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첫째날
1. 호후 텐만구((防府市 天滿宮)
이틀간 타고 다닐 전세버스가 처음 가 닿은 곳은 야마구치 시의 정남쪽 세토 내해(內海)에 접해있는 호후(防府市) 텐만구(天滿宮)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10세기 초에 창건된 가장 오래된 천만궁이며, 일본3대 천만궁(교토 北野天滿宮과 후쿠오카 太宰府天滿宮)의 하나로 학문의 신 스가와라 미치자와를 모신 사당이다. 수많은 신사와는 달리 명치신궁에 버금가는 품격 높은 곳이며, 특히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느껴져 개인적으로 관심이 큰 곳이기도 하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9세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스가와라 미치자와(845~903)는 다섯 살에 일본 고유의 시를 짓고 열 살부터는 한시를 쓴 신동으로, 그리고 사후에는 “천만궁의 천신 · 학문의 신 · 문화의 신”이라는 일본인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영원히 사랑을 받고 있는 참으로 이채로운 존재다. 한편, 1945년 패망하기 전의 히로히토 일본왕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었는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항복하고는 이른바 ‘인간선언’을 통해 자신은 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고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내려와 시민들과 악수하고 체육대회에 참석하는 등 ‘인간세계’에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이 두 얘기는 우리가 일본인의 기질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도 있으리라.
학문의 신 스가와라 얘기를 마저 해보자. 일찍이 다섯 살에 신동으로 유명해진 그는 아버지 스가와라 고레요시와 어머니 오오토모의 3남매의 막내로 서기 845년 8월 1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증조부 때 ‘하지’에서 ‘스가와라(菅原)’로 성을 바꾸었는데, 이 족보는 <일본서기> 등에 의하면 천손 곧 신라에서 건너온 왕자인 천일창(아메노히보코)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어, 일본인이 모시는 천신이 바로 신라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조정의 신임이 두터웠던 스가와라 미치자와가 모함을 받아 큐슈의 지방관리로 좌천당하고, 다음해인 903년 2월 25일 58세로 흰 매화꽃이 지듯 세상을 하직하자, 조정은 그의 시신을 교토로 옮기려 했으나 수레를 끌던 소가 멈춰 움직이지 않음으로 그곳에다 장례를 치렀다. 그 후 그를 중상모략 했던 여러 권세가들이 비명행사를 당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혼령이 노하여 일어난 일이라 여겨 묘소에 사당을 짓고 그의 혼령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천만궁의 유래이며, 천만궁의 상징물로 ‘청동 우신상(牛神像)’이 자리잡게 된 사연이다. 그들은 이 황소의 뿔을 만지며 입신양명을 빌고, 코를 만지며 재물에 대한 소원을 빈다. 그런데 10여 년 전 후쿠오카의 다자이후천만궁에서 만난 소는 뿔이 유난히 반들거린 것 같은데, 오늘 이곳의 소는 코가 반들거리는 걸 보니, 세태가 출세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씁쓸하다.
또 하나 천만궁의 명물은 매화인데, 스가와라는 생전에 국화와 매화를 유난히 사랑했고, 죽는 날 매화가지가 교토에서 큐슈로 날아와 하룻밤 새 6천 그루가 꽃을 피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다자이후텐만궁의 매화는 7백년이 넘는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경내를 다 돌아보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눈길을 끄는 고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성스레 가꾸는 매화원이 있고, 그 속에서 책을 지고 있는 소년상과 곳곳에 출생기념으로 심은 매화가 팻말을 달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쯤에서 자꾸 백제의 왕인박사가 떠오른다. 그에게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한 천민 수제자가 병이 들어 단명하자, 장사 지내고자 시신을 수레에 실어 운반하던 도중 소가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매장하였고, 그 뒤로 계속 불길한 일이 발생하여 사당을 세워 처음에는 ‘안락사’로 하였다가 ‘천만궁’으로 개칭하였다는 스토리다. 왕인박사는 백제 제17대 아신왕 때 32세의 나이로 일본국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논어와 천자문, 도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학문의 스승이 되고, 일본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된 역사적 인물이니까 우리에게는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얘기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저 묵묵히 이런 얘기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학문의 신을 믿고 의지하며 천만궁에서 행복을 빌며 겸손하고 정갈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자세다.
