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창시절에는 장군감이라는 인물평을 많이 들었는데
군생활 시절에는 오히려 군인 같지 않고 선비 모습이라는 평을 듣다.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다. 학창시절 나는 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4학년 때는 기계체조반에 선발 되었고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선발 되었다.
중학교 삼학년때에 학교 대표선수로 뽑혀
뙤약볕의 여름방학 때에도 학교 운동장으로 불려나가 육상연습을 해야 했다.
나는 불체질로 여름을 가장 싫어 했던 때에
하기 싫고 힘든 달리기 연습이 지금도 끔찍하게 기억된다.
운동은 무엇을 해도 동창들 사이이서는 모두 우수한 편이었으니
장군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듯 하다.
나는 늦게 향촌 대천농고를 졸업했으니
육사는 응시도 못 해보고 삼사관 학교에 응시하여 2년동안 훈련을 받던 때
분기별 體力檢定(체력검정)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특급 판정을 받았다.
6개 종목에서 모두 특급 수준 평가를 받은 것이다.
100m는 12초 이내가 특급이고
2000m 달리기는 7분내에 주파해야 한다. 나는 6분에 뛰기도 하다.
30kg짜리 사낭 메고 뛰기는 100m를 18초내에 주파 해야 특급이다.
턱걸이는15회 이상이지만 나는 20회를 했고
제자리 넓이 뛰기는 2m 60cm이상이 특급인데 나는 2m 70cm 를 기록했다.
수류탄 던지기는 46m이상 던져야 한다.
나는 최고 60m를 넘게 투척한 적도 있다.
야구선수로 오해받기도 했다.
특히 훈련 종목마다 등급별로 점수를 받는다.
예컨대 낮은 포복 요령을 가르치고 조별로 경쟁해서 1등을 하면 만점을 받는다.
초등학교 때 장애물경기 때도
1등을 했던 나는 운동신경이 빨라 항상 1등을 하다.
수영도 4종목 모두 그러했다.
전방에 배치되어 가을에 체육대회가 있었다.
계급별 이어달리기에 내가 중위 계급으로 뛰매 소위까지 3등의 순위의 바톤을
내가 운동장 한바퀴 뛰는 동안 모두 추월하여 1등을 해서
점수가 가장 많은 종목이었 탓으로 우리부대가 역전 우승한 일이 있다.
여러선수가 출전 했지만 부대장은 연단 자리에서 뛰어 내려
나에게만 달려와서는 좋아라 포옹해 주던 기억이 있다.
그 부대장은 만능이라며 나를 지칭해서 팔방미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당시에 한글전용 시절로 한문을 너무 모른다 하여
군단장의 지시가 내려와 업무일지를 비롯하여
교안, 브리핑챠트 등 모두 한자로 쓰라고 할 때이다.
부대장이 간부교육 교관으로 선정되어 한숨 쉬며 고민을 하던 모습을 보고
어떤일로 고민 하시느냐 질문하니 챠트를 한자로 써야 하는데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자진해서 붓글씨로 그 차트를 쓴 일이 있어 크게 칭찬 받았고
그 일이 소문이 나서 군내 한문실력 1인자 역으로 지칭 되어졌다.
광주의 관구사령부 작전처 교육장교로 보직 받았을 때에는
내 업무보다 붓글씨 한자 챠트사 노릇까지 하느라
더욱 바뿐 군 장교 생활로 지낸적이 있다.
특히 감찰 등이 있을 적에는 붓글씨 족자글씨까지 써야 했다.
아마추어 글씨로 족자비용이 아까운 글씨 수준이니
글씨를 쓸 수 없다 하여도 별 수가 없었다.
대위의 계급으로는 령관급 상관들 지시를 거역 할 수가 없었으므로
강제로 족자 글씨를 수십장 쓴일도 있다.
아마도 그 글씨들이 아직도 어느 곳엔가는 족자로 걸려 있을 것이다.
하여 선비로 알려지니 군인이 선비지칭은 칭찬이 아니다.
그때에 나에게 祖父神明(조부신명)이 강림하였다.
