. 사이비종교 맹신자들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주문을 외우는지 중얼거리지, 국기가 펄럭이는 소리는 누가 확 달려드는 기분이었고요. 새벽 6시쯤 돼서야 편안해졌어요. 라디오를 트니까 ‘난 바람 넌 눈물’이란 노래가 나오더군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물안개 덮인 어린이대공원쪽을 바라보니까 기분이 너무나 좋은 거예요.”
그는 도보산행으로 산에 입문했다. 91년 제대 후 모 전자회사에서 애프터서비스 업무를 담당해오던 그는 20대 후반인 95년부터 도보산행을 시작, 그 해 한북정맥 종주를 끝내고 97년에는 백두대간 종주산행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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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여름 설악산 적벽 독주길 등반.
- “중학교 수학여행 때 설악산에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암벽등반에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적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를 보곤 나도 언젠가 저런 암벽을 올라야겠다 마음먹었으니까요.”
그는 유달리 여러 등산학교를 나왔다. 97년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25기)을 처음으로 98년 암벽반(14기), 99년 한국등산학교 동계반(24기)과 고산거벽등산학교(2기)에 이어 정승권등산학교 빙벽반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이나 등산학교를 다녔다.
“도보산행을 하면서 간혹 혼자 암릉등반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도봉산 낭만길을 오르다 손으로 잡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한 2m쯤 떨어졌어요. 충격이었죠. 안전하게 다니려면 제대로 배워야겠다 마음먹은 게 그 때부터였어요. 기업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등산학교도 다녀보고 싶었고,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이름난 한국등산학교도 궁금했어요. 한국등산학교 암벽반 졸업식에선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첫날부터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선착순만 하면 1등으로 들어왔던 게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아요.참, 중학교 때 아차산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난 바람 넌 눈물’을 부른 신현대 선배와 인연을 맺은 것도 코오롱등산학교를 통해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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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겨울 판대 인공빙벽.
- 함께 즐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단독등반 추구
2003년 파키스탄 트랑고타워 원정은 고산거벽등산학교 때 인연맺은 산선후배들과 함께 나선 등반이다. 고산등반에 맛을 들이면 대개 빠져나오지 못하기 마련이건만 박준규는 그 한 번의 고산등반으로 히말라야 등반은 멀리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산인데, 트랑고타워 원정 중 산에 있은 시간이 1이라면 산 밖에서 머문 시간이 2였어요. 게다가 내게 산은 쉬는 곳, 편안한 곳이었는데, 전혀 아닌 거예요. 먼지투성이에 물은 어찌나 나쁘던지-.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이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이 내겐 맞다 싶더군요. 이후 외국산은 일본 산만 찾아요. 물 좋고 산 좋은 데다 직장생활에 관계없이 1주일이면 다녀올 수 있으니까요.”
고산등반에 대한 생각은 접었으나 등반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특히 단독등반에 열중했다. 인공등반을 배운 것 역시 단독등반 기술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악산 미륵장군봉 좌벽 인공등반 루트와 2005년 용대리 매바위에 개척한 강풍20(A3+)은 홀로 해낸 것이다.
- “개척 당시 초속 20m의 강풍이 불었기에 강풍20이라 이름지은 거예요. 50m쯤 올랐을 때 하얀 조약돌이 보여 옛날 예까지 물이 차 있었구나 생각하니 정말 신기하더군요. 기존루트는 이미 답을 알고 접근하는 거지만 개척등반은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점에서 두렵기도 하지만 궁금증에 신비감도 넘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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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인수봉 귀바위 등반.