교토의 기타노천만궁은 그가 정계에 진출해 대활약을 하던 곳이고, 후쿠오카의 다자이후 천만궁은 교토에서 좌천되어 억울한 심정으로 죽어간 곳에 세운 사당이란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면, 이곳은 그의 성장기의 무대이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10여 년 전 큐슈를 여행할 때 들렀던 다자이후 천만궁에 비하면 규모가 작으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라 오히려 더 정감이 간다. 입시철이 아닌데도 시민들이 아이들에게 전통복장을 입혀 함께 기도하고 가르치는 걸 보면, 교육의 장소로써의 기능이 큰 것 같다. 패키지여행은 늘 시간에 쫓겨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없지만, 곳곳에서 유서 깊은 내력과 기품, 그리고 특히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시민들의 모습이 무척 경건하고 평화로워 보여 부럽기까지 하다. 아직 교토의 천만궁은 가보지 못했지만, 천만궁의 배치구조와 상징들은 이제 대충 눈에 들어온다.
하필 할 말도 관심도 제일 많은 이곳을 왜 제일 먼저 왔을까. 시작하자마자 벌써 지쳐버렸다. 여행이란 아는 만큼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은 눈으로 보지 않고, 자꾸 마음의 눈으로 보려는 본성을 지닌 존재이지 않은가. 여기 올린 사진이 그 증거다. 어쩔 수 없이 내 멋대로 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여, 용서하시게나.
▲ 일본 신사의 첫 관문이자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새를 형상화한 것으로, 신(神)과 인간을 이어주는 메신저 역활을 하는데, 우리의 '삼족오(三足烏)'와도 의미의 연결성을 지닌다
▲정문인 도리이를 지나면 입구를 지키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코마이누(高麗犬) 석상이 좌우에 버티고 있다. 친구는 지금 저 고려견을 다시 데려가려고 궁리하는 것 같은데... 글쎄...
▲ 입구의 도리이에서 한참 올라가면 본당 앞에는 이렇게 누운 황소가 있고, 그 앞에는 또 테즈미야(手水舍)라는 석정(石井)이 있어, 신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고 입을 헹궈야한다.
▲ 천만궁이라는 든든한 요람 속에서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나 어른이 된다.
▲ 천만궁 뜰의 필총(筆塚:붓무덤)은 이곳이 학문의 신이 있는 곳이란 의미를 강조하고 있고, 또 경내에서는 소원을 적은 나무팻말 에마(繪馬)도 반드시 만나게 된다. 대부분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 천만궁의 또 하나의 상징은 매화다. 매화원의 매화는 저렇게 하얀 팻말을 달고있는데, 다가가 보면 모두 출생기념이란 게 이채롭다.
▲ 일본인들의 '인생의례'가 궁금하여 사진을 확대하여 보니, 그들의 일생이 한눈에 들여다보이고, 뭉치면 지독하고 얄밉지만 개인은 상냥하고 예의바른 이유를 알만하다. 내용은 이 여행기 맨끝에서 다시 언급할 생각이다.
2. 유다온천마을에서 잠시 머물다
유다(湯田)온천은 지도를 보니 호후 정북 방향의 야마구치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제법 떨어진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잠시 길거리 족욕장에 발 한번 담그러 들렀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족탕(足湯)은 길 하나씩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 네 군데가 밀집되어 있었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족탕으로 가 주민 2명을 밀어내고 서둘러 발을 담갔으나, 14명이 앉기에는 비좁아 금방 일어서버렸다. 잠시 거리 구경을 해보니 역시 깨끗하다. 한 친구는 담배를 빼물고도 불을 붙이지 못한다. 꽁초 하나 보이지 않는 도로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주민 한 사람이 담배를 문 채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우리보다 담배가 자유롭다. 외국에 나와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경직되고 융통성이 없는지, 그 대표적 예가 담배문화임을 절감한다.
족탕 골목 입구에 있는 7언절구 한시인 「溫泉春色」 시비와 안내판을 사진에 담아 확대해보니, 유다온천마을의 봄 경치가 ‘야마구치(山口)10경’에 꼽히는 모양인데, 뜯어보니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山川秀孕陰陽炭 天地鑄成造化爐”이라는 전반부가 이 온천마을이 자랑하는 봄빛인데, 산천과 천지 곧 온 세상이 희부옇게 부글거리며 김을 피워올리고, 용광로가 부글부글 끓어 쇳물로 무얼 만들어내듯 하다니? 자연이 빚어낸 노천탕 풍경이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옥도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또 하나, 야마구치 여행에서는 일본의 보수적 자부심과 그 밑에 잠재되어있는 광기 같은 것이 자꾸 느껴진다. 가까이 하기(萩)야마구치신용금고의 붉은 벽돌건물이 있는데, 입구에는 야마구치가 메이지유신 발원지로 2018년이면 150주년이 된다는 붉은 깃발이 선정적으로 나부끼고 있다. 아직 3년이나 남았는데 하다가, 문득 이곳이 정한론의 주인공들이 살던 땅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또한 아베수상의 고향도 이곳 야마구치현 나가토(長門)라는 사실도 상기된다. 600년 전에 흰 여우가 상처부위를 온천물에 담가 치료하는 것을 보고 온천을 발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이 유다온천, 그래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맨홀뚜껑과 유다역 앞에는 커다란 백여우상이 서 있다고 한다. 이 깨끗하고 조용한 온천마을에서 한일관계도 흰 여우처럼 치유되기를 빌어보는 망상(?)에 잠깐 젖어본다.