군생활을 못하게 된 것이다.
전역지원서를 내어도 지휘통신의 중심인 通信隊長(통신대장) 직책으로써
지휘관들은 번번히 나의 전역지원서를 묵살했다.
결국 神病(신병)이 심해져
전방부대의 사단 통신대대 행정과장 보직으로 전역을 하게 되다.
나의 신병은 위장병이었다.
하여 일년이면 한 두차례씩
약 한달간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 한채 군복무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니 2년만에 체중이 20kg이나 줄었으므로
체력적으로 도저히 군 생활을 감당키 어렵게 되었다.
중위때에 위장병이 생기어 십년을 고생한 내력이 이러했다.
결국 전역후에 세번에 걸쳐 道人(도인)을 만나 山(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첫 산이 충청남도 公州市(공주시)에 있는 鳳凰山(봉황산)이다.
하루는 밤에 사람 키만한 바위 밑에 앉아 참선 중인데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호랑이가 가랑잎을 밟고 오는 소리이다.
헌데 점점 가까워지고 호랑이가 한 마리에서 두 마리, 다섯 마리, 수십마리,
나중에는 수수 백 마리의 호랑이가 몰려오는 소리로 들리는데
무서운 것이 아니라 발자국 소리가 뇌성벽력 치는 소리보다 더 커져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나는 결국 눈을 뜨게 되다.
헌데 내 무릅 앞으로 동물 한 마리가 휙 하고 지나 갔고 어떤 동물인지는 확인 되지 않았다.
지상의 모든 산신이 호랑이로 몰려온 靈驗(영험)이다.
나의 첫 靈驗(영험)이 그러하다.
수년 뒤에 실제 나는 전국 명산에 두루 오르내리며 山祭(산제)를 지낸바가 있다.
정읍 두승산 아래에 背西向東(배서향동)을 한 庵子(암자)에
지인을 통해 들어가서 수행한 적이 있다.
암자의 주지가 멀리 부산에 자리하고 있있기로
평소에는 비어 있을 때가 많았고
이때에 내가 잠시 수행터로 삼았던 때의 일이다.
산신제 지내고 내려오던 佛者(불자)가 나를 보고는 크게 소스라쳐 놀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산신령님인 줄 알았단다.
내가 산을 자주 찾는데 종종 듣는 말이 산신령 같다는 평이다.
어느 수도인은 나를 보고 좋아라 하면서 천하의 명산들이 다 보인단다.
그는 나에게서 명산의 산신들이 응해 있음에 神眼(신안)으로 보고
전국의 名山(명산)들이 영안으로 보여진 것이다.
두번째에는 본격적으로 입산하여 修行(수행)한 곳이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에 있는 泰和山(태화산) 活人峰(활인봉)이다.
麻谷寺(마곡사)가 자리잡은 곳이다.
마곡사가 있는 고을이라 하여 寺谷面(사곡면)이다.
원효대사가 이 활인봉에서 수도 하고는 너무 좋아 다리춤을 추었다 해서
지금까지도 산아래의 마을 이름을 '춤다리'라 부른다.
한자로는 舞橋洞(무교동)이라 칭한다.
원효대사가 무당처럼 신명나서 다리 춤을 춘 것은
그곳이 천하만민을 구제중생할 땅이기 때문이다.
비결지다. 비결로 維麻兩水之間 可活萬人(유마양수지간 가활만인)이라고 전해 내려 온다.
維麻兩水之間(유마양수지간)이란 維(유)는 維鳩川(유구천)을 말하고
麻(마)는 麻谷川(마곡천)을 말하니 두 냇물 사이라는 뜻이다.
可活萬人(가활만인)이란 가히 세상 사람을 살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곳의 정기를 보고 원효대사가 춤을 추게 된 것이다.
누구도 이곳에서 5일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산신에게 쫒겨나 하산하였다는 소문이다.
내가 이 산에 오르던날 산신이 반겨 맞아주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산길 지나는 곳 바위가 사랑스러워 쓰다듬기도 하고
풀포기 마다 사랑스러워 매만지던 기억이 생생하다.
