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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좋은생각공유글 스크랩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답성(踏城)놀이로 잘 알려진, 전북 고창 고창읍성 (2014. 4. 11)
웃자 추천 0 조회 741 14.04.14 09:15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2014. 4. 11.  전북 고창 고창읍성..

풀피리와 함께...

 

변산에서 1박을 한 후 등산을 포기하고 고창읍성으로...

잘가꾸어진 읍성 입구....

읍성으로 들어가기 전 신재효 고택을 먼저 들린다.

명창 신재효의 고택을 구경한 후 읍성으로 (입장료 1,000원)..

 

읍성 내부로 들어가자 푸른 잔디밭에 올망쫄망한 유치원생들이

재잘거리른 소리를 내며 점심을 먹고 있다...

푸른 잔디밭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소리이다.

 

답성놀이를 하기 전 읍성 내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입구 왼쪽에 있는 옥...

그리고 관청, 풍화루, 장청, 동헌과 내아, 객사, 작청, 향청, 팔각정, 맹종죽림사적 등...

 

그리고 성곽을 따라 도는 답성놀이

세번을 돌면 극락승천한다는데 난 오늘 한바퀴만...

 

풀피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름다눈 벚꽃이 떨어지는 길을 여유롭게 천천히...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고창읍성을 서두름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답성놀이 축제 할때 한번 와보고 싶다...

 

 

 

고창 신재효고택(高敞申在孝古宅)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판소리 명창 신재효가 살던 가옥이다.

1979년 1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되었다. 1850년경 신재효가 지은 초가집이다. 그가 여생을 마친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한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광무 3)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현재는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아 있는데, 건물 남쪽에는 직사각형의 마당이 있고, 남동쪽에 우물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일자형 주택으로 1979년에 보수, 정화하고, 1986년 연못과 담장의 석축을 보수했다. 동리(桐里) 신재효가 말년까지 살면서 종래 되는 대로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의 판소리로 절차를 세우고, 가사를 실감에 맞도록 고치고, 이론을 정리한 곳이다.

 

신재효는 순조 때 창극(唱劇) 발전에 공을 세운 가인이었으며, 여섯 마당 중 《가루지기타령》 내용이 너무 음탕하다는 이유로 부르기를 꺼려 가락이 잊혀지고, 현재 다섯 마당만 전해 오고 있다. 이곳에 노래청을 마련하여 많은 명창을 가르치고 후원하기도 했다.  주변에 고창읍성(사적 145), 문수사, 선운사, 마애불, 고수도요지, 고인돌군[支石墓群], 당산오거리, 서정주 생가 등의 관광지가 있다.

 

 

 

 

 

 

 

 

 

 

^ 명창 신재효 고택 둘러보기...

 

 

^ 여인상...

 

^ 소나무 종류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

 

고창읍성(高敞邑城)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이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方丈山, 743m)을 둘러싸고 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1453년(조선 단종 원년)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높이 4~6m,면적 16만5,858㎡이며,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 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고,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어버렸고 현재 북문 공북루, 서문 진서루, 동문 등양루와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동헌, 객사, 풍화루, 내아, 관청, 향청, 서청, 장청 등 일부만 복원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전해오는데,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둔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대원군 척화비가 서 있고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 답성놀이를 마치고 처음위치로...

 

 

 

^ 장성으로 가는 아름다운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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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4.14 10:58

    첫댓글 언제나 멋진 우리동상 덕분에 돈 안들고 힐링잘했네

  • 작성자 14.04.14 17:41

    힐링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봄꽃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 14.04.16 11:13

    내가좋아하는 고창~~
    꽃내음이 자욱하게 번져있는 향긋한 모습입니다
    게다가 웃자&풀피리, 선남선녀가 거기 있어 더욱 좋습네다

  • 작성자 14.04.19 18:23

    저도 다음에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답성놀이 축제 할때 다시 가볼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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