버스를 짧게 타고 식당으로 갔다. 꽤 먹을 만한 점심이다. 급성장염이 다 나은지 실험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면서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조니워커를 반주로 한 잔 마셔보았다.
▲ 버스정류장이 하도 이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사진속으로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걸어들어오는 저 내공!
▲ 식당에서 나와보니 동백이 활짝 피어 반긴다. 가을이 깊어가는데... 아, 여기는 남쪽 섬나라이지. 나무울타리도 싱그럽다.
▲ 이곳에는 황옥 같은 좋은 돌이 산출되고, 도자기 굽는 좋은 흙도 나는 곳인 것 같다.
3. 루리코지(瑠璃光寺)
역시 버스를 짧게 탄다. 유다와 루리코지 모두 야마구치 시내에 있기 때문이다. 14세기 중반의 무장 오우치 씨가 당시의 수도였던 '교토'를 동경하여 만든 도시 야마구찌, ‘서쪽 의 교토“로 불리는 야마구치의 대표 관광명소인 루리코지(瑠璃光寺) 주차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정문 앞에는 ’瑠璃光寺‘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뒤돌아보니 주차장 쪽에 왠 사무라이가 동상으로 높이 서 있다. 검도와 거합도 사범을 지낸 아무개라는데, 그럼 이 사람이 우리나라로 치자면 절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절 경내에 칼을 찬 무인동상이 두 개나 더 보이니, 참으로 어수선하고 흉해보인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우측에 ’고잔공원(香山公園)‘이란 표지석이 나타난다. 작은 연못 너머 높이 31.2미터의 탑이 숲위로 아름답게 솟아있다. 그 유명한 일본 국보인 5층탑이다. 호류지, 다이고지와 함께 일본 3대 명탑 중에 하나라 한다. 이 연못가가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뷰포인트다. 단체기념 촬영을 하고 정원을 지나 절로 들어갔다. 규모가 참 작고 법당이나 불상이 모두 우리에 비하면 조악스럽다 할 정도다. 대형염주와 부처님 발이 새겨진 석물에 그나마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오층탑(五重塔)으로 내려왔다. 가까이서 좀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다. 국보답다. 15세기에 전사한 당시의 번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 제자들에 의해 건립된 것이라는데, 우아하고 아름답게 휘어져 올라간 5층의 지붕과 상층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탑의 균형이 절묘하다. 또한 지붕 모서리에 달려있는 풍경이 미인의 귀거리처럼 아름다워 쳐다보는 앙각의 디자인이 일품이다. 밤에는 조명을 밝혀 낮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한다.
절 밖으로 나와 안내판을 읽어보니, 19세기 중반에 이 땅을 다스린 모리 씨와 관련된 건축물과 걸으면 반향음이 일대에 퍼져 ‘우구이스하리(삐걱거리는 마루)’라 불리는 돌기둥이 있다는 게 구미를 당기지만 단체여행이라서 다시 가볼 수는 없다.
첫댓글 멋진가이드 이구락 다음엔 자네가 가이드을 ------ㅎㅎㅎㅎ내용 너무 충실 하며 35회 친구 모두가 들어와 같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 입니다
고맙네. 오랜만에 사진 올리려니, 시행착오가 잦아 진도가 잘 나가지 않네.
이제야 좋은 글과 이미지가 올라와~너무 반갑고~이구락 회원의 많은 활동 기대합니다^^~
우수회원으로 등업!~축하드립니다^^~!
이친구 넘,
멋지네요!
잘~생긴 아지랑이님! 우수회원 등업!~축하드립니다!~ㅎㅎ~
억쑤,감사합니다^^
걑이가질 못하였는데 늦게 혼자 그길 따라 가 볼려고 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