- 그는 인공등반 기술에 대해 99년 고산거벽등산학교에서 배웠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2000년 ‘트랑고의 꿈’을 등반하다가는 도중에 길을 잃고 포기하고 이후 한동안 단독등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단독등반의 매력에 제대로 빠진 것은 2004년 적벽 독주길 등반 이후였다. 그가 단독등반을 좋아하는 데는 위험을 무릅쓴 모험심이 아닌 함께 즐기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촬영을 위해 독주길을 단독등반하면서 자신이 생긴 것 같아요. 이틀간 8차례나 오르내렸으니까요. 인공등반은 한 피치 등반하는 데만 해도 두세 시간이 기본이에요. 밑에서 확보를 보는 사람에게는 지루한 시간이죠. 단독등반은 그렇게 불필요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추락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다보니 더욱 안전에 철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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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키스탄의 네임리스타워 등반중 죽음의 콜에서 홀링을 마치고 휴식중.
- “아침이 올까 싶었어요. 사이비종교 맹신자들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주문을 외우는지 중얼거리지, 국기가 펄럭이는 소리는 누가 확 달려드는 기분이었고요. 새벽 6시쯤 돼서야 편안해졌어요. 라디오를 트니까 ‘난 바람 넌 눈물’이란 노래가 나오더군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물안개 덮인 어린이대공원쪽을 바라보니까 기분이 너무나 좋은 거예요.”
- 파트너와 바로 옆에서 따로따로 등반하면서도 충분히 등반을 즐길 수 있고요.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하는 건 아니예요. 적어도 누군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하니까요. 혼자 등반하다 추락 직후 혼절이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니까요.”
초교시절 야영산행을 통해 담력을 키웠고, 권투를 통해 싸움꾼 기질을 익힌 그는 한때 스포츠클라밍을 즐겼다. 99년에는 당시로선 가장 어렵다는 간현암 신토불이(5.13)도 올랐고, 원골(5.13b)도 해냈다.
“목표를 정해야 산을 더욱 열심히 다니겠다는 생각에 바위에 몰입해 있을 때였죠. 5월부터 네댓 달 동안 줄기차게 간현암을 찾았어요. 그 기간동안 5.11급에서 5.13급으로 끌어올린 거예요. 5.11급과 5.12급, 5.12급와 5.13급 한 급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커요. 자기 수준에서 한 단계 높은 난이도의 루트에 붙으면 처음엔 힘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다 차츰 자세가 나오고 자신감까지 생기면서 해내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황홀할 지경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99년 이후 스포츠클라이밍쪽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좀더 어려운 루트에 도전하려면 체계적으로 운동해야겠다 싶어졌어요. 그런데 매일매일 운동을 하고, 먹는 것도 조절해야 한다 생각하니 갑갑해지더군요. 산은 쉬는 곳이지 구속하는 곳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즐기는 쪽으로 등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인공등반이 마음에 들어요. 인공등반은 공식과도 같아요. 스포츠클라이밍은 한 주만 쉬어도 실력이 뚝 떨어지는데 인공등반은 한 번 배우면 오래도록 가요. 지난 가을 익스트림 인공벽대회는 2년만에 처음 한 인공등반이었고, 무라길 등반도 전혀 연습 없이 한 거예요.”
그는 이렇게 다양한 등반을 경험하고 여기에 강한 체력까지 뒷받침되어 종합등반 능력이 뛰어난 클라이머로 자리잡았다. 그로 인해 2007년 제1회 네파컵 익스트림대회에서 2위에 입상하고, 이듬해 제2회 대회 때는 우승을 차지했다.
“95년엔 산악마라톤대회에 나갔어요. 반환점까지 잘 뛰었어요. 오버페이스하는 바람에 제한시간 안에 겨우 들어왔지만요. 네파컵 대회는 종합등반이에요. 배낭 메고 산악구보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클라이밍에 주마링, 홀링, 티롤리안브리지까지 해야 하니까요. 이틀동안 벌이는 시합이다 보니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지요. 고교시절 권투하느라 다진 체력 덕분인 것 같아요. 그땐 세계 최고 선수가 되기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를 악 물고 운동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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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편이 어려워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할 생각에 92년 시합 중 사고를 당한 김득구 선수가 나온 아마추어 권투 명문 위례상고를 다닌 박준규는 시험관의 모호한 판정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더 이상 권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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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약혼녀 지주연씨와 함께 설악산 칠형제봉 리지에서. / 서울등산학교 교육.
