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오피니언 칼럼>
시는 어떻게 쓰이는가
고난받는 자들을 지키는 촛불보다 더 소중한 것들
박남인
겨울이라 날이 추운 것인가 세상이추운 것인가. 배추 허리끈이 좀체 풀려나지 않는다. 봄동은 벌써 환장하게 노랗게 허벌나게 벌어져 연신 불러댄다.
이 땅의 국민들에게 ‘고난의 시대’가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일꾼’의 성직으로 도시 변두리 삶을 보듬어 살고있는 친구가 겨울호 소식지신문을 내면서 ‘고난 속에서, 관객 아닌 배우가 되어’라고 붙여 보냈다.
지난 해부터 무엇이 후퇴하고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너무 아픈 상처로 깨닫고 있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적폐 개혁을 내세우고 있는 윤 정부는 의식있는 국민들의 저항을 3개 개혁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올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이 겨울은 더 어떻게 엄혹하게 삶을 내몰아갈 것인지 절망이 커진다고 한다.
영화는, 소설은 언제나 현실보다 앞서 세상을 선명하게 내보인다. 한 쪽에서 430년 전의 시대를 재조명하며 대첩을 이루기위한 ‘무엇을 위하여 누가 싸우는가’라는 명제를 묻는 가운데 반지하방의 기생충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며 ‘아바타’와 같은 가상세계에 취해 ‘해어질 결심’을 하기 위하여 제살뜯기의 오징어게임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 그 안개의 어둠과 차가운 불빛 아래에서 잡단참사는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촌은 그 단면이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억대농부들의 자서전이 고정적인 시청률을 유지하며 전원생활의 꿈을 부추긴다. 1%가 99%를 대신하는 드라마는 우리를 더욱 휘청거리게 한다. 물가상승의 주범으로 내몰리지를 않는가 기후변화나 환경오염의 원인제공자로 또 다른 계몽대상자로 인식된다.
제대로 입장을 밝혀 대신해줄 정치세력은 지리멸렬하고 고난에 빠져든 가난한 약자들이 다시 확인하는 것은 ‘하느님은 없다’거나 사랑도 눈물도 없다라는 자답에 이른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이 인간은, 인간의 삶이 어떻게 고귀한 피의 예술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지 그 슬픔이 어떻게 독(毒)이 되는지 한탄하고 절망한다.
혼자 잘 나가는 대통령은 경제위기 타개의 요체로 수출과 미래전략기술을 제시하고,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에 대한 거친 구상을 밝힌 게 전부인 시년사는 “1년에 한 번 하는 노변정담 느낌”이며, 노조를 기득권으로 공격하고, 윤석열표 노동개혁의 본색을 확인한 게 그나마 알맹이었다.
신년사에는 민생, 외교안보, 국내이태원 참사에 대한 위로의 언어도 없었다. 협치와 통합에 대한 얘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중차대한 집권 2년차의 청사진을 기대한 게 민망할 지경이다.
아무리 무모한들 이런 신년사로 신년 회견을 대체하다니, 의문이 차오를 때 우리 진도에서도 김희수 군수가 2년차 군정에 임하면서 방향과 소신을 밝혔다.
아직 본격적인 언론과의 인터뷰로 의사를 구체적으로 내보인 것은 아니지만 김 군수도 어쩌면 조금 아프고 불편한 질문을 피하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아직 군수가 하고 싶은 얘기를 일방으로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인사는 김희수체제라는 본격화하고 있는 선별적 소통, 차별적 관철의 연장선상은 아닌지 여론을 더 살펴야 할 때다.
대부분 지도자들은 개혁 언설에는 거칠게나마 ‘왜’와 ‘무엇’은 들어 있으나 ‘어떻게’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단지 진도의 문화예술이 무엇을 쓰고 그리고 밝히고자 해야 하는가 공론화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죄 없는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난쏘공’이 선물로 통하는 세상에 ‘눈물을 마시는 새’의 종족들이 사는 세상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환타지에 시달린다. 창 문 밖의 오이디프스 눈에 흐르는 눈물. 소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시도 또한 그러한가. 200년 전의 시인(저항시인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에서 조선의 민중들이 농사를 짓던 낫을 들어 제 양근을 잘라버리는 모습을 애절하게 표현하였다.
