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 오후 1시 한예원에서는 강사들이 마련한 간략한 스승의 날 기념식이 있었다.
정영태국장님과 함께 받은 황송하고 과분한 자리를 마련해 준 강사들께 감사를 드리며
부끄럽지 않는 지도자가 되도록 자신을 채찍해야 할 것이다.
스승이 아니라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라고 항시 생각해 왔기에 이런 자리는 언제나 쑥스럽고 멋적다.
斅學半이란 가르치는 반은 배우고 그러므로 서로 敎學相長 함께 성장해 왔기에
오히려 학습자로 인해 더많은 배움을 얻어다고 생각한다.
스승의 날에 앞서 13일엔 30여년 지도해고 이끌어 주신 동곡 김시황선생님과 대학원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정병호교수님을 시골집에 모셔서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스승의 날이면 매년 한유의 사설을 읽어본다.
◎한유의 사설(師說)
古之學者 必有師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고지학자 필유사 사자 소이전도수업해혹야.)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스승이 있었는데, 스승이라 함은 학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서 도(道)를 전하기 때문이다.
人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
(인비생이지지자 숙능무혹. 혹이불종사 기위혹야 종불해의.)
사람이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의혹이 잘 없겠는가? 의혹하면서도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의혹됨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
生乎吾前 其聞道也 固先乎吾 吾從而師之 生乎吾後 其聞道也 亦先乎吾 吾從而師之 吾師道也.(생호오전 기문도야 고선호오 오종이사지 생호오후 기문도야 역선호오 오종이사지 오사도야.)
내 앞에 태어나서 도(道)를 들었음이 진실로 나보다 앞선다면 내가 따라가서 스승으로 하고 내 뒤에 태어났더라도 도(道)를 들었음이 또한 나보다 앞선다면 내가 따라가서 스승으로 함이 내가 도(道)를 스승함이다.
夫庸知其年之先後生於吾乎. 是故 無貴無賤 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부용지기년지선후생어오호. 시고 무귀무천 무장무소 도지소존 사지소존야.)
대저 그 나이가 나보다 앞이나 뒤에 태어났음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귀하고 천함도 없으며 나이가 많고 적음도 없으며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
嗟乎. 師道之不傳也久矣 欲人之無惑也 難矣.
(차호. 사도지부전야구의 욕인지무혹야 난의.)
아! 스승의 도(道)가 전해지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사람들이 의혹 없기를 바라기가 어렵게 되었다.
古之聖人 其出人也 遠矣 猶且從師而問焉, 今之衆人 其下聖人也 亦遠矣 而恥學於師.
고지성인 기출인야 원의 유차종사이문언, 금지중인 기하성인야 역원의 이치학어사.)
옛날의 성인(聖人)은 사람들보다 뛰어남이 컷지만 오히려 또 스승을 따라가서 물었는데,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성인(聖人)보다 뒤떨어짐이 또한 심하면서도 스승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한다.
是故 聖益聖 愚益愚 聖人之所以爲聖 愚人之所以爲愚 其皆出於此乎.
(시고 성익성 우익우 성인지소이위성 우인지소이위우 기개출어차호.)
이 때문에 성스러운 이는 더욱 성스러워지고 어리석은 이는 더욱 어리석어지니, 성인(聖人)이 성스럽게 되는 이유와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게 되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가?
愛其子擇師而敎之 於其身也 則恥師焉 惑矣.
(애기자택사이교지 어기신야 즉치사언 혹의.)
자기 자식을 사랑하여 스승을 골라서 가르치도록 하는데, 그 자신에게 있어서라면 그러한 스승을 부끄러워하니 미혹된 것이다.
彼童子之師 授之書而習其句讀者也 非吾所謂傳其道解其惑者也.
(피동자지사 수지서이습기구독자야 비오소위전기도해기혹자야.)
저 어린아이들의 스승은 책을 주고서 그 구두(句讀)를 익히게 하는 자이니, 내가 말한 바의 도(道)를 전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자는 아니다.
句讀之不知 惑之不解 或師焉 或不焉 小學而大遺 吾未見其明也.
(구두지부지 혹지불해 혹사언 혹불언 소학이대유 오미견기명야.)
구두(句讀)를 알지 못하고 의혹을 풀지 못하는데, 어떤 것은 스승을 삼고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작은 것은 배우면서 큰 것은 버리니, 나는 그들이 현명하다고 보지 않는다.