- “지금 165cm 키가 초등학교 때 키예요. 체격은 작았지만 싸움해서 져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담임선생께서 넌 싸우러 학교 다니는 거냐 하셨을 정도니까요. 제대 후 잠시 운동을 다시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어요. 어차피 프로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면 머리를 다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어요. 잘 내린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계속 권투한 친구 치고 성공한 친구도 거의 없고, 대부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참, 권투 끊고는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어요.”
97년 등산학교를 다니기 위해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후 실내암장과 실내인공빙장을 관리하고, 장비점 근무도 해온 박준규씨는 현재 등산·캠핑장비 수입판매업체인 호상사에서 애프터서비스 파트에서 근무하고 있다. 호상사를 통해 유통되는 암빙벽장비뿐 아니라 캠핑장비 등 수많은 장비 중 문제가 생긴 물건은 그의 손을 거치는 순간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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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상사 애프터서비스실에서. / 2000년 일본 백마악 산행중 설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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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명이 ‘죽을 때까지 배우며 산다’예요”
“한때 중고장비도 팔고 수리도 해주는 사무실을 직접 운영했었어요.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아이스바일과 아이젠 튜닝을 많이 해요. 혼합등반용과 빙벽등반용은 스타일이 다르거든요. 초교시절부터 자전거에 미쳐 지냈던 게 손재주를 키워준 것 같아요. 구의동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성남 모란시장까지 가서 펑크 때우는 본드니 부품을 사왔으니까요. 잘 안 나가면 기어를 분해해서 싹 닦은 다음 조립해요. 그러면 팅팅 소리를 내면서 잘 굴러갔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석쇠를 만들어 상을 받았더니 담임선생님이 그쪽으로 목표를 정하라 하시더군요. 그러면 밥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거라면서요. 결국 그렇게 되었네요.”
박준규씨는 오투월드 근무할 때에서 아마추어들을 대상으로 빙벽을 가르쳤고, 지금은 호상사 부설 서울등산학교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후배를 키우는 일에도 열중할 생각이지만 저 역시 끊임없이 배워야할 거예요. 3월에 2급 응급구조자격증 교육도 신청해 놓았어요. 누군가 가르치려면 그에 앞서 배워야 하고 자격증도 있어야 할 테니까요. 등산가이드와 등산강사 자격도 그래서 땄던 거고요. 머리가 나빠 수시로 까먹지만 배우고 또 배우면 또다시 채워질 테니까요. 배움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좌우명도 ‘끝까지 배우며 산다’예요.”
마흔 둘.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는 아직 미혼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98년 실내암장에서 인연을 맺은 이후 오래도록 사귀어온 약혼자도 있고, 얼마 전 방 세 칸짜리 집도 마련, 곧 식을 올릴 계획이다.
“1월 중순 열린 노스페이스 빙벽대회에 올 봄 결혼하기로 한 지주연씨와 함께 참가했어요. 성적은 둘 다 그냥 그래요(난이도 경기에서 박준규씨는 13위, 지주연씨는 9위를 기록했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작은 장비점이 딸린 암장을 운영했으면 해요. 거기서 제 운동도 하고 후배들도 가르치는 거죠. 등산학교를 막 나온 이들이 가장 위험해요.
걸음마 겨우 익힌 상태에서 낭떠러지 같은 곳에 나서는 격이니까요. 제가 가르친 교육생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해줄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클럽이 아닐까 싶어요. 그들과 흰 산도 찾고 저나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깊은 산에 들어가 며칠씩 지내고픈 마음도 있고요. 제게 산은 영원한 안락의 공간이니까요.”
/ 글 한필석 차장
첫댓글 대단힙니다, 준규씨.
동대문 에서 마이크로 너트를 하나둘모으던 그사람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