浩然之氣(호연지기)의 의미를 알게 한 곳이다.
활인봉에서 開眼(개안)이 되어 내가 내눈의 빛나는 정기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활인봉 수도터는 삼봉 아래 중심 출맥하고 맥 끝자락에 큰 바위가 기를 막았으며
그 바위 아래 석굴이 앞이 틔인 모습으로 들어가 있다.
사람이 앉으면 천정이 닿지 않고 여유가 있다.
마치 籠(용)의 입안에 여의주와 같아 사람이 들어가 앉아 있으면
용이 여의주를 문 형국이 된다.
비룡상천형 수도터이다.
특히 석굴안에 석수가 모여 샘이 되니 활인샘이라 명명한다.
그 샘에서 정화수를 뜨려다가 석수에 비친 내 눈빛 반사로 인하여 내가 놀란 것이다.
현재도 修道人(수도인)이 있어 그릇 등이 놓여 있다.
正東方(정동방)이 정면이다.
일출시에 태양의 정기를 마시며 단전호흡을 했었다.
새벽 두시간, 오전 네시간, 오후 네시간. 저녁 두시간씩
매일의 수행 시간표를 정하고 그대로 시행했다.
계획한 기일동안 시간을 단 한 번도 어긴일이 없이
정성껏 수도한 것이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곳이다.
활인봉 서쪽 고을 維鳩(유구)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에 李 如松(이 여송)이 이곳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난다하여
그 인물이 나지 않게 하고자 산맥을 끊었는데
이때에 비둘기들이 나타나 날아갔다 하여
얽을維(유) 자에 비둘기鳩(구) 자 지명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입산수행하면서 십년동안의 神病(신병)이던 위장병이 나아졌다.
이러한 현상을 일러 神通(신통)하다, 神奇(신기)하다, 神妙(신묘)하다 라고 한다.
위장병이 신병인 줄 모르던 때의 당시에 좋다는 위장약은 모두 구입해서 복용했다.
美製(미제)인 겔포스를 구입하여 복용도 했었다.
無所用(무소용)이었다.
그러다가 수도의 길에 들어서 나아진 것이다.
그리고 하산 후에 자연을 보면 무엇이던지 그 의미를 알게 되니
하루에도 수 없이 무릅을 치며 아하! 의 탄성을 내면서 지내다.
나는 사서 삼경을 배운바가 없다.
조부께서 선친을 통해 전해주신 古書(고서) 상자만 보물단지 처럼 들고 다니었다.
한문을 모르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들고만 다닌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상자를 열어 책 한권이 손에 잡혔는데
秘書三種(비서삼종)이라는 문서이다.
책장을 펼치니 한문 글들의 그 뜻이 튀어 나와 해석이 되어지고
통쾌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순간에 독파하고 신명난 날을 맞게 되다.
특히 黃帝陰符經(황제음부경)에 나는 아주 깊이 심취하게 되다.
부녀문답 제 2권에 풀이했다.
古 箱子(고상자)에는 사서삼경 외에 황제 음부경,
노자 도덕경, 율곡전집, 동경대전의 필사본, 대순전경의 필사본,
주역경의 공부 노트, 예법 필사본 등 여러 서적들이 들어 있었다.
조부께서는 유,불,선을 모두 섭렵한 유학자인 듯 하면서 도인이셨다.
그 영향으로 祖父神明(조부신명)이 하감한 후에
나는 배우지 않은 철학서를 읽어 볼 수 있었고
책을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文理(문리)가 났다.
나는 스승이 없다.
다만 조부가 영적 스승이 되었고 하늘이 스승이 되다.
개안이 된 이후에는 不知(부지)하여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하늘이 게시하여 알게 되었으므로
누구에게 묻는일 없이 현재를 맞고 있다.
신과 통하면 누구나 그리된다는 내력을
경험적으로 세상에 알리려는 취지로 나의 내력을 전함이다.
현대 세상의 중생들이 神(신)을 부정하고 迷神(미신)이라 置溥(치부)하기 때문이다.