진도아리랑 가사가 채록된 것만 해도 700여 개 수를 훌쩍 넘는다. 예술은 본디 집단공동체의 열망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삶의 현실이 반영되지 않는 예술은 위안이나 희망 동력이 되지 못한다. 우리시대에 진도에서 어떤 수묵화와 시가 소설이 쓰여지고 공유되어 거대한 미래가 되어야 한다. 먼 산에 배고픈 새의 노래는 더 이상 우리를 위로하거나 행복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그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자는 누구나 나의 입이다”고 선언한다. 미얀마의 저항시인은 창자가 다 꺼집어 내 죽기 전에 혁명은, 희망은 머리가 아닌 심장에 있다고 외쳤다. 지금은 심장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낫이 휘둘러야 할 대상이 분명하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어디에도 없는 신’을 섬기며 정치에 뛰어난 종족 인간, ‘자신을 죽이는 신’을 섬기며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 도깨비,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섬기며 거대한 몸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종족 레콘, ‘발자국 없는 여신’을 섬기며 온도를 볼 수 있고 니름(정신을 이용한 텔레파시)으로 대화하는 종족 나가. 각자 다른 신을 섬기고 각자 다른 삶을 고집하는 네 종족이 한 세계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2023년 사회는 그런 종족으로 대체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 사회에서 죽음은 ‘사소한’ 것으로 기억에서 시스템에서 지워진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치워버려야 할 적폐, 가슴아린 통과의례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소녀와 소년들을 도시로 공급하던 농어촌사회가 밑바닥부터 붕괴되고 있다. 골롬들의 노인복지관과 적막이 짝꿍이 되는 시골학교는 이상향이었다. 팔순 할머니들이 시를 쓴다. 단골술집에서 판화와 같은 자화상을 그리는 해방전후사의 주인공들. 모든 날들이 수묵 비엔날레다.
우리가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를 사랑하기에 성난 얼굴로 세상과 마주 서야 하는 새해 겨울이다. ‘추워야 산다’라는 현실모순과 농민들의 딜레마를 즐기는 기득권자들을 위한 신년사는 그들만의 안전한 시스템과 잔치를 약속하는 자리였다. 노동자도 농민도 세입자도 없었다.
새해 진도문인협회에서 회원들의 작품을 수록한 소중한 연간집이 나왔다. 올 한 해 여러 소설 시집 수필들이 발간되었다. 향우문인들도 작품집을 내 기쁘게 했다. 이 겨울 한 밤에는 진도이야기가 담긴 문학작품을 읽어볼 일이다.
왜 남쪽 진도에서 바람이 불어야 하는지 어떻게 봄은 오는 것인지 내 땅에서 유배당한 불우한 예언자의 숙명이라면, 그대 하얀 눈밭에 침을 뱉으며 시를 쓰라. 가슴에 돋는 슬픔을 향해 호미질을 하라.
3만 명의 사회에서 일만 명의 시대로 사질토 속의 도시혈처럼 보이지않게 흐르고 있는 농어촌 그리고 진도. 예향 진도답게 올 해도 국제적(?)으로 수묵 비엔날레 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위대한 우리 군민들은 고난 속에서, ‘관객 아닌 배우가 되어’ 수묵의 전시장을 아바타 혹은 눈물을 마시는 새처럼 날아다닐 것이다.(박남인)
시 한 수를 바친다.
평생 진도 땅을 일구며 소리를 찾아 심던 한 사람 제대로 된 원시 원형의 공동체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 했던, 쓸데없이 한없이 징한 고향사랑으로 살았던 농민 김병철. 그가 또 길닦음 지나 ‘길 위의 길’로 걸어간 소포의 바람, 소포의 수묵이었던 한 사내에게 바친다.
소리는 바람에 머물지 않고
오늘도 소포리 대흥포에
바람이 분다
눈은 언제나 수묵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개옹마다
뻘낙지 숭어떼가 돌아오는 꿈이 보였다
이 산 저 산 노래와 연꽃을 심어
노란 붕어찜에 올 해도 농사야
마누라 궁뎅이로 밀어도 장원이지라
바구리만한 섬 민속마을 소포리 마을에 가면
거나한 체험놀이판이 수시로 벌어졌다
어디 사랑방 장구소리가 들려오면
마을 주민들이 모두 천상 소리꾼이였다
흥타령, 육자배기,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상여소리가 온 마을을 휘감고 돈다
돼지막 불소금 소개나루쟁이도
사라져가는 소리의 사설들이
병철이 구수한 입담에서 살아나고
그에게서 사랑이 없었다면
요란한 징소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걸군농악에서 북놀이 상쇠로
“얼씨구 씨구 절씨구 씨구
방아로구나. 이 하~에 헤야~ ”
수묵의 길 따라 소리들도 세상을 뜨는가
봄동배추가 노란 속이 꽉 차서
한 바탕 놀다 가라고 병철이
대흥포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 가라고
가는 길 상여꽃이 지천에 피는구나
-고 김병철 소포민속전수관장을 추모하며