巫醫樂師百工之人不恥相師 士大夫之族 曰師曰弟子云者 則群聚而笑之. 問之則曰彼與彼年相若也 道相似也, 位卑則足羞 官盛則近諛 嗚呼! 師道之不復 可知矣. 巫醫百工之人 君子不齒 今其智乃反不能及 其可怪也歟.
(무의악사백공지인불치상사 사대부지족 왈사왈제자운자 즉군취이소지. 문지즉왈피여피년상약야 도상사야, 위비즉족수 관성즉근유 오호! 사도지불복 가지의. 무의백공지인 군자불치 금기지내반불능及 기가괴야여.)
무당과 의원, 악사(樂師)와 모든 기술자들의 사람들은 서로 스승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사대부(士大夫)의 무리들은 스승이라 말하고 제자라고 말하며 일러주는 자라면 무리지어 모여서 비웃는다. 그들에게 물으면 말하기를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같고 도(道)가 서로 비슷하다.”라고 하면서 지위가 낮으면 넉넉히 부끄러워 하고, 벼슬이 높으면 가까이 아첨하니, 오호라! 스승의 도(道)가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당과 의원, 모든 기술자들의 사람들은 군자(君子)들이 끼워주지도 않지만 지금 그들의 지혜는 도리어 잘 미치지 못하니, 괴이할 수 있음이 아닌가?
聖人無常師 孔子師郯子, 萇弘, 師襄, 老聃 郯子之徒 其賢 不及孔子.
(성인무상사 공자사담자, 장홍, 사양, 로담 담자지도 기현 불급공자.)
성인(聖人)은 일정한 스승이 없으며, 공자(孔子)는 담자(郯子), 장홍(萇弘), 사양(師襄), 노담(老聃)을 스승 삼았는데도 담자(郯子)의 무리가 그 현명함이 공자에 미치지 못하였다.
孔子曰 三人行 則必有我師. 是故 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공자왈 삼인행 즉필유아사. 시고 제자불필부여사 사불필현어제자. 문도유선후 술업유전공 여시이이.)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연고(緣故)로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못한 것이 아니고,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도(道)를 들음은 선후(先後)가 있고 기술(技術)과 학업(學業)에 전공(專攻)이 있으니, 이와 같을 뿐이다.
李氏子蟠年十七 好古文 六藝經傳 皆通習之. 不拘於時 請學於余 余嘉其能行古道 作師說以貽之.
(리씨자반년십칠 호고문 륙예경전 개통습지. 불구어시 청학어여 여가기능행고도 작사설이이지)
이씨(李氏)의 아들 반(蟠)은 나이가 열일곱인데 옛 글을 좋아하고 육예(六藝)와 경전(經傳)을 모두 익혔다. 시속에 구애되지 않고 나에게 배우기를 청하니, 나는 그 옛 도(道)를 잘 행함에 사설(師說)을 지어 그로써 퇴지(貽之)를 가상(嘉尙)히 여겼다.
'사설(師說)'의 내용은, 스승의 정의를 제시하였고 스승의 필요성과 스승 삼는 방법을 “나보다 천하고 나이가 적더라도 나보다 먼저 도(道)를 들었으면 스승 삼는다.”라고 하여 당시에 남에게 배우기를 꺼리는 풍조를 비판하였으며, 스승이란, “글을 가르치고 지식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혹을 풀어주고 도(道)를 전하는 사람을 스승 삼는다.”고 하여 참 스승으로 정의를 했다.
살펴보건데, “이 때문에 귀하고 천함도 없으며 나이가 많고 적음도 없으며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是故 無貴無賤 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시고 무귀무천 무장무소 도지소존 사지소존야.)”라고 하였는데, 나보다 천하고 나이가 적더라도 나보다 먼저 도(道)를 들었으면 스승이라 하였고, 도(道)를 스승(師)의 앞에 두었[道之所存 師之所存也](도지소존 사지소존야)으니 “道之所存 師之所存也”라는 글을 스승에게 올리면 욕됨이 될 수 있으며, “도존사존(道存師存)”이란 글은 선생된 자가 스스로 자경(自警)하는 글로 써야 타당하다.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에 있는 “道之所存 師之所存也”라는 글은 스승에게 올리는 글이 아니고 선생된 자가 자신을 채찍하며 자경(自警)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