산에는 山神(산신)이 있고 물에는 龍王神(용왕신)이 있음을 본다.
靈眼(영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상과 친하면 할 수록 신명과 통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
나는 태어나자 마자 조부께서 잘난 장손을 보게 되었다고 쾌재를 부르시며
평소에 항상 주유 천하 하시던 여로를 접고는
늘 손자를 곁에 두고 지내었다.
내가 많이 들은 조부의 말씀은
너는 할애비 바지에 똥 오줌 젖게 하며 키워졌다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너는 할애비 애비가 하지 못한
천하사를 할 수 있다고 유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조부께서는 세계대통령이 되어 인류를 태평성대하게 혁명하려는 꿈을 가지셨던 분이다.
人和(인화)로써 울타리를 짓고 도덕으로써 집을 짓는 정치를 하겠다는 포부였다.
인화의 울타리란 만 인류가 인화의 태평성대 되도록 하는 것이고
도덕으로 집을 짓는다는 말은 도와 덕으로 정강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조부를 따라 많은 곳을 돌아 다니었다.
산천경계를 지나면서 음택명당의 내력과 양택명당 내력 등을 전해주셨다.
어린 나는 명당에 대한 궁금증을 어린시절 부터 가지게 된 인연이다.
하여 어릴적부터 어디를 가던지
집터와 산의 모습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들었고 취미가 되어졌다.
그러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조는 법이 없다.
그렇게 지내다가 조부신명이 하감하고
도인 성현의 신명들이 응감 함으로부터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는 궁금증들이 사라지고
산의 모습이 보였으니
신묘한 地氣(지기)를 지금껏 보고 느끼며 산과 명승지를 찾게 된다. 풍수객이 된 것이다.
대지명당을 감상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되는 까닭이다.
지관노릇은 사양한다.
다만 인연 있는 명당의 주인이 있으면 찾아준다.
명당은 천지의 보물이다.
그러므로 天藏地秘(천장지비)의 보물인 것이다.
그래서 物各有主(물각유주)이다.
주인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다.
옛적 원효대사가 명당을 보면 춤을 추었다는 전설을 나도 함께 동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춤을 춘곳 중 한 곳이 활인봉이고
유일하게 마을 이름까지 춤다리로 현재까지 전해져 불러지고 있음이다.
그 다음의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과 충청남도 논산시의 경계에 있는 대둔산 아래 太古寺(태고사)터 이다.
원효대사가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터이다.
소울음 소리의 근원지는 경상북도 청량산의 청량사이다.
원효대사가 심혈을 기울려 직접 지은 사찰이다.
우리나라에 원효대사가 창건 했다는 절이 가장 많다 하여 혹자는 이를 두고 비평을 하기도 한다.
대둔산 동남쪽 케이블카 아래에 원효사라는 절이 있다.
케이블카 안의 안내 방송에서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라는 멘트가 나오자
어느 관광객의 말이 그러했다. 하여
나는 누구의 말에도 참견하거나 끼어들어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날은 그에게 말해주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들이 많은데
실제는 원효대사가 명당으로 점지된 땅에
그 지역 불자들이 자연적으로 불사를 하여 짓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준 일이다.
원효대사 시절 당시 원효대사는 유명해져 있었기에
그가 머문 수도터는 자연히 원효대사를 존경하는 불자들에 의하여
십시일반 모인 성금으로 절이 지어지게 되므로써
전국의 명당자리 들의 산에는 많게도 창건 사찰화 함이다.
옛적 백성들의 불심이 깊던 시절 큰 스님이 지나가면
그 지역 백성들은 들에서 일하다 말고
들판에 부랴부랴 法席(법석)을 쌓고 스님의 法語(법어)를 들었다.
그 유래에서 野壇法席(야단법석)이란 말이 생겨났다.
앞으로도 그런 神人(신인)의 新人物(신인물)이 출현 하면
천하의 인재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모여 들게 된다.
천하가 자동으로 혁신된다. 새 하늘 새 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